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구 벨기에영사관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21, 정동 16-1)
대한제국과 벨기에 사이의 한비수호통상조약이 1901년 10월 17일 체결되고 벨기에 전권위원 레옹 뱅카르(Leon Vincart)가 총영사가 되어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조약을 비준하면서 외교업무를 시작했다
[그 시절에 벨기에는 백이의(白耳義)로 부르곤 하였으나 비리시(比利時)·비국(比國)·대비리시국 (大比利時國)으로도 표기하였으므로, 이 조약은 한비수호통상조약(韓比修好通商條約)이라는 명칭으로 정리되었다]
벨기에는 1901년 정동 16-1 번지에 영사관을 두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위치만 추정할 뿐 개설 시기나 이곳이 그들의 첫 영사관이 맞는지의 여부 등은 알 수 없다
이곳은 1924년 이화학당 음악관을 거쳐 하남호텔 로 이용되다가 1973년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동포 사업가 서재식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90년대에 들어와 경영난에 직면한 하남호텔은 결국 캐나다대사관에 매각되어 1995년에 헐렸다
2007년 하남호텔을 철거한 자리에 캐나다대사관이 세워졌다
♤ 회현동 밸기에영사관 건물
벨기에는 1902년 6월 10일 현재의 회현동2가 78, 79번지(현 우리은행 본점)에 영사관 신축기지를 선정하고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1905년 지하 1층 지상 2층, 총건평 454평 규모의 영사관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중화의 경성기략에 의하면 1902년 6월에 건축에 착수했다고 쓰여 있으나, 건물의 머릿돌에는 영사관 착공년도는 1903년 준공년도는 1905년 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500.83㎡이다)
벨기에영사관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에도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면서 영사관을 유지했으며, 1919년에는 회현동 영사관건물을 일본의 요꼬하마생명보험회사(橫濱生命保險會社)에 팔고 지금의 충무로1가 18번지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이 건물은 일본 해군성(海軍省)에서 무관부 (武官部) 관저로 쓰다가, 해방 후 해군 헌병감실과 1970년 상업은행에서 사용하던 중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새로 이전·복원을 위해 1980년 8월에 철거하여 1982년 8월 관악구 남현동 541번지에 복원하였다
2004년 5월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무상 임대하여 공공미술관으로 새롭게 꾸며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 으로 조성, 2004년 9월 서울 시립 남서울미술관 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정동아파트 (서울시 중구 정동길 13, 정동 18-1)
1965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LH)가 도심형주택으로 건립한 소규모(6층, 1개 동棟, 15평짜리 36가구) 아파트로,
건립부지 일대는 한국전쟁으로 구 러시아대사관 (당시 소련대사관)이 파괴되고, 방치되면서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정동아파트가 들어서고, 이어 1966년 정동 MBC 문화방송국과 문화체육관(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 한 명랑운동회가 유명하다), 1977년 정동공원이 조성되면서 이 일대의 판자촌은 새로운 도심공간 으로 변모되었다
정동아파트는 고급아파트로 지어져, 분양 당시 경쟁률도 높아 국회의원, 변호사, 인근 종교시설 성직자 등이 거주하였으며, 특히 MBC 문화방송국 이 인접해 연예인들도 많이 거주하였다
그동안 다양한 주민들이 거쳐가면서 반세기를 훌쩍 넘게 외롭게 지켜온 여전히 정동을 대표하는 살림집 이다
성 니콜라스성당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3, 정동 22)
처음 정교회는 주한 러시아 공사관 직원들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한국인 선교가 이뤄지고 임시예배소 로 쓰이던 주한 러시아 공사관 관저가 협소해지자 1903년 한국 선교담당 주임 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한성부 황화방 군기시계 소정동의 부지에 임시 성당을 지었다
이곳은 본래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으나 이보다는 대개 '아라사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지원이 힘들어지자 주교 중 한 명인 일본 정교회의 세르게이 대주교가 선교를 맡게 된다
그러면서 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의 등기는 1923년 당시 교구장격인 세르게이 대주교가 개인적으로 유지재단으로 설립한 '일본 정교회 재단' 쪽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정동의 성당은 포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유엔군 측으로 참전한 그리스군에서 종군사제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의 노력으로 정교회가 다시 재건되고 폐허가 된 성당도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성당의 등기를 일본 교구 재단 측으로 넘긴 것(1923년)이 화근이 되어, 성당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국가에 몰수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정교회는 긴 소송전 끝에 정동 부지를 다시 되찾지만, 이미 소송 과정에서 소모된 경제적 문제로 인해 도심에서 성당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 아현동 나콜라스대성당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18길 43,아현동 424-1)
한국전쟁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66년 성 니꼴라스 성당의 정동 부지를 문화방송국에 매각하고 서울의 중심부였던 정동을 떠나 도심에서 어정쩡하게 떨어진 마포구 아현동으로 그 부지를 옮기게 된다
♤ 러시아 정교회란?
세계 기독교 3대 지류는 개신교회, 로마가톨릭교회, 그리고 정교회다
‘정교회’는 ‘정통(Orthodox)교회’의 약어다
정통과 비정통은 325년부터 787년까지 7회에 걸쳐 열린 고대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오리지널 그대로 수용하고 지켜오는지 아닌지에 따라 구분한다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 또는 ‘그리스 정교회’라고 한다
동방 정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다르다
정통을 뜻하는 ‘정’(正)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칼케돈 공의회로부터 정죄를 받은 단성론자들 (콥틱교회), 에베소 공의회로부터 정죄받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동방’ 교회라고 한다
정교회를 그리그 정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사, 교리, 예전의 언어가 그리스어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정교회의 부분집합으로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핀란드 정교회, 한국 정교회 등이 존재한다
한성교회 (서울시 중구 정동길 8, 정동 25-2)
1912년 산동(山東)성 출신 중국인 청년 처다우진 (車道心) 장로와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출생인 데이밍 여선교사가 한성 YMCA에서 첫 중국인 집회를 가지면서 조선중화기독교 경성교회로 시작된 교회는 195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한국 화교들의 신앙모체일 뿐아니라 중국 선교를 위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은 1920년대 조선일보 사옥, 이화 프라이홀, 이화여전 채육관과 음악당 등을 건축한 화교 사업가 왕공온王公溫의 건축업체 복음건축장의 기부로 지어졌다)
특히 1950년대부터 한국 기독인들이 사역자로 참여하면서 한성교회는 화교 및 한국인들을 위한 연합 봉사의 터전이 되었다
과거 화교교회는 서울, 제물포, 원산에 있었는데 현재는 화성중앙기독교회를 중심으로 인천, 부산, 수원, 대구, 영등포, 군산 등 7곳이 있다
첫댓글 예전 명랑운동회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옛 모습들이 정겹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