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을 뜬 몽(夢)씨는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직도 내리는지 알고 싶어 지팡이를 짚고 베란다로 나섰다. 역시 아직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부산(釜山)이 아니라면 이 비는 분명 눈(雪)이 되어 내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랬다, 몽씨의 고향. 대구(大邱)와는 달랐다, 부산은 한겨울에도 눈은 거의 내리지 않았다. 몽씨가 고향을 떠나 살아온 20년 간의 낯선 땅, 부산의 겨울엔 오히려 밤새 내린 비로 도로가 얼어 잦은 교통 문제를 일으키는 그런 곳이었다. 간밤에도 몽씨는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는 악몽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쳤다. 요즘 들어 매일이다시피 반복해 꾸는 꿈이었다.
몽씨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덟 살 되던 해, 알 수 없는 병으로 동네 어귀 당산나무 아래 앉아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와 그 후, 세상 떠난 가장을 대신해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어린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시장 바닥에서 억척스럽게 콩나물 장사와 감주(단술)장사, 생선 장사 등 갖은 고생을 하시던 어머니 마저 심장질환으로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시자 막 열두 살이 된 몽씨는 아래로 두 살과 세 살 터울의 두 여동생을 키우며 초등(국민)학교 시절부터 소년 가장으로 끼니를 건너뛰는 것이 적응(면역)이 되어 그 가난과의 별거(別居)가 오히려 어색할 정도였다. 어느 때였던지 기억마저 가물거리지만 몽씨의 작고 가냘픈 어깨 위에 힘겹게 얹혀진 물지게, 짧은 몽씨의 다리보다 더 길게 양쪽으로 드리워진 물동이를 흔들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한 장의 연탄을 사기 위해 눈 내린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한 봉지의 쌀을 사기 위해 걸었던 그 낭떠러지 위 계단 길, 몹시도 추웠던 그 해 겨울, 하얀 눈이 내려 빙판길이 되면서 미끄러운 계단 길 위에서 눈보다 더 하얀, 보석같이 귀한 쌀을 흩으며 굴러 떨어져 가물가물 희미해져 가려는 의식을 애써 붙잡으며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주워 담으려 애쓰던 작은 고사리 손, 그 낭떠러지에서의 추락으로 오른쪽 다리 무릎관절의 성장 판(成長 板)파열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오른쪽 다리... 절룩이는 다리로 물을 길어 지게로 져 나르고, 밥을 하고, 동생들의 흙 때묻은 빨래를 하며 참기 힘든 다리의 고통을 동생들의 성장과 바꾸는 기쁨으로 힘겹게 견디어 왔다.....
그런 어둡고 슬픈 기억들로 몽씨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채색되어 갔다. 어렸던 그 시절 몽씨는 찌들게 어려운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죄(罪)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부모가 없어도, 장애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다녀도, 그 육체적 불구가 어린 몽씨의 정신을 병들게 하지는 못했다. 하루 한끼를 시래기죽만으로 질긴 생명을 이어가도,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교실 밖으로 쫓겨 나와, 찬바람이 몰아치는 운동장을 절룩이며 배회할 때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 얼어붙은 급수대의 수도꼭지를 입술로 녹여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수돗물을 마실 때도 그는 오히려 동생들이 함께 할 수 있고,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조그만 방이 있음을 행복해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 이런 궁색한 환경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추운 겨울 여기 저기로 쫓겨다니지 않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참고 견디리라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받은 졸업장과 몇 장의 상장을 가슴에 안고 추웠던 그 밤!. 몽씨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참 많이 울었다. 꽃다발을 한아름씩 안고 친구들은 모두 밝게 웃으며 졸업식장에서 진학할 중학교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모, 형제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발빠른 이들은 이미 중국집 자장면을 먹으러 교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집 근처 조그만 공장으로 취직(?)을 하게된 몽씨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모가 없는 고아이며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가난과 신체적 장애로 인해 빚어진 표현 못할 수치심과 자괴감 때문에 즐거워야할 졸업식장은 오히려 지옥 보다 괴로웠다.
몽씨 혼자 쓸쓸히 졸업식장을 뒤로하고 돌아서 내딛는 눈물의 걸음을 붙잡으며 조용히 다가와 한 다발의 꽃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주시며 이 사진을 꼭 찾으러 오기 바라며 이사진을 찾으러 올 때는 반드시 중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시던 담임 선생님은 그렇게 진학 못한 불쌍한 제자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해 주셨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한 다발의 꽃을 안고 빡빡 깎은 머리에 눈물 젖은 얼굴로 한쪽 다리가 짧아 어색한 포즈로 서있는 어린아이가 찍혀진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속에서 그렇게 멈추어져 있었다.
갓 마흔이 되던 해. 몽씨는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K그룹 계열의 A항공사의 지점장이 되었다. 대기업의 이사(理事)... 그렇게 그는 변해 있었으며, 그의 두 여동생들도 판사의 아내로 성형외과 의사의 아내로 성숙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귀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 날,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봄 소풍 때 찍었던 빛 바랜 한 장의 사진을 펼쳐 놓고 흐느낌을 속으로 감추고 설움을 토해내며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는 사진 속의 젊고 예쁜 여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그 선생님의 젊고 예쁜 모습은 이미 사진 속에만 존재할 뿐, 그녀는 백발이 성성한 늙고 쇠약한 노파로 변해 있었다.
한 다발의 꽃을 안겨주고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며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찾아오라며 그렇게 헤어졌던 옛 제자의 27년만의 돌연한 방문에도 그녀는 몽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찍어 주셨던 눈물 젖은 아이의 사진을 내놓으셨다. 끝내 중학교 교복을 입지 못해 찾으러 오지 않을 사진임을 알면서도 사진 속의 제자 모습이 빛 바래고 퇴색해 가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안타까워 최근에 비싼 돈을 들여 산뜻한 칼라로 사진 복원까지 해 놓고 언젠가 출세해서 찾아올 몽씨를 기다려 왔다고 했다.
몽씨는 노(老)스승의 지극한 제자 사랑에 울컥 치솟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스승은 그렇게 떠나보낸 제자가 중학교 과정을 독학하여 검정고시로 야간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대학은 수석으로 합격하여 전학년 장학금을 받으며 어느 집 가정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수입으로 생활한 것, 그리고 대기업에 스카웃(특채)되어 남들보다 아주 빨리 진급하고 현재 이사로써 지점장을 하고 있음을 옛 제자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노라 하시며 몽씨를 꼭 껴안으며, 또 짧아서 절룩일 수밖에 없는 몽씨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또 2년의 세월이 흐르고 정 많고 마음 따뜻했던 노(老)스승은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덧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30년 전 초등학교 동창들은 모두 젊고 패기 있고 사회적 역량 있는 훌륭한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고 더러는 기업의 중견 간부로 일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몽씨는 그들과의 만남이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몽씨는 그들의 근황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신기하게도 몽씨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고 있었다. 몽씨는 순간, 옛날 자신을 향해 "너는 중학교도 못 가는 바보, 가난뱅이, 병신, 절뚝발이 "라고 놀리며 선생님이 먹다 남긴 자장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가난한 한 아이를 학급 전체 아이들에게 "거지에 가난뱅이, 바보, 절뚝발이"라고 놀려대던 한 아이가 떠올랐다. 그 기억의 저편에 오늘날 몽씨의 세상도전의 밑거름이 깔려 있었다. 잘 생기고 옷 잘입고 부잣집 아이라서 늘 두목이고 거만하던 아이! 어릴 적 좋지 않은 기억의 앙금을 애써 떨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그 아이가 있었다. 풀죽은 듯 구석진 자리에서 몇 몇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에게 다가선 몽씨는 반가움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 Y맞지?" 그리고는 의례적인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누며 몇 잔의 소주를 나누고 몽씨가 먼저 명함을 건네 주고는 Y의 명함을 청했다. 그런데 녀석은 이상하리 만치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양복 안쪽의 명함 주머니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 줄까 말까 망설이듯 선뜻 넘겨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S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 야! 너희들 같은 A항공사에 있으면서 아직도 서로 못 만나 봤니?, Y가 네 소식 자주 전하여 주기에 너희들 서로 만나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K가 거들었다. " Y도 A항공사 공항지점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잖니! 몽씨! 네가 얘 좀 도와줘서 빨리 진급 좀 시켜라!. 초등학교 동창끼리 한 사람은 이사님이고 한 사람은 과장이니 좀 어색하지 않나? 몽씨 네가 힘써서 키워 줘라. 부탁하자!."
같은 회사에 부하 직원이면서 여태 몰랐다니! 반가움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몽씨에게 Y는 타들어 갈 정도의 바짝 말라 쇳소리처럼 들리는, 몹시 떨려 말소리조차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 요~용서 하-십시-오!..." "이~사~아~님! 잘 부~타~악 드~드립니다..." 녀석도 아마 몽씨의 옛날 그 아픈 추억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나 보다!...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돌고 도는 것을,...
4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