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 1984년 = 34년 전.
오 솔 길
지금부터 34년 전.
나의 생을 바꿔 놓은 한 순간의 교육 레크리에이션을 만난 해다.
레크리에이션이 너무 좋아 지금까지 이 길을 가고 있으며
다시 태어나도 또 이 길을 가고 싶다. (레크리에이션 : 이하 레크)
나의 묘비명도 미리 정해두었다. “ 잘 놀다 갑니다.”
34년 전.
서울 KBS방송국 별관에서 고려대학교 김오중교수님(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 협회)이 주관하여 레크 강습회를 실시하였고, 10박 11일간 교육과정과 과목검정시험을 거쳐서 자격증을 발급하였다. 그 때 이화여자대학교 강봉화교수님(모션), 대전에 우옥환교수님(레크댄스), 이계진 아나운서(스피츠), 김경진교수님(게임), 박창영교수님(게임), 그 외에도 기억할 수 없지만 숙명여대(포크댄스). 국민대(율동), 등등 교수님들의 교수 내용이 나의 머릿속에 아직까지 남아서 내가 하고 있는 레크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 때 교수님들의 모습은 기억에서 없어졌지만 이름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특강으로 싱어롱에 이요섭 작곡가, 건전가요에 전석환 작곡가님이 강의 하셨다.
통기타와 노래, 막걸리 한 사발, 청바지 문화가 젊음의 상징이었고, 군복 검게 물 드려서 사시사철 입고 검정고무신을 싣고 다닌 멋도 부렸던 때였다.
종로1가 YMCA 학원가를 거닐 다 장발단속에 걸려 귀밑머리 잘린 아픈 기억도 있었던 때의 일이니 호랑이 담배 쯤 피웠던 때라고 말해 두자. 그 때가 좋았다면 구닥다리 꼰대문화라고 놀리겠지만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875355B3A48DB11)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1D8345B3A47E90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F0F3E5B3A494137)
지난 2018년 6월 30일(토요일) 바로 엇 그제.
생활스포츠지도사(국가고시) 구술시험을 부산 외국어대학교에서 실시하였다. 나는 평생생활 교육자로써 당연히 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자격을 따야 한다는 생각에 작년에는 '노인스포츠지도사' 국가자격증을 획득하였고, 올 해는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까지 도전하게 된 것이다. 사단법인 자격증을 갖고 남 앞에 서서 가르치기 보다는 국가(문체부)가 부여하는 교육자격증을 갖추고 서야 된다는 내 양심의 기준에 따라 시험이 있으면 자격을 갖추려 도전 한 것이다.
현재 국가자격증이 없어도 하동군에서는 교사로 받아주고 있다. 그리고 국가자격검증을 실시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국가자격고사에 응시하는 사람이 하동에서는 내 아내와 함께 두 명에 불과하다. 아직 이런 자격증의 정책이 현실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국가자격증을 갖추어야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 날 일.
시험 면접을 보기 위해 부산외대에서 5명씩 대기 한 후 대학교 교수님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준비해 간 레크의 이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면접장은 3명의 대학교 교수님이 한조를 이루어 4곳에서 보고 있었다. 나도 도우미 안내를 받아 3번째 면접장에서 대기 하였다. 어떤 사람은 면접 구술시험이 길기도 하고, 또 짧기도 하였다.
나는 대기 한지 10여분이 지나자 내 차례가 왔다. 면접실에 들어서자 몸이 굳어짐을 느낀다. 순간!
- 이거 질문에 답 잘하겠나? -
걱정이 온 몸을 감싼다. 나름대로는 평생 레크 만 해 왔는데,,,
- 레크 면접쯤이야 -
하고 나를 달랬지만 지금 나는 예방주사 맞는 어린이처럼 떨고 있었다.
면접실.
내 소개를 하고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자 중간에 앉아 있는 면접 교수님이
“레크를 많이 하셨군요. 어려운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순간 반가움이 들었다.
“예-”
큰소리로 대답하고 면접교수님을 응시하자. 친근감이 들면서 꼭 나를 떨어트리려고 한다기 보다는 붙게 하려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 뒤 오랜 시간(다른 사람보다)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그러다가 질문 중에
“언제부터 레크 하였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기에 나는
“답변이 조금 길어도 이해를 부탁합니다.”
라고 전제하며 말을 시작하였다.
옛날 34년 전 서울 KBS별과에서 받았던 레크 교육과 교수님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과 내 인생이 레크의 만남은 내 삶에 운명이었다는 말까지 짧지만 장황스럽게 하게 되었다.
순간! 교수님 답변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 교수님은 내가 면접실에 들어오기 전, 면접실 4곳 중 가장 어렵고 까다롭게 면접을 본다고 하여 저승사자 면접관이라 불리었던 교수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강봉화 교수요. 이름을 바꿔 지금 강나경으로 되었지만 내가 그 때 담임이었던
내가 강봉화교수요.”
하는 것이었다. 저승사자가 강봉화교수였다.
나는 순간 멍- 했다.
내가 34년 전 나의 삶을 바꿔 놓은 교육의 담임교수님 앞에서 면접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름을 잊지 않고 살아 온 나에게는 그 만큼 그 교육이 좋았던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바꿔주신 그 주인공 교수님을 면접에서 만난 것이다.
너무 놀랐다.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어서 그냥 나왔지만 큰 여운이 면접장을 나와서도 남아있었다.
면접결과가 궁금하기 보다 인생의 스승을 만난 것이 더 기쁘고 강봉화교수의 근황이 더 궁금했다. 나 보다 한 살 많다는 것과 아직도 왕성하게 서울서 활동하고 있다고 협회 관계자가 말해 준다.
이산가족처럼 늘 그리워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34년간 이름을 잊지 않았고, 내가 살아가는
길을 앞서서 살아 온 사람이며 나에게 길 출발선을 알려주었고, 나는 그 길을 신나게 달려왔던 게기가 되어 준 나에게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평소 찾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레크의 모션을 가르쳐 주었고, 강한 인상을 남겨 내가 레크를 삶의 길로 선택하는데 큰 역할 한 것은 분명했다. 그냥 그뿐이었던 교수님인데 오늘 같은 길 위에서 만나고 보니 나에게는 평소의 생각 보다 참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강봉화교수 란 말 듣고, 처음에는 의아했고, 다시 확인 후 맞다는 확신이 든 뒤 역시 레크의 길은 밝고, 삶에 힘 있고, 소신이 있는 길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나 역시 그 길을 가고 있다는 뿌듯한 감이 들었다.
합격 발표가 난 후 서울로 올라가 레크의 인생을 살아 온 우리나라의 레크의 산 증인이며, 역사인 강봉화(현재 본명: 강나경)교수님을 만나 차 한 잔 나눌 수 있기를 기대 해 본다. 교수님은 나를 모르지만 나에게는 내 인생의 큰 길잡이었다.
레크의 본연의 씨앗 성분은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는데서 레크는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레크의 사랑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나는 레크가 좋다.
첫댓글 내가 쓴 글 내가 휴대폰으로 처음 읽어본다.
나도 기계치인가봐.
단 한가지만을 위한 34년
결코 후회할 수 없는 세월이었고
만남과 길의 좌표가 올았다고
큰 박수를 보내는 바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