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웅치 전적지 답사(熊峙 戰迹地 踏査)>/구연식
교수님 수업 중에 조선의 임진왜란을 소개할 때는 꼭 빠지지 않는 ‘웅치 전적지’는 너무 귀에 익었고, 눈에는 낯선 곳이다. 수필 반 전반기 현장 학습지는 웅치 전적지 답사로 결정했다. 60여 년 전 전주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 친구들의 진안 곰치 재 교통사고 이야기는 많이도 들었다. 오늘은 난생처음 그 길을 따라 웅치전적지를 밟아보기로 했다. 승용차 4대로 분승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들떠서 우랄라∼하며 전주 시내를 벗어났다.
완주군 소양 순두부마을에서 진안 쪽으로 조금 가다가 세 갈래 도로에서 가운데 길로 들어섰다. 가로수 숲길을 헤치면서 꼬불꼬불 오르내리니, 신록의 가로수 잎이 부딪치면 초록의 풋내가 코끝에 스친다. 초여름 이맘때 어머니는 기운 잃어 밥맛없는 아들에게 익모초 즙을 내어 억지로 먹였던 냄새가 되살아난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기분 좋게 미끄러지다가 우회전하여 고샅 좁은 길로 가고 있다. 중앙선도 없고, 꼬불꼬불하여 운전면허 취득 후 주행 연습하는 기분이다.
드디어 임진왜란의 격전지 웅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400여 년 전 왜군들이 오르기 쉽고 적에게 노출이 적은 산등성이 아닌 골짜기 길로 진격했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오르고 있다. 입하가 지나서인지 골짜기에 내리쬐는 햇볕이 오목렌즈처럼 모아서 그대로 반사하니 조금은 짜증이 나는 더위를 느낀다. 더구나 무슨 훼방을 놓는 것인지, 넓은 땅 놔두고 골짜기 길 한가운데 호박 모종을 심어 놓아서 걷기도 불편했다.
그런데 이곳 연례행사마다 자주 참석했던 교수님을 오늘 가이드로 모셨다. 교수님은 일행이 오르는 길은 옛날 길은 맞으나 행정당국이 최근에 새로 개설한 도로가 있다고 하면서 좌측 산봉우리를 가르치며 9부 능선쯤에 포장도로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자고 한다.
그래서 선발대 세 사람은 급경사인 산을 헉헉거리면서 올라가 새로 낸 도로에 도착하여 일행을 부르니 나머지 일행은 오르다가 지쳤는지 그냥 내려간다고 한다.
드디어 그 옛날 육탄전을 벌여 조국과 백성을 지켰던 웅치전적지에 도착했다. 만시지탄이 들어 선열들 영혼에게 숙연해진다. 혼령들을 달램인지 서낭당처럼 고개를 오가는 후손들이 작은 돌을 던져 놓아 만들어진 돌무덤에 숭고함과 초라함이 동시에 엄습한다.
고개 넘어 마을에서 나무를 잘라 목책을 설치하여 적의 진입을 막으려는 백성들 울력의 함성이 들리는 듯 나무 이파리들이 바르르 떨고 있다.
국가에서는 이곳의 토양을 분석하여 뼈의 주성분 인(燐)과 칼륨이 다량 추출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뼈는 으스러져서 진토가 되어 영혼들만 떠도는 것으로 짐작된다. 해마다 진혼제(鎭魂祭)가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안심해 본다. 마음속으로 묵념을 올리고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올려놓고 내려가고 있다.
식당으로 내려가기 앞서 창열사에서 합류하여 참배 후 기념 촬영을 했다. 주차장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말씀이 웅치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
점심 식사 후에는 웅치 전적비를 방문하기로 했다. 전적비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개 이름처럼 곰들이 으르렁거리며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수악한 산골길이다. 이 길이 1960년대 숱한 교통사고가 자주 났던 곰치재 길이라고 한다. 내려가는 오른쪽은 수천 벼랑길 이라니 간담이 서늘하다. 도로 위험표시도 DMZ에 설치된 지뢰 매설 위험 지역처럼 철책이 설치되었다. 이런 산속 숨겨진 곳에서 고대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종합 판 도로를 보는 것 같다. 아이로니컬하게 산길 천년송(千年松) 가지 위로는 최신식 고속도로 키다리 골리앗 같은 가교가 설치되어, 웅치전 선열들이 이 땅을 지키고 그 땅 위에 고속도로를 건설했는데, 그 고마움을 아는지 자동차들은 아랑곳 없이 씽씽 거리며 달리고 있다.
웅치전적비 주차장에서 잠깐 걸어 올라가니 웅치전적비가 기다리고 있다. 전적비를 세운 최고 위정자에게 불만이 많다고 한다. 전적비는 전적지에 세워야 원칙인데, 능선만 같지! 너무 멀리 설치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적지는 산세가 험하여 공사의 어려움 때문이었겠지만. 그 당시에도 산악 중장비와 산악용 헬기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소홀히 했거나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탁상행정의 결과로 보고 싶다.
전적비를 돌아보니 전적비문에 새겨진 돌 판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며 부식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오석(烏石)이 문제인 것 같다. 애당초 오석이 진품이 아니었거나, 비품을 약품 처리하여 빚어진 결과처럼 생각되어 께름칙하다. 전적비 참배를 마치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웅치전에 얽힌 슬픈 애환들이 지명과 마을 이름으로 남았다고 하니 애잔하다.
가는 길에 지도교수 농장에 들려 차 한 잔하고 쉬어가기로 했다. 천여 평이나 되는 농장에 농막이 있었다. 한 평생 교단에서 선비 생활을 하던 학자 분에게는 힘들 것 같은 농토였다. 꿀벌이 잉잉거리고 장끼가 꿩꿩 노래하는 과수원 농막에서, 담백한 차 한 잔으로 오늘의 피로를 풀며 도원(桃園)의 결의를 마치고 서녘의 붉은 해를 바라보며 웅치전이 지켜준 전주성으로 입성했다.
(2024,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