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다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알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로이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당신께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에게 그것의 참 주인은 당신이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것이나,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 주인을 몰라본 덕에 부활의 상급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들어온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가야파 대사제의 입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자신들의 것인 양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다시 받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과 유다인들처럼 대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심판도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다시 ‘만민구원설’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는 부활에 더 집중하려는 모습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머물지 않고 다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1장 45-56절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수동의 시기, 성주간>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준비의 시기)
② 출가(出家)후의 공생활(능동적 활동의 시기)
③ 수난과 죽음(수동의 시기)
요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이 활발한 능동의 때를 마무리 짓고 서서히 수동의 때로 넘어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활발했던 치유활동도 조금씩 줄여갑니다.
능력의 메시아로서 전지전능,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모습도 사라져만 갑니다.
한때 그토록 흠모의 눈길을 던지던 사람들, 기를 쓰고 예수님 뒤를 쫓아다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갑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따라나섰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일 것입니다.
더 이상 기적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결국 수동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능동의 시기,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120% 이상 완수하셨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수동의 시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잠잠히 있으라니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적대자들의 잔악한 손길 앞에 묵묵히 서 계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 십자가 죽음을 완수하기 위해 그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던 모습을 완전히 접습니다.
이 세 단계(준비의 시기, 능동의 시기, 수동의 시기)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어린 시절과 청춘의 시절은 나자렛 예수님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시기,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삶을 배우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능동의 시기는 그간 준비해온 바를 마음껏 발휘하는 시기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이어야겠습니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잠시의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병들고 노쇠해진 어느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시기는 다름 아닌 수동의 때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동의 때인 것입니다.
이 시기는 소매 걷어붙이고 혈기왕성하게 일할 시기가 아니라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늙음과 한계를 겸손하게 수용할 시기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영적으로 활활 불태울 시기입니다.
살다보면 ‘영 아닌 것 같은’ 삶의 모습을 접합니다.
때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준비의 시기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당연히 공부에 충실해야겠습니다.
매사에 배우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공부는 뒷전입니다.
배우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있어서 새로운 것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능동의 시기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얼굴입니다.
몸은 젊은이인데 하는 행동은 노인입니다.
반대로 수동의 시기는 침묵과 은둔의 시기입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매사를 영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나날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습니다.
죽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성주간은 철저하게도 수동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따라
우리 역시 수동의 삶을 추구하는 특별한 시기입니다.
수동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시기입니다.
수동의 소중함을 되새겨보는 시기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강론>
(2024. 3. 23. 토)(요한 11,45-56)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47-53).”
1) 최고의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표징’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일들을 일으키신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에게 큰 손해가 생길까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전과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 하지만, 그자들은 마음속으로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이 진짜로 지키고 싶어 한 것은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요한 8,42-44ㄴ).”
그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했던 자들입니다.
2)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희생’은 원래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 쪽에서는 ‘희생’이 맞지만, 카야파와 최고의회 쪽에서는 ‘살인’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가 자기는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지도자가 독재자입니다.
<정치 지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있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 함께’ 희생하자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희생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어떤 공동체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 시키기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3) 카야파의 말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복음서 저자의 해석이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예언입니다.
카야파와 최고의회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고, 그 희생 덕분에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섭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4)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말을, 카야파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이 말은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서 한 말인데,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면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애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에는 가말리엘이 최고의회에 없었을까?
있었다면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그는 분명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최고의회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5)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내린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불법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은 폭력에 의한 살인이고, 그 ‘살인죄’에 대한 책임은 그들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