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19)】
울산서머페스티벌의 추억 / 김잠출
오뉴월 더위에 염소 뿔이 물러 빠진다더니 요즘이 딱 그렇다. 계절은 이미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 덥고 습하다. 이상기후 탓이겠지만 예전보다 태양이 훨씬 더 뜨거워졌다. 이러니 사람도 생물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래도 7월은 수확의 달이다. 감자는 이미 수확했고 옥수수, 고추, 오이와 가지들이 풍성해 수확을 앞두고 있다.
큰 나무를 안으며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힘들고 막막할 때 나는 큰 나무를 마주한다. 어릴 때 집 안팎과 동네 사방이 온통 나무였고 산과 들판이었으니 그런 환경에 길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잎이나 몸피, 껍질만 봐도 바로 나무 이름을 떠올린다. 소나무, 감나무, 오리나무에 살구나무, 매화나무, 앵두나무, 등나무와 아까시나무, 대나무, 싸리나무, 때죽나무, 물포구와 버드나무, 느티나무... 굳이 이름을 몰라도 모야모에서 알려준다지만 나는 백 가지 정도는 나무 이름을 알 성싶다. 고향의 당수 나무는 200살이고 중학교 뒤 활만송의 나이는 619년이나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안다. 붉은빛이 도는 수피와 울퉁불퉁 근육질을 자랑하는 활만송(活萬松)은 승천하려는 붉은 용을 닮았다. 울산 김씨의 입향조인 김비(金秘)가 1404년 이곳에 마을을 세우면서 당산나무로 정했다고 해서 '세전송(世傳松)'으로 불리다 '활만송'으로 바꿨다.
고향 집 뒷산은 온통 참나무 숲이었다. 여름 내내 도토리가 달려 다람쥐 놀이터였고 땅에 떨어진 가지가 수북할 때도 있었다. 바람에 꺾인 게 아니라 절단면이 예리해 사람이 톱으로 잘라낸 것 같았다. 길이가 1cm도 안 되는 조그만 도토리거위벌레가 장본인이라는 것을 40대에 처음 알았다.
도톨도톨해서 도토리인지 돝(돼지)이 먹는 밤이라서 ‘도토리’란 이름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보니 도토리는 도토리나무에서 열리는 게 아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도토리나무는 참나뭇과에 속한 낙엽 활엽 교목으로 ‘상수리나무’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리고 “도토리”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가시나무 등 참나무류의 열매를 통칭하는 이름이란다. 어릴 때는 전부 참나무, 꿀밤나무라고 그냥 불렀다. 알고 보니 참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따로 없다. 내가 아는 지식이 참으로 허망하다. 들국화란 이름을 가진 꽃이 없다고 하듯이.
참나무류 6종류는 잎과 잎자루, 도토리가 저마다 다르고 쓰임새도 제각각이다. 상수리나무는 동네 산에 흔하고 굴참나무는 나무껍질로 굴피집을 짓는다. 졸참나무는 무리 중 잎이 가장 작고 늦가을까지 황갈색 단풍을 멋지게 만드니 갈참나무이고 잎사귀를 짚신 밑바닥에 넣어 깔창 대신 활용했으니 신갈나무라 부른다.
강 건너 둔치에 조성된 ‘은행나무 정원’에 들러 두 팔 벌려 둥치를 안는다. 한 아름이 넘는다. 큰 나무는 언제나 나를 위로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오래된 큰 나무를 볼 때마다 그냥 안기고 싶고 안고 싶어진다. 버리지 못한 행동이다.
Glo-Cal한 울산서머페스티벌
울산의 7월은 ‘울산서머페스티벌’의 달이다. 2003년 지역방송이 젊은이들과 한류 팬들을 위해 기획한 K-POP 잔치가 이어지고 있다. 7월 마지막 주, 전국의 젊은이들이 울산에서 여름을 즐기며 청춘의 시간을 만끽하는 여름 축제의 백미다.
지금이야 그러겠냐만 예전엔 지역방송 사장은 거의 서울에서 온 낙하산 인사들이 차지했다. 지역 방송인들은 2, 3년 그분을 총독으로 모셨다. 총독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탱자 탱자’하거나 ‘놀멘 놀멘’하다가 임기 끝나는 그날 바로 지역을 떠났다.
2003년부터 2년여 함께 일한 신 사장은 달랐다. 예능PD 출신으로 지역MBC 사장을 거쳐 부사장에 오른 특이한 경력을 가진 분이다. 독특한 캐릭터에 좀 튀는 개성파, 자칭타칭 ‘DDOL-I PD’라고도 했다. 첫 대면부터 사장이 아닌 PD 선배로 일하겠다고 해 천생 PD로 받아들였고 직원들의 호응도 좋았다. 나와도 나름대로 합이 맞았다. “지역방송이라고 촌스러운 기획이나 하고 로컬리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라는 훈시도 듣기 좋았다. 나는 즉시 화답했다. “발은 지역에 두고 머리와 가슴은 세계로 향하는 글로컬리즘의 콘텐츠만이 살아남습니다.” 신 PD는 토토즐, 쇼2000등을 제작한 여의도 연예 쇼 대표 PD이자 집념의 연출가였다. 연예 오락 PD의 거장다운 면모를 보이며 조용필 나훈아 쇼를 기획해 소화하는 등 울산에서도 쉬지 않았다. 어느 날 전국적인 축제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울산서머페스티벌‘을 만든 출발이었다. 매일 1억 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해 7일 동안 매일 쇼를 하자는 제안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10억 규모의 협찬을 동원할 자신도 없었고 지방에서 무슨 그런 대형 쇼를 한다고? 간부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는 “전국의 젊은이들을 울산에 데리고 와 여름을 즐기게 하자, 관람료나 참가비 없으면 해외에서도 오고 홍보 효과도 좋을 것이다.”며 K-POP의 불씨를 지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사장이란 자가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때려치우면 된다.”라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다. 어찌어찌 시작된 울산서머페스티벌은 그로부터 2013년에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었고, 출연한 음악인도 1천 명이 넘었다. 축제는 하루마다 트로트, 댄스, 발라드, 록, 힙합, 포크 등 한 장르로 특화해 공연했다.
우선 울산 시민들이 여름을 즐기고 문화를 향유하고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발전했다. 일본과 중국, 베트남에서도 팬들이 몰려와 촌 PD들과 울산시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험에 가까운 도전과 창발, 그 후에도 신 PD는 사장이기보다 아이디어, 기획, 섭외를 도맡으며 마구잡이 지원을 했다. 연출은 후배 PD들의 몫이었고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세월이 달라졌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노하우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신종인 PD를 지켜보고 일을 배운 처지에서 볼 때 그의 연출 노하우는 우선 불광불급(不狂不及), 그대로였다. “PD는 밤새워 편집기 앞에서 작업하다 새벽에 담배 한 대 물고 퇴근하는 낭만적인 직업”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내던 그는 방송은 매일 매일 달라야 하고 뭔가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something new 파였다. 어제 한 내 것도 오늘 만든 것과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영상을 많이 보고 연예 오락은 틀이 없으니 정해진 메뉴얼이나 포맷을 무시하고 드라마, 다큐도 섞어보고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방송을 흉내라도 내 보라는 주문을 반복했다. 때때로 ”일 욕심은 많을수록 좋다. AD나 작가에게 다 맡기면 PD는 무얼 할 거냐? “라는 질책에 수많은 밤을 같이 샜던 워크홀릭의 시간이 문득 그립다.
예나 지금이나 결국 지역방송의 경쟁력은 콘텐츠다. 그리고 자기 일에 미쳐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관건은 PD로 종착된다. 그래서 지금도 ‘PD는 P 터지게 일하다 D지는 직업인‘이란 유머는 통할지 모른다.
향토사 왜곡에 앞장선 지역방송
지역마다 자·타칭 ‘향토 사학자’들이 많이 있다. 논문이나 이론도 없어 학자는 아니지만 지역에선 향토사 박사니 향토 사학자라 부른다. 대부분 지역방송이 부추기거나 생각 없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지역방송이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지역사를 편성하는 일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향토사나 지역사도 역사이다, 역사는 문학과 다르다. 역사는 팩트를 기반으로 한 해석이 생명이다. 꾸며내거나 과장하다 자신도 모르게 국수주의가 되고 국뽕에 빠진다. 무조건 우리 고장의 것, 우리 것이 좋은 것이고 최고라는 지역방송들, 무지로 인한 왜곡, 오류보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지 모른다.
지역방송이 퍼뜨린 향토사 왜곡 사례도 많다. 백결이 울산 출신의 박제상 손자라 하고 기박산성에서 신흥사 승병들이 홍의장군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자랑한다. 고려의 충무공이라는 김취려 장군 묘가 강화도에 있는데 언양에 있는 가묘를 진짜 묘라고 강변한다. 근거도 사료도 없다.
‘오색팔중’이란 이름을 가진 동백을 일본 교토 지장원에서 가져 와 시청 뜰에 심어놓고 절을 하거나 헌다하는 사람들, 가요제를 열어 찬양한다, 가토 기요마사가 임란 중에 학성에서 가져가 연전에 죽고 없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는 오류가 팩트로 둔갑했다. 애향심을 위한 지역방송의 억지 쇼에서 비롯됐다. 방어진 바다에 있는 바위(海巖)를 문무대왕 비의 수중릉이라고 한다. 근거가 희박하고 개인의 사소한 글이나 족보 등 객관성이 부족한 애사에 기댄 결과다. 출처가 불명하고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전설, 설화를 사실(史實)이라 한다.
애향심은 긍정적인 감정이나 국수주의나 국뽕은 과도한 애착이고 자부심이 아니다. 광기에 불과해 자칫 분노와 편견,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지역방송의 과도한 의욕에서 비롯된 잘못된 애향심은 경계해야 한다. 역사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차가운 과학의 영역’이다.
장단음 구분 못 하는 아나운서
매일 출근길에 KBS1 라디오를 듣는다. 아침 8시 29분쯤이면 여자 아나운서가 다음 프로를 예고한다. 그 아나운서는 매일 “일부 지역국에서는 해:당 지역방송을 들으시겠습니다.”라고 한다. 해당(該當)을 해당(害黨)으로 잘못 발음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강성곤 아나운서에게 물었다. 장음인가? 단음인가? 바로잡게 왔다. “단음입니다. 많이 틀리는 단어입니다.”
한국어는 장단이 있는 언어다. 억양과 강세가 도드라지는 서양어와 결이 다르다. 문맥상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장단음 구별이 굳이 필요하냐는 물음도 있지만 강 아나운서는 “읽기와 연설, 그 격과 멋을 높이는 결정적 기제가 장단의 존중과 구현이다.”라고 강조했다.
예전의 아나운서들은 방송의 꽃이었고 우리말의 교과서였다. 거기에다 기름지고 매끈한 음색으로 뉴스나 스포츠 중계를 하면 귀에 쏙쏙 들어왔고 혼잡하고 시끄러운 버스 안에서도 정확한 발음은 빛을 발했다. 라떼는 아나운서가 장단음을 틀리게 발음하면 즉시 전화를 걸어 항의하며 훈계하는 분들이 많았고 일간신문 독자투고란에는 "아나운서라는 자가 그것도 제대로 발음을 못 하느냐?"는 비판의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장단음 구분? 꼰대나 한다고? 예를 들어, 뉴스가 끝내면서 앵커들마저도 '감사합니다.'와 '고맙습니다'를 규범 발음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국어 시간에 밤, 눈, 말, 굴과 같이 한 글자 음성에 대한 장단음 구분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모른다. 부자, 사과, 감정 등 2음절 한자어나 걷다, 갈다, 그리다 등의 첫음절 장음 구별 훈련도 마찬가지다.
좋은 발음의 첫걸음은 모음의 정확한 음가 내기에서 나온다고 한다. 한국어의 단모음 10개와 이중 모음 11개, 총 21개의 다양한 모음을 제대로만 소리 내도 근사한 발음을 할 수 있다는 게 강 아나운서의 설득이다.
밤과 밤: 눈과 눈: 말과 말:은 어떻게 구별하나? 어두운 밤, 먹는 밤: 보는 눈, 내리는 눈: 타는 말, 입으로 하는 말: 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재미를 붙여 자꾸 찾고 익혀야 한다. 입에 붙어야 발음이 제대로 나온다. 더 이상 <해당>을 <해:당>이라고 하는 발음을 듣고 싶지 않다. 외워야 할 것은 외우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자. 그래야 아나운서다.
‘아득가’를 부르며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영남알프스를 올랐다. 간월재 공룡능선 초입에서 홍류폭포를 마주하며 힘찬 물의 낙하를 응시했다. 강력한 자기(磁氣)를 뿜어내 에너지를 충만하게 해주니 상쾌하기 그지없어 속세의 찌든 때가 다 씻겨져 나갔다. 남들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폭포 소리에 묻어 혼자 산노래를 불렀다.
아득히 솟아오른 저 산정에
구름도 못다 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는 정 미워하는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혁명도 있는 집 자식이나 한다.’는 말을 기억한다. 그 시절 자주 되뇌던 말이다. 오직 취업만 바라던 어머니는 허리가 휘도록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흙 속에 묻혀 살았다. 죽을 때까지 오직 일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가난을 떨치지 못한 이유를 끝내 모르고 떠났다. 그러니 아들은 감히 중심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변에 머물며 참여하는 시늉만 냈다. 그나마 기록은 충실히 하는 것으로 자괴감을 감췄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었거나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은 안다. 그 경험이 소중한지 억울한지 차치하고 내 청춘도 그랬다. 후에 가던 길을 바꾸고 때론 장벽에 부딪혀 튕겨 나온 적도 있었다. 실망과 좌절에 몰리며 자책의 시간도 있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어머니 홀로, 나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행동하지 않은 죄’를 환경 탓으로 돌린다 한들 나무랄 사람 없으리라.
6·10항쟁일에 도시를 피해 산에 오르다 폭포 앞에서 가슴을 편다. 비류직하! 물보라를 마주한다. 기억은 희미하고 추억은 파편으로 남아 허공에 흩어져 간다.
첫댓글 대단한 지식과 내공의 글입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발음 연습을 잘 해야 겠군요^^
전문가들에게서 직간접으로 배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