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언더우드학당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26, 정동 32-1)
1886년 5월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집에 붙어있는 건물(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자리)을 이용하여 교육과정을 담은 학교로써의 고아원을 개원하였다
(이 고아원은 그 후 새문안교회 내에서 운영되었는 데 초기에는 ‘원두우학당’으로 불렸다)
1891년 ‘예수교학당(Jejus Doctrine School)’과 1893년 ‘민노아학당’을 거쳐 1901년 게일(James S. Gale) 교장 때 ‘구세학당’이 되었다
구세학당은 1905년 밀러(Edward H. Miller)가 교장에 취임하면서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후에는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김규식과 안창호가 바로 이 학교에서 수학한 대표적인 조선인이었고, 축구선수로는 차범근, 유상철, 박항서 등이 있다)
경신학교는 조선인에 의한 기독 조선인 전도사 양성(신학대학)과 조선인 교사(사범대학)를 양성 하는 것을 목적으로 1915년 대학부를 확대하여 '경신학교 대학부'로 개학하여 1917년 '연희전문 학교(현 연세대학교)'가 된다
연세대와 경신고는 역사적으로 약간 연결된다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로 독립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된게 연세대이다
그 때문에 경신고 측은 '연세대의 모체'라고 자부한다
하지한 연세대에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현 시점에서 접점이라고 해봐야, 설립자가 같다는 것과 새문안교회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아카라카라는 응원가가 있는 것 정도이다
♤ 언더우드 사택 (서울시 중구 정동 1-45)
언더우드 사택(현 예원학교 자리)은 훗날 새문안 교회의 시초가 된다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5년 4월 5일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입국, 예수교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887년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상임성서위원회 위원자격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서의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다
1916년 4월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으로 돌아가 10월 12일 뉴저지주의 휴양 도시인 애틀랜틱시티 의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화학당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26, 정동 32-1)
첫 이화학당 교사(校舍)는 ㄷ자 모양의 한옥교사 (초가집 열 아홉 채와 그 옆에 있는 버려둔 빈터) 였으나 스크랜턴 부인은 이 초가집들을 고치고, 한편으로 이화학당을 짓기 시작하여 1886년에 완성되고, 그 해 11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수가 불어나자 1896년 헐고, 1897년 본관 (메인 홀Main Hall)을 착공하여 1899년 12월에 완공됐다 (그러나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
본관 다음으로 지은 건물이 1914년 착공해 1915년 3월에 준공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심슨기념관이다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룩이 희사한 기금 으로 건물을 준공하였는데 홀부룩의 기부금은 그의 동생 새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어서 심슨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진 부분을 1961년 변형된 모습으로 증축한 후, 2011년 10월 교내에 흩어져 있던 벽돌과 화강석으로 원형을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2002년 2월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이란 명칭과 함께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돼 현재 '이화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러 전시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유관순 교실’이다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교실을 재현한 교실 속 나무로 된 바닥과 책상, 걸상이 애틋하다)
♤ 이화학당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조선에 입국했던 미국 북감리회 소속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F. B. Scranton, 시병원 설립자인 윌리엄 스크랜턴 William B. Scranton의 어머니)은 1886년 5월 31일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한국여학교의 요람인 이화학당이다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고종황제 (명성황후)는 스크랜턴의 노고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편액 (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당초에 스크랜턴은 교명을 전신학교專信學校, Entire Truet School)로 지으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은총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이화'로 택하였다)
1904년 중등과가 설립되고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가, 1910년 대학과가 차례로 추가되었다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은 1908년 배출되었고,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은 1914년 배출되었다
1918년 보통과가 이화보통학교로, 고등과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립되고 대학과는 1925년 전문학교로 승격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교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를 1946년 대학교로 승격시켜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만들었다)
1928년에 마지막 남은 유치원사범과가 이화보육 학교로 독립하여 각급 학교가 독립적인 학제로 운영되었다
♤ 학교법인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가 재단법인 이화학당을 구성하였고, 이화여자고등 학교는 따로 재단법인 이화학원을 세워 두 학교가 분리되었다
-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이화·금란중,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병설 미디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병설 영란여자중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초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유치원
-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팔렬중,고등학교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소재)
예술학교인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도 본래 이화학원 소속이었으나, 1988년 이화학원에서 분리되어 따로 재단(학교법인 서울예술학원)을 설립하였다
♤ 결혼
1908년 이전에는 결혼함으로써 대부분 학업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따로 졸업식을 하지 않았는데, 아예 과년(瓜年)한 여학생들을 선교사들이 나서서 결혼시켜 주기도 하였다
이화학당 선교사가 주선한 결혼식 가운데 한국 처음의 서양식 결혼식은 1897년 4월 18일 열렸으며, 신랑 조만수와 신부 김륜시였다
1879년생이었던 김륜시는 이화학당을 9년 동안 다닌 학생이었고, 조만수는 1876년 1월 1일에 과천에서 태어나서 17살 때 상경하여 이화학당장 조세핀 오펠리아 페인의 한국어 교사였다가 1899년 이화학당 회계 겸 초대 서무주사가 되었다
김륜시는 결혼 후 당시 평동 91번지에 있던 이화지교(梨花支校 - 일종의 부속학교)에서 근무 하였다
♤ 영문 표기
영문으로 표기를 할 때 WOMEN'S가 아닌 WOMANS를 쓰는데, 이는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와 단 1명의 여학생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인적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뜻에서 그와 같은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문법적으로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영어에서는 WOMEN'S뿐만 아니라 WOMAN'S 역시 혼용되었다
(EWHA냐? EHWA냐?의 이론도 있지만 고유명사 인 '이화'로서 EWHA를 쓴다)
♤ 메리 스크랜턴(Mary F. B. Scranton, 시란돈施蘭敦
미국의 교육자이자 기독교 감리교회 선교사이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과 수원시에 위치한 매향여자정보고등 학교의 전신인 삼일소학당을 창립하였다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벨처타운에서 목사 집안(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1885년 북아메리카 감리교회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5명의 여자선교사 중 한 사람으로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시초가 된 인물이라 평가받는다
그 후 1905년 내한한 프레이에게 학교 일을 맡기고 계속 이화학당의 일을 도우며 삼일소학당,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를 세웠으며, 또 진명, 숙명, 중앙여학교들의 설립을 도우고 동대문, 상동, 애오개병원과 교회를 도왔다
그리고 수원, 여주, 이천, 천안, 홍성 등에서 선교와 교육활동을 하다가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한국에 묻혔는데 그녀의 묘지는 마포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위치해 있다
(양화진에 묻힐 때 조선인 참배 행렬이 약 5㎞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2009년 한반도 여성 선교는 물론 교육, 보건 등에 공헌한 메리 스크랜턴에게 무궁화훈장을 수여했다
정동여학당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1-11)
알렌(Horace. N. Allen, 안련) 선교사가 살던 정동집(제중원 사택이다)에는 1886년부터 간호사 엘러스(Ellers A. Bunker, 방커부인), 호턴(Lillard S. Horton, 후에 언더우드부인), 헤이든(Mary E. Hayden, 후에 기포드부인)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들어와 살았다
1887년 6월 엘러스가 제중원에서 5살 고아를 대려와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정동여학당 의 출발이다
(당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는데, 목욕을 시키다가 그중에 한 명이 남장한 여자 아이인 것이 발견되어 앨러스 집에 거주하면서 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 정동여학당을 시작한 동기이다)
1895년 10월 정동여학당이 종로구 연지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한 후 1897년 궁궐(경운궁)을 확대하면서 궁지(宮地)로 편입되어 서양식 전각 수옥헌(漱玉軒)을 지어 황실 도서관으로 삼았다
(정동여학당은 연지동으로 이전 후 연동여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09년 8월 11일 정신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가 일어나자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중명전이 되었다
1906년 연동교회 뒤 언덕에 2층 벽돌 양옥을 짓고 기숙사 겸 교사(校舍)로 사용하다가 1910년 670평 규모의 3층 르네상스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건축비 를 부담하여 세브란스관이라 불렀다
정신여학교는 1978년 사대문안 학교 이전 정책에 따라 잠실(송파구 올림픽로4길 16, 잠실동 50-4)로 이전하였다
♤ 애니 엘러스 (Ellers A. Bunker, 방커부인)
1860년 미국 미시건주의 장로교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일리노이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의대를 수료했다
그녀는 1886년 7월 북장로교 소속의 5명의 선교사와 함께 내한했다
5명은 조선 정부가 요청한 교육 선교사 3명과(벙커, 홀버트, 길모어) 여성 2명(길모아 부인, 엘러스)이다
서울에 도착 후 알렌이 사역하는 제중원에 근무하며 여성을 위한 부인과를 담당했는데 이것이 최초 여성 의료 선교사의 사역이었다
그녀는 명성 왕후의 시의가 되어 처음으로 왕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의사가 되었다
(1888년 왕후를 치료한 공로로 정 2품인 정경부인 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대에 재학 중 파견되었기에 의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하여 헤론에 의해 의사 자격 문제가 부각되면서 제중원의 여성 진료는 1888년 파견된 릴리아스 호튼에게 인계하였다
1938년 10월 서울 정동 그레이하우스(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에서 사망하여 양화진 남편(Bunker, 벙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첫댓글 귀한 사진들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