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윤설열 대통령 동남아 순방길 나서
2021년 5세기 중국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청자가 함안 아라가야 고분군에서 출토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 유럽 가톨릭 교회에 이주민 포용 촉구
2021년 중국 시진핑 장기집권 발판 마련
9000만명의 당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정당인 중국 공산당은 7월1일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기념행사 연설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겠다며 "누구든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11월 11일 공산당은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상·이론적 토대가 될 역사결의를 채택하며 시 주석을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내년 하반기 제20차 당대회를 통해 시 주석이 3연임을 확정지으면 중국 대외 정책은 더욱 강경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9년 걸그룹 블랙핑크의 ‘뚜두뚜두’ 뮤직비디오 K팝 그룹 최초로 유튜브 10억 뷰 돌파
2018년 국제엠네스티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에 수여한 양심의 사절상(2009년) 로힝야족 탄압으로 박탈
2015년 최상급 12캐럿 청색 다이아몬드 ‘블루 문’ 스위스 경매시장에서 캐럿 당 역대 최고가인 4,860만 스위스 프랑(4,840만$ 약 560억 원)에 팔림
2010년 서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개최
제5차 G20 정상회의가 2010년 11월1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다
G20은 선진 7개국과 신흥시장 12개국, 유럽연합 의장국을 가리킨다
당시 회의는 G7에 속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아시아 최초로 회의를 개최 했다는데 큰 의미를 가졌다
위기를 넘어 다함께 성장 이라는 큰 목표아래 다양한 논의가 진행됐고 국제통화기금개혁, 대형 금융회사 규제, 개발도상국 지원등의 성과를 달성했다
2010년 대만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 부부 징역 19년 확정
대만 최고법원은 2010년 11월 11일 '직무에 위배된 수뢰죄'를 적용하여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에게 징역 19년과 벌금 1억5000만대만달러(약 55억원), 부인 우씨에게 징역 19년7월과 같은 액수의 벌금을 각각 확정했다. 재판부는 두사람이 룽탄(龍潭)지구 개발과 관련한 직무상 수뢰죄와 대만 최고층 건물인 101빌딩의 회장으로부터 받은 뇌물을 죄를 인정하여 형을 확정하였고, 부인 우씨의 경우 돈세탁 죄를 추가하여 징역 7월을 덧붙였다.
대만 남부 타이난(臺南) 출신 일용잡부의 아들로 태어난 천수이볜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국립 대만대학 3학년 때 법률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그 후 재야인사를 변호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1985년에는 직접 반체제 잡지를 만들다 보안법 위반죄로 8개월간 구속되기도 했다. 2000년 집권세력인 국민당 세력을 '부패 집단'으로 몰아 도덕성과 청렴성을 내세우며 49세의 젊은 나이에 총통에 올랐다. 2008년 5월 마잉주(馬英九) 현 총통에게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8년간 대만을 이끌었다.
그러나 퇴임 3개월만에 국무기요비 횡령 사건이 터졌고 수사는 본인과 부인, 친지와 총통부 비서들의 뇌물 수수 및 돈세탁 사건으로 확대됐다. 천수이볜 전 총통 부부는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후 이번 최고법원 판결에서 각각 19년과 19년7월로 형량이 확정되었다.
2010년 '킹콩' '라 스트라다' 거물 영화 제작자 로렌티스 별세
‘킹콩’ ‘라 스트라다’ 등을 제작한 이탈리아계 거물 영화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91)가 2010년 11월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네오리얼리즘 장르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으로 평생 50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어로 제작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라 스트라다’와 ‘키비리아의 밤’으로 아카데미 상을 받았고,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형사 서피코’ ‘전쟁과 평화’ ‘킹콩’ ‘바이블’ ‘한니발’ 등 수많은 히트작을 제작했다.
2001년에는 아카데미 공로상인 어빙 G. 탤버그상을 받았다.
2008년 억대 '인터넷 도박' 130여명 적발
2008년 11월 11일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가 인터넷 도박 사이트에 10억원대를 쏟아부은 방송국 MC인 강병규씨를 비롯해 1억원 이상을 인터넷 도박에 사용한 130여명을 상습 도박 혐의로 형사처벌하기로 했다.
검찰은 지난 2008년 9월 필리핀에 ‘바카라’ 도박장을 차리고 이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해 국내 참가자들로부터 1000억원대 수익을 올린 혐의로 이모씨 등 4명을 구속기소한 데 이어, 이씨 등이 개설한 사이트를 통해 도박을 한 수만명 중에서 1억원 이상을 사용한 상습 도박꾼 130여명을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10억원 이상을 쓴 사람도 1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중 방송국 MC 강병규씨는 필리핀에 16억원을 보내고 12억원을 돌려받아 4억원의 손실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망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사인(死因)과 사망 시점 등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아라파트는 전날인 10일 그의 병상을 찾은 오랜 친구인 타이시르 엘 타이미 팔레스타인 종교법원장이 코란 구절을 외우는 가운데 사망했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아라파트는 3일부터 혼수 상태에 빠졌고 계속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라파트의 병명이나 사인은 끝내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 병원 후송 직전에 팔레스타인 의료진이 ‘혈소판수 저하 증상’이라고 밝힌 것이 전부다. 프랑스 병원측은 “병명을 알 수 없다”면서도 암·독극물 중독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했었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인 하마스의 최고 군사 지도자인 칼레드 마샬은 11일 “이스라엘이 아라파트를 독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41) 여사는 아라파트 은닉 재산의 처리를 둘러싸고, 수하와 PA 지도부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날 40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 상점은 이날부터 3일간, 공공기관은 1주일간 셔터를 내려 길거리는 인적이 뜸했다. 축제도 일절 금지됐다. 그러나 자치정부 청사 앞에는 그를 애도하는 주민과 세계각국의 취재진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이스라엘 공보처 관계자는 11일 오전까지만 외국 기자 700여명이 입국했다고 집계했다.
팔레스타인 라디오방송은 10일부터 조가(弔歌)와 아라파트 일대기를 계속 방송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아라파트가 11일 이전에 이미 숨졌는데 발표를 늦춘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2002년 개인 워크아웃 국내 첫 신청
일정한 요건 아래 신용불량자의 빚을 탕감하고 신용을 정상화시켜 주는 ‘개인 신용회복(워크아웃)’ 제도가 시행 열흘 만인 11일에야 첫 신청자가 나왔다.
이날 오전 10시쯤 신용회복 지원위원회(위원장 이상룡·李相龍) 창구에 첫 신청서가 접수되자 그동안 ‘개점 휴업’ 상태로 애를 태워오던 사무국 직원들 얼굴에도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청 1호’ 기록의 주인공은 경기도에서 식당 조리사로 일하는 이모(29)씨. 그는 “6개 은행과 신용카드사에 카드 빚 1700여만원, 1개 할부금융사에 200만원 등 모두 1900여만원의 빚이 있고, 신용불량자가 된지 15개월이 지났다”고 밝혔다.
현재 개인 워크아웃(1단계)은 ‘5개 이상 금융기관의 총 채무액이 2000만원 이하이면서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지 1년이 지난 사람’이라야 신청자격이 있는데, 위원회 사무국은 “이씨는 신청요건을 갖추었다”고 판정내리고 신청서를 접수했다.
한 달 월급이 130만원 가량인 이씨는 “작년 초 건강 문제로 일시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없어 카드로 생활비와 병원비를 썼다가 작년 8월부터 연체자가 됐다”면서 “연체 이자가 너무 빠르게 불어나 ‘돌려막기’(카드를 여러 장 돌려가며 결제하는 것)로도 감당이 안됐다”고 말했다.
2000년 의약분업, 의사-약사-정부 3자 협상에서 타결
장기간 끌어 온 약사법 개정을 위한 의사-약사-정부 협상이 2000년 11월 11일 밤샘 협상 끝에 막판 타결됐다.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약계는 이날 새벽 의약정협의회를 갖고 “대체조제 금지 등 12개 쟁점사항에 대해 일괄타결, 잠정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협상안은 대체조제의 경우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생동성시험을 거친 약품은 예외로 인정하고, 명확한 사유가 있을시에만 대체조제 불가표시를 하기로 했다. 논란이 되었던 의약품 분류는 현행대로 하되, 이론이 있을 경우는 조속히 재분류하기로 하고 포장단위는 소포장단위가 안되도록 정부가 지도하기로 결론지었다.
또 의약협력위원회 규정을 삭제하고 처방의약품 선정은 의약계 자율에 맡겨 최소화하도록 했다. 의사협회 지도부, 병원협회, 의대교수협의회는 처음부터 합의안을 수용한 데 반해 의쟁투, 병원의사협의회, 전문과 개원의협의회는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곧 인정했다.
1999년 영화배우 최무룡씨 별세
원로 영화배우 최무룡(71)씨가 1999년 11월 11일 심장마비로 숨졌다. 영화배우 최무룡씨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5,6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 톱스타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최씨는 당시로선 보기 드문 인텔리 배우에 속했다. 그는 무려 총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우리 영화사에 큰 궤적을 남긴 명배우였지만, 인생 역정은 순탄치 못했다. 역시 배우 출신으로 본처인 강효실씨와 이혼, 톱스타이던 영화배우 김지미씨와 결합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지는 등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편이었다.
1994년에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택지 불하를 미끼로 거액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는 등 인생 후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정은 계속됐다. 이에 앞서 1976년부터 5년 동안은 미국으로 이민가 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귀국 후 1986년에는 ‘초이스프로’라는 영화제작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한 채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사라져갔다. 최씨는 1988년 제13대 총선 때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의 추천으로 파주에서 출마해 당선돼 다시 한번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최무룡씨는 1999년 4월 대종상 영화제에서 ‘영화발전 공로상’을 받았다.
1998년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을 반대하는 승려들이 조계사 총무원 건물을 완전점거
총무원장의 3선 출마를 반대하는 20여개 단체 소속 승려와 신도 1천여명이 1998년 11월 11일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가진 뒤 총무원 청사를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출마를 반대하는 승려들과 송월주 총무원장 지지파 승려들이 충돌해 신도와 승려 등 30여명이 부상했다. 총무원측은 승려대회측 3백명의 승려들이 청사 진입을 시도하자 사설 경비업체 경호원 1백50여명을 동원해 진입을 막았으나 절단기와 쇠밧줄을 동원, 총무원 청사 1층 현관 왼쪽 창문에 설치된 쇠창살을 뜯어내고 청사내로 진입, 건물전체를 점거했다.
조계종은 지난 몇달간 총무원장 3선 여부를 놓고 분란을 거듭했다. 월주 스님은 1980년 제17대 원장에 취임했으나 6개월여 만에 신군부에 의해 강제 축출된 바 있어, ‘총무원장은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현재의 조계종 종헌에 1980년의 상황을 재임기간에 포함시키느냐를 둘러싸고 월주 스님측과 반월주 스님측이 논쟁을 벌여왔다.
송 원장은 임기만료를 하루 앞둔 11월 19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영화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종무행정 중단사태가 벌어지고 승가 전체 위신이 실추된 데 대해 총무원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후보를 사퇴한다”고 밝혔다.
1998년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KIPA) 설립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공식 출범
1994년 사랑의 장기은행 발족
19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
1993년 국무회의 병역법개정안 의결. 방위병제도폐지·상근예비역과 공익근무요원소집제도 신설
1992년 국내 첫 심장이식 수술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울산대 의대 서울중앙병원 송명근(45) 흉부외과 교수.
국내에서 처음으로 심장이식 수술이 이루어졌다.
울산대 의대 서울중앙병원은 1992년 11월 11일 10년 이상 확장성 심근염을 앓아 생명이 위태로워진 조모씨(48·여)에게 뇌사자의 심장을 이식, 환자가 안정상태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수술은 이날 낮 12시부터 5시간 동안 시행됐으며 집도는 흉부외과 송명근 교수가 맡았다. 수술팀은 뇌사자에게서 심장을 떼어내 냉동상태로 보관했다가 이를 73분 만에 환자에게 이식했다.
심장이식 수술은 196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크리스찬 버나드 박사가 처음 성공했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연간 2천건 이상의 심장이식이 이루어지는 등 외국에서는 인공심장 부착, 동물심장 이식 등의 단계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1992년 고려대 한민홍교수, 무인자동차 개발
`무인자동차`가 국내 첫 개발됐다. `무인자동차`는 사람없이 컴퓨터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고려대 산업공학과 한민홍교수가 1992년 11월 11일, 2년6개월 만에 개발해 냈다.
무인 주행 자동차 `KARV-1호`는 군용 지프에 컴퓨터와 카메라가 각각 2대, 초음파센서 2대, 적외선센서 1대와 모터를 장착해 구성됐으며 장애물이 나타나면 속도를 줄이고 경적소리를 낸 뒤 장애물이 없어지면 다시 출발한다. 급커브에서도 모터로 핸들을 조정하여 부드럽게 빠져 나간다.
평균주행속도는 커브의 경우 시속 30km, 직선의 경우 50~60km로 카메라가 받아들인 영상정보를 컴퓨터로 분석해 핸들과 브레이크에 적절한 명령을 내려주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날 이공대 운동장에서 가진 시운전에서 총길이 7백여m의 S자형 코스를 시속 30km 속도로 주파했다.
1989년 독일의 베를린장벽 붕괴
서독으로의 대량탈출 막고자 여행자유화를 통해 베를린장벽을 차차 개방하기로 했으나 기자회견장에서 당 대변인이 국경개방에 대해 문서와 달리 얼떨결에 ‘즉시발효’라고 하는 바람에 장벽붕괴로 이어짐, 실수와 의도적 오해로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한 장면
1982년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 발사
1980년 조선왕조시대의 공산성 동문지 충남공주서 원형대로 발견
1980년 북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위한 준비위원회(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결성 제의
1978년 강원 장성 연화광업소 승강기 추락 사망 12명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발생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쯤의 전북 이리(현 익산).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의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중 호송원이 술을 마시고 잠든 사이 켜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를 포장한 마분지에 옮겨 붙어 폭발한 것이다. 화물열차에 있던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등 30.28톤의 폭약이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터졌고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도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후 사고 책임에 대해 한국화약 호송원은 폭발물 파열죄로 10년형이 확정되었다.
폭발 지점에는 깊이 15m, 폭 40m나 되는 5층 높이의 웅덩이가 패였고 반경 500m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폭발 피해는 반경 4km까지 미쳐 4km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반경 1km 이내의 건물은 반파돼 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된 건물이 780동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리역에서 100m 떨어진 삼남극장도 지붕이 날아가고 14명이나 현장에서 죽는 등 아비규환을 이뤘다. 이주일은 머리가 함몰돼 후에 4개월이나 입원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불길이 치솟는 난로 옆에 쓰러져 있는 하춘화를 들쳐입고 극장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나라 폭발물사고 사상 최대로 기록된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1,350여명이 다쳤다.
'이리'라는 이름은 95년 익산군과 합쳐져 익산시로 바뀌었다. 익산시는 참사 30주년인 2007년과 31년인 2008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벌였고, 2009년에는 민간단체인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사업회가 11월 11일 추모의 자리를 마련했다.
1976년 모빌 창시자 콜더 사망
모빌 창시자이자 미국의 조각가인 알렉산더 콜더가 1976년 11월 11일 사망했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히려 이런 미술적 분위기와 달리 물건 만드는 일과 기계장치들을 좋아했다.
1925년 서커스의 율동에 매혹된 그는 끊임없이 그들의 동작을 간단한 선에 담아냈다. 그러나 스케치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구불구불한 철사, 콜크, 병마개 등을 주워모아 실물과 흡사하게 움직이는 동물의 장난감을 만들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떠난 어느날 미로와 몬드리안을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아 추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1~32년 겨울, 마침내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모형들로 이루어져 동력으로 움직이는 조각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모빌(mobile)’이었다. 이 명칭은 친구인 마르셀 뒤샹이 움직이는 조각이라 해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 다음해에는 이와 비슷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금속조각 ‘스테이빌(stabile)’을 만들었다. 1932년부터는 모빌이 인위적 동력이 아닌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콜더의 ‘우주’라는 작품 앞에서 40분간이나 꼼짝 않고 서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1976년 왕인 박사 유허비 전남 영암에 건립
1975년 앙골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2년 24년 만에 남북 비방방송 중지
1971년 한국천주교 주교단,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 시정요구한 공동교서 발표
1970년 사하로프 박사 등 3인이 참여한 `인권위원회` 소련내에 발족
1966년 롱갈리트 파동. 검찰, 유독성 롱갈리트 사용 제과업자 입건
1965년 로디지아 독립선언
1964년 `통일론` 필화사건
서울지검 공안부는 문화방송주식회사사장 황용주씨가 월간잡지 ‘세대(世代)’ 11월호에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글이 국회에서 말썽이 되자 1964년 11월 11일 황 사장을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이 필화사건을 기소하면서 반공법을 어긴 부분을 간추려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수립을 민의에 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과 남북연방 등을 주장, 북한집단을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유일무이한 합헌국가임을 부인했고 유엔군의 한국주둔은 강대국이 자국경영에만 급급한 나머지 취한 무자비한 역사적 필연의 결과이며 미군의 한국 주둔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점령이라고 주장, 반미사상을 고취한 점 등이었다. 서울지법 이석선판사는 황피고인에 대해 반공법 4조 1항을 적용,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964년 월남 중부지방에 대홍수. 천여명 사망, 10만이상 이재민
1963년 프랑스, 중국과 수교
1961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에 올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1일 김포공항을 출발, 15일간의 방미 장도에 올랐다. 박의장은 11월 13일 오후 워싱턴공항에 도착,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 등 다수의 미국 고위층과 주미 한국대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박 의장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1월 14일 정오 오찬을 겸한 대담에 이어 오후에 본격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8·12성명에서 발표한 대로 1963년 여름까지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공약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이 무력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군사원조를 확약했고, 박 의장도 한반도에서 양국의 공동이익이 강화돼야한다고 역설했다.
박 의장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만나 제트기 등 한국군의 무기현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박 의장은 프레스클럽에서 연설과 기자회견을 한 후 맥아더 원수와 벤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하와이를 거쳐 11월 2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61년 생리용품 `안네 냅킨` 발매
1960년 월남에 쿠데타 발생
1959년 유엔총회, 완전군축에 관한 82개국 공동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
1958년 유엔정치위, 참전 13개국 통한(統韓) 결의안 채택
1956년 국제시계밀수사건 적발
1956년 11월 11일 오전11시40분 홍콩발 노스웨스트 여객기가 서울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다. 승객 중 23세 된 페드로 케슬러라는 미국인 청년이 고급 손목시계 2,694개를 가방 속에 숨겨 들여오다 들켰는데 그 가방 속에는 후란시스코 대시스 장이라는 중국인이 서울 후암동에 거주하는 동생 마카리오 장에게 보내는 수상한 편지도 들어있었다. "황성수 국회부의장 앞으로 캐비넷 2개를 선편으로 보내니 부산에서 찾으라"는 편지내용이었다.
수사결과 놀랍게도 문제의 캐비넷은 이중벽으로 되어있었고 그 속에서는 고급 손목시계 2,480개가 들어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5·15 정·부통령선거 당시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후보의 선거사무장이었으며 당시 국회 외무분과위원장이던 박영출이 마카리오 장과 함께 홍콩에서 트렁크 8개를 가지고 여의도공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박영출은 자유중국 쌍십절(雙十節) 행사에 참석한 후 특별한 이유없이 홍콩으로 갔었고, 마카리오 장은 상습 밀수꾼으로 한때 외무부가 여권발급을 거부했으나 박영출의 압력으로 교부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자유당은 박영출을 제명했으며 황성수는 국회부의장직을 사퇴했다.
1950년 부역자 처벌 특별조치령 공포
1946년 국립박물관 개관
1945년 조선인민당 결성. 당수 여운형
1945년 해방병단 창단(해군 전신)
8.15광복 직후 해군창설을 목적으로 미 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해사협회 70명이 주축이 되어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을 단장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임무는 총인원 200명으로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고 본부를 진해에 설치하는 일이었다. 1946년 1월 국방사령부로 편입되었고 1월17일 통제부 안에 해군병학교를 창설했으며,
2월1일에는 공작부를 설치하고 3월 3일에는 해헌대(海憲隊)를 창설했다. 또 4월에는 해방병단 인천기지가 설치되었다. 해방병단에서는 계급 없는 생활을 하였는데 장교급에 대한 계급 부여는 2월에 시작되었으며, 사병에 대한 계급제도는 6월에야 제정되었다.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 해병병단는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 개칭되면서 1946년 6월 통위부로 개쳔되면서 조선해안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1942년 조선소년심판소 개청(開廳)
1939년 일본의 화가 무라카미 가가쿠 사망
193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브리지(금문교(2,825m)) 개통
1924년 화가 천경자 태어남
1920년 동아일보 장덕준기자, 훈춘사건 취재중 일본경찰에 피살
1918년 독일 휴전협정 서명… 1차대전 끝나
연합국·동맹국 모두 참호전에 치중하다보니 전황은 전쟁기간 내내 교착상태였다. 그러나 1917년 독일이 무제한잠수함작전을 전개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선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무렵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자 승리를 예감한 독일은 미군이 본격 투입되기 전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 1918년 3월 21일 새벽을 기해 총공세를 취했다. 360만명을 동원해 7월까지 서부전선에서 5차례나 대공세를 취했으나 필사적으로 맞서는 연합국의 방어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월부터 미군이 하루 1만명씩 속속 서부전선에 도착하고 연합국이 여세를 몰아 8월부터 전면공세로 전환해 전세를 뒤집자 동맹국들이 먼저 흔들렸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항복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이 저마다 독립을 요구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전쟁에 신물이 난 독일 국민들의 저항으로 몸살을 앓았다. 10월 3일 킬항(港)에서 일어난 수병 반란으로 점화된 혁명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자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가 총리에 올랐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1차대전이 막을 내렸다. 영연방 국가들의 경우 1차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현충일로 정하고, 전쟁에 스러져간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양귀비꽃을 가슴에 달고 ‘포피(Poppy 양귀비) 데이’로 부르며 이날을 기념한다.
1918년 폴란드 독립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 몰락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를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오스트리아제국을 지배했던 유럽 최고의 명문가,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한 것이다.
1년 뒤인 1919년 4월 3일 공화국 의회는 ‘황제일족 추방법(합스부르크법)’을 제정한다. 합스부르크 일족이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왕권과 재산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입국을 불허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차 세계대전으로 마지막 영토였던 오스트리아마저 잃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09년 미국, 진주만을 해군근거지로 지정
1908년 최초의 신극 이인직의 ‘은세계’ 원각사 공연
1908년 어업령 공포. 일본인 독점 시작
1898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르 출생
1891년 청나라 금단교도 봉기, 기독교도와 충돌
1886년 프랑스 리옹서 제1회 전국노동조합대회 개최
1880년 미국의 선구적 개혁운동가 모트 사망
1869년 이탈리아의 마지막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출생
1855년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사망
1833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 출생
1821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출생
1620년 대륙 상륙에 즈음한 메이플라워 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