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열 아홉 번째 이야기】
역사가 전하는 미래(2) / 이은화
패러다임으로 미래를 읽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마녀재판’-종교계의 사과가 무색한 다양한 변주곡
1850년대, 러시아에서는 겨울마다 시행되었던 ‘마녀사냥’의 원인은 과학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한겨울에 기온이 너무 낮아 주석으로 만든 물건들이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주석으로 만든 성당의 성물들까지 바스러지며 일어난 소동은 동소체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원인이 입증된 건 수 십년 뒤였다. 과학적 무지 뿐 아니라 정치적인 ‘마녀사냥’은 이미 로마 대화재(64년) 때 흑마술을 이용해 재난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고문 및 사형을 당한 기록도 전한다. 사회에 만연한 여러 가지 불만과 불안을 제거 할 이유와 책임전가가 필요했던 공식적인 마지막 ‘마녀사냥’기록도 남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 해군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4번함인 버럼이 1941년 11월 독일의 U보트에게 격침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한동안 비밀에 부쳤지만 곧 버럼호의 승조원의 가족들에겐 은밀하게 전해진다. 이정보를 몰래 입수한 헬렌 던컨이란 영매술사는 당국에서 격침 사실을 공개하기 전에 자신이 강령술을 통해 버럼이 격침을 알게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영국 당국에서 던컨을 잡아 정작 재판을 열고 보니 던컨은 끝까지 ‘나는 버럼에서 전사한 승조원의 영혼에게 들었을 뿐이다’라고 우기자 처벌할 법적 혐의를 찾아야했다.
고심하던 검찰은 이미 사문화된 법률인 마녀 처벌법(Witchcraft Act of 1735)을 적용해 던컨은 이 마녀 처벌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았고, 약 9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이 마녀 처벌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던컨은 ‘영국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공식 처벌을 받은 마녀’로 기록에 남았다. 그렇다면 이후 ‘마녀사냥’은 사라졌을까.
현재는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마녀사냥’은 검색하면 ‘사회 안의 불특정 다수가 한 사람 혹은 소수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며, 마녀재판이라고도 한다. 개인정보 유포죄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개인정보 유포죄가 상대방의 사생활 등의 개인정보를 외부로 유포하는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마녀사냥은 허위사실을 퍼트려 소수의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로, 개인정보 유포 외에도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걸리는 행위도 마녀사냥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의어로 인민재판이 있다.’고 정의한다. 보다 포괄적이고 내포하는 의미가 다양해졌으며 어느 곳에서도 군중이 사용가능한 관용적 전쟁도구가 되었다는 의미다.
정치인과 정치적 영향이 큰 인물을 지목하는 것은 이미 반복되어 온 일이다. 그들의 정의는 광기로 변해 정치인들은 대중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내세워 정치에 관심이 적은 시민마저 사상검증의 굴레를 씌우기도 한다. 내포한 의미가 무서운 단어이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무분별하게 죄의식이 없이 사용하는 정치색이 짙은 용어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한 무분별한 마녀사냥이 원칙도 없고 무책임하게 자행되었지만 종교계의 자성의 목소리나 자기반성은 없었다. 2000년, 교황 바오로2세가 <기억과 화해>라는 문건을 발표하는데 이는 과거 교회가 신의 뜻이라며 저지른 인류의 역사에 참혹한 잘못을 시인하며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로서 교회가 저지른 광기에 따른 종교의 ‘마녀사냥’은 사과와 함께 종교계에서 막을 내렸다지만 뿌리는 깉다.
그들이 전했던 사과는 용기가 필요했고 남은 것은 인류의 몫으로 남은 죄책감이지만 종교의 사과는 사회의 근원적인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반성과 사과가 사회를 통섭하거나 성찰까지 이르지 못한 탓일까. 여전히 ‘마녀’의 범주는 확대되고 국가가 국가를 상대로 자행되기도 한다. 진정한 화해는 용서보다 기억을 먼저 요구할지 모른다. 책임 소재를 묻지 않고 시대마다 사회는 전쟁이나 기후에 따른 재앙도 나와는 다른 인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소빙하기와 페스트- 전쟁과 환란의 책임을 밝히는 현장
빙하기는 아니지만 추운 기후가 지속되었던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 ‘소빙하기’다. 400년경에 시작해 900년경에 끝난 고대 후기 소빙하기와 중세와 근대 사이인 13세기 초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중세 후기 소빙하기 등을 소빙하 시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13세기 초부터 시작해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소빙하기에 나타난 기온 저하 현상은 세계 각지의 기록에서 나타나 있다. 포도의 생산량이 저하되며 식생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상과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기후가 시작한 재해는 인명 피해로 이어졌고 원인을 모르는 대쟁앙에 인류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계사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와 그 과정의 결과는 고스란히 인류가 감담할 몫이었다. 기후의 변화가 예측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앙은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했다. 5세기에서 15세기의 중세시기의 지구촌은 여러 재앙이 거듭하는 기후 변화시기를 거친다. 소빙하기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몽골에서는 소빙하기로 인해 초원이 줄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격동기 몽골을 하나로 통합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은 정복을 통해 영토를 넓혀 동유럽에서 중국까지 이른다. 대륙 끝에서 다른 대륙 끝까지 인류 최초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렸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는 동양의 발명품인 화약과 종이 등이 길을 통해 전해졌다. 문화와 문명이 전하고 섞인 길이다.
아시아보다 더 심각한 유럽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농작물의 생산량이 줄어들어 유럽인들은 자연환경과 건강상태는 위험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전역을 휩쓴 페스트의 유행은 유럽인들은 페스트가 유행하기 전의 4분의 3으로 줄어들었다. 급격한 노동력 인구변화는 일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임금이 늘어나는 경제학적인 반사이익과 함께 사회구조의 변화도 나타났다. 사회의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기후변화가 몰고 온 전염병이었다.
유럽은 경제적인 호황을 맞게 되고 그렇게 생긴 돈을 탐험에 투자되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발견한다. 이때 아메리카에 천연두가 전해지면서 천연두에 걸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이때까지도 병은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죄의 결과이고 신의 저주였다. 신 앞에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었고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기도와 금식에 의존했다. 부패한 공기가 문제라고 여긴 사람들은 장뇌나 강력한 향기를 내는 방향제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좋은 냄새를 맡으며 병을 이겨보려고 노력한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등장한 의사들 역시 코 부분에 방향제를 넣는 새의 부리와 비슷한 주머니가 달린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격리와 거리두기는 오래 된 치료제였다. 한 가지씩 배워가는 현장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에게 전염병은 신의 징벌의 의미가 강했다.
밀라노에서는 환자와 가족들이 안에 들어 있는 채로 환자의 집을 아예 폐쇄했다. 그 발생자 격리와 거리두기로 밀라노의 사망률은 15%에 그쳤다고 전한다. 자연스럽게 격리가 이어졌다. 공중 위생을 위한 여러 제도가 정립되고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환자들을 마을 밖의 수용소에 격리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물건을 일정 기간 격리하는 검역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크로아티아 라구사에서는 1377년 흑사병이 유행하는 주변 섬들로부터 오는 사람이나 물자를 30일간 격리하는 제도를 정식으로 시행하는데 1397년에 40일(quarantenaria)로 늘어나 오늘날의 검역(quar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비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윤리의식은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요소들은 윤리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의 하나일 뿐이지, 윤리를 형성하는 핵심 기준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이에 대해 니체는 정확하고 엄격하게 규정한 철학자 중 하나다. “인간이 윤리와 비윤리, 선과 악에 대하여 구분을 지어온 근본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습과 규율의 속박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윤리는 사회적 규율이나 관례 따위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선하다’고 규정하지만 반대로 인습을 역행하는 의미의 ‘윤리적이 아닌 것’을 사회는 곧바로 ‘악’이라 규정한다.
윤리의 핵심 기준으로 거론되는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는 중요한 구분이 아니다. 특별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기적 행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규율과 다를 때 ‘비도덕적’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해석이 반유대주의를 양성하게 되는데 ‘신은 죽었다’는 말로 인류의 도덕적인 양심에 철퇴를 가한 니체는 또 한사람의 독설가이며 사상가를 낳는다. 니체의 이러한 해석에 심취해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을 세운 괴물이 심취한 사상의 잔인한 후폭풍을 야기한 이로서 히틀러를 능가 할 이가 없을 듯하다. 스스로 위대한 민족을 위한 인종청소까지 확대되는 광기어린 ‘마녀사냥’이다.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 어떤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이 접목될 것이다. – 지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위기에 대한, 가장 심원한 양심들의 충돌에 대한, 이제까지 믿어져 왔고 요구되어 왔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부를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대한 회상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이사람을 보라 1908>–니체
완전하게 연결된 들킨 역사–실존하는 가장 완벽한 역사현장 보고서
제노사이드*는 근대의 비극이면서 아직도 희생의 그즐이 짙은 현장을 증거로 지닌 현재의 역사현장을 보여준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한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더 많은 것을 고발하고 있다.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며 도왔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면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정밀하게 측정했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는데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한다.
전범국가 독일이 된 이유로 반유대주의적 정책들이 독일인들의 별다른 반대 없이 전국가적으로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와 유사한 행위로 일컫는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는 주장도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밝히고 있는데 설득력이 있는 고발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는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는 직접 연결이 되었음이 드러났다. 이미 독일에서 유행을 하고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던 역사적 사실이지 갑자기 출현한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한다.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위험한 인종 차별주의는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유대인이었다.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 잔인한 차별주의와 민족말살 정책은 유럽을 관통한 사상이 되었다. 독일 안에서 오래 전부터 정책적으로 일어난 민족차별정책이었다.
옛 독일 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1895) 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 1912》에서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과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도 촉구한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암묵적으로 독일인이 동조한 잔인한 규정의 출발은 명문화되었고 구체화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독일의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된다. 당시 유럽 일대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약 9백만 명이었는데, 히틀러는 독일 내부의 정치적 통합을 강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독일인을 인종적으로 우월한 민족으로, 유대인 및 집시와 슬라브인 등을 인종적으로 열등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독일의 인종적 통합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규정하여 탄압을 시작했다. 이 탄압 정책은 특히 유대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반 유대 정서를 공유했던 인접 국가들에서 유대인 탄압 정책을 택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저지르고 나라가 자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전후 재판을 거쳤지만 당사자 누구도 제대로 지지 않았다. 전쟁의 빚과 상흔을 치료할 심리적 부담을 나라가 채무를 갚고 있는 상황은 당연한 일임에도 다른 전범국가에 본이 되고 있는 아이러니는 독일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국가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피해국이 승전국이 아닌 것처럼 패전국이지만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인류에 저지른 대가를 묵묵히 치를 수밖에 없는 독일이다. 일본이 전범국가로 동아시아에 저지른 폭압의 피해는 독일에 지지 않는다. 지면으로 다 할 수 없는 만행은 여전히 일본이 자행한 ‘마녀사냥’임에랴.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폭압적닌 ‘마녀사냥’은 지구촌을 잔인하게 나누고 있다.
에필로그-미래의 답이 보이는 역사의 현장에서
확산되는 심각한 코로나19상황보다 포스트코로나19에 실린 염려는 시작이었다. 이미 빚어진 참담한 현실보다 어떤 모양으로든 코로나19의 진행이 잠잠해지면 그 후에 벌어질 일들은 예측이 어렵다. 책임을 몰아서 물을 수도 없는 일에 사회와 정치는 책임전가와 직무유기를 방패로 사회적인 불만을 해소하려 들지만, 서로 떠넘기기와 궤변으로 앞가림하는 연출은 지구촌에 총체적 난국이 될 소지가 짙은 의심은 염려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제도와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다투고 시급한 일보다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진행할 주체의 역량여부를 따지다가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흔들린 사회를 불안하게 지켜보았던 과거를 상기하는 일은 정치를 하는 지도자가 고민해야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역대의 뛰어난 재량과 역량을 가지고도 자신이 속한 국가나 집단의 이익에 몰입한 나머지 인류나 국가의 멸망을 초래한 지도자들의 그림자를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이미 세기의 지도자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나섰고 서로 총구를 겨누기 시작했다. 그들이 익숙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때 새로운 대상을 겨냥한 ‘마녀사냥’은 어색하지 않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따져가면서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적대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상대를 혐오하거나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사회를 분열하는데 동조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기도 한다. 군중은 정치의 대상이지 도구가 아님에도 역대의 지도자들이 다시 정치를 한다면 똑같은 과오를 범할지 모르고 사회는 다시 뒤틀린 모습으로 그대로 답습될 여지는 크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들이 지시하는 방향이 틀렸음을 지적하고 사회의 병페를 개혁하는 자가 나서서 수습하는 일이 있었기에 사회는 회복할 수 있었고 기존이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던 역사기록은 미래에게 던지는 최고의 교과서다. 미래로 가는 인류에게는 축복인 교과서가 역사다.
과거를 지향하는 정권이나 집단은 반드시 실패하거나 좌절하고 만다는 검증된 역사의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비극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를 보면 과거는 복제하기 쉽고 미래는 예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여전히 증명되고 있는 숙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따져서 일이 원래대로 회복되거나 이미 입은 상처가 아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의 약속의 확인이지 바른 법을 지향하고 나은 방향으로서의 선회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래가 두려운 이유와 사건 이후가 중요한 이유는 닿아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회의 문제는 이제까지 없던 일이 아니었고 회복의 의지가 낮아보여도 미완의 희망을 읽어야하는 불완전한 열린 미래답안지다. 국가가 국가에게 행하는 폭력과 정치적인 압력도, 집단이 가지는 힘의 무기가 다른 집단을 굴복시키려는 힘의 논리도 이제까지 쉬운 미련한 해결방법이었음을 지적하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불안한 현실에서 미래를 열 탈출구는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제대로 치르지 못한 과오청산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전범국가의 책임을 확실하게 묻지 못한 과오는 이제 다시 세계와 국가의 위상을 흔들 정도로 강한 부메랑이 되었다. 또 다시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쓰게 하고 증오의 대상을 만들 여지는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다시 사회가 나누이거나 저마다 다른 패러다임으로 무장한 정치적 군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마녀를 사냥하는 퇴마사를 생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인류애에서 찾아야하는 명분이다. ‘역사 거울이 볼 때마다 다른 거울’이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정의가 시대를 이 시대를 판단하는 말이자 미래를 규정하는 말이며 희망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미세먼지와 일본이 쏘아 올린 핵폐기물의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이 요원한 불투명한 미래인 것은 맞으나 떼와 억지로 무마시킬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레이다에 잡힌 위험신호임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음을 어쩌랴.
인류는 각각의 국가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라는 점은 논증의 대상이나 찬반을 다툴 주제가 아니다. 인체에 무수한 세포가 호르몬에 영향을 끼치며 호르몬은 인체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듯이 인류의 영향은 지구촌에 이르고 있다.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만이 인류를 흔든 것은 아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집단으로 행하는 패러다임이 무서운 무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 잠재된 사냥을 멈추어야 한다면 이성적 사고는 필수다.
시대마다 위기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흐름을 바꾼 이도 사람이었다. 환경과 기술은 보탤 뿐 시간이 보태 준 변화는 역사에 더해진 해석이다. 지금 가는 이 길의 끝을 정확하게 예견할 이가 누군지 모르지만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더 나은 길이 있다는 전제를 달지만 위기가 다다른 그때에 다른 도피 방법을 찾을 인류다. 시대마다 안고 있는 딜레마이고 던지던 질문이며 도피방법으로 행해질 ‘마녀재판’은 어떤 이유로든지 허용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 지금 시대를 가르는 불안한 현장이지만 이곳에서 미래를 읽어야 지구촌의 내일도 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제노사이드 -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 1944년에 법률학자 렘킨(Lemkin, R.)이 제안하여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
첫댓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을 사진으로 보니 좀 숙연해집니다. 빽빽한 글자 속에서 오백 년 전 루터의 절절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오늘에야 이 사건이 마음으로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