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구 신아일보 별관 (서울시 중구 정동길 33, 정동 1-28)
1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미국기업인 싱거미싱회사 (Singer Sewing Machine Company) 한국지부 등으로 사용되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에 진주만을 공습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망가져 싱거사는 추방당하고 건물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된다
해방으로 한국이 일본 식민지배의 굴레를 벗어나자 다시 돌아온 싱거사는 원래 사옥으로 쓰던 건물을 되찾아 1969년까지 사옥으로 사용한다
1969년 신아일보사로 매각되어 1975년 사세확장에 따라 3·4층을 증축이 이루어진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의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통합되면서 또 다시 주인 잃는 건물이 되고, 2008년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30년대에는 공공 건물만 철근을 넣은 콘크리트 로 지었는데 이 신아일보 별관은 민간 건물인데도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서 희소성을 더하고 있다
♤ 지금의 신아일보는 1980년에 사라진 신아일보 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2003년에 창간한 신한일보 가 신아일보로 개명한 별개의 신문이다
보구여관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34-3)
조선 말기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병원
1887년(고종 24) 한국 감리교 의료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미국인 목사 스크랜턴은 한국여성들 이 남자병원에 갈 수 없는 관행을 보고 여성전용의 병원을 만들 것을 결심,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에 병원설립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병원설립안이 승인되어, 같은 해 10월 여의사 하워드(Meta Howard)가 한국으로 건너와 정동(貞洞)에 위치한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보구여관의 시초로서, 당시 서울에는 알렌이 운영하는 광혜원과 스크랜턴이 운영하는 정동병원 이 있었으나, 여자들은 하워드가 운영하는 이곳에서 별도로 치료를 받았다
하워드를 이어서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Cutler), 해리스(Lillian Harris) 여의사가 내한했다
병원의 첫 간호사는 1903년에 내한한 캐나다 출신의 에드먼즈(Margaret Edmunds)였다
그녀는 1903년 12월 보구여관 안에 한국의 첫 간호원양성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1월에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에게 간호사 모자를 씌어주었다
마침내 1908년 11월 5일 제1회 졸업식에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를 한국인 최초의 졸업 간호사로 배출했다
보구여관의 마지막 담당 의사인 힐만이 1914년에 귀국한 후 영문 잡지나 한국 사료에서 보구녀관의 존속은 확인되지 않는다
건물은 이후 이화학당 건물로 이용되다가 1921년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에드가 후퍼 기념 유치원 (이화유치원)이 건립되었다
1958년 이화유치원이 신촌으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을 젠슨 부인(M.K. Jensen, 1904~1998)이 매입하여 정동제일교회에 기부(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헌증되었다)하였으며, 정동제일교회에서는 1960년에 이 건물을 헐고 젠센기념관을 새로 세워 정동제일교회의 부속 건물로 사용하였다
1979년 정동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 예배당’ 건립과 함께 이 건물도 철거되었다
이후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이 동대문으로 이전되어 해리스기념병원에 통합되면서 1930년부터는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행림원(杏林院) 의학부가 창설됨에 따라 이 동대문부인병원은 1979년 신병동이 개축되어 의과대학과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93년 목동에 대학병원을 신축하고 의과대학이 이전한 후, 2008년 폐원했다
♤ 보구여관 한자표기에 대한 고찰
'여성을 질병으로부터 구하고 보호한다'는 뜻으로 보호할 보(保)자를 써서 保救女館이라 표현한 자료가 많이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잘못 사용되어왔던 것으로, 관련자료를 엄밀하게 검토해 보면 넓을 보(普)자를 써서 普救女館이라 해야 맞다
중명전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1-11)
원래 궁궐에 포함되지 않은 땅으로 1890년대까지 주로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1897년 궁궐을 확대하면서 궁지로 편입되었고, 현재의 중명전 자리에 서양식 전각 수옥헌(漱玉軒)을 지어 황실 도서관으로 삼았다
(1899년 준공된 옛 전각은 서양식 1층 건물이었다)
1897년 10월 미국인 토목기사 존 헨리 다이가 설계한 수옥헌이 1901년 11월 16일 화재로 전소되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가 일어나자 고종 이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기고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1905년 일본의 러일전쟁에서 승리는 이 땅의 독점적 지배를 반대하는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졌다 는 것이다
일본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909)는 특명전권대신 자격으로 정동을 찾아와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 군대가 주변을 둘러싼 수옥헌에서 통감부 설치로 일제 통감의 내정 지휘와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황제의 어새와 비준 절차도 없고 무력과 강압으로 진행된 부당하고 불법적인 조약이었다
1906년 수옥헌은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重明은 주역의 용어로 임금과 신하가 하늘의 뜻 받아 소통하고 화합하여 밝아짐을 의미한다)
을사오적(乙巳五賊) 대신들이 황제를 무시하고 천명을 거스르는 불법 조약에 서명한 곳이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외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는데 이 때 파견된 인물이 이상설(정사 正使), 이준(부사 副使), 이위종 (참서관參書官) 세 사람이다
국권 수호를 위한 황제의 노력은 다양하게 진행되었 지만 제국주의 중심 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을 외면 하였다
1907년 7월 19일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중명전에 유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었다
193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의 거처가 되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 을사오적(乙巳五賊)
학부대신 이완용(왼쪽 위), 군부대신 이근택(오른쪽 위), 내부대신 이지용(오른쪽 가운데),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오른쪽 아래), 외부대신 박제순(왼쪽 아래)
정동극장 (서울시 중구 정동길 43, 정동 8-11)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를 목적으로 1995년 국립중앙극장 분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96년 과도기 운영체제인 사단법인체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재단법인으로 완전한 독립법인체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극장은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1908년 에 문을 열었던 국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 圓覺社의 복원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공연으로는 정기공연과 맞춤공연이 있으며, 정기공연은 ‘정동극장 상설국악공연’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전통예술공연을 무용·풍물·기악연주·소리의 4종류로 나누어 궁중음악과 민족음악 모두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반면 맞춤공연은 정기공연과는 달리 프로그램의 구성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며 주문자의 신청에 따라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주문자의 요구에 맞게 프로그램을 제작 공연하고 있다
♤ 원각사
1908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창극 (唱劇)이 주가 되고 잡가(雜歌)와 잡희(雜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이다
1909년 궁내부 대신 이용익(李容翊)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금의 새문안 교회 근처에 로마식 원형극장을 지었다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이용되었지 만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영훈 노래비
정동극장 끝자락에 작곡가 이영훈(1960~2008)을 추모하는 작은 노래비碑가 있다
(작곡가 이영훈은 2008년 2월 밸런타인데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이문세 5집 앨범에 수록된 광화문 연가는 덕수궁 돌담길, 눈 덮인 교회당을 노래한다
정동길 아름다운 모습은 노래 속 추억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정동제일교회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34-3)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중에 하나로,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10월 11일 정동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한국인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한 것을 정동제일교회(초기에는 벧엘예배당 이라고 불렀다)의 시초로 삼고 있다
1889년 12월에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예배처, 그리고 종로집회소(중앙교회의 전신)를 아우르는 공식교회로서 한국 감리교회 최초의 정동구역회 (계삭회)가 조직되어 두 곳의 남녀 예배처가 통상 ‘정동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894년에는 교인수가 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벧엘예배당은 1916년 북편을 증축한 데 이어 1926년 1500명 수용 규모로 60평을 증축하면서 원래의 라틴십자가형에서 지금의 사각형으로 변해 원형을 잃은 아쉬움이 있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한국전쟁 중엔 폭격을 받아 예배당의 절반가량이 무너져 내렸으며 이때 예배당에 있던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도 부서졌다
(파이프오르간은 건립 당시 동양에선 3번째, 한국에선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훼손돼 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문화재 예배당’으로 불려 왔으며 1987년 화재로 소실된 내부 보수와
1990년 종탑 보수, 2001년 건물붕괴 우려에 따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
초대 아펜젤러 목사 흉상
4대 탁사 최병헌 목사 흉상
시병원 터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34-3)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이 1885년에 세운 시병원은 지금의 정동교회가 있는 곳과 바로 이웃하는 자리로서, 선교100주년 기념예배당의 서쪽 일대이다
베푸는 병원이라는 의미의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Hospital)은 1885년 9월 10일 스크랜턴 의 집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1886년 6월 15일 집 동쪽에 붙어 있는 집(현 정동제일교회 구 예배당 마당)을 구입, 개조하여 5개의 병실로 정식 병원을 개원하였다
처음에는 정동병원이라고 불렀으나 1887년 3월경 부터 시병원이라고 불렀다
이후 메리 스크랜턴이 1889년 주로 서민층들이 모여 사는 남대문로 주변의 상동지역, 지금의 상동교회 일대 약 7,300㎡의 대지를 사들였고, 이를 고쳐 1890년 10월에 상동병원(尙洞病院)을 개설 하였다
평소 상주인구가 많은 상동으로 자신의 병원을 옮기기를 갈망했던 스크랜턴의 바람에 따라, 시병원 은 1895년 상동병원에 통합되었다
시병원 터는 한국 근대의료와 여성교육에 공헌한 스크랜턴 가족이 처음 개설한 병원이 있던 자리라는 점과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관련 깊은 자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첫댓글 싱거미싱 생각이 납니다. 어릴쩍 어머님이 이용하던 것이지요. 귀중한 자료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