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댈러스 에어쇼서 수송기, 전투기 2대 공중 충돌
2022년 심석희 2022 4대륙 쇼트트랙 선수권대회 금메달
심석희는 12일(한국시간)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명(ISU) 2022 4대륙 쇼트트랙선수권대회 여자 500m 결승에서 43초272를 기록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마지막 곡선주로에서 미국 산토스 그리스월드의 크리스틴과 경합을 벌이다 오른발을 뻗어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2021년 일본 대기업 도시바 해체 수순돌입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 최초의 전신 설비 업체로 출발한 도시바는 합병을 통한 사업확장을 거듭하면서 한때 원전, 철도, 반도체, 가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 히타치제작소 등과 함께 세계를 주름잡는 일본의 종합 전기메이커로 자리매김해 왔다.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 도요타자동차와 함께 전후 일본 산업계를 주도한 ‘재계의 삼두마차’로 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업부문의 문어발식 확장을 통한 ‘복합 경영’은 우량 계열사의 수익이 부실 계열사의 지원에 들어가는 등 시간이 갈수록 그룹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발생한 회계부정 사건은 도시바를 과거의 영광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타가 됐다. 이에 회사를 3개 법인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2017년 천막 제조회사 파인텍 노동자 2명(홍기탁 박준호) 75m 굴뚝(목동 열병합발전소) 농성 시작, 2019.1.11 426일 만에 내려옴, 세계최장기고공농성기록
2017년 이란 케르만샤 주 진도 7.3 지진 사망 530명 부상 7,460명
2014년 인류최초로 탐사로봇 혜성표면에 착륙
2004.3.2 프랑스령 기아나 우주센터 발사 10년 8개월 10일 만에 지구-태양 거리 42배가 넘는 65억㎞ 날아간 유럽 혜성탐사선 로제타에서 분리된 탐사로봇 파일라가 혜성 '67P/추류모프-게라시멘쿠' 착륙
지구에서 5억1천만㎞ 떨어진 67P 혜성은 마치 고무 오리 장난감처럼 2개의 큰 덩이가 목으로 연결된 모습이어서 '오리 혜성'으로 불리며 태양 주위를 6년 반에 한 바퀴씩 돔
2011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사임
2009년 제임스 릴리 전 한국대사 별세
2009년 11월 12일 전(前) 주한 미국 대사로 근무한 제임스 릴리(Lilley·81)가 미 워싱턴DC의 병원에서 타계했다. 릴리 전 대사는 전립선암 합병증으로 오랫동안 투병해왔다.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의 릴리 전 대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아시아통으로 손꼽혀왔다. 미 예일대를 졸업한 그는 1951년 CIA 요원이 된 후, 27년간 일본과 대만, 동남아 등에서 활동했다.
고인은 이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후 1986∼89년 주한 미대사, 1989∼91년 주중(駐中) 대사를 역임했다. 당시는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분출하고 중국에서는 톈안먼(天安門)사태가 발생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큰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릴리 전 대사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당시 정부가 고려 중이던 계엄령 선포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09년 명래제약 창업주 이용재 여사 별세
2009년 11월 12일 오후 7시30분 '이명래고약'으로 유명한 명래제약 창업주 이용재(李容載·88) 여사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명래고약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이명래(1890∼1952) 선생이 1906년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약학을 배워서 만든 종기 치료제다. 선생이 별세한 뒤 막내딸이자 소아과 의사였던 고인이 195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소'를 세우고 대량생산했다.
항생제가 귀하고 비쌌던 1970년대까지 이명래고약은 피부질환 치료약의 대명사로 통했다. 노란 기름종이에 싸인 짙은 고동색 발근고(拔根膏)를 콩알만큼 잘라내 욕창·다래끼·부스럼 등에 붙여두면 고름이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고인의 아들 유종(兪淙·52·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씨는 "이명래고약의 장점이자 단점은 상업화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라며 "어머님은 평생 이명래고약을 원래 성분 그대로 보존하고 공급하는데 힘썼다"고 했다.
80년대 이후 다양한 항생제가 시판되면서 이명래고약은 차츰 설 자리를 잃었다.
2008년 박춘호 국제해양재판관 별세
2008년 11월 12일 오전 8시 박춘호(朴椿浩·78)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이 노환으로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별세했다. 박 재판관은 올해 초 혈액암이 발병해 항암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세가 악화됐다.
전북 남원 출신의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관은 국내 최고의 해양법학자로서 세계적 권위의 국제사법기구에 한국인 최초로 진출해, 국내 해양법 분야를 한 단계 더 격상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박 재판관은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한·일 간 어업분쟁이 격화되는 것을 보고 해양법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국제법 전문가로 꼽히던 미국 켄턴대의 헨리 레이프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1996년 독일 함부르크에 설치된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돼 2005년 9년 임기의 재판관에 다시 선출됐다. 그의 재판관 당선은 1991년 유엔 가입 이후에도 우리에겐 불모지대나 다름없던 유엔 사법기구에 한국인이 최초로 진출한 쾌거였다.
2007년 제주항공 제주-평양 최초 국제선 취항
국내 저가 항공사 제주항공이 제주∼평양 노선에 첫 전세기를 띄웠다
북한 민족화해협의회강 남북협력제주도민운동본부를 통해 초청한 김태환 제주지사와 제주도민 방북단 70명은 2007년 11월12일 오전 제주항공 전세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방북은 해마다 제주도민이 실시한 수해 구호물자 지원, 당근 북한보내기 사업등에 대한 화답 차원에서 이뤄졌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개막(2005.11.12.~11.19)
2005년 손초롱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미니멈급 챔피언 됨
2004년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 MBC라온건설인비테이셔널 스킨스게임 출전위해
제주 방문
2001년 홈런왕 맥과이어 명예로운 은퇴
마크 맥과이어(38·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명예로운 퇴진을 선택하며 2001년 11월 12일 끝내 방망이를 놓았다.
맥과이어는 지난 2001년 1월 구단과 2년간 3000만달러를 받기로 합의, 2002년 시즌 연봉 1500만달러가 보장돼 있었다. 그러나 소속 팀 카디널스가 자신과 같은 1루수로서 올 FA시장 최대어인 제이슨 지암비(애슬레틱스)를 영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 맥과이어는 1997년 카디널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약 2년간 지암비와 한솥밥을 먹으며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암비는 맥과이어의 도움으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1루수로 성장했다.
맥과이어는 지난 1998년 70개의 홈런을 때려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백인 슬러거. 하지만 지난 2년간 무릎 및 허리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올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돌았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187, 29홈런, 64타점. 특히 포스트시즌에는 4게임에서 11타수 1안타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맥과이어는 198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 역대 5위인 통산 58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 미국 여객기 뉴욕서 추락, 260명 사망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AA) 소속 에어버스-300 여객기(587편)가 2001년 11월 12일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향해 이륙한 지 3분 만인 오전 9시17분 뉴욕시 퀸스 지역 주택가에 추락했다.
사고기에는 승객 251과 승무원 9명 등 260명이 탑승해 있었으며, 사고기가 추락한 주택가에선 건물 4채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화염에 휩싸였다. 승객들 가운데 150명은 도미니카 국민인 것으로 밝혀졌다. 탑승객 251명과 승무원 9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 부시 행정부는 이날 오전 뉴욕에서 아메리칸 에어라인(AA) 587편이 추락하자, 추가 테러의 가능성으로 최고 경계 태세에 즉각 돌입했다. 그러나 추락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해 조사를 한 결과 사고원인은 기체 결함으로 밝혀졌다.
1999년 안산 SW 지원센터 설립
1996년 제1회 국제 CDMA 회의 개최
1996년 사우디항공 보잉 747-100기와 카자흐스탄 민항기가 인도 뉴델리 상공에서
충돌. 349명 사망
1994년 영국의 소설가 스튜어트 사망
1992년 영종도 국제공항 기공식
1991년 아태지역 경제협력(APEC) 제3차 각료회의 서울서 개최
1991년 동 티모르 수도 딜리시의 산타쿠르즈 묘지에서 200여명 학살사건 일어남
1990년 빌게이츠 컴덱스쇼 기조연설에서 `손가락 끝의 정보`라는 문구로 미래
컴퓨팅의 비전 제시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본 제125대 왕에 즉위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의 즉위식이 1990년 11월 12일 궁성에서 거행됐다. 히로히토 선왕(先王) 즉위 이래 62년 만에 거행된 즉위식은 오전 9시부터 아키히토 왕 내외를 비롯, 가이후 총리 등 3부 요인 50여명이 현소의 신당에 있는 3종의 신기 중 으뜸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거울 앞에서 즉위 사실을 보고하는 왕실행사로부터 시작됐다.
1989년 히로히토 전왕(前王)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고친 바 있는 아키히토 일왕은 이로써 명실공히 일본 제125대 왕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됐다.
일본은 66개국의 국가원수와 17개국의 왕족, 18개국의 부통령, 19개국의 총리, 32개국의 장관이 즉위식에 참석하자, 국가원수 2명과 22명의 왕족, 17명의 총리가 참석했던 1953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과 비교하며 만족해했다. 아키히토는 히로히토의 장남으로 칭호는 쓰구노미야이다. 1952년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 해에 왕세자가 되었다. 1956년 가쿠슈인대학 정경학부를 수료하고, 1959년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이날 도쿄에서는 일본 경찰 3만7천명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주일 미 총사관저, 군사기지 및 기차역 등 시내 25개소에서 폭탄테러 및 화재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약 10만명의 좌익 노조원들이 즉위를 반대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1989년 전교조, 전태일노동상 수상
1989년 문학평론가 임종국 별세
문학평론가 임종국씨가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로 별세했다. 임종국씨는 20여년간을 친일파들의 감춰진 실체를 벗겨내는 일에 바치며 고군분투해온 재야 사학자로 큰 자취를 남겼다.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대 정외과를 나온 뒤 문학을 지망, 1959년에는 시 `비`를 문학예술지에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했고 곧 이어 경남문학지에 `물레방아론`을 내면서 평론활동도 개시했다.
그러나 1965년 한일회담은 그가 친일문제 탐구자로 `대변신`을 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여기저기 숨겨진 자료들을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1966년 `친일문학론`을 내놓았다. 일제하 우리 문인들의 친일문학활동 작품들을 예로 들어가며 밝혀낸 이 저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록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임씨는 `친일` 캐내기 작업을 외롭게 계속하여 치욕의 역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열을 촉발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80년대 들어 문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1983년에는 일제의 사상침략과 자원침략, 대륙침략의 실상을 담은 `일제침략과 친일파`를, 1984년에는 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내놓았다
1989년 서양화가 하인두 별세
하인두씨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전후 제세대로서 평생 고집스레 추상화만을 추구해 온 집념의 화가였다.
1987년 사형선고와도 같은 직장암 선고를 받고 다섯차례의 입원을 거듭하면서도 전시회를 개최하고, 투병기를 저서로 출간하는 등 예술과 생애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보이다가 끝내 한창 원숙한 예술세계를 펼칠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전쟁의 포연속에서 서울대 미대를 졸업, 1957년 박서보 김창렬씨 등 당시 청년미술가들과 함께 현대미술가 협회를 조직, 표현추상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그는 이후 온갖 새로운 사조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죽는날까지 그 맥락을 유지해왔다. 다작이며 대작인 뚝심의 작가인 그는 자신의 개인전에 1백호 내외의 큰 작품을 내놓곤 했다. 그의 작품에는 대중적 인기가 따르지 않았지만, 그는 독특한 자기세계를 고집한 작가였다.
1989년 최점환 WBC 스트로우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년 스페인 노동운동가 파시오나리아 작고
1988년 충남 보령 상공 훈련 중 공군F5전투기 엔진고장 추락, 민가 7채 파괴 사망 1명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총재 김대중)
1987년 전화접수 우편환 송금제도 실시
1986년 아이티여객선 아이티 연안 침몰 사망 200명
1984년 미국 디스커버리호 고장위성 사상 처음으로 회수
1983년 일본, 랭군사건의 제재조치로 북한 과학대표단 입국 불허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
1982년 폴란드 정부, 11개월 만에 바웬사 석방
1982년 레바논 티레 이스라엘군사령부 폭발 100명 사망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유리 안드로포프 선출
전소련국가보안위원회(KGB) 총책이었으며 정치국원인 유리 안드로포프(68)가 1982년 11월 12일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고(故)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소련 권력구조에서 가장 강력한 직책인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됐다.
15년 동안 KGB 책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1982년 5월 당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브레즈네프의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7년 6월 정치국원으로 뽑혀 지난 1953년 처형된 베리아 이후 KGB 총책과 정치국원을 겸직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1914년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로포프는 1954년 헝가리주재 소련대사, 1961년 당중앙위원, 1967년 KGB 의장과 정치국의 후보국원을 거쳐 1973년 정치국원이 됐다. 1976년에는 소련군 대장에 임명됐다. 서방의 소련전문가들은 안드로포프가 영리하고 강경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1981년 전두환대통령, 김일성 서울방문 제의
1981년 한국방송사업단 창립
1980년 미국 보이저 1호, 토성 근접 촬영
3년 2개월 간 태양계 여행을 계속해 온 무인혹성탐사선 `보이저1호`가 1980년 11월12일 토성에 12만4천2백km까지 접근, 근접촬영에 성공했다.
1977년 미항공우주국이 `보이저2호`와 함께 발사한 이 탐사선에 의해 과학자들은 토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우주개발의 지평을 더욱 넓혀준 2대의 탐사선(2호는 1981년 8월 토성에 도달)은 지구로부터는 도저히 탐지할 수 없었던 토성의 8개 위성을 새롭게 발견했고 이제까지 `빛의 점`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위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전달해 주었다.
특히 극적인 발견은 토성의 트레이드 마크인 3중의 띠로 실제는 수많은 가는 띠가 모여 생긴 것이다.
보이저호는 토성에 접근하여 놀랄 만큼 상세한 구조를 보여주는 고리의 화상을 보냈다.
토성의 고리는 구름의 정상으로부터 약 7000km에서 30만km 이상의 높이까지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틈이 있고, 밝기의 정도가 다른 띠가 동심원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겉모양으로부터 고리는 A, B, C, D, E, F, G의 일곱 가지로 분류된다. 지구에서 똑똑히 보이는 것은 A고리와 B고리이다. 보이저는 이들 고리가 더욱 가느다란 무수히 많은 고리로 되어 있다는 것과 완전한 간극으로 생각되었던 곳에서도 가느다란 고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고리의 형태는 원형뿐만 아니라 타원형의 것과 비틀어져 있는 것도 있다.
또 고리위를 방사상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줄인 `스포크`를 관측했다.
고리의 두께는 최대 20m라는 데이터가 나왔다.
고리의 너비를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얇은 것이다.
1980년 정치쇄신위원회, 정치활동규제 대상자 811명 발표
1979년 공화당총재 김종필 선출
1977년 자이레서 화산폭발, 2천여명 사망
1974년 동아일보, 천주교도 인권회복기도회 기사로 경영진과 기자들의 의견충돌
12일자 휴간
1969년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 사망
유소기 전 중국 국가 주석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의 학대에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후난성(湖南省)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유소기의 시신은 ‘유위황’이라는 가명에 ‘무직’의 노인으로 화장됐다.
유소기의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유소기는 `4인방`이 체포되고 부활한 등소평이 최고지도자가 된 1980년 2월 명예회복이 되었다. 사후 12년이 지나 수습된 유골은 부인 왕광미에 의해 1980년 5월 19일 북해함대에 실려 보슬비 속을 헤치고 청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등소평과 함께 모택동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1차 표적이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이 뒤에서 사주하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야만적인 언어적-신체적 모욕을 당했다. 급기야 1969년 10월 제8기 중앙위원회 확대 제12차 총회에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어 축출됐다.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국가 주석직을 유소기에 물려주고 당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던 73세의 모택동은 농업의 기계화, 물질적인 유인, 자본투자 등을 지지하는 실무파들이 주도권을 쥐자 중국이 개인주의, 자본주의 경향인 우경으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공산혁명을 일으킨 모택동 자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모택동은 먼저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학생들로 홍위병을 조직,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69년 미국 후생성, DDT 사용금지
1965년 한일협정 비준안 일본중의원 통과
1964년 미국, 원자력잠수함 시 드래건호 일본 사세보항에 처음 기항
1964년 최초 대일 여객선 아리랑호 취항
1964년 베트남 남부에 태풍 동반한 홍수 사망 7,000명
1963년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 검거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이 1963년 11월 12일 검거됐다. 강원도 인제에서 6명의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후 제2의 범행을 위해 서울로 잠행한 고재봉이 범행 24일 만에 한 땅콩장수의 신고로 서울 청계천5가에서 검거된 것이다.
고재봉은 지난 10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이득중 중령(36)집에 침입, 이중령과 부인 그리고 세자녀와 가정부 등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후 귀금속을 훔쳐 달아났었다. 다행히 인제읍내 큰아버지댁에서 통학하던 장남은 화를 면했다.
군과 경찰은 즉각 합동수사본부를 구성, 고재봉이 과거 이중령집에서 구두를 훔쳐 복역한 사실이 있고 이중령집에서 훔친 다이아몬드를 홍천읍내 보석상에 판 사람이 고재봉인 것을 확인, 고재봉 검거에 나서 수사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검거된 고재봉은 1963년 12월12일 사형을 구형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1961년 6월 20일 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조기 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장관과 이케다 총리를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으나 일본은 3억달러 제공만 고집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내렸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를 다시 만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타결지었다.
금액은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독도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독도 파괴를 일본 측에 제안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일본 측의 의견에도 합의해줬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충격을 주었다. 곳곳에서 졸속 타결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김종필측도 할말은 있었다. 어떻게든 6억달러를 받아내려다 보니 일부 문구에 소홀하게 됐고,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8억달러였을 때 6억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한일 청구권에 대해 '6억달러+알파'라는 '김종필·오히라 메모' 합의로 10년간 지지부진하던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물꼬가 틔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사정권의 밀실 타협이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상존한다. 이후 정부 간 공식협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63년 3월부터 독도 문제 등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이에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6·3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1962년 학사고시 실시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본 방문해 이케다 수상과
한일국교정상화에 합의
1960년 민주당 구파, 신당 발기인대회를 통해 당명을 신민당으로 결정
1957년 미국 트리뷴지 여기자, 기사소스 증언거부로 금고형
1955년 서독군 발족
1953년 닉슨 미국부통령 내한
1948년 도쿄 군사재판, 전범 7명에게 교수형 선고
1948년 11월 12일 흔히 동경재판이라 불리는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전범 7명이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군사재판에는 도조를 포함한 28명이 A급 전범자로 기소됐으나 재판부는 심리 도중에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정신병증세를 보인 오카와 슈메이를 빼고 나머지 25명에 대해 전원 유죄를 인정했다. 도조를 포함한 7명에게는 교수형을, 16명에게는 종신형을, 한명에게는 금고 20년을, 또 다른 한 명에게는 금고 7년의 형을 선고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다.
이날 교수형 선고를 받은 도조 히데키는 동경에서 태어나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관동군 헌병사령관, 육군차관, 육군대신 등을 역임한 뒤 1941년 10월 총리대신이 되었다. 1943년에는 문부-상공-군수 대신을 겸임했고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1945년 동양척식회사, 신한공사로 개칭
1945년 조선인민공산당 결성(위원장 여운형)
1942년 과달카날 해전서 일본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섬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나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고통의 씨앗이 됐다.
섬을 둘러싼 수차례의 육ㆍ해전 끝에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넘어가자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 공세로 저지당했다. 11월 12일, 섬을 탈환하기 위한 일본군의 총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이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 부르는 과달카날 해전의 시작이었다. 3일간의 전투로 양측은 해전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으나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군 증원부대는 최악의 살육전에 그대로 노출됐다.
수송선 7척이 미군 폭격기 편대에 격침됐고, 3척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력을 육지로 상륙시켰으나 이들 역시 미군의 총구에 여지없이 쓰러졌다. 이제 섬에 남아있는 일본군은 고립무원 상태였다. 최고 3만6000명에 달했던 병력 중 2만4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가운데 반수 이상이 아사자였다. 태평양전쟁 개전이래 최초의 대패였다.
1937년 일본, 중국 상하이 점령
1930년 런던에서 제1회 영국-인도 원탁회의
1929년 영화배우 겸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출생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개막
워렌 하딩 미대통령 제안으로 동아시아에 이해관계 있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9개국 참가, 해군군비 제한에 관한 조약·잠수함과 독가스 사용금지·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등 맺어짐, 워싱턴 체제(The Washington System) 성립, 1931년 만주사변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질서 규정
1920년 조선징발령 공포
1918년 독일 사회민주당, 민주공화국 선포
1915년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출생
1900년 경인선 전선(全線) 개통 서울역사 준공
1887(조선 고종 24) 언더우드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현 새문안교회)
1866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출생
1857년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오리베 사망
1848년 그리스 언어학자 하드지다키스 출생
1840년 프랑스 조각가 로댕 출생
1815년 미국 여권운동가 엘리자베스 스탠턴 태어남,
1746년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출생
1607(조선 선조 40) 우암 송시열 태어남
1463년 동국지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