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9일 (금) 촬영.
창덕궁은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복궁이 상징적인 정궁이라면 창덕궁은 실질적인 정궁이다. 조선 정사 대부분이 창덕궁에서 일어났다.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 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
1405년(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했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을 완공한 후 1406년(태종 6년)부터 태종은 창덕궁의 후원을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 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 역시 매우 조촐했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은 고작 3칸 규모였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 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번 증개축했다.
또한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졌다. 성종 때에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다.
- 이하 생략, 출처 나무위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和門)이다. (보물)이다.
돈화문 (敦化門) 일원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2층 목조 건물이다. 왕이 행차를 하거나 국가 행사를 치를 때 드나든 문이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드나들었다.
남쪽에 종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궐의 남서쪽 끝에 세워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돈화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구역과 연결된다.
1609년에 다시 세운 돈화문의 아래층은 출입용, 위층은 감시 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
돈화문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고, 여기서부터 종로까지 관청 거리가 있었다. - 현지 설명문 -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는 키 15~16m, 가슴 높이 줄기 둘레 0.9~1.8m, 수령은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이곳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 창덕궁을 묘사한 동궐도(東闕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어서 학자 나무라고도 한다. - 현지 설명문 -
창덕궁. 昌德宮 / 세계문화유산.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의 역할을 했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 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77년 12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현지 설명문 -
창덕궁의 금천교(보물)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중문인 진선문 사이에 위치한다. 1411년(태종 11년)에 만들었다.
창덕궁 자체는 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먼저 내부 전각들을 다 건립한 후 궁의 영역을 확정했기 때문에 창건한지 6년 뒤에야 세운 것이다.
이후 그 많은 화재와 전란 등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즉 현존하는 궁궐 안, 나아가 서울에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다만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했을 때 차량 통행의 편리함 등을 이유로 다리를 약간 북쪽으로 틀어 옮기긴 했다.
너비 약 12.5m, 길이 약 12.9m로 궁궐의 금천교 중 폭이 제일 넓다. 임금이 의장을 갖춘 정식 행차를 할 때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그리고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왕이 다니는 어도는 가운데에 있는데 높이가 가장자리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아 서열을 분명히 구분했다.
그리고 경복궁 영제교와 달리 어도의 넒이가 양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넓다. - 출처 나무위키 -
진선문이다.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하류 쪽에서 본 금천교이다.
금천교의 6개 돌기둥 중 양 편 엄지기둥에는 서수를 조각하여 놓았고 나머지 4개의 기둥에는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4개의 기둥 밑에는 천록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고. 홍예문 사이의 역삼각형 돌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그 앞에는 해태 상이 있다.
상류 쪽 금천교의 난간 기둥 6개 중에서 엄지기둥 2개를 제외한 4개의 기둥 밑에는 천록의 머리상을 조각해 놓았다
홍예 옆에 있는 역삼각 돌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겨 놓았고, 그 아래에는 거북이를 조각해 놓았다.
궐내각사 옥당.
중문인 진선문을 통과하면 좌측에 인정문이 있고 정면에는 숙장문이 있다.
숙장문은 진선문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1475년(성종 6)에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 중 하나를 성종이 낙점하면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에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인정문(보물)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초 증건시
재건되었으나 1744년(영조 20)에 인접한 승정원에서 화재로 또 소실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정문을 포함한 20여 칸의 월랑이
행각으로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1년에 배수로 보수 도중 발견된 석조 기단과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습인 월랑으로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인정문 용마루 양성 바름 부분에 대한 제국의 국화인 오얏꽃 문양이 있다. 이화문은 독수리 문장과 함께 대한 제국의 국장이었다. - 나무위키 -
인정전과 조정.
인정전 국보
창덕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전각이며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다.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 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때 복구공사를 시작해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즉위하면서 1908년(융희 2) 창호를 황색으로 칠하고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앞마당의 박석이 걷어지고 화초가 심어지는 등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 해방 후 1985년 국보 225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앞의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다시 설치했다.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출처 나무위키
인정전의 아래 월대에는 부간주를, 위의 월대에는 드무를 배치했다.
아래 월대에 있는 부간주.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월대에서 본 인정문과 조정.
드무와 부간주.
월대로 오르는 계단.
황궁임에도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커튼, 전등 설치 등 서양식 실내 장식이 도입되었다.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시던 편전이다.
옆에 있는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면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이었으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편전의 기능을 대신 하게 되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었으며 왕실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대조전 뒷마당은 계단식 화단, 굴뚝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놓았는데, 이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어려움이 많았던 왕비의 심신을 달래기
위함으로 짐작된다. 이 밖에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성정각,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궁궐 내에 세운 관청인 궐내각사,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
헌종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낙선재, 궁궐에 남아있는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금천교 등이 있다. -리플릿에서 -
행각.
인정문과 외행각.
선정전 앞마당으로 통하는 행각의 문.
선정문.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복도각.
선정전 월대에도 드무가 있다.
선정전(보물)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단층 양식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전각으로 궁궐의 전각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하고 있다.
건립 당시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다.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광해군 때 청기와를 얹어 호화롭게 지은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헐어 재건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청기와를 얹고 있는 것이다.
이후 편전의 기능이 희정당과 중화당으로 넘어가자 빈전, 혼전 등 왕실 장례 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되었고 복도각이 증설되었다.
근대화 시기에 인정전처럼 내부에 전기 시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에 복도각이 헐어지는 등의 훼손을 겪다가 해방 뒤인 1985년에 보물 제814호에 지정되었고 1997년에 복도각이 복원되었다.
선정전은 편전이었지만,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사용되며, 편전의 기능을 잃었다.
복도각.
궁궐 내에 유일한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
희정당(보물).
희정당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한 전각이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희정당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양은 한식 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 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 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남 행각 문에서 들여다본 희정당.
희정당 쪽에서 본 현관.
현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희정당 안에서 본 현관.
희정당 일원.
희정당 앞마당.
희정당.
희정당의 내부.
희정당 일원.
희정당에서 대조전으로 가는 길.
좌측은 대조전 일원이고, 우측은 희정당 일원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이자 생활공간이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있다.
대조전 오른쪽에 있는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에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려 경술국치가 결정된 비운의 장소이다.
대조전 전체 지역은 여러 부속 건물들이 행각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뒤뜰에 조성된 화계에는 아름다운 굴뚝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에 일어난 화재로 이전의 대조전이 불타 없어지자 그 터에 경복궁의 침전이었던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마지막 왕과 왕비가 살았던 1920년대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 현지 설명문 -
대조전(보물)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경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대조전의 대청,
대조전 앞 월대에 있는 드무와 부간주 그리고 전등과 해 시계.
대조전 권역.
후원의 담과 화계
화계에 있는 굴뚝.
후원으로 통하는 문.
대조전의 후면.
대조전의 후면.
희정당과 성정각 사이 길에서 본 성정각의 지붕.
동궁.
동궁의 성정각이다.
창덕궁 동쪽에 속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ㅓ"자 형태의 단층 전각이다.
액호인 성정은 유교 경전인 대학에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 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의 남쪽에는 희우루, 동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당시 순종이 이곳으로 일시 피난처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정각을 빙 돌아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 자시문(資始門)이란 문앞에 오면
오래된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준 매화나무에서 접처온 후 자랐다고 전해진다. - 나무위키-
관물헌(觀物軒)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여기에 걸린 '집희/즙희(緝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3세 때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더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빈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 나무위키 -
중희당 터 /重熙堂 址
성정각을 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 터가 정조 8년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동궁 중희당이다.
정면 7칸 내지는 9칸, 측면 3칸 내지 4칸으로 추정되는 규모이며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동궁으로 쓰이기보다는 왕의 정무를 보는 편전이나 별당 용도로 많이 쓰였다.
중희당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으뜸되는 정당으로 사용했으며 후일 헌종, 철종, 고종까지도 활발히 사용했다.
특히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 궁중 가례 절차를 중희당에서 치렀고, 기타의 궁중 행사도 중희당에서 많이 개최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809년경 경복궁 화재로 중건공사를 다시 벌이는 과정에 중희당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으라는 지시가 있었더라는 기록 이후에는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터만 남아있다. 다만 중희당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무려 정조의 친필이고, 2018년 기준으로 전시중이니 중희당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고자하는 사람들은 찾아가보자. - 나무위키 -
창덕궁 후원 관람 매표소 앞 마당에 장대석으로 중희당 터를 표시해 놓았다.
첫댓글 창덕궁
기행문
잘보았습니다
감사감사 ()
창덕궁 나들이할 참이었는뎅
안방에서 나들이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으로 올려주신 창덕궁
감사히 즐감합니다
고궁 즐기기를 좋아하여 늘 관심이 많지요
저는 다 섯 고궁중 창덕궁을 가장 좋아합니다
어젠 광화문에서 모임이 있어
경희궁을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