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선포, '8.15 시국성명'에서 비쳤던 우려가 현실로
박정희 정권은 오래 전부터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1972년 '8.15 시국성명' 발표를 계기로 감시가 노골화되었을 뿐이다.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중앙정보부 초청을 받아
몇몇 신부들과 서울 이문 동에 있는 그 곳엘 가본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여러 사무실을 지나치는데 육군병원에서 만난 적이 있는 신
자장교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별다른 뜻 없이 "이 방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
몇 인사들 정보 관리하는 곳"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요주의 인물에 대한 동향파악과 사찰을 담당하는 부서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사찰카드도 있겠네"라고 물었더니 그는
"그야, 당연하죠"라며 씩 웃었다.
'8.15 시국성명' 발표 후 회의차 로마에 머물 때 그 곳에 주재하는 한국
대사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10월 17일로 기억한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대사가 자세를 가다듬고 얘기를 꺼냈다.
"추기경님, 마침 드릴 말씀이 생겼습니다"
"뭔 데요. 말씀해보세요."
"대통령 각하께서 오늘 10월 유신을 선포하셨습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셨습니다."
'8.15 시국성명'에서 비췄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분노와 허탈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대사님,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대통령
께 보고하십시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 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정권 욕에 눈이 먼 박 대통령 자신
도 결국 불행하게 끝날 것입니다. 참사께서는 한번 더 나가서 방금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보고하십시오."(배석한 대사관 참사는 대화내용을 서울
에 보고하는지 식사 중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때 프랑스와 미국에도 들렀는데 가는 곳마다 공관 직원들이 나와 대
기하고 있었다. 내 일정을 어떻게 그리 훤히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
였다. 상부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직원들에게 무엇을 탓하겠는가. 그래서
"극진히 대접해 주어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건네고 다녔다.
그 여행 중에 유신정권의 덕(?)을 본 일도 있다. 뉴욕공항에 내리니까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는데 비행기는 터미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승객
들을 내려놓았다. 비를 쫄딱 맞고 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한국 총영사관차가 비행기 트랩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외교관 차량이기 때문에 그곳까지 진입이 가능했던 것 같
다. 정말 아쉬울 때에 덕을 보기는 봤다.
한국 사회는 10월 유신으로 소용돌이쳤다.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의
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
화 요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다 잡혀 들어가 옥고를 치렀다.
반(反)유신과 반독재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은
심해졌다. 박 정권은 유신헌법 개헌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하고 위반자를 엄단 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인권과 정
의는 땅에 떨어졌다.
급기야 교회와 국가권력이 정면출동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1974년 4
월 유신정권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하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
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고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
호를 발동했다.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자 180명을 구속, 기소했는데 원주
교구 장 지학순 주교님(1993년 별세)까지 사건에 연루시켰다. 유신정권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는 불법단체에 자금을 댔
다는 것이다.
지 주교님은 마침 해외여행 중이셨다. 원주 교구 청에서 "지 주교님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고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전화가
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지 주교님이 귀국하는 날 주교회의
사무총장 이종흥 신부(현 대구대교구 몬시뇰)에게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으니 공항에 나가 보라"고 연락했다.
이 신부는 한참 만에 돌아오더니 "지 주교님을 뵙지도 못했습니다. 원주
교구 신부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까지는 봤는데 그 후로 오리무중이
라고 합니다"하며 걱정스런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 아니면 정보기
관에서 체포해간 것이 틀림없었다.
사방에 수소문해 보았으나 지 주교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사흘쯤 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 차장이 찾아와서 "우리가 지 주교님을
모시고 있다"고 실토했다. 즉시 중앙정보부로 달려가서 지 주교님을
면회했다.
지 주교님은 면회도중 눈물을 내비치실 만큼 감정이 풍부하고 정의로운
분이셨다. 지 주교님 얘기를 들어보니까 유신정권이 주장하는 혐의는 납
득할 수 없었다. 원주교구에서 농민과 탄광촌 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김
지하 시인을 통해 순수한 뜻을 가진 젊은이들을 도운 것뿐이었다.
용공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그들 음모를 파악한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신부들 수백
명이 서울로 올라와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오전에 김재규 차장이 찾아와서는 "대통령
각하와 면담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아"오늘 열리는 주교회의에서 논의한 후
알려 주겠다"며 대답을 보류했다.나를 제외한 주교 12명의 의견은 정확
히 반반으로 갈렸다. 그래서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면담제안을 받아들이
겠다고 말하고 김 차장한테 그 사실을 통보했다.
김 차장이 오후에 다시 내게 들렀다.
그리고 의미 심장한 비유로 말문을 열었다.
"추기경님, 환자는 딱딱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처럼 부드러운 음식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대통령 각하와 충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가 박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한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1979년 박 대통령 시해사건의 장본인이다. 아무튼 대화를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 가라고 신신 당부했다. 나나 박 대통령이나 '욱'하는 성질
이 있는 경상도 남자라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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