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배재학당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정동 34-5)
미국 감리회소속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Henry G. Appenzeller)가 1885년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2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스크랜턴(Scranton,W.B)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1886년 8월 3일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2명의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은 고종황제가 직접 내린 이름으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배재학당의 교육 목적은 기독교인 양성과 근대 국가의 인재를 배양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를 비롯하여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福音)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에서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 학생들은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학교에 등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마태복음 20장을 교훈으로 삼았다
수업료는 매월 3냥(兩 - 1냥은 10전錢)이었고,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는 일자리를 주어 자신의 힘으로 벌게 하여 자립정신을 길러 주었다
1895년 배재학당 내에 보통부, 중등부,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대학부가 대학 기관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학부는 자체적으로 설치한 학기 과정일 뿐 당시 조선에 대학 기관은 없었다)
해방 이후, 배재학당은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 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지만 배재학당 대학부는 폐지되었다
본래는 한국전쟁 후 1959년에 동문이기도 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불하받은 서울시 성북구 월곡동의 땅에 정규 대학으로 재설립을 추진, 기공식을 마치고 건축물까지 착공하였으나 정권이 바뀐 후 토지 불하 과정이 위법했다는 이유로 월곡동 부지를 다시 몰수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배재학당 대학부는 부활하지 못한 채 한동안 명맥이 끊기고 만다
1970년대 들어서야 경영난에 처한 대전보육학원을 인수해 대전시에 있던 보육초급대학을 4년제로 승격시켜 배재대학교를 설립하면서 대학 부활 숙원 사업은 이루어졌다
1984년 2월 정부의 강남 개발 정책으로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는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로 이사하였다
(80년대에도 학교 부지가 팔리지 않아, 운동장만 팔아서 중고등학교 부지를 구입/신축 경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나 이화여자전문 학교는 교장을 지낸 윤치호와 김활란의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 규제가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 헨리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亞篇薛羅)
미국의 감리회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으며 선교와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적은 없으나 그가 설립한 배재학당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미국 팬실버니아 사우더턴(Souderton)의 스위스계·독일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회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렌턴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조선 땅을 밟자마자 미군 측의 폴크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의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처음에는 조선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 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를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하며,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1902년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위치한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 동관
1916년 2월 1일 조선총독부에 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당시 이에 맞게 건립된 지하실이 딸린 벽돌 3층 건물로, 1916년 4월에 준공되었다
(이 당시의「매일신보」기사와「배재사」(1955) 에 정리된 내용에는, 배재학당의 교사 확장에 찬동 한 테라우치 총독이 직접 1,000원을 특별 기부하여 이것을 재원으로 건립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에는 10개의 교실을 두었으므로, 한 반에 60명씩 총 600명의 학생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옛 배재학당 건물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원래의 자리에 남아 있으며,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2001년 3월 15일 자로 서울시 기념물 제16호 ‘구(舊) 배재학당 동관’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2008년 7월24일부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설전시관 1에는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과 유길준의 친필서명이 담긴 「서유견문록」「협성회회보」「독립신문」등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선교사들이 한국의 자연, 정치, 문화, 종교, 한국어 등에 대해 서술한 The Korean Repository 도 볼 수 있다
상설전시관 2에는 배재학당 설립자인 선교사 아펜젤러를 비롯한 노블(William Arthur Noble) 선교사 가족의 한국에서의 활동과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기획전시장과 특별전시장에는 '한국 근대와 한국의 선교사', '텬로력뎡', '졸업앨범을 통해본 125년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역사적인 인물, 유물, 사건 등을 현재의 우리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
♤ 서관
크게 늘어난 신입생 수를 감당하기 위해 1923년 3월에 배재학당 본당과 옛 삼문출판사 건물을 사이에 두고 배재학당 동관과 마주 보는 자리에 대칭형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따라서 건물의 외형은 배재학당 동관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1984년 2월 28일 배재중고등학교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에, 그곳으로 함께 해체· 이전하여 아펜젤러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강당
1886년에 완공한 건물을 허물고 1932년 9월 착공, 1933년 5월 말일에 준공을 보았으며, 곧이어 창립 48주년 기념일인 1933년 6월 8일에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의 고덕동 이전 이후에도 여타 건물들과 더불어 다른 용도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2004년 1월에 준공된 배재 복합빌딩의 신축 공사로 헐려 아까운 문화재 하나가 사라지고 말았다
♤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최지
1920년 11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다
(단일 종목으로 야구가 개최되었으며 종합경기대회 로 전환된 것은 5년 후 1925년부터이다)
해방 후 대한체육회는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 대회'를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으로 삼아, 이 대회를 제1회 전국체육대회로 인정하여 오늘날까지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체육회의 원만한 유지와 운영을 위해서 성인 50전, 어린이 5전의 입장료를 받아 약 200원 정도에 수입이 있었다
개막식에서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시구를 하였다
♤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1921년 2월 11일 부터 13일까지 3일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