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
청량리역 4번 출입구입니다.
중앙선 타는 곳으로 이동하여.
춘천행 전철을 탔습니다.
의외로 승객들이 없네요. 전철을 전세 낸 것 같았어요.
마석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모란공원 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흥선대원군 묘까지 걸어갔습니다.
큰 길 건너
이정표 따라
골목 같은 좁은 길로 들어가면,
산 아래 막다른 곳에 철문이 나옵니다. 이곳에 흥선대원군의 묘가 있습니다.
흥원(흥선대원왕)
남양주의 조선시대 능, 원, 묘.
흥원이 위치한 남양주는 지리적으로 서울(한양)과 가까우며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풍양현'으로 불리면서 왕들의 근교 휴식처와 왕릉 부지로 쓰였다. 흥선대원왕의 무덤인 흥원뿐만 아니라
조선왕릉인 홍유릉도 위치한다. 홍유릉에는 흥선대원왕의 차남으로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황제와
제2대 황제인 순종황제가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사릉, 광릉, 덕흥대원군 묘 등 조선시대 왕족들의 능, 원, 묘가 다수 조성되어 있다.
철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흥선대원군의 신도비가 보입니다.
귀부 받침돌에도 조각을... 불로초, 사슴, 대나무, 구름 같은데...
신도비
측면에는 총탄을 맞아 파손된 흔적이 있습니다.
흥원이란?
흥원은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무덤으로 부인인 여흥부대부인과의 합장 무덤이다.
조선 왕실 무덤의 마지막 계보를 잇고 있으며, 우리나라 근대 석물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석물을 보유한 곳으로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무덤은 여러 번의 이장을 거쳤다. 1898년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사망한 뒤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모셨다가, 이후 1908년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로 이장했으며, 1966년 미군 군사 시설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장되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황제의 아버지로서 대원군에서 대원왕으로 높여짐에 따라
1908년 무덤의 명칭도 흥선대원군 묘에서 흥원으로 승격되었다.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 제도를 따르는 듯 하나, 대군에 맞도록 간략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상하 2단으로 나누어졌다.
상단에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봉분과 그 둘레에 석양이 1쌍이 있고, 그 바깥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묘 앞에는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다. 한단 아래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가 좌우에 각 1쌍이 있고 상석 바로 앞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1908년 건립)와 국태공원소 표석(1905년 건립)이 건립되어 있다. - 현지 설명문 내용 -
흥선대원왕(흥선대원군)은누구인가?
이름은 이하응(1820~1898)으로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1820년에 태어나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이후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을 맡아 10년간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위정척사사상에 근거해 개항에 반대하고 천주교를 박해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현지 설명문 내용 -
*위정척사사상 -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 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유교용어)
흥선대원군 묘역.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이다.
1863년 철종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후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을 정비하고,
왕의 외척이 국가를 운영하던 정치기관인 비변사를 없앴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관인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을 새로 고쳤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청을 제외한 일본 및 서양에 나라 문을 강력히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나라 간에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병인양요,1866년)와 미군(신미양요, 1871) 을 격파하였고,
새로운 방식의 국교 관계를 체결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에 납치되어 4년간 갇혀있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있었으나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면서 흥원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1966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묘역 입구에 있는 국태공 원소 비.
혼유석에도 총탄 자국이 있다.
묘의 석물들.
전경.
상석.
망주석.
문석인.
장명등.
장명등의 전면.
석양.
석마.
묘의 후경.
흥선대원군 묘 바로 옆에 있는 가족 납골묘.
장남인 흥친왕 이재면, 서장자 이재선과 이우(이재면의 양손자로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 등의 납골묘가 있다.
이 묘역 너머에 있는 모란공원 묘지는
1966년 이우의 아내이자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가 운현궁 소유의 땅에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사설 공동묘지이다. 박영효 묘도 이곳에 있다.
장명등.
석물들. 석양, 석호, 석마 등이 있다.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후경.
전경.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무너지고 있다.
흥선대원군 묘역 답사를 마치고 마석역으로 나와 전철을 탔다.
평내호평역이다.
안동 김씨 묘역으로 가기 전 파주 닭 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있었다.
칼국수 먹고 안동 김씨 묘역으로 가기 위해
55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남양주 시청 지나서
금곡 초교 정류장에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버스정류장 앞 상점에서 장갑이 3켤레에 만 원이라고 꼬시는데 넘어가,
장갑 세 켤레 샀는데, 잘한 일인가, ㅋㅋㅋ
땡큐 버스, 환승버스 61번 버스가 왔다.
두 번째 탐방지인 안동 김씨 묘역에 도착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