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 가지는 바로 교장 훈시 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초중고만 졸업했다고 이 훈시가 끝나느냐?
전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교장 훈시의 연장선으로 우리네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주기적으로 처들어야 하는 부대별로 다르겠지만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등의 훈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느냐?
절대 아니지요.
돈을 벌어야 하기에 직장에 가면
사장이라는 사람의 훈시가 있습니다.
여기서 끝나느냐?
아니지요.
한국 사회에서 인간 관계를 가져야하기에 각종 종교 단체에 다녀야하므로
각종 신부, 스님, 목사의 훈시가 또한 있습니다.
한국은 바로 이 훈시의 시달림에 평생동안 고달프게 살아야 하는 팔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교장 훈시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훈시 고문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 근거합니다.
일단 훈시는 매우 엄청나게 지루합니다.
저도 각종 훈시에 인생 볶임을 당했지만
이 각종 훈시에서 기억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으며
말을 떠나 단어 하나조차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각종 훈시의 커다란 특징은 묘하게도 일주일을 시작하는 그것도 시작하는 아침에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주일의 시작을 아주 상쾌하게 시작해야 하지만
이 한국 사회는 일주일의 시작에 커다란 똥판에서 먼저 굴림을 당하고 시작합니다.
바로 그것이 훈시이지요.
과연 그렇다면 이 훈시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한국이라는 이 원숭이 패거리 본능을 이해하는 커다란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훈시하면 떠오르는 것은 극단의 지루함입니다.
초등학교 훈시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의 훈시
그리고 저 사단장 훈시
그리고 훈시의 끝판왕인 저 사장의 훈시가 있습니다.
여기에 또 일요일 휴식을 방해하는 저 신부, 목사, 스님 들의 훈시 또한 막강 끝판왕을 자랑하지요.
이 훈시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엄청나게 극단으로 지겹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치 누가 더 지겹게 훈시를 하는것에 서로 쟁탈전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살면서 그토록 훈시 고문에 그것도 매주 1회씩은 꼭꼭 훈시에 시달렸는데,
이 훈시가 없던 시절은 아마 대학교 시절외에는 없는듯 싶습니다.
그래서 대학교가 그렇게도 생각할 때마다 꿈나라인 듯 싶습니다.
훈시는 왜 이렇게 지겨운것인가?
훈시를 하는 이들도 사람들 그것도 무척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훈시를 하는 이들 또한 청중의 반응이 극도의 졸음 일변도이면
뭔가 개선을 하고 뭔가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말이지요.
문제는.
진정 중요한 문제는
저 훈시를 하는 이들은 단 1미리도 개선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거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왜 이리 지금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그 훈시가
단 하나의 문장도, 단 하나의 단어도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훈시를 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그 훈시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모임 중에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즉 그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모임 중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그 모임 그 집단에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 집단에서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훈시를 단 1미리도 개선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즉 청중이야 듣던 말던 나발이던 나는 나대로 간다 이 심정이지요.
즉 내가 킹인데 내가 왜 너따위것들의 귀를 만족시켜 줘야 하는가?
이 심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그 집단의 최고 자리 즉 자신이 그 집단을 이끄는 리더라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말에 주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훈시를 그렇게 시종일관 지겨움의 연속으로 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꾸지 않습니다.
왜????????????????????????????
그는 그 집단의 리더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결론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는 학교에서는 교장, 군대에서는 사단장, 회사에서는 사장이지만
그는 그 자신을 그 집단의 리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는 그 명함에 자신을 교장, 사단장, 사장이라고 표시는 해놓았지만
그의 자아는 그를 교장, 사단장, 사장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즉 그에게 있어서 교장, 사단장, 사장은
다른 커다란 이득을 얻기위해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 시종일관 지겨운 그것도 단 한 명의 청중도 듣지 않는
이 훈시를 절대 바꿀려고 단 1미리의 노력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그 또한 훈시를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그리고 더 깊게 생각하면
그렇다면 만약에 그가 훈시를 개선할려고 하면 개선이 되겠는가?
의 문제가 또한 존재합니다.
가능할까요???
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왜???????????????????????????
그가 교장, 사단장, 사장이 되는데 필요했던 능력이란
바로 나의 인생의 나의 주도로 끌고나는
나의 인생이 아니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능력이란
그의 철학이 아니라
그의 생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라는 곳의 원숭이 패거리 본능에서 승자가 되는 능력이지요.
그러기에 그는 훈시를 개선할려고 해도
개선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훈시는 시종일관 지겨워야 하는 것이며 지겨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이 씨부려 놓은 도덕책'을 씨부려 대는 것이기에
그 훈시는 힘이 하나도 없고 어설프고도 어슬픈 연극이지요.
그러기에 청중은 훈시가 시작되자 마자 졸음과의 일대 쟁탈전을 각자 벌여야 합니다.
이토록 구슬픈 시간이 바로 그 각종 집단에서의 훈시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그 훈시란 이제 훈시 내용은 일말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훈시 그 자체가 바로 얼차려 시간이 되고 맙니다.
학교던 군대던 직장이던
훈시 시간만 되면 규정과 규율을 강조하고
푹쉬고 나온 일주일을 시작해야 할
그 월요일 아침에 훈시를 시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겨운 저 훈시를 월요일 아침부터 처들으며
늬들은 나를 위해 굴림당하는 하나의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바로 초등학교부터 직장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이 '훈시'의 본질적인 목적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자연의 순리는 정직하며
인간은 속일 수는 있어도
저 하늘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에
문제는 진정 중요한 핵심은
나에게 그렇게도 수 없는 훈시를 갈겨댔던
저 초등학교 교장부터 시작한 저 수도없는 훈시의 폭격자들에게
저의 뇌에
단 하나의 문장도
단 하나의 단어도
새겨놓지 못했다는 것을
저 훈시의 폭격자들은
뒤지기 1분 전부터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죽으면 좋을건데
미안한데
죄송한데
이 위대한 자연의 순리는
절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문제의 핵심이지요.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냥 뒤지게 두지 않는 다는 것.
깨닫고 뒤지게 한다는 것.
그것도 열외 한 명 없이
그 모든 훈시의 폭격자들에게 말이지요.
슬픈 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