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61, 서소문동 37)
1883년 미국에서 돌아온 보빙사 민영익 일행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근대적인 교육시설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일종의 국립학교를 짓자는 것인데, 고종의 윤허로 1886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 이 개교되었다
(이 육영공원이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교수직에 역임했던 외국인은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흘법訖法, 할보轄甫), 길모어( G. W. Gilmore, 길모吉模), 벙커(D. A. Bunker, 방거房巨), 허치슨(W. F. Hutchison, 헐치신轄治臣), 할리팍스(T. E. Hallifax, 해래백사奚來白士)였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어, 좌원에는 젊은 현직 관리를 학생으로 받고 우원에는 관직에 아직 나가지 않은 명문가 자제들을 입학시켰다
학교 운영 비용은 안천과, 부산, 원산의 항구에서 받는 해관(세관)세로 충당되었다
육영학원에서는 무료로 침식을 제공하였고, 책도 물론 무료였으며 더구나 매달 담뱃값 명목으로 6원(600전)씩 지급하였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은 2전5리였다)
육영공원은 1894년 정부의 재정난으로 운영이 어려워 폐교되었다
육영공원이 폐교되고 이 땅은 1902년까지 독일영사관으로 쓰였다
독일이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시기는 1883년으로 최초의 독일영사관이 있던 곳은 충무로 1가 중앙우체국 뒷편이었다
이 후 1886년 11월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우로 활동하던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가 살았던 박동(현 종로구 수송동 108)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세창양행과 소유권 문제로 인해 육영공원과 자리를 서로 바꿈으로써 1891년 후반 자리잡게 되었다
1900년 3월 경운궁 확장을 위하여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독일영사관 일대의 부지를 매수하였다
독일영사관은 보상비와 함께 지금의 남창동 9번지(당시 회동, 현재는 서울스퀘어빌딩 8층에 독일대사관이 있음)로 1902년 옮겨갔다
조선~대한제국 시기 3년 남짓(1896년 7월 2일 ~ 1899년 12월 4일) 신문을 발간했던 독립신문사 사옥이 있던 지역은 지금의 서울 시립미술관(서소문 37~38 번지) 부근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가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는 정동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서소문동 39-1번지)이 독립신문사 자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추정을 하며,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는 처음엔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정동 34-5번지)에 표석 을 설치하였으나 이곳으로 정정하여 우리문화재 자료연구소장 이순우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안쪽(서소문동 38번지)에 있었다고 추정 한다
육영공원이 있다가 1891년 떠난 곳으로 그 일대에 여러 채의 집과 땅이 있었던 듯 하다
(나라가 폐망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독립신문사가 사용했던 사옥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리가 없다)
♤ 독립신문
1896년(건양 원년) 4월 7일에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에서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순한글 3면 영문 1면으로 구성됐다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띄어쓰기가 대중화되어 정착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독립신문》이 독립협회보다 먼저 창간되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기관지는 아니다
(사실 독립협회에는《대조선 독립 협회보》라는 공식 기관지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이건 월간이고, 인지도가 바닥이다)
처음에는 주 3회(300부) 발행하다가 1897년(건양 2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을 4면짜리 The Independent로 분리했다
1898년(광무 2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바꾸었다
독립협회가 해체당한(1898년 12월 25일) 이후, 윤치호, 헨리 아펜젤러 등이 잠시 맡았으나 정부 에서 인수한 뒤 폐간시켜버렸다
(1899년 12월 4일자 [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내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상과 국내 독립운동 움직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전투 등 한국의 독립운동 상황과 한국인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한문으로 발행(1919. 8~1926. 11)한 기관지《독립신문》도 있다
♤ 이 터에서 존속 기간
육영공원 : 1886년 9월 ~ 1891년
독일영사관 : 1891년 봄 ~ 1902년 가을
독립신문사 : 1896. 7. 2 ~ 1899. 12. 4
대한제국은 부지 매입 후 경운궁과 궐외각사를 연결하기 위하여 기존 통행로(현재 덕수궁길)를 폐쇄하려고 하였으나 덕수궁 주변에 밀집된 외교가에서 반대가 심하여 결국 통향로 폐쇄 계획은 취소되고 대안으로 등장한것이 운교(구름다리)였다
1903년 가을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름다리 일부를 현재도 덕수궁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지고 경운궁 영역내 일부였던 이 땅에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8년까지 존속)과 조선총독부 정동분실 (1924년 화재로 소실)이 들어섰다
그리고 고등법원과 경성재판소도 대한제국의 사법기관이었던 평리원 자리에 설치되었다
1927년 11월 9일 기존 경성재판소를 대신할 건물을 신축했다
준공 당시 연면적 6,480㎡로 3층 높이였다
♤ 정초석
소화2년 11월 조선총독 자작 재등실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子爵齋藤實
(1927년 11월 조선 제5대, 6대(1918년 ~ 1927년) 총독 자작 사이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동 대법원으로 쓰였고 이 시기에 4층으로 증축되었다
그러다 1989년 대법원이 서초동 신청사로 옮기면 서 이 땅에서 사법기관과의 관계가 끝나게 됐다
(평리원의 전신인 고등재판소가 1895년에 등장 했다는 것을 볼 때 이 땅과 사법기관과의 관계는 9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됐다)
1989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청사 별관으로 사용하다가 2002년 5월 전면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철거(파사드 공법)한 뒤 재건축(원래대로 3층으로 축소)하여 모든 시민이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아치형 현관이 특징적인 전면부를 보존하여 '구 대법원 청사'의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어 건축적, 역사적 가치가 있어 2006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로 지정되었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15, 서소문동 37)
1975년 지어진 구 대검철청 청사에는 서울고검과 서울지검이 같이 있었으며 당시 꽤나 정성들여 크고 좋게 지은 건물이다
1989년 서울시가 서초동을 내주고 이곳을 받아 서울시청 서소문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 13층에 정동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내부 카페
이곳에서는 덕수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지만 현재는 전망대 운영을 중지 중이다
조선시대에는 예학의 태두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 살던 곳이었다
대한문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옛 대법원과 대검찰청의 중간쯤을 마주보는 돌담길 자리에 위치)
인화문의 자리에는 건극문을 세우고 조원문 동쪽에 대안문을 세워 정문으로 사용했다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동년 4월 25일 대한문 (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33m쯤 뒤로 밀려 났다)
(문을 해체하지 않고 통째로 문 전체를 조금씩 들어올려 건물 전체가 살금살금 걸어 가듯 덕수궁쪽으로 밀어 당기는 식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장인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며,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2021년부터 현 위치에 일제강점기 시절 훼철된 월대를 재현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대한문이 원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복원이라 할 수 없어 재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짧른 거리지만 우리 근대사의 보고인 정동!
종교, 병원, 학교의 시작이된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는 즐거움으로 하루 일정을 마침니다
우리 님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정동에 관한 것 많이 배우고 지나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저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