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동 2층에 있는
사유의 방
사유의 방 입구에 있는
문구
사유의 방에 전시되어 있는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이 함축된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좌(半跏坐)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다리,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치마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조각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이는 동양조각사에 있어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이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다수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그 중 석굴암 조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의 반가사유상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는 미래에 태어나 성불하는 구세주 미륵보살의 행적이 과거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을 비슷하게 따른다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조형적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우선 화려한 보관이 눈에 띕니다. 마치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합니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발전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는데,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다양한 예가 나타납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가늘며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냅니다.
반가좌의 자세도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 손가락은 깊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합니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는 비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 기법 등, 우리는 이 금동불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도의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입니다. 그러나 두 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입니다. 국보 83호 상은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보 78호 상과 달리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였습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아, 우리나라 불상의 고대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한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과 관련하여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백제 혹은 신라의 것이라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고구려에서 특히 중국의 북위와 동위시대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한 점,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 국가를 지목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는 이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사유의 방에 전시되어 있는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지금까지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우리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국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앞)과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뒤)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앞)과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뒤)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좌)과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우)
전시동 2층에 있는
기증 I 전시실(208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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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가치를 발견하는 공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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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서재의 벽을 장식한 글
"딸을 좋은 곳으로 시집 보낸 느낌이다"…의사 선생님·마크 테토·송성문 참여한 '기증'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MBN 기사 입력 2024-01-13 16:07 l 최종수정 2024-01-14 23:22
김문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전체 소장품의 11% 기증품
마라토너 손기정도 일본인도 '소유' 아닌 '기증' 결심
"영광스러운 일"…정성껏 수집한 문화유산, 조건 없이 국가에 내주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 싸서 박물관에 이사시켜 놓고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느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며칠 안 되어서 가셨지요."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푼 의사인 수정 박병래(1903-1974) 선생의 딸 박노원 씨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한 말입니다. 박 씨는 "아버지께서 '월급쟁이라서 자잘하게 산 것이 나중에 이렇게 남들에게 호감을 주게 됐다'고 기뻐하셨다"고도 전했습니다.
박병래 선생은 우리 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도자기를 모은 수집가입니다. 조선 청화백자를 주로 수집해 중요한 우리 청화백자가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1974년에는 평생 모은 도자기 중 무려 37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박 선생이 돌아가신 뒤 박 선생의 부인 최구 여사도 4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작고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미가 살아있는, 기증자의 안목을 꼭 닮은 도자기들을 누구든지 가까이 감상할 수 있도록 정성껏 간추리고 포장해 전달했습니다.
기증이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주는 일입니다. 개인에서 사회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공유하는 고귀한 뜻을 실천한 이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TV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인지도가 높은,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마크 테토도 그 중에 한 명입니다.
마크 테토는 국립중앙박물관의 YFM 단체(Young Friends of the Museum)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돈을 모아 단체의 기금을 함께 조성했고, 일본 수집가가 가진 고려 시대의 불감을 사들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한 뒤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유명한 송성문 씨도 지정문화재 다수를 기증했는데요. 송 씨의 기증품 중 국보 1건과 보물 4건 역시 그제(12일)부터 새롭게 단장해 대중에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2층의 기증관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는 누가 있고, 기증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를 알아봅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그리스 투구, 손기정이 기증했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 손기정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그리스 청동 투구를 부상으로 받기로 돼 있었지만 받을 수 없던 손기정은 1986년이 돼서야 돌려받았는데 국가에 이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손기정 선수 자신의 투구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공공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대중은 기증관을 방문하면 그의 그리스 투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원 이홍근(1900-1981)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혼란기 속에서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평생에 걸쳐 문화유산 수집을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98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기증한 물품은 1만 202점에 이릅니다.
이 선생과 유족은 당시에 운영한 동원미술관의 콜렉션 전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품도 보물인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을 포함해 금속, 토기, 석기, 석조물까지 방대한데 그가 수집한 서화는 전체 수집품의 백미로도 불립니다.
이 선생은 문화재는 한 점이라도 사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증을 하겠다고 의사를 확실히 했고, 이에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받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족들은 수집품을 하나하나 감싸두고 오동상자 안에 정성껏 보관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을 방문할 때는 이 선생의 생전 수장고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선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또는 멀찌감치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관람할 때의 '꿀팁(유용한 방법 또는 정보)'입니다.
'가보' 기증하다…치과 의사·코리아나 회장 유상옥 '유산 사랑'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인 '가보'가 기증되기도 합니다.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과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등이 그 예시인데요. 임진왜란의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이항복의 15대 종손인 이근형 선생이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알려진 송성문 씨가 국보 5점, 보물 21점을 기증했다면 김성용 씨는 2011년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편집한 지식백과인 지봉유설을 기증했습니다.
치과의사인 박영숙 씨는 화장 도구 등 과거 규방 유산들을 기증했고, 코리아나 회장 유상옥 씨가 기증한 고려 시대 청자 기름병 등 토기들도 우리 문화 유산을 감상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재를 털어가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혼란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족문화재를 지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만큼이나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는 다양한 개인들의 노력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인의 한국 기와 사랑…옛것에서 '현대 공예'로 이어지는 아름다움도
또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일본인 내과 의사인 이우치 이사오(1911-1992)입니다. 어린 시절 삼촌으로부터 짐승 얼굴무늬의 기와 선물을 받고 기와에 빠진 이우치는 한국의 와전이 일본 와전의 원류임을 알게 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기와와 벽돌을 평생 동안 모아온 그는 이중 1,082점을 1987년 한일 친선을 위해 기증합니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랑했던 일본인이 소유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박물관을 위해 기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아쉬움을 넘어서 한일 친선과 양국의 학문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매우 만족합니다." 전 시대를 망라하는 한국의 와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와전의 절반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면서 이우치가 한 말입니다.
유강열(1920-1976) 선생은 1954년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에서 염색과 판화 공방을 맡아 전통 민예를 현대 공예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현대의 판화나 염색 등의 모티프가 되는 전통 공예 미술품을 그의 소장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토기, 조선 시대의 백자와 나전칠기, 민화 등에서 발견한 옛 장인들의 조형 의식을 발견한 유 선생은 실내 디자인 등 현대 조형예술의 발전을 이끌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아틀리에의 모습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현해 놓았습니다.
5만여 점 기증 받았다…세한도와 수월관음도 등 '장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동안 기증자 313명이 소장품 5만여 점을 380여 차례 기증했습니다. 박물관의 소장품 43만여 점 중 5만여 점이 기증품인 것입니다.
이 기증자 숫자에는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제(12일)부터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는 기증자 114명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번 기증관 재개관 전시에서는 5월 5일까지 특별 공개되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가 기증한 국보 '세한도'(歲寒圖·정식 명칭은 '김정희 필 세한도')와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서화류와 목가구 등은 재질의 특성상 4개월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교체될 예정입니다.
기증자실 운영 어떻게 돼왔나…기증자 예우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개인 기증관은 이홍근 선생과 박병래 선생을 기린 동원기념실과 수정기념실로, 1981년에 만들어져 상설 전시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박물관의 부지가 서울 용산구로 이전되면서 기증자의 이름을 딴 기증자실이 다시 운영됐습니다.
이후 기증관의 재방문율을 높이고, 점차 늘어나는 기증품들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방법을 찾기 위해 '테마별'로 구성한 기증관이 이번에 새로 꾸려지게 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은 단적인 예를 들면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보 14건과 보물 46건 등 2만 1,6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대규모로 늘어나게 됐는데요. 이 회장의 기증품도 순회 전시 등이 끝나면 추후 일부 선별해 기증관에서 전시할 예정입니다.
기증을 하면 우대받는 것도 있을까요? 기증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증서와 기증자 명패를 받습니다. 박물관에 기증자로서 이름이 올라가 전시도 됩니다.
예우가 큰 것은 아닙니다. 무료 주차와 전시 관람에 있어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기증자가 요청하는 경우, 소득 신고 시 '평가 금액'만큼 법정기부금액으로 세제 혜택을 볼 수 있도록 국세청에 신고 가능하도록 처리해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증자가 이렇게 요청을 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전했습니다.
그만큼 기증자들이 '기증'이라는 숭고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었고, 소중한 문화유산일수록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는 기증자들의 마음이 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 기증자들이 기증을 결심한 이유 등을 이야기한 영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홈페이지(현재 '소장품-수어동영상' 제공, 이후 카테고리 수정 가능)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 해당 전시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증품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재현한 '손으로 보는 기증 문화유산' 공간도 전시 뒤편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눔의 서재에 전시되어 있는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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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나눔의 서재에 전시되어 있는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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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서재에 있는
쉼터
나눔의 서재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보기 위해···걸작 세한도를 조건 없이 기증한 마음
경향신문 기사 입력 : 2024.01.11 16:13 수정 : 2024.01.11 22:14
도재기 선임기자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2년 단장 마무리
기증품 1600여점…세한도·수월관음도 전시
“문화유산 기증의 가치·의미 되새기는 공간”
기증은 크게 존경받고 영원히 기억돼야 할 숭고한 행위다. 애써 수집한 문화유산·현대미술품의 기증도 그렇다. 깊은 안목과 막대한 돈, 시간과 노력이 수반된 소장품의 기증은 사적 자산의 공적 자산화다.
‘나 혼자’ 집에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공 박물관·미술관에서 감상하고 또 역사와 문화를 연구할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일이다.
아쉽게도 국내의 소장품 기증은 문화강국이라 불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저조하다. 루브르박물관·뉴욕 현대미술관(MoMA)·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은 소장품 중 기증품 비율이 7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품 43만여점 중 기증품이 5만여점, 국립현대미술관은 1만1000여점 중 절반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품 ‘이건희 컬렉션’이 2021년 중앙박물관에 2만1600여점, 현대미술관에 1400여점이 기증되면서 그나마 기증품 비율이 급등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입비는 각 연 40억여원에 불과하다. 국격·경제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지만 올해도 마찬가지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구입하기 힘들다. 그렇다보니 기증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기증의 가치와 의미의 확산, 세제 혜택, 기증자 우대, 기증 유물의 전시·연구 등 기증문화 활성화 노력이 절실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관을 새롭게 단장해 12일부터 전면 공개하고, 국보·보물 등 주요 기증품 1600여점을 선보인다.
조선시대 걸작 회화로 손꼽히며 전시 때마다 주목받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손창근 기증)도 관람객을 맞는다. 손창근씨는 개성 출신 실업가인 부친 손세기 선생(1903~1983)과 자신이 모은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300여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특히 애착을 가졌던 ‘세한도’는 기탁 형태를 유지하다가, 2020년 국가에 기증했다. 손씨는 걸작을 국가에 별다른 조건 없이 기증하면서도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의 하나인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15’(국보·송성문 기증)도 전시된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시대 배경이기도 하다.
또 신라시대의 ‘금동관’(변종하 기증), 일본에서 구입해 들어온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윤동한 기증), 고려시대 독특한 청동 유물인 ‘짐승 얼굴무늬 풍로’(국보·남궁련 기증), 세계적으로 20여점만 전해지는 고려 나전칠기 공예품의 하나인 ‘나전칠기 경함’(보물·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도 만날 수 있다.
분청사기 명품인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 병’(보물·이홍근 기증), 독특한 형태로 유명한 ‘백자 청화 난초무늬 조롱박모양 병’(보물·박병래 기증), 조선시대 명재상인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손자를 위해 쓴 천자문인 ‘이항복 필 천자문’(보물·이근형 기증), 손기정씨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아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보물) 등도 출품됐다. ‘세한도’와 ‘수월관음도’는 5월5일까지만 공개된다.
중앙박물관의 이번 기증관 재개관은 2022년부터 진행한 기증관 개편작업을 마무리하고 기존 공개된 ‘기증 Ⅰ실’에 이어 ‘기증 Ⅱ, Ⅲ, Ⅳ실’을 선보이는 것이다. ‘기증 Ⅰ실’이 기증의 의미·가치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의 기증·나눔과 관련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라면, ‘기증 Ⅱ, Ⅲ, Ⅳ실’은 기증품을 특정 주제로 선보이는 주제전 공간이다.
‘기증 Ⅱ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혼란 속에 문화유산을 지킨 이들의 노력을 살펴보는 ‘문화유산 지키기와 기증’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다. 해외로 반출되거나 훼손될 위험에 처했던 문화유산, 후손들이 정성껏 지킨 문중 문화유산, 국립중앙박물관회 같은 단체의 노력이 기증으로 이어진 문화유산 등을 선보인다.
‘기증 Ⅲ실’의 주제는 ‘기증 문화유산의 다채로운 세계’다. 옛 생활문화가 오롯이 담긴 문방·규방 공예품, 다양한 재료와 해외의 문화유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서로 다른 조형성과 미감을 비교하거나 시공을 초월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존의 의미도 살필 수 있다. ‘전통미술의 재발견’이라는 주제의 ‘기증 Ⅳ실’은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공간이다. 문화유산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한 현대 작가들의 기증품으로 구성됐다.
기증관은 개편으로 고화질 영상 등 전시 전반의 개선은 물론 점자·음성·수어 관련 안내, 촉각체험물 등 문화 취약계층의 접근성 향상도 높였다. 2월 중에는 인공지능(AI) 전시안내 로봇인 큐아이가 본격 운영돼 전시 구성·주요 전시품을 소개할 예정이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개편한 기증관을 통해 문화유산의 기증·나눔의 소중한 가치가 더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며 “국보급 기증품은 물론 고화질 영상, 인공지능 전시안내 등으로 기증관이 새해에 더 사랑받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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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0,202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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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근 선생에 관한
소개문
한국3대 고미술품 수장가의 선택 - 동원 이홍근
글 등록일 : 2023-07-24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는 오래전 떠났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안팎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의 유산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과 장명등도, 청자실의 귀한 고려청자도, 고종어진도 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산이다. 5천 건이 넘는 문화재를 기증한 인물 바로 동원 이홍근 선생이다.
개성 출신인 이홍근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종합물산회사와 양조회사를 운영하며 젊은 나이에 이미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것이 우리 문화재였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은 돈이 많다고 수집한 것이 아니에요. 문화재에 애정을 가지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게 애국하는 일이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계셨어요.
선생은 개성 출신 문화재 관련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 인터뷰>
고유섭 선생도 개성 분이고, 황수영 선생도 개성 분이고, 최순우 선생도 개성 분이니까.
이홍근 선생은 30대부터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화재가 돈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안목을 쌓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했다.
누구의 감정을 받지 않고 내 눈으로 보고 샀다. 그래야만 감식안이 생긴다.
반세기 동안 문화재 수집에 몰두한 이홍근 선생은 한국 3대 고미술품 수장가로 꼽힌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5천여 건. 하루에 한 점씩 사들인다 해도 15년 가까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동원 컬렉션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정수영의 해산첩, 단 세 점만 남아있는 평탈 기법 거울인 금은 평탈 보상화 무늬 거울, 그 외에도 수많은 도자기와 서화 등 문화재들이 그의 안목 덕분에 가치를 되찾았다.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인터뷰>
우리나라 미술사 전반을 이분의 소장품을 가지고 서술할 수 있을 만큼 두루 갖춘 그런 컬렉션입니다. 한 화가의 기준작이면서 대표작인 작품을 기증하셨고 그 자체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메꿀 수 있는 그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죠.
동원, 미술관을 만들다.
한국 최초 기업 미술관 동원미술관 설립
1967년, 이홍근 선생은 자택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미술관인 동원미술관을 설립하고 습도와 온도를 관리할 수 있는 수장고를 만들었다. 수집품들은 딸과 며느리가 바느질해서 만든 비단 주머니에 싸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이 박물관을 하려고 이층집을 잘 지었어요. 이홍근 선생 거실이 박물관의 2층이에요. 항상 거실에 계시거든요. 이홍근 선생이 거실에 앉아계시면 앞을 지나가야지 수장고에 들어갈 수 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곳에 계셨어요.
이홍근 선생의 문화재 사랑은 각별했다. 이정의 <대나무> 5폭이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직접 일본 왕실에 출입하는 표구상을 찾아가 표구를 요청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한번은 일본의 한 재벌총수가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를 사겠다고 사흘을 조르고 돌아가는 공항에서도 전화를 걸어서 간청했지만 이홍근 선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 문화재를 해외로 유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문화재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문화재는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집만큼 정성을 다 한 보존.
수집 문화재는 자손에게 상속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문화사업으로 영구히 남는 일이 되어야 한다.
기증으로 남긴 영원한 유산
유족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1980년, 1995년, 2002년, 2003년 네 차례에 걸쳐 총 5205건, 10,192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은행 주식 약 7만 주를 출연해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에 기여한 연구소도 설립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홍근 선생이 자식들에게 ‘이것은 국가 것이니까 너희들 것은 없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들 이상용(이홍근 선생 둘째 아들) 선생은 이홍근 선생의 평소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이상용 씨가 ‘정 선생, 빨리 가져가시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거죠.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동원 이홍근 선생님 컬렉션이 박물관에 들어온 다음에 굉장히 연구가 활성화됐는데요. 선생님의 후손인 이상용 선생님이 기금을 대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목록집이 발간됐습니다. 이상용 선생님은 아버님의 뜻을 이어가길 원하셨고 저희한테 계속 연구비 지원을 해주실 정도로 한 번에 끝나는 기증이 아니었던 거예요.
한국 3대 고미술품 수장가의 마지막 선택, 기증.
이홍근 선생의 이야기는 오늘날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의 문화재 사랑과 문화재 사랑과 노력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사랑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동원의 유산
‘선생 수집의 문화재가 이제 이렇게 우리 민족문화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민족 전체가 보고 배우고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이 선생이나 선생가문의 보람과 경사일 뿐 아니라 나라와 우리 전체의 기쁨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동원 이홍근 선생 기념비 비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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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수집한 도자기 375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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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선생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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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를 수집해 국가에 기증한 의사(醫師) 박병래
글 작성일 : 2018-04-30
작성자 : 문화재청
조선 백자를 수집해 국가에 기증한 의사(醫師) 박병래 수정(水晶) 박병래(1903~1974) 선생은 의사다.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 내과 강사로 근무 하다가, 1936년 천주교 경성교구(지금의 서울 대교구)가 설립한 성모병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했으며, 뒤에 이 병원이 모체가 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다재다능한 문필가이기도 했던 그는 도자기 수집가인 동시에 이 분야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가 타계하던 1974년에 평생 수집한, 보물 제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을 포함해 조선백자 3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자랑스러운 문화재로 남겼다. 광복 후 개인이 국가에 다량의 문화재를 기증한 첫 사례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정(水晶) 박병래 전시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수정 박병래 선생이 기증한 도자기들을 전시한 ‘박병래 기증 전시실’이 있다. 71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가 임종 직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362점의 도자기 중 일부를 전시한 곳이다. 그의 기증품들을 모두 한곳에 전시할 수가 없어 3층 ‘백자 전시실’에도 일부 전시하고 있으며 지방의 박물관에도 빌려 주어 좀 더 많은 사람이 박병래가 수집한 도자기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박병래가 기증한 도자기들은 대부분 18~19세기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와 분원리 가마에서 만든 단정한 도자기로 청화백자가 많다. 한결같은 품위를 지닌 이 도자기들은 조선시대 백자 연구와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들이다.
그의 기증 도자기 중 하나인 <백자청화 산수 무늬 항아리>는 2018년 3월 10일 밤, KBS 1 TV의 인기 교양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에 소개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조선 후기 왕실 관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배 부분에 능화모양의 창을 만들고 산수화를 그려 넣은 화려한 예술품이다.
도자기 수집을 통한 조선미(朝鮮美)의 탐구자, 박병래
박병래가 도자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 그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의 내과의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하루는 박병래에게 일본인 교수가 물건 하나를 보여주며 물었다. “박 군, 이게 뭔지 알겠나?” 그저 하얀 접시 하나였다. “조선 것은 아닌 듯합니다.” 20대 중반의 조선인 제자에게 스승이 정색을 했다.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그 순간 박병래는 다소 부끄럽기는 했으나 별생각 없이 퇴근을 했다.
그러나 집에 와서 지도교수의 말을 곱씹어보니 왠지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부분의 가난한 조선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명색이 이 나라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자신조차 우리의 귀중한 물건을 제대로 보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럽고 분하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박병래는 병원 일이 끝나면 경성 시내에 있는 일본인 골동품상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도자기를 모으던 박병래의 열정이 느껴지는 일화다.
단순한 수집가가 아닌 도자기 전문 저술가, 박병래
박병래는 단순한 도자기 수집가가 아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도자기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1972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는 도자기들에 대한 『소장품도록(所藏品圖錄)』을 출판했고, 사망하기 1년 전인 1973년에는 중앙일보에 몇 달간 연재했던 도자기에 관한 얘기들을 모아 『도자여적(陶磁餘滴)』이라는 수필집까지 출판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1980년에는 역시 박병래가 남긴 도자기 수집과 사랑에 관한 글들을 모은 『백자에의 향수』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 책을 보면 박병래의 도자기 수집이 얼마나 전문적이고 또 그의 도자기 사랑이 얼마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위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수필집에서 “도자기 수집에 취미를 붙이고 나니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그릇에서 차츰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또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도자기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글. 맹광호(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평생 수집한 도자기 375점을
국가에 기증한
박병래 선생
박병래 선생이 기증한
도자기
박병래 선생이 기증한
도자기
한국콜마 홀딩스 창업주인
윤동한 회장이 기증한
수월관음도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기증
전 세계에 46점 남짓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했다. ‘수월관음도’는 불경인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거처와 형상을 묘사한 회화다. 윤 회장은 일본 경매에 직접 뛰어들어 수십억원에 작품을 구입한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다
작성일 2016-10-17
담당자 :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박성원 (02-2077-9414)
일본에 있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다
이번에 (주)한국콜마홀딩스의 윤동한(尹東漢) 회장으로부터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 1점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영훈)에 기증되었다. 올해 초 윤동한 회장은 일본에 있던 이 수월관음도를 구입하여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수월관음도는『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거처와 형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 도상은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달빛이 비치는 연못가 금강보석(바위)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찾아뵙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현재 전 세계에는 160여 점의 고려불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수월관음도는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인해 고려불화의 백미로 꼽힌다. 수월관음도는 국내외를 통틀어 대략 46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는 5점이 소장되어 있다. 리움미술관(2점),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우학문화재단,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대부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윤동한 회장의 구입과 기증에 따라 국내에 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모두 6점이 되었으며, 국립박물관 소장품으로는 최초이다.
이번에 기증된 수월관음도 역시 고려 수월관음도의 전형적 도상을 따르고 있다. 미소를 띤 관음보살은 신광과 두광으로 둘러싸여 금강보석 위에 반가부좌하고 있으며, 금니당초무늬로 장식된 투명한 천의를 두르고 있다. 관음보살 앞쪽에는 선재동자를 작게 표현하였고, 화면 왼쪽 중간에는 승반과 정병을 그렸다. 이처럼 이 기증품은 여러 도상들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나타낸 수월관음도의 걸작이다. 14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비단 위에 그렸으며 전체 크기는 172cm×63cm, 화면 크기는 91cm×43cm이다. 전체적으로 박락과 훼손이 진행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선재동자 등 화면의 중요한 부분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가치가 높다.
이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기증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일본에 있던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인 수월관음도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민관에서 펼치고 있는 국외문화재 환수운동의 중요한 성과로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그 환수가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기업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무엇보다 깊은 뜻이 있다. 기업이 사회로부터 창출한 이윤을 사회에 되돌려준다는 기업가 정신을 실천한 모범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윤동한 회장이 수월관음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데에는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지원과 협력이 있었다. 국외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문화재청의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에 윤동한 회장에 의해 기증된 고려 수월관음도를 앞으로 한달 동안 국민들에게 선보인다. 특별 전시 이후에는 본래의 가치를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보존처리에 들어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선보이고자 한다.
한국콜마 홀딩스 창업주인
윤동한 회장이 기증한
수월관음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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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 금동 관음보살
(1999년 파트리샤 슈밋 기증)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기증한
명성황후 옥보
일본인 니시가와 다마노스케가 기증한
안중근 선생이 뤼순 감옥에서 쓴 글
이병창이 기증한
백자 달항아리
이병창이 기증한
백자 달항아리에 관한
안내문
독립운동가 이원순이 기증한
우리 문화유산
독립운동가 이원순이 기증한
도자기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이 기증한
불감과 관음보살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이 기증한
불감과 관음보살에 관한
안내문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기증한
나전 칠 경전 상자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기증한
나전 칠 경전 상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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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이 기증한
나전 칠 연꽃 넝쿨무늬 상자
나전 칠 연꽃 넝쿨무늬 상자에 관한
안내문
이근형이 기증한
이항복 초상화
이근형이 기증한
이항복 초상화에 관한
안내문
윤여덕이 기증한
윤상정 교지
윤여덕이 기증한
윤상정 교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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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를 대량 기증한
최영도 인권변호사
겸산 최영도변호사 기증 토기
김동우(국립중앙박물관 연구사)
"겸산 최영도(1938年生) 변호사는 30여년 동안 우리가 도자기나 회화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토기를 수집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1,500여 점을 기증하였다.
외국인들이 토기를 사 가지고 해외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 최 변호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것이 밖으로 나가고 있구나. 나부터라도 이것을 막아 보자'라고 결심하고 토기를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왕 수집을 시작하였으면, 후손에게 덕이 되는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토기 전문 박물관> 설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체계적이고 다양한 토기를 사 모으셨다. 그래서 수집된 토기는 원삼국 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器種을 갖추었고, 수준 높은 토기가 많다.
이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수집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토기에 대한 심도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수집한 최영도 변호사의 각별한 노력에 기인한다 하겠다.
이러한 기증자의 뜻을 기려 국립중앙박물관은 『겸산 최영도 변호사 기증유물특별전』(5월8일-6월10일)개최와 함께 각 시대별로 기증 유물을 선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쇠뿔잡이단지[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높이 24.2㎝)]는 원삼국시기 영남지방의 소위 '瓦質土器'를 대표하는 기본적인 기형으로 아가리는 나팔형으로 바라지고 둥근 바닥에 뿔모양의 손잡이를 동체 중심에서 위쪽에 대칭되게 붙였다.
몸통은 달걀모양으로 길쭉하며 몸통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노끈무늬[繩文]이 베풀어져 있다. 몸통의 위에는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대칭으로 달려 있다. 이러한 기형은 전시대의 목이 긴 검은간토기[黑陶長頸壺]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비교유물로는 창원 茶戶里, 김해 良洞里유적의 널무덤[木 棺墓]에서 출토된 것들이 있다.
화로모양토기는 대부분 소형으로 높이가 14.2cm이며, 어깨 부분(肩部)에 빗문살무늬[斜格子文]가 베풀어져 있으며, 臺脚에 직사각형의 透窓이 뚫려져 있다. 부산 노포동, 울산 하대리 덧널무덤(木槨墓)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화로모양토기는 초기에는 臺脚이 좁은 형태에 견부에 菱形集線文 또는 三角集線文이 시문된 것에서 점차 대각이 넓은 형태에 견부에 사격자문이 시문된 것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화로모양토기는 이후 신라와 가야지역 화로모양 그릇받침 기형의 조형이라고 판단된다.
최영도 인권변호사가 기증한
토기
최영도 인권변호사가 기증한
토기
최영도 변호사가 기증한
참외 모양 매병
최영도 변호사가 기증한
참외 모양 매병에 관한
안내문
최영도 인권변호사가 기증한
토기
최영도 인권변호사가 기증한
신라시대 제작 바리 모양 그릇 받침
문방 용품 기증품들에 관한
소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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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치 이사오 선생
[강구열의 착한 공유, 기증] (3) 이우치·유창종, 기와로 맺은 '정신적 상속'
세계일보 디지털기획입력 : 2016-05-14 14:41:01 수정 : 2016-05-14 14:41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1987년 10월, 이우치 이사오 선생은 자신의 수집품 중 일부인 한국와전(기와와 벽돌) 1082점을 오사카 남부의 한 부두에서 배웅하고 있었다. 기와는 한국으로 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될 터였다. 이우치는 딸의 출가시키는 심정이었다.
“타국 땅에 와서 반세기, 너희들도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지. 내일이면 부산에 도착하니 오래도록 사랑받았으면 좋겠구나.”
2002년 9월,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장이던 유창종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가 와전 수집품 187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 것은 물론 일본과 중국, 동아시아의 기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단일 종류의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증이었다. 유창종가 밝힌 기증 당시의 심경이다. .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주었다는 안도감과 후련함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내 삶의 흔적을 어디론가 떠나 보낸다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없지 않다. 딸을 시집 보내는 어버이의 마음이 이러하리라.”
수집품 기증을 딸을 출가시키는 아버지의 심경에 비유한 것에서 그것에 들인 정성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우치와 유창종은 한국 와전에 미친 사내들이었다. 훗날 두 사람이 맺은 ‘정신적 상속’의 인연은 국외소재 한국문화재 환수의 모범이 된다.
‘이우치 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이토 컬렉션’에 연원을 둔다. 식민지 조선에서 와전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이토 쇼베가 모은 것이었다. 그의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최대 유물소장처였던 조선총독부박물관, 이왕가박물관의 것보다 “우수하거나 최소한 그만 못지 않으며, 그 수와 질에 있어서 일본에 으뜸가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토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1945년 이마이즈미 토시아키에게 20만원(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21억원) 팔았다. 이마이즈미는 기와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보관만하다 이우치에게 넘겼다. 1964년이었다.
이우치의 소유가 되면서 고국을 떠난 와전은 적극적으로 연구, 활용되었고 한국 학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효고현 아카시시 자택에 수장고 겸 전시실을 마련한 이우치는 ‘이우치고문화연구실’까지 설립해 연구에 매진했다. 수집품을 엄선한 ‘조선와전도보’(전7권)를 200부 한정으로 발간하고, 50부를 한국에 보냈다. 1980년대에는 ‘이우치고문화연구실보’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우치가 황수영, 김원용, 정영호 등 한국의 학자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우치가 한국 와전 연구, 활용에 매진하던 무렵인 1978년 유창종은 청주지검 충주지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평소 문화재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이때 충주 탑평리 출토 수막새 파편에 깊이 매료되면서 와전과의 인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창종은 기와의 가치에 대해 “다른 문화재와 달리 장소의 이동이 거의 없고, 제작시기의 예술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편년을 가장 확실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직업이긴 해도 검사의 수입으로 유물 수집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기와가 “다른 고미술품을 살 때 개평으로 끼어주는 판촉용 선물로 쓰일” 시절인 1970년대에 일찍 관심을 가져 유창종은 오랫동안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기와검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이우치는 컬렉션의 일부를 한국에 기증할 생각을 갖게 됐다. 한국 학자들과 인연이 깊어졌고, 한국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학문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했고, 그 해 10월 구체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조선와전도보에 실린 2229점 중 절반 정도인 1082점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듬해 ‘이우치 이사오 와전 기증실’을 만들어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이우치 기증실을 보는 유창종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우치 기증실에서 일본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눈빛에서 자부심이 읽혀져 기가 죽는다. 그 방을 찾아오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일본인이 기증한 우리 기와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우리 국민들은 자기 조상 유물 하나 제대로 감상하고 간수하지도 못한단 말인가. 부끄러움과 안쓰러움 때문에 와당 수집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유창종의 기증은 이우치 기증실을 보며 느꼈던 자극과 자괴감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우치 기증 유물과 같은 방에 전시해 달라”, 기증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한국, 일본에서 제각각 와전 수집, 연구에 몰두하던 유창종, 이우치는 2003년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이우치가 1992년 세상을 떠나고 컬렉션을 관리하던 아들 이우치 기요시가 유창종에게 컬렉션 인수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이 계기였다. 유창종은 “소름이 쫙 엄습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뻤으나 만만찮을 것이 분명한 가격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격려를 받고 이내 인수를 결심했고, 인수 대금은 “2년간의 변호사(당시 유창종은 검찰에서 퇴직한 상황이었다) 월급과 그나마 딱 한 장 있었던 골프장 회원권으로” 해결했다. 이우치 기요시와 만남을 유창종은 “아버지(이우치)의 못다 이룬 숙원 사업을 우리 부부에게 설명하고 전수해 주는 정신적 상속의 자리로 느껴졌다. 와전 컬렉터들의 정열과 수집벽이 정신적으로 전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뿌듯하고 흐뭇한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2005년 유창종이 인수를 하면서 이우치 컬렉션의 귀환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우치가 조선와전도보에 게재한 와전이 2229점, 이중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것이 1082점, 유창종이 인수한 것이 1296점이었다. 조선와전도보에 실린 와전 모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우치 컬렉션의 가치는 크다. 양적인 면에서 다른 와전 컬렉션을 압도하고, 완형이 많아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고구려부터 근현대까지 전 시대를 망라해 한국 와전사의 전모와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우치 컬렉션을 인수한 뒤 유창종이 2008년 서울 부암동에 ‘유금와당박물관’을 세워 아시아 와전 4000여점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소장자의 기증과 민간의 거래, 환수 후 박물관 설립을 통한 활용. 이우치와 유창종이 성사시킨 이우치 컬렉션의 귀환은 한국문화재 환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유금와당박물관은 두 사람이 맺은 ‘정신적 상속’의 인연을 새길 수 있는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는 유창종 기증실과 이우치 기증실이 나란히 있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은 지난해 말 ‘돌아온 문화재 총서3: 돌아온 와전 이우치 컬렉션’을 발간하고 유금와당박물관에서 7월까지 전시회를 열고 있다.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와전, 부드럽고 단아한 백제 와전, 동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련되었던 통일신라 와전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다.
이우치 이사오 선생의 기증품
이우치 이사오 선생이 기증한
짐승 얼굴 무늬 기와
2024년03월24일(일요일)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국립 한글박물관&국립 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Korea, 國立中央博物館)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보물 창고
소재지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휴관일 1월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이용 시간 월ㆍ화ㆍ목ㆍ금요일 09:00 ~ 18:00, 수ㆍ토요일 09:00 ~ 21:00, 일요일ㆍ공휴일 09:00 ~ 19:00.
※2017년 7월 1일부터는 개관시간 9시→10시로 조정.
목차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넓고, 크고, 깊다. '국립', '중앙', 그리고 '박물관'. 그 이름에서도 품위와 무게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국 각지 박물관의 종합관 격이다. 게다가 역사 연표와 영상 등을 활용해 유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우리 아이의 '역사 공부'에 이만큼 훌륭한 교과서도 없다.
30평 아파트 1300채 규모의 거대한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터를 잡기 전까지 숱하게 이전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는 조선총독부 건물(사진에서 광화문 뒤로 보이는 건물로 1995년 철거)을 사용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을 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지 면적이 약 9만 평(30만m²), 총면적(한 건축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의 합계)이 약 4만 1000여 평에 이른다. 계산상으로는 30평 아파트 1300채를 합친 면적이다.
이를 하루 만에 모두 섭렵하겠다는 '욕심'은 접어두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다가갈수록 살며시 고개 드는 남산과 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수하러 나타나는 거울 연못과 박물관 녹지 공간 속 야외석조물정원, 종각, 전통염료식물원, 이웃한 용산 가족공원 등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할아버지 격인 '국립박물관'은 100년 전인 1909년 창경궁에서 태어나 1995년 현재 용산에 자리 잡기까지 전국각지로 피난민이 보따리를 싸듯이 숱하게 이전해왔다. 셋방살이를 견디며 흩어졌던 유물들이 이 자리에 모여 대가족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더욱 크다.
70만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가장 빠른 타임머신
열린 마당 오른편으로 상설전시실이 모여 있는 으뜸홀이 있다. 세 개 층을 어우르며 웅비하 듯 높이 뻗은 천장이 박물관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으뜸홀은 총 여섯 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되어 있다. 이곳에 상설전시된 1만 2000여 점의 유물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으뜸홀의 내부는 마치 연극에서 무대의 장막이 걷히고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순간과 닮았다. 으뜸홀 가운데로 곧게 뻗은 '역사의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전시실이 자리해 있다. 1층에는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이, 2층에는 서화관과 기증관이, 3층에는 아시아관과 조각·공예관이 있다. 특별히 정해진 관람 순서는 없다.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면 되는데, 대부분 1층의 선사·고대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꼭 챙겨볼 것은 고구려에 관한 전시다. 고구려 땅은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의 수가 백제와 신라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1층의 비밀은 관람객의 동선이 곧 역사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재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 세월은 가늠하기 힘든 약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불과 100여 년 전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휴대폰에 있는 스톱워치로 입구에서 1층 끝까지 관람 시간을 재보자. 70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삼국시대 전시실에 놓인 영산강 지역의 대형 독널(옹관)을 아이와 함께 살펴보자. 설명에 앞서 아이에게 질문을 건네보자.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이 항아리는 무엇에 쓰였던 걸까?" 독널은 항아리나 독 두 개를 맞붙여 만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館)이다.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독을 관으로 이용했다. 대형 독은 높이가 어른 키만 하다.
전시된 독널은 삼국시대 영산강 인근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본래 독 두 개가 입구를 맞대고 캡슐처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독널의 크기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사하던 권력의 크기를 대변한다.
독널을 통해 아이에게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줄 수 있다. 아이는 열 살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실제 개념을 형성한다. 이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자. "떠나버렸어"와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국의 미소,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보았으면 하는 것은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서양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금동일월식삼산관사유상(국보 제78호), 금동연화관사유상(국보 제83호)의 미소가 있다.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동시에 만나볼 수 없다. 둘을 교체하며 전시하기 때문인데, 자주 방문해 두 반가사유상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여성미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남성미가 감돈다. 이름은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에 따라 붙여졌다. 두 반가사유상 모두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 얹고 오른손은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 쉬는 듯한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한다. 국보 제78호,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물 중 하나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당한 사연 많은 탑
역사의 길을 따라 중앙통로에 보이는 거대한 석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이다. 경기도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었다고 한다. 다행히 일제강점기가 끝나기 전에 탑을 돌려받았으나, 그 후 오랫동안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었다. 1960년에 탑을 다시 세우고 1995년에 복원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르되, 고려 말 유입된 원나라 문화도 반영되어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균형감이 뛰어나고 우아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문화재를 호위하는 무사 같기도 하다.
눈길 닿는 모든 것이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
2층 서화관은 서예, 회화, 불교회화, 사랑방 등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작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인과 선비들은 글씨가 정신과 인격을 반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예는 예술 활동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수양하는 과정이었다. 서예 작품을 보면서 선의 기세에 따라 달라지는 감흥을 아이와 이야기해보자.
회화실은 전시품이 가장 자주 교체되는 전시실이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풍속화, 초상화, 산수화, 화조·동물화, 사군자화, 궁중장식화와 민화 등 그림의 소재에 따라 세분화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람 전 아이와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꼽아보기로 하는 것도 좋겠다.
3층 공예·조각관에는 백자실, 분청사기실, 청자실, 금속공예실 등이 있다. 불교조각실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한국 불교 조각의 시대적인 흐름과 함께 불교 도상에 따른 주제별 특징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밖도 국보와 보물 천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은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실내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박물관의 야외 석조정원에도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염거화상 탑(국보 제104호)을 비롯해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들여 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제100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 제2호)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문화재의 백미로 손꼽힌다.
체험의 즐거움으로 왁자지껄한 어린이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어린이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유물을 어린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즐길 수 있도록 복제하여 전시해 놓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여섯 번 매회 한 시간 20분씩 300명이 선착순 입장한다. 100명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받고, 200명은 현장에서 표를 배부한다.
어린이박물관은 아이들 세상이다. 다소 엄숙한 느낌의 상설전시장보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곳이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따끈따끈, 삶의 보금자리', 농기구의 발전과 생활 양식의 변화를 학습해보는 공간인 '밥을 담는 그릇', 시대별 다양한 장신구, 금관, 복식 등을 체험하고 과거 사람들이 입었던 옷을 살펴보는 '고운 우리 옷', 음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마음과 영혼의 소리', 전쟁에 사용된 무기와 갑옷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무기와 무사들', 동력을 이용한 에너지 생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자연 에너지 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책도 읽고 박물관 신문도 만들어볼 수 있는 '작은 쉼터, 어린이들의 도서공간'이 있고 박물관 선생님들과 함께 즐거운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어린이 교실' 등 다양한 체험 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기념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매표소 맞은편에는 '도시락 쉼터'가 있으니, 허기를 달래가면서 신 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미리 먹을거리를 준비해와도 좋겠다.
스마트한 관람을 위한 사전 준비는 홈페이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해설은 대표 유물과 전시관별로 구성되어 있고, 오전 오후 각 2회 정도 열린다. 야외 석조물 해설은 봄가을 매주 토요일에만 진행된다. 이 밖에 예약이 필요한 '박물관 명품 유물 산책' 해설과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도 꼭 들어봄 직하다. '이야기가 있는 전시 해설 스마트 큐레이터'는 관장이 추천한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 속에 담긴 숨은 이야기 등 유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당장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하고, 회원 가입도 미리 해두자. 예약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서 회원 가입은 필수다. 또 홈페이지에는 미리 살펴볼 자료가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 알차게 구성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만 참여해도 우리 아이의 역사, 문화 교육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을 정도다.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해설 '스마트 투어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가면, 안내데스크에서 따로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지 않아도 된다. 박물관 영상·음성안내기는 관람 전날까지 예매해야 대여할 수 있다.
관람시간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수, 토요일: 10:00 ~ 21:00 (입장 마감: 20:30)
옥외 전시장(정원)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휴관일 및 휴실일
휴관일: 1월1일, 설날(2.10.), 추석(9.17.)
상설전시관 정기휴실일: 매년 4월, 11월(첫째 월요일)
상설전시관 내 특별전시실 휴실
기획전시관(특별전시 미운영시 휴실), 야외전시장은 정상 개관
2024년 휴실일: 4.1.(월), 11.4.(월)
관람료 : 무료
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무료 특별전시 해당
유료 : 유료 특별전시 해당
관람권 구입하는 곳: 기획전시실 앞 매표소
관람권 판매시간 :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학생단체관람 안내
초·중·고 학생단체(30명 이상)의 박물관 관람은 사전예약제로 운영합니다.
(사전예약하지 않은 학생단체는 입장 불가)
상설전시실 층별 안내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장은총 7개의 관과 39개의 실로 구성되어 9,884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전시물은외부전시일정 및 유물의 보존 상태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상설 전시장은누구나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층 ○중·근세관 ○선사·고대관
중·근세관
고려, 조선, 대한제국실로 꾸며진 북쪽 전시공간은 당시의 역사자료를 관람객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사·고대관
인류가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입니다
2층 ○서화관 ○사유의방 ○기증관 ○실감2관
서화관은 서화, 불교 회화, 목칠공예 등 선과 색채로 발휘된 한국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유의 방은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된 공간입니다.
기증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재를 전시하여 기증자들을 기리며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공간입니다.
※VR체험 예약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온라인접수는 서버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1 VR체험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 2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 관람료는 없습니다.
2 VR체험은 예약제로 운영합니다.
가상현실(VR) 체험을 제외한 디지털 실감 영상관 콘텐츠는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합니다.
3 예약은 관람일 30일 전부터 가능하며, 회차 당 이용 인원은 6명입니다.
4 예약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회원 가입 후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5 1회 예약 가능 인원은 최대 4명입니다.
6 아이디 당 1일 1회의 예약만 가능합니다.
7 00:00~00:30에는 시스템 점검으로 당일 예약을 할 수 없습니다.
8 예약과 취소는 회차 시작 전까지 가능합니다.
9 예약 시간 이후 도착하실 경우, VR 체험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10 VR체험은 1회 1종만 가능하며 입장 순서에 따라 콘텐츠 주제 선택에 제한이 생길 수 있습니다.
11 VR 체험은 이용자 안전과 원활한 체험을 위해 8세 이상, 키 130cm 이상인 경우만 가능합니다.
12 VR 체험은 양 손 및 몸의 움직임이 필요한 체험이므로 이용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3 장비 소독 및 기기 교체 등 쾌적한 체험 환경 유지를 위한 1일 2회(12:30-13:00, 15:30-16:00) 점검 시간을 운영합니다.
14 문의전화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 02-2077-9093
3층 ○조각·공예관 ○세계문화관
조각·공예관은 한국 불교조각과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의 도자공예 그리고 금속 공예문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입니다.
세계문화관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인도•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지하철로 오는 방법 : 경의중앙선(문산-용문)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도보로 468m 이동
탐방코스 : [이촌역 2번 출구~국립 중앙박물관 서문~거울못 청자정~배롱나무못~국립 한글박물관~석조물정원~미르폭포~보신각종~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전시동 1층~전시동 2층~전시동 3층~(엘리베이터 이용)~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이촌역 2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3월24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시 용산구 최저기온 8도C, 최고기온 2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7시간12분 소요)
10:14~10:55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이촌역으로 간 후 이촌역 2번 출구로 나옴 [41분 소요]
10:55~10:59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7 번지에 있는 이촌역 2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으로 이동
10:59~11:02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번지에 있는 거울못 청자정으로 이동
11:02~11:10 사진촬영
11:10~11:12 배롱나무못으로 이동
11:12~11:20 사진촬영
11:20~11:22 국립 한글박물관으로 이동
11:22~12:03 국립 한글박물관을 관람
[국립 한글박물관
목차
1. 개요
2. 상세
2.1. 소장품
3. 교통편
4. 역대 관장
5. 역사 왜곡
6.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 2014년 10월 9일에 개관했다.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남쪽에 있다. 애초에 중앙박물관 부지 일부를 사용해 건립한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통합 수장 센터가 건립 중이다.
2. 상세
4층 건물이지만 전시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은 2층과 3층이다. 가장 주가 되는 2층 입구 앞에 계단이 크게 설치되어 있고, 1층 입구는 옆의 쪽문에 있다. 4층은 직원을 위한 공간이고, 3층 내부에 4층행 계단이 있지만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관에서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이두와 향찰을 쓰던 시절부터, 한글 전산화와 글꼴에 대한 논의가 있던 20-21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는 전시관 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고,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절의 기록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한글이 국문으로 지정되기부터 일제에 의해 조선어로 지위가 격하된 것,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글 전산화 과정에서 발명된 송기주의 네벌식 및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 그리고 현대에서 사용되는 글꼴에 관한 이야기까지 있다.
2021년 4월 5일부터 2022년 1월 20일까지 상설전시관 개편공사를 진행하였고, 1월 21부로 재개장되었다. 재개장한 상설전시는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으로 전시장은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한글의 역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화재급 소장 자료와 관내외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글 자료들이 소개된다. 유가사지론(13~14세기), 선종영가집언해(1495년),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곤전어필(1794년), 말모이 원고(1910년대) 등의 보물 자료를 비롯해 무예제보언해(171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훈맹정음(1926년, 국가등록문화재), 송기주타자기(1934년, 국가등록문화재) 등 다양한 등록문화재들도 전시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쓴 한글 편지를 모아 놓은 정조 한글어찰첩과 양반 송규렴이 노비 기축이에게 쓴 한글 편지, 과부 정씨가 어사또에게 올린 한글 청원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가의 한글 자료, 일제 강점기 발명가 최윤선이 한글 교육을 위해 만든 조선어 철자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 소개되어있다.
3층에서는 기획전시가 이루어진다. 상설전시관이 재개장한 시점에는 조선 시대와 근대의 여성들이 주로 지은 내방 가사를 다루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기획전시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가 신나게 놀면서 한글을 이해하고 한글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체험전시 공간인 '한글 놀이터'가 있다. '한글, 어린이가 소통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힘'을 주제로 한 공간으로 일상 속에서 어린이들이 새롭게 한글을 발견하고, 한글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며 한글문화를 스스로 창작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한글 놀이터'는 사전 예약으로 운영되며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1층에는 한글도서관이 있다. 대부분의 분야를 취급하지만 한글박물관 내에 있는 도서관인 만큼 한글 관련 자료가 가장 주를 이루고 있다. 도서관 규모도 아담한 편이고, 열람을 위한 공간이 매우 적어 장시간 활동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박물관 별관 건물 내에 '도란도란 쉼터'라는 휴게공간이 새로 재개장하였다. 관람객 휴식공간과 어린이 독서공간을 함께 조성하여 해당 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책을 읽거나 쉴 수 있다.
2층에 카페와 기념품점이 있다. 카페의 음료 가격은 시세와 비슷한 편이고, 기념품들은 다소 비싼 편이다.
3. 교통편
도로교통
자가용을 이용하면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에 있는 대체주차장에 추자해야 한다. 박물관과의 거리는 약 700m로 이촌역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조금 더 멀다.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서빙고로를 지나는 서울 버스 400, 502번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정류장 또는 이촌역 정류장에서 내리면 갈 수 있다.
철도교통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하다. 되도록이면 2번 출구 옆에 있는 박물관 나들길이라는 지하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꽤 길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무빙워크가 설치되어 있어 역의 다른 출구로 나와서 야외를 걷는 것보다 빠르게 갈 수 있다. 박물관과의 연계를 위해 지어진 곳인 만큼 통과하며 걷는 도중 박물관과 관련된 볼거리가 있다.
4. 역대 관장
문영호 (2014~2016)
김철민 (2016~2017)
김재원 (2017)
박영국 (2018~2019)
김낙중 (2019)
심동섭 (2019~2021)
황준석 (2021~2022)
김영수 (2022~2023)
김일환 (2024~현재)
5. 역사 왜곡
국립한글박물관이 유튜브에 게시하는 영상 중 대중을 대상으로 제작된 『만화로 즐기는 한글 이야기』라는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많은 영상은 북한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친북적 논조와 민족의 고난이나 선조의 영민함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논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조가 단순한 편향을 넘어,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까지 날조하는 역사 왜곡에 이른다는 점이다. 모든 사례를 일일이 다 반박할 수는 없으니 심각한 역사 왜곡의 사례 두 가지만 살펴보자.
「원고로 남은 비운의 사전_말모이, 보물이 되다!」편에서는 미완성 사전 원고인 『말모이』가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던 김두봉이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했다고 설명한다. 『말모이』는 한글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던 우리말 사전으로, 주시경의 요절로 인해 작업이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김두봉은 훗날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는 인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1919년에 상해로 망명하면서 스승의 유작인 『말모이』 원고를 상당 부분 반출하였다. 그러나 영상의 설명과 다르게 김두봉은 상해로 망명한 이후 해방 이전까지 귀국한 적이 없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동참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했다. 게다가 『말모이』는 『조선말 큰사전』을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사전의 기초가 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이 김두봉에게 있다.
1927년 국내의 한글학자들은 사전 편찬을 재개하기 위해 이윤재를 상해로 보내 사전 편찬 경험이 있는 김두봉을 초청하고, 김두봉이 반출한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여 새로 편찬하는 사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두봉은 국내로 귀국하지도 않았고 원고를 빌려주지도 않았으며 그 뒤의 김두봉의 행동은 힐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게 김두봉은 이윤재에게 당시 큰 돈이었던 200원을 보내면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겠다고 제안한다. 맨손으로 귀국한 이윤재는 김두봉의 말을 믿고 출판업자 이중건으로부터 200원을 기부받아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은 약속과 다르게 원고를 보내지 않았고 원고를 손질해서 완성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동생을 통해 사전 편찬의 의욕을 꺾는 납득하기 어려운 훈시를 전보로 보내왔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김두봉의 이 행위는 능력도 없이 원고를 혼자 완성하려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주시경의 유작인 말모이는 다른 사전의 기초가 되는 일도 없이 미완성 상태로 방기되었다. 이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서 사전 편찬을 재개한 한글학자들은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겪었다. 이윤재가 김두봉에게 보낸 200원은 결과적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가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돈을 보낸 당사자인 이윤재는 일제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받고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전편찬을 다루는 다양한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도 한글박물관 측은 북측 인사를 미화하기 위해 『말모이』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김두봉의 귀국과 사전 편찬 사업 합류라는 허구로 대체했다.
「철자법 논쟁_주시경파 vs 박승빈파」편에서는 일제가 일관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주시경파의 조선어 학회가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박승빈 중심의 반대에 직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상과 달리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책을 실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이 시기에 주시경파는 탄압을 당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여 영상의 주제인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다. 박승빈파가 본격적으로 주시경파에 반발하기 시작한 것은 주시경파가 참여하여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언문 철자법」 때문이지, 주시경파가 독자적으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때문이 아니다.
1930년 최현배, 권덕규, 심의린 등 주시경파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사업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산하 각급 학교가 사용하는 조선어 교재에 주시경식 철자법이 보급되었다. 이는 철자법 논쟁에서 주시경파에게 큰 우위를 가져다 주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박승빈파의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본격적인 반대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로 1931년에 박승빈파는 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에 대항해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에는 동아일보가 개최한 한글 토론회에서는 양파가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이는 모두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주목할 점으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총독부의 사업에 참가한 주시경파를 비난하는 평가가 있었다.
하여간 한글運動도 現實에 잇어 우리의 思想을 기록하는 統一된 道具를 使用하여야 하겟다는 意味에서 무엇보담도 焦眉의 急務에 잇는 것인즉 蛙鷸이 相爭하고 同志가 相賊하다가 그쫓아 아무 解決된 事業이 없이 남의집웅아레 뫃여서 그 政治的 背景밑에 비로소 改正綴字法을 定하얏다는 것도 우습다란 羞耻다.
(현대어) 하여간 한글운동도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을 적는데 통일된 도구를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다. 개구리와 도요새가 서로 싸우고 동지들이 서로 해치는 사이에 아무 해결된 일도 없었다. 남의 지붕아래에 모여서 남의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야 비로소 개정철자법을 정했다는 것은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다.
金台俊, 「硏究者的 態度에서」, 『東光』, 1932.04.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맞춤법을 정립한 주시경파가 조선총독부의 사업에 참여하여 철자법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글박물관이 일제가 일관적으로 민족 말살을 시도했다고 거짓 서술을 하거나 박승빈파의 반대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학술기관이 지배계층의 이념을 선전하며 국민을 '계몽'하는 것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말까지 일삼는 것만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배반하면서까지 주권자를 기만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6. 기타
중국 출장 중이던 김재원 3대 관장이 2017년 12월 6일 아침에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 호흡정지.
방역패스 적용시설로 지정받았지만 재개장한 주부터 패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거리두기 완전 해제 이후로는 미접종자도 이용 가능하다.]
12:03~12:05 석조물 정원으로 이동
[석조물 정원에는 국보 99호인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국보 100호인 남계원 칠층석탑, 보물 166호인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보물 358호인 영천사 보제존자 사리탑 등의 유물들이 야외 전시되어 있다.]
12:05~12:09 사진촬영
12:09~12:10 미르폭포로 이동
12:10~12:15 보신각종으로 이동
12:15~12:19 사진촬영
12:19~12:22 국립 중앙박물관 으뜸홀로 이동
12:22~14:55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1층을 [구석기실~신석기실~청동기&고조선 전시실~부여&삼한 전시실~고구려실~백제실~가야실~신라실~경천사 10층석탑~통일신라실~발해실~고려I실~고려II실~디지털 복원 광개토대왕릉비~조선I실~조선II실~조선III실~대한제국실]의 동선으로 관람
14:55~16:32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2층을 [사유의 방~나눔의 서재~손기정 기증 그리스 투구~이홍근 기증 유물~박병래 기증 유물~윤동한 기증 수월관음도~이병창 기증 유물~이원순 기증 유물~최영도 기증 유물~유창종 기증 유물~이우치 이사오 기증 유물~김홍기 기증 유물~가네코 가즈시게 기증 유물~유강열(미망인 장정순) 기증 작품~록펠러재단 기증 판화~김종학 기증 유물~손창근 기증 세한도~불교회화]의 동선으로 관람
16:32~18:00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동 3층을 [불교조각~금속공예~도자공예 청자~분청사기~청화백자~철화백자~달항아리~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중국~인도]의 동선으로 관람
18:00~18:07 국립 중앙박물관 서문을 거쳐서 이촌역 2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8:07~18:17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전철 승차 대기
18:17~18:56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촌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9분 소요]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2층 시설 안내도
국립중앙박물관 3층 시설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