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5일, 산내를 벗어나 서울로 향했다. 작년 10월 이후 6개월만이다. 작년4월 19일도 다녀갔다. 작년 봄은 유난히 빨랐다. 올해는 봄이 유난히 늦다. 산내만 그런게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수서까지 SRT를 타고가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인 일원역.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걸어서 SS병원에 도착했다. 때는 점심때다. 입구 화단에 꽃들이 만발하다. 경주 산내는 연산홍이 아직 만개 아닌 몽오리 맺어진 수준인데, 여기는 철쭉이 활짝피었다. 남쪽 산내보다 훨씬 빠르다. .
나는 SS병원에 예약할 때, 경주역에서 올라오는 시간을 고려하여 오후로 잡는다. 수서역에 도착하면. 수서역 부근에 와서 점심을 해결한다. 일원역 부근에도, 수서역 맞은편 대모산 입구부근처럼 한끼 점심식사를 떼우기에 그런대로 괜찮은 식당이 몇군데라도 있으면, 그곳을 이용하겠는 데, 내가 인근을 둘러보지 않아서 그런지, 내눈에는 일원역 부근이 동네 명성에 답지 않게 먹음직한 음식점이 없는 것 같다. .
그래서, 보통은 수서역부근에서 식사를 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데, 1년전, 방문시, 병원지하에 음식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점심은 병원지하에서 해결하곤 했다. 나도 참 둔했다. 15여년을 가까이, 산내 정착후로 8~9년, 정기적으로 그 병원을 다니면서, 지하에 식당이 있는 것을 몰랐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다. 병원에는 출입등록이 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출입도 안되고, 직영이든, 임대 음식점을 들였던, SS병원음식점이...신뢰도 가서, 알게 된 이후, 그 곳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줄을 서야 하고, 자리가 쉽게 나질 않으니 식판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한참을 자리 찾는 데 소모한다. 그럴때면, 짜증이 많이 난다. 더구나, 지하에, 여러 시설물 틈바구니 사이 좁은 공간에 마련된 음식장소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음식을 주문하려 대기하는 줄, 식판을 들고 앉을 찾는 사람, 미리 점찍어두었던 자리로 찾아가는 사람, 식후 식기반납하는 창구로 가는 동선 등이 겹쳐져 있어서 여간 번잡한 게 아니고 불편하지 않다.
사람 식사장소인데... SS병원정도면, 좀 넓고 확트인 공간을 마련 할 수 있을지 싶은 데, 왜이리항상 번잡하고 복잡하지? 병원 관게자가 모를리 없을 낀데... 어쩌면, 그사람들은 여기를 이용않할지도 모르지, 잘모르지만, 주변은 그렇다 치더라도 몇 정거장가면 이른바 '강남', 넓고, 맛있는 음식점이 좀 많겠어? 높은 분들은 그런 댈 이용하겠지.
저번에 어째 한자리 정도는 자리가 생기겠지하며, 식판부터 먼저 받아들었다가 오랬동안 식판을 들고 빈자리를 찾아 헤매던, 낭패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주문이 끝나자 마자 음식이 나오면 진동과 불빛으로 알려주는 번호표를 들고, 매의 눈처럼 자리들을 훑어보다, 식당 바로 맞은 편에, 손님이 식판을 들고 일어서기에, 얼릉 그곳 자리에, 들고 있던 가방을 얹어 두고, '이건 내가 잡아둔 자리. 용케도 잡았네. 오늘은 뭐가 잘 풀리려나?' 카며, 번호표를 들고 진동과 불빛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자주 시간을 체크해본다. 15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도대체 언제?
그래 찾아가서
“왜 주문한 음식이 안나오느냐?”
물어보니, 손님이 많아서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달란다. 그럴 수 있겠지, 손님이 많기는 많군. 기다리는 대기 열 중의 어떤 사람이,
“이 병원은 진료보다 여기 식당에서 더 돈 버는 것 아닌가?”
내처럼 짜증이 나는 지, 그 냥 해보는 소리인지, 기다리면서 한 소리 한다.
나는 곧 음식이 나올 줄 알고, 가방을 얹어 두었는데, 왠 중년 아줌마가 식판을 들고, 앉을려고 한다. “여기 제가 잡아논 자리” 라 하니, 웬 촌놈이 이 북새통에 자리잡아두었다고 불만인가보다. 눈을 삐딱하게 뜨고 날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음식나오기만을 기다렸다.
15분를 더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그러니, 30분 넘게 기다린 셈이다. 예약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기다리는 데만 30분을 더 넘긴다. 거기다 내 보다 늦게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 음식이 나보다 먼저 나온다. 가만히 보니, 내가 주문 한 것은 손님이 많지 않아 그런 것인지, 재료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 내 주문을 깜박한 것인지, 다른 주문이 밀려, 그것 처리하고 내 주문으로 눈을 돌린 것인지…
살짝 꼭지가 돌라한다. 다시 창구로 찾아갔다. 여차저차한데,
“왜 주문한 것이 안나오느냐?”
다시 따졌다. 그러니, 음식을 분배해주는 아저씨왈,
“음식 나왔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받지 않았다” 칸다.
흠, 이놈봐라 사람놀리네. 주문번호가 새겨져 있는 번호판이 진동과 깜박거리는 불빛으로 주문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신호를 보낸다. 진동과 깜박거리는 불빛이 나오면, '음식 나왔으니 가져가라' 는 통상의 그런 번호표다. 그러나, 그 번호표를 손에 들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데, 신호를 보냈다고 우겨? 내가 깜박이는 불빛을 못 볼 수가 있어도, 진동을 못느낄 수가 없다. 이놈들이 내가 촌놈이라 용케도 알아보고 그러나, 촌놈은 맞는데, 그러면 촌놈인걸 우찌 알았지? 아니면, 우짜다가 실수로 늦어져서 어리숙한 촌놈처럼 보이니 변명을 대는 건가?
그럼, 주문번호가 고장인가? 싶다가 고장이 아닌 것이 곧 판명된다. 내가 항의를 한 후, 조금 있다, 정상적으로 진동과 불빛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여보시오, 내가 손에 들고 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데, 무슨 신호? 내 뒷 번호는 벌써 여러분이 주문(음식)을 찾아갔는 데, 30분도 넘게 기다리게 해놓고, 한다는 소리가…”
이전에 수십년을 살아봤어도, 시골에 살다 오래간만에 서울이라고 올라와봤더니, 감이 떨어진 것인가? 내가 진정 촌넘이 다된 것인가? 작년에 수서역 택시 기사한테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올해는 여기서 촌놈 취급당하나? 촌놈의 자격지심인가? 꼭지가 완전히 돌아삘라한다. 그래, 한 소리 했다.
역시 촌놈이 다 된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못참고 좀 심하게 하고 싶어도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많이 참았다.
음식점 간판부근에, 음식이 나오면, 번호를 디스플레이 하면, 될텐 데, 번호표 신호외는 알길이 없으니, 음식 주문하는 사람, 음식기다리는 사람, 빈그릇 반납하고 물마시고 나오는 사람 북새통이다. SS병원이라면, 국내 빅쓰리 병원에 드는 초 일류 병원으로 알려져 있는 데, 음식점 주문관리 수준은 동네 서민 음식점 수준보다 못해 보인다.
진료를 보고 6개월후에 다시 예약날짜를 잡았다. 다음 번에 왔을 때는 많은 개선은 어려울 게고, 음식 주문하는 사람, 음식기다리는 사람, 빈그릇 반납하고 물 마시고 나오는 사람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는 것이나, 음식이 완료되면 대기번호에 진동과 불빛으로만 알려줄 게 아니라,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주방 앞면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했으면 좋겠는데…
서울을 떠나 산 지가 10여년 넘어가니, 내가 촌놈이 다 되어 그런 것인지, 서울의 문법과 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런지, 서울 올 때마다 불만거리 한두가지씩 겪고간다.
병원 일을 끝내자, 지하철 역으로 갔다. 자주는 아니지만, 6개월에 한번씩, 서울에 올 때마다 늦둥이 아들 놈을 만나, 그동안 배불리 먹지 못했을 고기나 실컷 사 먹여주고 갈려고 시도하는 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대부분, 늦둥이 녀석이 시간을 못 맞추는 것이다. 글마는 회기동에 방을 얻어 사니, 내가 병원 용무를 마치고 일원역에서 그 곳까지 갈려면, 1시간 가까이, 3번인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가야한다. 글마가 저거 아부지 만나러 온다해도 마찬가지.
병원방문일이 한달이내로 다가오면, 열차 예약을 한다. 어디로 하까? 글마를 수서로 오게 할까? 나가 회기동으로 갈까? 지하철 노선도를 열심히 들여다 보다.
‘종로3가역’,
거기서 만나면 되겠다. 그곳은 일원역에서 3호선타면 갈아타는 것 없이 한번에 도착한다. 시간은 37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글마는 회기동에서 1호선 전철을 타면 7번짼가? 한번에 도착한다. 그리고, 경주로 돌아올 때는 서울역이 전철 1호선 네 정거장을 지나, 8분 걸려 도착이라. 오고가는 시간을 세이브 하여, 글마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있고, 음식도 느긋이 즐길 수 있으니 좋다. 그곳으로 하자. 그래 종로3가역 부근으로 아들놈과 미팅 장소로 정한 것이다. 1년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6개월마다 오는 일정중, 직전 그러니까 6개월전에는 녀석이 시간이 안되어 못만났다.
병원진료를 받고, 병원을 나서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20~30분 맞아도 옷이 젖어 불편할 정도는 아닌 그런 보슬비 수준이다. 그래 우산도 사지 않고, 약국에 들러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사고, 내가 먼저 종로3가역에 도착 했다. 이놈에게, 어디서 뭘 사먹일까? 주변을 들러보며,
‘종로3가역에서 나오자 직진하면, [낙원오피'스텔]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맞은편 골목 입구에 붉은 글씨로 [SAESEOUL], 그 앞에, [장화당]에서 우회전 바로 앞에 한정식 [담솥], 더 들어가면 [한옥랑선 익선]이라는 카페, 더 들어가 골목킅에서 우회전 하면, [요록 익성] 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장소와 음식점들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지하철로 오면서, 식사할 곳을 검색해보고, 생각해보라 그 말이다.
이곳은 '경주의 황리단길’ 을 생각나게 하는 골목길이다. 경주 황리단길은, 경주 황남동 포석로 일대의 황남 큰길이라 부르는 골목길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전통한옥 스타일의 건물에 여러 가지 상점들, 카페,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해 있고, 오랜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정취를 그대로 느껴볼 수 있으며 인근의 첨성대, 대릉원 등의 관광지를 함께 둘러볼 수 있어 경주의 명소로 각광을 받아, 젊은이들의 많이 찾는 거리가 되었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황남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합쳐진 것으로 '황남동의 경리단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이나, 경주 황리단길이나, 주변에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가게들이 즐비하고, 특히 외국인들이 많다. 이곳을 둘러보는 동안, 거진 반 정도는 외국인들로 보여진다. 흑인, 백인, 말씨들을 들어보니, 동남아 유색인종, 중국인들, 아마도 일본 인들이 지나가는 것 같다.
경주 황리단길은 과거 [경주 홍등가]로 유명 했다는 데, 그 때의 건물들을 헐지 않고 그대로 살려 관광코스로 조성했다는 데, 물론 [홍등가]지역은 아니고, 어느 길모퉁이 어느집에, 과거 홍등가를 상징하는 붉은 색 대문을 남겨두어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건축물을 남겨두었다고, 프로젝트를 갖이하는 동국대 교수분이 경주토박이라, 경주의 과거 역사를 꿰고 있어 지나는 길에, 알려주어 알게 되었다.
'경주 황리단 길'에는 아기자기한 가게, 카페, 영화관등이 몰려 있어, 경주를 찾은 사람들이 많이 방문 하는 곳이다. 황리단길은 일방통행이라도 차가 들고날수 있지만, 여기는 오로지 걸어다녀야 한다. 그러니, 아기자기하기로는 여기가 더하고, 범위나 길도 넓은 것은 [황리단길] 이 더한 것 같다.
여기의 역사도 과거 황리단 뒷골목 같은 홍등가 역사가 없을랑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이는 아마도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알려주지 싶은데, 골목길은 영판 그런 곳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 나만의 씰데없는 연상일지?
‘[한옥랑선 익선]이라는 카페에 들어가서 ‘라떼’ 한잔을 시켰다. 바캍에는 봄비가 내리고, 우산도 없이 더 돌아다니다가는 옷젖겠다 싶기도 하고 주변 분위가가 어디 앉아, 커피한잔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변형된 한옥한켠에 빈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한잔 마시고 있을 터이니 찾아와라" 하고 카톡을 넣고,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녀석을 만난 것은 카페가 아닌 종로3가역 3번 출구에서 였다. 녀석이 도착될때쯤, 내가 녀석을 마중 나갔다. 녀석에게 고기를 좀 먹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 여기는 구경만하고, 고기를 먹자. 여기는 한정식류이니, 입구로 가자"
둘이서 아까 봐두었던 골목길을 둘러만, 보고, 지나는 길에 언뜻 본 고기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종로3가 역 3번 출구 맞은 편이 6번 출구다. 아까 골목길도 6번 출구 안쪽인데, 6번 출구가 있는 지 모르고 3번, 출구 맞은 편으로 찾아 오라 했던 것이다. 6번 출구 바로 앞에 고기 집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리로 갔다. 소고기와 갈매기살을 섞어 원대로(?) 먹게 했다. 맥주도 한두잔씩 같이했다. 그 녀석이 저거 아부지 한테, 맥주 따라주는 것은 생애에, 1년전이 처음, 이번이 두번째다.
많이도 먹는다. "헬쓰를 열심히 다니기 때문에 근육관리를 위해서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엔간히 먹었지 싶은데도 추가추가...에 사양이 없다
이런 저런 이야기, 올 여름에 시작한다는 공익복무이야기, 졸업관련 요건이야기, 졸업후 진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이래라 저래라 할 내 처지가 못된다. 어디까지나 녀석의 의견을 들어주고, 내 의견만을 내는 수 밖에.
평소, “산내 다녀가라” 하면
“거기가서 심심하고 할 일이 없다”
언제나, 딱히 나무랄 수 없는 녀석의 말이 돌아오곤 했다. 부산으로 오면, 해운대 역 부근에 사는 저거 누나집에서 자고, 서울로 바로 올라가 버린다.
“집에 오면 잠자는 것 빼놓고, 어디로 싸돌아다니는 지…”
저거 누나 말이다. 그 동네주변은 온갖 놀이터가 즐비한 곳이다. 지하철을 타면 광한리, 서면, 어디든지 쏘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중, 고등학교, 교회 친구들도 만나고, PC방에, 사직 운동장에 야구응원 다니든가 할 것이다. 지놈한테는 딱이다. 그런 사정과 그 놈의 취향을 아니, 산내 다녀가라고 강요는 못하는 것이다.
설날에도, 추석때도, 저거 아부지 생신에도… 일체 산내 출입을 안하며 올 생각도 없지만, 저거 누나 집에는 한번씩 신세를 지는 모양이다. 주변에 놀이장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이 좀 든 것인지 이번에는 "산내 (아부지 사는데) 한번 다녀가야지?" 했더니,
"누나랑 의논해보께, 누나랑 같이 갈께"
'누나랑...' 저거 누나 핑계돼는 버릇은 여전하다. 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16살이나 차이나는 저거 누나가 여태, 밥 챙겨주고, 고민거리 상대해주고, 의논상대해주고, 엄마역활을 해왔기 때문에, 저거 누나랑 의논하고 누나에게 의존하는 버릇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철은 많이 들었다.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시작하는 때가 한여름이니, 지놈의 생일 이틀 후이다. 생일전에 다녀가는 것을 저거누나랑 생각해보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공익군무 전에 해외여행도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모자라는 학점도 채우고...할 일이 많을 텐데, 아직은 '아부지가 지원해달라' 무언의 압력(?)이다.
큰어머님 생각이 난다.
둘째 백부께서 일제시대 공무원하다 20대 말년에 복막염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한 것 같다. 그 백모님이 22때 일이다. 농사일하며 자식을 보살피는 일하며,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미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백모님에게 이른바 '신'이 내렸다. '무당'이 된 것이다. 무당이 된 게 차라리 다행아니였을까? 농사일은 우리 아버지가 많이 도와준 걸로 기억되고, 심심찮게, 점도 봐주고, 굿도 해주고 하면서 삶에 숨통을 트여준 것이다.
큰어머니는 당시 '영험'하다는 소문이 났었고, 연세가 드시면서, 거제 인근에서 '큰무당(大母)' 이 된 것이다. 신출내기 무당이 되면, '대모한테 인사하러 오는 사례' 가 기억한다. 그게 그 세계에서의 예의이고, 인사고, 관행이였던 모양이였다. 하지만, 일체의 집안의 길흉화복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늦둥이 아들놈이 태어난 게, 2000년 8월, 25년전이다. 아마도 백일쯤인지, 돌때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다만, 부산에서 시골집으로 새 사람 인사시키려 갔을 때다. 저거 엄마랑, 저거누나랑 같이 가서, 큰어머님께도 인사시켰다. 그러자 큰 어머님 때뜸하시는 말씀이,
"...**야, 니가 키워야 겠다'"
딸래미 보고 하시는 말씀 중 아직도 뇌리에 뚜렸이 박혀있는 말씀이다. 당시는 뭐, 노산을 하였으니, 나와 마누라는 그때되면, 애들이랑 놀아주기 벅찰 터이니, 얘가 크면, '**니가 놀아주고,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 나는 이런 정도의 생각이였나 싶었는데, 왠일일지, 뇌리 속에 그 말씀이 깊이 새겨졌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십여년 만에, 백모님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딸래미가 저거 엄마 역활을 하게 될 줄이야. 백모님이 아마, 십몇년의 미래를 본 것인지, 그냥 경험상 해 본 소리인지.... 가족간에는 과거.현재.미래를 일체 언급안하시던 백모님, 이 일을 그냥 경험삼아 흔히 하는 말로 포장하여, 진실로 미래에 대한 암시를 준게 아닌지?
딸래미와 아들을 생각할 때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고 의문이다. 백모님이 돌아가셨을 나이때가 다가오니 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인가?
이상기후로 세상이 많이 변해가리라는 데,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바꿔 주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의 변화를 미리 알려주어 대비하게 하였으면...
아들의 밝은 모습을 보며, 술도 한잔 걸치기도 한 탓도 있겠지만, 돌아오는 열차속 내내 이런 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첫댓글 늦둥이 아들을 둔 보람이 지금부터 느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은 지금부터 이겠지요.
요즘 애들이 자기 아버지 집에는 안 갈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생각없이 한 말들이 잔소리로 들리기 때문이 아니까요?
그리고 누나집에 가면 자기가 원하는 것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고 용돈도 든든히 줄 것인바 무엇 때문에 시골로 가겠소.
아프로 옥자의 생활이 부럽기만 합니다
간만에 청야거사의 나들이 기록
한 꼭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더해 가족간의 얘기, 아들과의 밀딩 등
가족사를 감춤없이 편하게 펼쳐줘서
동감하는 부분엔 무릎을 치고
촌놈 무시하는 서울내기 다마내기
얘기엔 '글마가~!"
하며 콧김도 내어보곤 했답니다
현장의 거리사진들도 잘 배열해서
읽는 내내 나도 그곳에 있는 양
생생함이 밀도를 더했습니다
촌로는 무신~!
매우 뛰어난 르뽀작가가
촌티나는 할배일 리가 없지요
다만 꽃을 좋아하는 낭만할배가 돼서 그런지
산내면에도 온갖 꽃들로 잔치를 벌여놓더니만
서울나들이의 첫걸음으로 본 장소도 화단이라!
낭만까도남으로 자처하는 내 자리를
양보해야겠습니다그려~!
언젠가 아들이 따뜻한 아부지 품으로 돌아오니 가만 기다리소 ㅎㅎ
父子가 획실히 Xerox Copy입니다.
참 정겨운 장면입니다.
둘째 자형의 큰 누가가 수학여행을 다녀오니
어머니가 자형을 낳은 것을 보고
큰 누나가 자기가 키울 것을 생각하니
퍼질러 엉엉 율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맏이는 막내에게 부모 맞잡이
잘 읽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이네요. 정겹고 리얼합니다.
오래 전 충석공 글에 늦둥이, 늦둥이 하던 애가 쟤로군요. 많이 커서 늠름해 보이고 인물도 아부지보다 훨 낫네요 뭐! 하하하. 키운 보람 있겠심다.
첨에 글을 읽을 때는 경주 부근에 산담시로 말라꼬 서울꺼정 댕기노? 경주나 대구에는 병원이 없나? 아니면 꾸준히 한 군데서 진료 받아야 될 까닭이 있나 보다 했더니 좀더 읽어 가자 그런 저런 이유도 있겠지마는 아들 보고잡아 먼 길 가는 거구나 하고 넘겨 짚어 지데요. 맞능교?
암튼 부자간의 정이 징징하게 우러나오는 글발입니다.
익선동 카페 골목은 이전에 두어 차례, 수인공이랑 몇몇 동기들 덕분에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라 현장감이 와닿네요.
'경주 부근에 산담시로 말라꼬 서울꺼정 댕기노?'
카고 이법사 말씀대로,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넘겨 짚어 지데요. 맞능교? ' 하시는 거슨 반은 맞고 반은 다른 이유가....
첫째이유
빅5병원에서 신약을 잘못 처방(+간호사의 설명)하여
당한 휴유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곳이 SS병원,
그후로 SS환자로 등록되어 오늘날까지...
SS병원정도에 진료를 받을 려면 과정이 복잡하고 여렵습니다.
그래서 등록 환자로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쪼금있고...
둘째이유
동네의사들의 엉터리 진단에 종종 당합니다. 그래 여차하면...
예를 들어, 집사함이 언양유명 어느 정형외과에서
손목터널증후군이라 해서, 수개월 외래진료를 다녔는데,
부산에 있는 아들래미 집에 갔다가 인근의 어느 병원에서
그게 아니라 단순한 통증이라 하며 1주일 약처벙으로 완치
또, 목디스크라고 졸라 치료받았는 데, 알고보니
어깨 석회 때문,,,
목디스크라 물리치료 받은 것이 오히려 어깨살을 찢어 악화사례....등등
언젠가 시골생활에서 당한(?) 의료 사고에 대해 글을 써 보리다.
샛째이유
짐작하신대로 늦둥이 만나려,
겸사겸사
@玉忠錫 그렇군요. 인구만 서울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그리 특별하지 않은 분야의 의료 기술마저 그런 차이가 실례로 드러난다니... 점점 가속화 될텐데 보통 일이 아니네요.
갸게 일에 매여 일시 추춤하는 동안, 카페 주역들의 글이 계속 올라와 있었군요.^^
일수 말대로, 조곤하게 정리된 옥자의 글이 읽기에 은은한 느낌이라..오랫만에 부드럽게 사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납니다.
무엇보다, 초상권 침해에 유의하며(?) 어렵게 찍어낸듯한 동영상이 현장 분위기를 잘 살려주네요.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은 별다를 것이 없겟지만..오랜세월 떠나 있던 서토의 눈에는..외국인들이 많이 보여
마치 외국의 유명 관광지같은 느낌이 크게 듭니다.
여건이 되면 이런 지역을 구경삼아 돌며, 맛난 것도 사묵고..공연히 죄없는 가게 주인들에게
씰데없는 시비도 걸어서 농담따묵기 하며 히히거리는 일상을.. 최고의 재미로 여기는 서토라...
옥자의 본문글이 예사로 보이지가 않능군요.
댓글을 붙이고 싶은 내용들이 좀 있는 바..나중에 또 - ^^
빈이가 아주 건장하게 잘 성장했네요.
사진으로만 보아서인지는 몰라도, 조금 과장하여..자신을 낳은 아버지보다 2배 정도
몸집이 더 크 보이는군요. 부친을 많이 빼닮기도 했고요.
이전 늦둥이 양육기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옥자의 아들에 대한 진한 사랑의 심정이
옥자의 글 어디서건 늘 강하게 풍겨납디다.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그냥 잔말없이 지긋히 아들의 주변에서 살펴보아 주며, 오직 바른 길로 향하여
전진해 갈 수 있도록.. 관여의 마음을 한정하고 있는 것도..옥자의 현명하고 뛰어난 처신으로 사료됩디다.
사실, 사랑이 강하다보면..무의식적으로 보채게 되는 부모들의 경우가 적지않은데 말이지요.
아마 옥자의 무서운 절제력일 수도-
많이도 먹는다. "헬쓰를 열심히 다니기 때문에 근육관리를 위해서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엔간히 먹었지 싶은데도 추가추가...에 사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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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부분에서는 공연히.. 돌아가신 저의 부친 생각이 문득 나더군요.
대학 초년시기 방학기간을 틈타 당시.. 강원도에서 홀로 근무하고 계시던 부친을 뵈러
강릉을 방문했을 때..마중 나오신 부친과 시내인근 양과점에 함께 들러 간식을 같이 하고
아버님의 숙소에서 며칠간 지내며 함께 소금강 등을 관광하고 돌아온 적이 있지요.
당시 저희 부친 연세가 약 52세쯤으로 계산되네요.
이후로 은퇴하신 뒤, 미국에 주재차 나와있던 저의 집을 부모님이 비교적 자주 방문오셨는데..
20년 전 한국 강릉 양과자점에서 저와의 회동 일화를 자주 꺼내시더군요.
적당히 먹고 일어나면 좋겠는데, 제가 그냥 퍼지고 앉아 그 비싼 빵과 양과자 그리고 고급 아이스케키 들을
자꾸만 집어와서 먹어재끼더라는 것이지요.
공무원으로써 빠듯한 형편의 아버지가.. 지방에 전근되어 홀로 고생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는지..
정말이지 대학생이란 놈이.. 너무 철없이 여겨져 적절히 탓하며 지적하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당시에
그런 심정을 전혀 피력하지 않았다 하시더군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서토가 그때만 해도 참으로 철부지였다 하겠지요.
물론 옥자의 경우는 그와는 달리, 경제적 여유가 풍요한 상황이라..빈이가 얼마나 많이 먹던,
외려 부자간 정이 푸근히 더 깊어지는 행복한 순간이라 하겠으며..
이후 언제라도 다시 회고될 수 있는 멋진 장면으로 새겨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