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문화기행(28) 염농산 제언 공덕비 어릴 때 본 그 비석 중학생이었던 1973년부터 3년 동안을 나는 용암면 용정마을에서 살았다. 마을을 관통하는 대로를 오갈 때면 항상 낮은 언덕 위의 비석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혹 궁금하여 비석에 새긴 글을 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어려운 한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밤, 그곳을 지나게 되면 혹시 귀신이 나타날까 두려워 냅다 내달리기까지 했다. 수많은 귀신이야기가 뇌리에 박혀있었던 탓이었다. 3년이 지난 후 그곳을 떠나게 되자, 궁금증과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그 비석도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잊고 지냈던 그 비석과 관련된 글을 성주군지(星州郡誌)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앵무(鸚鵡) 공덕비"라고 소개된 이 비석에는 원래 비각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단청무늬가 화사하고 아담한 비각을 "앵무빗집"이라고 불렀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비각은 사라졌으며, 지금은 비석과 빗집 기둥을 받치던 빗돌만 남아 있다고 했다. 앵무 공덕비를 찾아가다
1996년에 발간된 성주군지(星州郡誌)에는 앵무 공덕비와 앵무빗집의 주인인 앵무는 1889년에서 1946년까지 생존한 기녀의 이름인데, 그녀는 기생의 몸으로 용암면의 농업경제기반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두리방천의 복구사업을 추진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성주군지(星州郡誌)의 기록을 통해 그 비석에 대해 가졌던 오래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앵무라는 기녀의 공덕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앵무라는 기녀가 어떻게 용암면까지 와서 두리방천을 쌓아 홍수에 대비하고 농업경제기반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 사연이 궁금해진 것이다. "앵무" 그녀는 누구인가? 그 흔적을 찾아 나섰다. 30년 전(前)과는 많이 달라진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앵무 공덕비를 찾았다. 용암면사무소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100여m, 오른쪽 시멘트계단 위에 비석이 보였다. 비석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네 곳에 빗집의 주춧돌인 빗돌이 있고 한쪽 구석에는 제를 지낼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촛대와 향을 피운 그릇이 초라하게 놓여있었다. <염농산 제언 공덕비>
<앵무빗집은 사라지고 빗돌만 남아 있다>
염농산 제언 공덕비 앵무 공덕비라 불리는 이 비석 앞면에는 "염농산 제언 공덕비(廉隴山 堤堰 功德碑)"라고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자의 해석은 성주군지(星州郡誌)에서 옮겨왔다. 石强扵弩 돌이 쇠뇌에서 힘을 쓰니 溪澗爲東 개울물 불어 낙동수가 되고 里落故按 고향마을 일부러 더듬어보니 阡陌仍成 논밭의 두렁들이 예처럼 되었네. 魚龍古窟 물고기들의 묵은 늪에서 禾稼登塲 오곡이 용처럼 하늘로 치솟네. 國計民有 나라의 정책이 백성에 있으니 幷被其功 아울러 입었도다. 그 공덕을 汝不吾信 모두가 믿지를 못한다며는 視此林隴 이를 보라 숲진 농산의 방천을 十蕢山積 여러 사람 한 삼태기씩 흙으로 산을 쌓았으니 俾也可忘 모두가 가히 잊으리로다. 한자의 해석에 어려움이 있어 전체적인 글의 내용을 자세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방천을 쌓아 늪에서 오곡이 솟아나게 한 공덕을 잊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비석 뒷면에는 감역자의 이름과 비석을 세운 연월일이 새겨져 있었다. 성주군지의 기록에서 보듯이 1889년에 앵무가 태어났다면 그녀가 서른 한 살 되던 해인 기미년, 즉 1919년에 이 비석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監役 金容雲 崔在翰 己未 五月 五日 감역 김용운 최재한 기미 5월 5일 <염농산 제언 공덕비 앞면> <비석 뒷면의 새겨진 글> 염농산과 앵무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염농산이 방천을 쌓은 공덕을 기념하는 비인데, 마을사람들은 이 비석을 왜 "앵무빗돌"라고 했을까?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염농산은 앵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앵무는 대구의 유명한 기생이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근거로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생몰연도도 불분명하고, 앵무 혹은 염농산이라는 기명(妓名) 하나로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그녀의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는 대구삼절(大邱三絶)에 관한 것이었다. 서경덕(徐敬德),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했듯이, 대구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 달성공원(達城公園), 앵무(鸚鵡)와 그 동생 비취(翡翠)를 대구삼절로 불렀다고 한 기록이다. 몇몇 기록에서 당시 대구 기녀들의 명단이 나오는 데, 앵무라는 이름이 나오면 염농산은 없고, 염농산이 나오면 앵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앵무는 두 개의 기명(妓名)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또 있다. 농산(隴山)과 앵무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말이라는 것이다. "앵무주(鸚鵡洲)"라는 이태백의 시를 보면, "앵무새는 서쪽으로 날아 농산으로 가버렸는데(鸚鵡西飛隴山去)"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농산(隴山)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산으로 앵무새가 많이 나서 그 이름이 농산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앵무는 앵무새를 뜻하는 농산(隴山)이라는 이름을 같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앵무에 대한 기록들 앵무는 평소 후배들한테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을 섬겨서는 안되며,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면서 기생의 지조를 강조했다고 한다. 대구삼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이러한 기질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앵무는 항일정신도 대단했다고 한다. 19살 때인 1907년에는 서상돈(徐相敦, 1850~1913)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섰으며, 네 번째로 기금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 2월 6일자 매일신문 기사에서 김교성 기자는 "1907년 2월 21일 대구에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에 대구 기생 앵무는 당시 큰 돈인 100원을 의연금으로 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앵무는 “금번 국채보상은 국민 의무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일분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기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그만큼 출연하겠다.”고 선언했다."고 쓰고 있다. 2006년 2월 23일자 연합뉴스 기사에는 임상현 기자가 "특히 당시에는 유일하게 사회활동을 통해 돈을 가질 수 있었던 기생들의 활약도 눈여겨 볼만 하다. 대구지역 기생 앵무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원을 내놓아 이에 자극받은 진주와 평양의 기생들도 앞다퉈 이 운동에 참가해 여성 참여의 중요한 기폭제가 됐다."고 했다. 1908년에는 경북 관찰사인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1874-1955)이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등에 업고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객사(客舍)였던 태평관(대구시 중구 대안동에 소재)까지 허물려고 하자, 격분한 앵무와 비취 등 몇몇 뜻있는 기생들이 지역민들과 함께 농성을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오공대 김석배 교수가 쓴 글에는 앵무가 행수기생으로 나온다. "1920∼40년대 영남은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선산군 고아면에서 태어난 박녹주(朴綠珠, 1905-1979)는 14세(1918년)때 대구로 내려와 만경관 근처 달성권번에 입번해 경상감영 관기 출신 행수기생(으뜸기생) 앵무(鸚鵡)한테 춤과 시조, 소리를 배웠다."는 내용이다. 앵무가 서른 살인 1918년에는 으뜸기생이었다는 기록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농산(籠山)이 대구권번의 전통을 이어받아 달성권번을 열고 초대회장이 되었으며, 지금의 만경관극장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앵무는 성격이 올곧은 기생으로, 항일정신도 강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행수기생을 거쳐 달성권번 초대회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앵무 공덕비가 1919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두리방천을 쌓은 것은 1918년 말이나 1919년 초, 즉 행수기생을 하고 있을 때의 일로 추정되어 진다. 석재 서병오 앵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앵무와 함께 대구삼절로 불려진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석재 서병오는 1889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1896년에는 신령(新寧)군수를 지냈었다. 어려서부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통하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그로부터 석재(石齋)라는 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는 시(詩), 서(書), 화(畵) 뿐 아니라 文(문), 금(琴), 기(碁), 박(博), 의(醫), 변(辯) 등 모두에 능하다 하여 팔능거사(八能居士)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글씨를 보려면 성주군 월항면 선석사를 찾아가면 된다. 걸려있는 편액이 그의 글씨이다. 그가 어떻게 선석사의 편액을 썼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그는 대구삼절, 또는 영남삼절(嶺南三節)이라 불릴 때인 1920년에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1년에 3∼4회 열리는 시회(詩會) 때 돈을 마련키 위해 작품을 마구 제작한 경우 외에는 그의 작품을 받기는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서병오가 쓴 성주 선석사 현판 글씨> 석재 서병오에 관한 자료에 보면, "그에게 특별히 큰 현판이나 대작을 받으려면 염농산 등 달성권번에서 이름난 일류기생을 불러 크게 풍류를 즐겨야만 했다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다. 염농산이라는 이름이 대표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1973년, 1983년, 1989년 세 차례 열린 그의 유묵전과 1996년에 발간된 도록(圖錄)에는 많은 기생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무려 25명이나 된다. 염농산, 비취, 금홍, 이향, 진옥, 향완, 옥미, 남전, 추당, 연홍, 근영, 지재, 경란, 금계, 향전, 계옥, 옥강, 소옥, 설매, 섬월, 운정 등이 나오는데, 그 이름에 염농산이 있다. 앵무라는 이름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염농산이 앵무였을 것이다. 팔능거사라 불리며 풍류를 좋아했던 석재, 대구 최고의 올곧은 기생 염농산, 즉 앵무, 그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대구삼절로 불려 졌던 것이다.
<달성공원에 있는 서병오 기념비> <조선해어화사>에 나오는 앵무 대구는 평양, 개성, 진주와 함께 기생의 도시로 유명하였으나, 기생들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국기생에 대한 연구는 1927년 이능화(李能和, 1869~1945)가 지은 "조선해어화사"라는 책이 거의 유일하다. 이 책에 앵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경상감영(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 교방(감영에 딸린 기생들의 거처)의 관기였던 앵무는 훗날 대구 중구에 있었던 달성권번 소속의 기생이 되었다. 앵무는 경상감사 이천보(李天寶)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천보는 앵무의 한문 실력에 탄복을 한다. 하루는 이천보가 경상감영 어린 기생들을 불러 등왕각서(藤王閣序)를 외우게 했다. 등왕각서란 중국 당나라의 왕발(王勃, 649~676)이 지은 글인데, 등왕각은 중국 장시성 난창시에 있는 유명한 누각이다. 당 고종이 여기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왕발이 이 누각마루에서 이 글을 지어 올렸고 훗날 기생청 소속 관기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앵무의 차례가 왔다. "물화(物華) 는 천보(天寶)"란 구절에 이르러 앵무는 느닷없이 "물화는 사또"라고 바꾸어 읽었다. 사또(使道)는 백성이 고을 원을 공대하여 일컫던 말로 당시 지역민들은 경상감사를 사또라고 불렀다. 다른 기생들은 앵무가 글을 잘못 읽은 줄 알았지만 이천보는 속으로 탄성을 지른다. 사또의 이름이 천보와 같은 음이 된다는 것을 안 앵무가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관기들은 앵무의 재주를 부러워했고 이천보도 앵무를 더욱 아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천보가 대구를 떠날 때, 앵무는 만단정회(萬端情懷)가 스며든 한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鸚鵡雕籠歲月飜 앵무가 새장 속에 살면서 세월이 흘러 長時飮啄主人恩 오랫동안 주인의 은혜 먹고 살았네 主人一去秋無粒 주인 한번 간 뒤엔 가을에도 곡식 없어 道是能言不敢言 말한다고 해놓고 말하지 못하네 이 시를 가슴에 품은 이천보는 앵무에게 관수미 100섬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앵무를 다시 생각하며 성주군 용암면 두리방천 복구로 생긴 너른 들판을 지금 사람들은 "새내(新川)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분들은 "앵무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년 큰물이 져 논밭이 쓸려나가자 제방을 쌓아 공을 세운 앵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염농산, 마을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관찰사나 감사, 목사를 기리는 공덕비는 수없이 보았는데, 마을을 위하여 큰 공을 세운 기생을 위해 공덕비를 세운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이 공덕비가 더 돋보이는 것 은 아닐까? 경상감영 교방의 관기였던 대구 기생 앵무는 국채보상운동에 거금을 내놓기도 했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기생조합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던 올곧은 기생이었다. 춤과 시조와 소리도 후배를 가르칠 정도였고, 한문에도 능하였다고 하니 능력이 뛰어난 기생이었음에 틀림없다. [출처] 성주문화기행(28) 염농산 제언 공덕비|작성자 적송자 |
첫댓글 정소장님 열정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문화관광해설 심화반에 계시는 분은 긴장하셔야 될 듯...
영영 잃어버릴 수 도 있는 이야기를 정성들여 쓰셨군요, 재미있게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