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차불 삼불순 김가산냉”
요한복음 6장 1절-15절
주제) 기적을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됩시다.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로 가다가 우연히 “등차불 삼불순 김가산냉”이라고 쓰여 있는 음식점 간판을 보았습니다. 순간 저게 무슨 뜻일까?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등차불이 뭘까? 삼불순이 무엇일까? 김가산냉이 무엇일까? 그 자리에서 한참 고민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등심, 차돌 백이, 불고기, 삼겹살, 불고기 백반, 순두부찌개, 김치찌게, 가마솥곰탕, 산체비빔밥, 냉면이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이러한 오해와 착각을 해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점 사장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연히 가로로 읽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던 저의 착각에서 비롯되었던 에피소드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속에서 오해와 착각의 연속된 삶을 살아갑니다.
인터넷에서 착각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몇 개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들의 착각 - 남자의 90퍼센트는 자신이 잘 생긴줄 아는 착각입니다.
- 솔직히 나정도면 괜찮은 남자인줄 안다
여자들의 착각 -여자들의 80퍼센트는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어쩌다 사진 좀 잘나오면 지가 이쁜 줄 안다
아기들의 착각 -울면 다 되는 줄 안다
엄마들의 착각 -자기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 공부를 못하는 줄 안다.
학생들의 착각 -앞사람 등 뒤에 누워서 선생님 안보이면 선생님도 자기가 안보이는 줄 안다
성도들의 착각- 설교 시간에 고개 꽃꽂이 들고 졸면 목사님이 모르는 줄 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착각 -자기는 아닌 줄 안다.
누구나 오해와 착각은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착각에는 좋은 착각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스스로 잘생겼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있게 살아가는 자세는 참 좋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불치병일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좋지 않은 착각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착각들은 서로에게 오해와, 불신, 원망 미움을 낳게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착각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관점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말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오해로 인한 상처와 불신 원망 미움이 생기게 되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중심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말을 이해하다보니 상대방은 결코 나쁜 의도로 이야기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말을 곡해해서 듣기 때문에 오해와 착각이 생기고,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게 되고, 미움과 원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속에서도 오해와 착각의 연속적인 삶을 살고 있듯이 신앙에 있어서도 착각하고 있는 것들, 잘못 이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에 대한 오해와 착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을 행하심등에 대한 오해와 착각이 없는지도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한 오해, 성경에 대한 오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잘못된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최대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서를 묵상하며 읽으셔야 합니다. 나의 관점만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은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본문의 재경청)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서에 모두 기록되어져있는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의 기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만큼은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줄거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무리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솔로몬 행각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원인은 다른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산에 제자들과 다시 오르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또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침 한 아이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에 축사하시고 그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린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그 떡과 물고기를 먹고 배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열 두 광주리의 음식을 남게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저마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겼으니 이것이야 말로 기절초풍할 능력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평범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14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참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한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무리들이 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는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리들이 오해를 키우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표적’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무리들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표적’자체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신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를 채워줄 임금으로 삼으려는 행동으로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분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착각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첫째 주님께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인생의 아무런 희망이 없이 38년 동안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고쳐주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사건을 보았던 제자 빌립에게 “어떻게 하면 저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빌립은 굶주린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해결 방법은 예수님 당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무리를 먹일 수 있는 것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빌립은 돈이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친히 목격했지만 빌립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돈이 주님보다 더 큰 능력으로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다가 왔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빌립의 이야기는 우리가 결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돈이 세상을 심판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세상을 심판합니다. 심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합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 중에도 가장 큰 착각입니다. 오해 중에도 가장 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세상을 지배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있는 교회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지배를 받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사업계획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합니다. 없어도 합니다. 왜입니까?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가 가진것은 한 소년의 보잘것 없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일찌라도, 그것으로 5천명을 먹이고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무리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80-90년대 한국 스크린을 강타한 장르는 홍공영화였습니다. 홍콩영화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복수’라는 주제가 항상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에도 특징이 있습니다. ‘히어로’ 영웅의 존재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항상 ‘영웅’이 등장해서 도탄의 빠진 민생들을 영웅이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결국에는 이겨낸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슈퍼맨, 타잔, 터미네이터등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이러한 세계관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유년시절 저의 꿈은 ‘영웅’이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약한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이 시대의 영웅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약해빠져 날마다 얻어 터지다 슈퍼맨이나, 타잔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이기 보다. 능력있는 영웅이 되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아마 우리들 중 그 어떤 한 사람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연약한 존재가 되어서 항상 도움만 받으며 살고 싶은 꿈을 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기를 더 좋아하고 희망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입니까? 도움 받는 다는 것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줄 수 있는 여력이나 힘이 있다는 것, 즉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은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가 기적만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 성장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거룩한 성도로 거듭나기를 원하십니다. 기적을 체험한 5천명 중에서 한 명이 아니라 삶속에서 5천명을 먹이고 5천명을 살리는 능력의 사람으로 성장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무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들을 먹여주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 자신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통해서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