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태권도를 하는 독일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와 동행한 학생을 통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한국의 단급 제도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제기 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태권도를 시작한지 5년이 되어 가며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태권도의 종주국 국기원에서 초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무예 수련장을 돌아다니면서 한결 같이 놀라고 실망하였다는 것이었다.
태권도는 물론이고 합기도나 여타의 무예 수련장을 찾았을 때, 어린이 중심의 수련체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 실망한 것은 7∼8세 밖에 안된 아이들이 매고 있는 품띠 혹은 검은띠에 있었다. 정작 자신은 5년 가까이 태권도를 신앙처럼 여기며 수련하여 왔는데 그리고 이제야 위대한 종주국에 초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 왔는데, 무술의 천재라면 모를까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그렇게도 자신이 선망해 왔던 블랙벨트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무예인의 수련 경력을 표현할 때 "몇 단인가?"가 주요 관심사이다. 무예에 문외한 사람들이라도 단급이 무예인의 무술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믿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류에 불과 하다. 특히 80년대 이후에는 단급 제도가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하는 제도로만 쓰여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단급제도는 중국의 바둑에서 기원한 것을 일본에서 무도의 수련체계에 도입한 것이며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무예는 이 제도를 수용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비교적 단급에 걸맞은 수련 과정을 통하여 의미 있는 유단자가 되었으며 이들 스스로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으며 도복을 검은띠로 묶어 어깨에 걸치고 수련장과 집을 오가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이후에는 신흥 무예의 확산과 이들의 사회적 보급 의지에 따라 단급 제도는 단기적 지도자 양성에 이용되어 왔다. 또한 기존의 비교적 엄격한 규율을 가진 무예 단체들도 동기유발이라는 명분아래 단급을 남발하여 왔다. 또한 종주국답게(?) 군대에서 취득한 태권도 초단, 한학기 대학 교양 과정 수업을 통하여 인준된 태권도 초단이 과연 수련 시간과 실력에 알맞은 적절한 인준인지도 의문이다
운동 기능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취득한 단급이 과연 타당한 평가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합쳐서 이십단, 삼십단 심지어 오십 몇 단의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증의 호한성 그것도 성격이 전혀 다른 무예 종목간에도 단의 호환성이 있어서 특정 무예의 고단자는 불과 몇 개월 혹은 몇 일 만의 연수로도 타 종목의 고단(보통 4단이상)을 획득 할 수 있는 방편이 마련되어 있다. 아예 타무예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체도 있다.
이처럼 대부분 한국 무예 단체들의 단급 제도는 엄격한 심사 기준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며 심사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하여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은 단급이라 할지라도 어느 선생에게서 배우고 심사를 보았느냐에 따라서 실력이 균등하지 못하며 특히 다른 무예간의 단급 비교는 애초부터 동등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유도, 합기도, 검도 등 몇몇 무도는 국가 기관이나 사설 기관에 의하여 그 단급이 경력으로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에 따라서 레스링, 씨름 등의 일각에선 단급 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내 단급 제도의 흐름은 적절한 시간성이 배제되고 상업성을 내포한 못 믿을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정작 유단자들도 초단은 아무나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자긍심도 약하다. 쉽게 취득한 것은 가볍게 여겨지는 법이며 땀과 인내에 의하여 어렵게 얻은 것은 소중히 여겨지는 법이다.
학부시절에 3년간 일본의 아이끼도(합기도) 수련생들과 교류한 적이 있었다. 아이끼도는 보통 유도복과 같은 복장 위에 하까마라고 부르는 치마바지를 입고 연무 하는데 당시 교류한 학생들은 대부분 3년 이상의 수련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말에 의하면 남학생은 3년 동안 치마바지를 입을 수 없으며 유도복에 하얀띠만을 매고 수련한다는 것이다. 이후 엄격한 심사에 통과한 자들에 한하여 검은띠를 매고 치마바지를 입고서 수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3년이면 하얀띠에 때가 묻어서 검어지게 되며 수련생들이 입은 옷을 보면 수련 경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통 3단 이상인 우리 한국 학생들은 초단자에 불과한 일본 학생들의 기술적 완숙도에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단급은 일정한 시간을 바탕으로 수련자의 단련과 노력, 인내, 고뇌, 경력 등이 담겨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복싱의 손기술이 눈에 쉽게 각인 된다 하여 몇 개월만에 익힐 수는 없는 것이다. 불과 몇 일, 몇 개월의 연수로 인정된 지도자들이 과연 얼마나 그 무예를 인식하고 깊이를 느낄 수 있을까? 무예 수련은 기술의 채집 혹은 암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몸을 반복시켜 원리를 터득해 나갈 때 뭔가 실마리가 잡혀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전통 무예 운운하면서 일본식 단급 제도와 허리띠 제도를 모방하는 무예단체들 속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도 끼어 있다는 것이다. 단체를 불문하고 동째나 마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이는 분명 단급 제도의 일환이며 아예 일본식 단급 제도를 그대로 쓰는 단체도 있다.
이는 마치 한국 사람이 일본의 하까마 복장을 하고 신라에서 기원한 한국 검법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혹자는 말한다. 단급제도는 지속적인 수련을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수련생들에게 적절한 제도라고...,
필자는 말한다. 수련생들에겐 분명 적절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운영자에겐 상업적으로 적절해 가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무예에 있어 동기의 부여 방법이 단지 단급 제도로만 국한되는가?
이 글이 이 땅의 진정한 무예인들에게 누가 되지를 않기를 희망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