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南의 傳統音樂
제1절 개 관
전남의 음악을 역사적(歷史的)으로 살펴보는 작업은 오늘의 음악현상(音樂現狀)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미래의 음악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남의 음악문화가 일반 민중의 구전음악(口傳音樂)으로 전수되었던 때문인지 문헌적 자료를 거의 없는 실정이고, 특히 한일 합방 이전의 음악의 실체를 파악 할 수 있는 악보나 음향자료는 구할 수가 없어서 전남의 전통음악을 어떤 문헌을 근거로 연사적으로 논증하는것은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전라남도에 극한(極限)한 음악의 역사적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지만은, 전남지역은 넓은 의미의 호남 문화권 내지는 백제문화권이므로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동일(同一) 문화권의 음악사를 간추려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삼한시대의 전라도 지역은 마한(馬韓)에 속해 있었는데, 마한에 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사기(史記)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중국의 위서동이전 마한 조(魏書東夷傳 馬韓 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나 있다.
마한은 항상 5월의 씨뿌리기가 끝났을때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낮과 밤을 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무리지어 노래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 움직이는 모습은 수 십인이 함께 일어나 앞사람의 뒤를 서로 따르며 땅을 밟으며 구부리고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맞았고, 악곡의 구절은 마치 탁무와 같았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마한에는 풍농기원제(豊農祈願祭)와 같은 큰 행사를 할 때 樂歌舞의 종합적인 연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과 관련하여 함화진과 정익섭은 강강술래의 기원유래(起源由來)를 동이전 마한조에 두었고, 지춘상은 농악의 기원유래를 동이전 마한조에 두었다. 위서 동이전의 내용만으로 전라도 지방에 해당하는 마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음악인 것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노래와 춤과 술을 즐기며 밤낮을 계속하여 연희하는 집단 의식은 마치 지금의 동제나 도당굿의 형태와 비슷하다. 이러한 의식행사에서 연행되었던 樂歌舞가 지금의 전남지역 민요를 대표할 만한 강강술래나, 농악, 무속음악으로 발전되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삼국시대 중에서 이 지역의 왕조였던 백제에서는, 6세기 무렵 일본에 횡적, 군후( ), 막목 등의 악기와 무(舞)를 전한 바 있었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북사(北史)}를 인용한 글에 백제에 고( ), 각(角), 적(笛), 공후( ), 우( ), 지( ) 등의 음악이 있었다고 쓰여졌다.
위와 같이 백제의 음악은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의 음악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특색있게 부각된것은 6 세기 초에 미마지가 일본에 전하여준 기악무(伎樂舞)이다. 이 기악무는 현재 우리 나라의 양주산대도감(楊州山臺都監)놀이 와 봉산(鳳山)탈춤 등의 가면극(假面劇)과 유사하다.
노래로는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방등산(方等山), 정읍(井邑), 지리산(智異山) 등이 악보없이 백제속악이란 이름으로 {고려사} 악지에 전한다. 앞의 내용으로 보아 백제의 민간에서는 많은 노래들이 불려 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와 같은 음악의 터전위에 남도 특유의 음악이 발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앞의 노래 중 "정읍"은 고려시대엔 성악곡인 대표적인 향가로 불려 졌으며, 조선 말기 이후로는 가사는 없어 지고 기악합주곡으로 편성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주되는 정악합주곡의 대표적인 곡이기도 한다.
한반도가 통일 왕조를 이루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는 10여 세기 동안의 음악문화에 관한 기록은 궁궐이나 선비계층, 또는 경기 지방의 음악문화 위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전라도 지역의 음악현상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전통음악의 장르들을 보고 미루어 추측하자면 무속음악과 민요, 농요 등의 성악곡이 전라도 특유의 음조직을 형성하며 발전하였고, 그외 시조나 가사, 풍류 등도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전라도의 각 사찰에서도 범패가 성행하였음을 각 사찰의 역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에 발달된 장르가운데 민중의 정서와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민요이다. 이러한 민요 중에 농요 한가지만 보더라도 모를 찔 때와 심을 때의 노래가 다르고 논을 맬 때에도 각기 몸 동작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추수한후 길꼬냉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등 다양하게 나누어져 있다. 또한 부녀자들이 밭을 맬 때의 노래가 있고, 베틀을 짤 때 부르는 노래 등 각기 일과 동작에 맞는 노래가 전해져 온다. 이러한 농요 외에도 강강술래나 진도아리랑 같이 온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놀면서 부를 수 있는 유희요가 있고, 고기를 잡을 때 부르는 어요, 상여 나갈 때 부르는 만가(晩歌), 아기를 재울 때 부르는 자장가와 동요(童謠), 호독한 시집살이의 설음을 한탄하는 시집살이요(婦女謠) 등 다양한 민요들이 있다.
남도 민요들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그저 혼자서 노래를 부르는 끝내는 단순한 무절형식(無節形式)의 노래가 아니고, 어느 한사람이 앞 부분을 부르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이 뒷부분(후렴구)를 제창으로 불러주고, 또 다시 다른 한 사람이 앞 부분을 부르는, 나머지 사람들이 제창하는 유절형식(有節形式)의 메기고 받는 소리로 되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기고 받는 형식은 남도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 양식에서 출발된 것이다. 즉 두레나 품앗이와 같은 공동 생활에서 발생된 것이기에 단합된 힘과 평등화된 정신 요소들이 내면적인 정신 요소로 작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전라도의 음악은 개성적인 음악어법으로 크게 발달하여 전라도에 극한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 발전되어 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산조와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그 근원을 꼭 전라남도에 극한할 수는 없지만, 이 지역에서 명창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특히 산조는 그 시조(始祖)가 전남 영암사람인 김창조로서 시나위나 봉장취와 같은 무속 기악곡을 바탕으로 판소리의 가락을 넣어서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다른 악기 산조의 유래도 전라남도의 명인으로 부터 시작된다.
호남지방에서 발생하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술 성악곡으로 발전한 '판소리'의 기원은 우리 나라 원시 종교인 무속(巫俗)의 무굿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했다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고, 다른 민요 등의 노래를 통하여 음악적으로 더 발전되었다고 한다.
판소리가 발생된 時期인 약 200여년 조선 말기의 사회는 수 많은 난(亂)으로 인하여 나라는 파탄 직전에 놓였고, 일반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때에 발생된 판소리는 그 사설 내용이 몰락한 양반을 조롱하고 꾸짖는 백성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춘향가를 통하여 몰락한 양반의 대역인 변사또의 행실을 이야기하고 급기야 벌을 주고 꾸짖는 내용과 춘향이의 정절을 강조하게 한것이다. 또한 심청가를 통하여 효행을 노래하고, 흥보가에서는 권선징악과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하였으니, 판소리야말로 암울했던 조선 말기에 원한 섞인 백성들의 노래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판소리는 남도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恨의 예술"이라는 독특한 이면(裏面)을 더욱 발전시켰고 다른 지방에는 없었던 '계면조'라는 선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악 독주곡의 한 갈래로 자리를 차지한 '산조' 또한 남도 음악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산조는 남도 소리인 판소리나 시나위가락을 규칙적인 장단(長短)의 틀에 넣어 연주하는 '즉흥성' 이 가미된 음악이다. 산조의 유래는 이곳 전남 영암 출신의 김 창조(1865-1929)가 처음으로 가야금이란 악기를 통하여 그 틀을 만들었다고 전해 진다. 그 이후 백 낙준(1876-1930)에 의하여 거문고 산조가 만들어 지고, 박 종기에 의해 서 대금산조가, 지 용구에 의해서 해금산조가, 최 응래에 의해서 피리 산조가, 한일섭에 의해서 아쟁산조 등이 계속하여 만들어져 현재에 있어서는 그 유파만 하더라도 백여개를 헤아릴 정도이다.
일제 침략시기의 이 지역의 전통음악의 명맥은 광주권번(圈番)을 비롯한 순천권번, 목포권번등과 각 지역의 신청(神廳) 등지에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해오면서 해방 이후에는 광주성악연구회의 결성되었다. 협률사와 같은 성격의 단체들이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일제 말엽과 해방 직후에 걸쳐 창극과 삼현육각 등의 전통음악을 지방곳곳을 찾아 다니며 공연하면서 민중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주고 전통음악의 보급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산업의 발달로 말미암아 전통음악의 근간(根幹)이 되는 농요(農謠)나 어요(魚謠)등의 일노래는 생활의 현장에서는 사려져 갔다. 반면에 광주를 비롯한 목포, 순천, 여수 등 각 지역마다 국악원(國樂院)이 만들어져 판소리나 산조 등의 보급과 교육이 활발해졌고, 전남대학교와 광주예술고등학교에 국악과가 설치되어 고급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