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설>
한국 가장많은 성씨 인구를 가진 김씨의 본관은 문헌상 623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이 가운데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본 미만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거의 모두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계와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계의 어느 한쪽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갈래로 대별된다.
김해김씨로 대표되는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가락국의 임금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이 수로왕 후손 가운데에는 김해김씨 외에 허씨(許氏) 및 인천이씨(仁川李氏)와 함창김씨(咸昌金氏) 등이 있다. 또한 진주김씨(晋州金氏)·수원김씨(水原金氏)·영동김씨(永同金氏) 등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허씨는 수로왕의 두 아들에게 비(妃)인 허왕후의 성을 계승하게 한 것이므로 이성(異姓)이면서 혈족이 된다. 이 허씨의 후손인 기(奇)가 신라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부터 이씨로 사성(賜姓)을 받아 뒷날 인천에 관적(貫籍)하게 되어 인천이씨가 되었는데, '가락중앙종친회'에서는 이들 허씨와 인천이씨를 종친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동성동본이지만 이족(異族)인 김해김씨도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제7대손인 시흥(時興:金寧君)의 후손 김녕김씨(金寧金氏)와 임진왜란 때 왜병 3,000명을 이끌고 항복,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된 왜장 사야가(沙也可:金忠善)의 후손이 그것이다. 김녕김씨는 처음에 김해김씨와 혼동되어 '선김(先金)'이나 '후김(後金)'이라 하다가 조선 고종 때 김녕김씨로 확정되었다.
경주김씨계의 원조인 김알지는 65년(신라 탈해이사금 9) 경주 계림(鷄林)의 소나무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왕이 '김'이라 지어 주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전하고 있는데, 신라 초기의 김씨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알지의 제7대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종(分宗)되고 《김씨대종사(金氏大宗史)》에도 266본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50여 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헌강왕계(憲康王系)의 광산, 무열왕계(武烈王系)의 강릉, 신무왕계(神武王系)의 영동김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에게는 아들 9명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넷째 은열(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던 듯하며, 구안동(舊安東)·청풍(淸風)·김녕(金寧)·도강(道康)·전주·양근(楊根:益和)·영광·안산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밖의 경주김씨계로는 선산(善山)·의성·언양(彦陽)·울산·나주·상산(商山)·수원·안로(安老)·연안·순천(順天)·고령·양근 등을 들고 있다. 고로(古老)들은 흔히 명문(名門)을 말할 때 '연이(延安李氏)·광김(光山金氏)·달서(達城徐氏)…' 식으로 명문의 서열을 꼽아 많은 김씨 가운데서도 '광김'을 으뜸으로 꼽았는데,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는 안동김씨를 비롯, 청풍·연안·경주 김씨 등지난날 이름을 떨친 명문이 많이 있다.
김씨 중 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 수를 보면 안동이 315명, 광산 265명, 경주 202명, 연안 163명, 김해 123명, 청풍 110명, 강릉 96명, 의성 96명, 선산 60명, 상산 55명의 순이다. 또한 3정승 중 김씨는 52명으로 이씨의 68명 다음인데, 이 중 신안동(新安東)이 15명, 청풍이 8명, 연안·경주가 각 6명, 광산이 5명, 구안동 4명의 순이다. 또 명문의 척도로 삼았던 대제학(大提學:文衡)은 광산이 7명으로 전주·연안 이씨와 더불어 전체 씨족 중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신안동 6명, 청풍 3명, 의성 1명이다. 61명의 김씨공신 중 구안동이 9명, 광산·청풍이 각 6명, 김해·경주·연안이 각 4명이다. 조선 역대왕비 가운데는 경주·신안동이 각 3명, 청풍이 2명, 연안·광산이 각 1명으로 모두 10명이다. 대대손손 더없는 영예로 알았던 문묘(文廟)에 배향된 김씨는 광산김씨의 장생(長生)·집(集) 부자와 울산김씨의 인후(麟厚), 서흥김씨(瑞興金氏)의 굉필(宏弼) 등 4명이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94만 9642가구에 인구 544만 275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208만 852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21.7%,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위를 차지하여 2위인 이씨보다 약 66만 가구나 많았다. 이 중 서울에 34만 가구, 부산·경남에 29만 3000가구, 대구·경북에 24만 7000가구, 광주·전남에 19만 9000가구의 순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인구주택조사에서는 가구수 3,102,537가구, 인구수 9,925,949명으로 286성중 제1위를 차지했다.
(1) 김해 김씨(金海 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유신(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관(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仇衡)의 증손으로, 그의 조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무력(武力)이고, 그의 부친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서현(舒玄), 그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 우항(宇杭)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한말 이후 김해김씨는 으뜸가는 성씨 인구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삼현파의 파조(派祖)인 관은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고, 그 5세손인 극일(克一)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차자(次子) 맹(孟)의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 등 세 아들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하였다.
이밖에 이조참판·시문가(詩文家) 현성(玄成), 사군파 파조(派祖) 익경(益卿), 예조판서 조, 고려의 좌시중(左侍中) 보(普), 조선시대의 무장(武將) 경서(景瑞)·완(完), 학자로는 자정(自貞)·덕승(德承), 화가로는 홍도(弘道)·양기(良驥) 부자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29만 5080가구에 412만 49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본관별 인구순위에서도 1위였다.
(2) 경주 김씨(慶州 金氏)
김해김씨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輔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파계가 복잡하지만,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파로는 대안군파[大安君派:은열공파(殷說公派)]·태사공파(太師公派)·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영분공파(永芬公派)·호장공파(戶長公派)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역대에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열공파와 태사공파로, 조선시대에는 6명의 정승과 2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4만 2018가구에 173만 67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안군파〉 파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넷째 왕자로 전하며, 중시조는 고려의 장군 순응(順應)이다. 조선 전기의 좌찬성 균(謚)은 중시조의 12대가 되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명원(命元), 판서 남중(南重), 숙종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주신(柱臣), 좌의정 사목(思穆), 판서·대제학 창희(昌熙), 고종 때의 유명한 총리대신 홍집(弘集) 등이 모두 순응의 후손이다.
〈태사공파〉 태사공 인관(仁琯)은 경순왕의 후손, 혹은 헌강왕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8대손 자수(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자결로써 충절을 지켰고, 그의 8세손이며 조선시대의 황해도 관찰사인 홍욱(弘郁)의 자손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은열공파 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2대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흥경(興慶), 예조판서 이주(燎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노경(魯敬), 서예가 정희(正喜), 판서 노응(魯應), 좌의정 도희(道喜), 영조의 국구(國舅)이며 어영대장을 지낸 한구(漢耉), 우의정 관주(觀柱)가 모두 홍욱의 후손이며, 또한 노론(老論)의 거두 유경(有慶)은 그의 종증손이 된다.
〈판도판서공파〉 경순왕의 후손 장유(將有)를 파조로 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판서·제학 정(淨)이다.
〈호장공파〉 대표적 인물은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며 사학자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부식(富軾)이다. 하지만 그 후손은 전하지 않고 있다.
〈영분공파〉 영분공 명종(鳴鐘)은 신라 경순왕의 셋째 왕자로 전한다. 이후 수은공파(樹隱公派)·시어사공파(侍御史)·두계공파(杜溪公派)·참찬공파(參贊)·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등의 14개로 분파되었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3명의 왕비 가운데 한 사람인 정안왕후는 월성부원군 천서(天瑞)의 딸이다.
(3) 광산 김씨(光山 金氏)
신라 신무왕의 셋째아들 흥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3세손 길(佶)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大匡)에 오른 정(鼎)의 아들인 약채(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 3형제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장생(長生)은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集)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槃)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구영언》을 낸 가인(歌人) 천택(天澤), 영의정 상복(相福), 우의정 희(喜), 이조판서 상휴(相休)·기만(箕晩)·기은(箕殷), 대제학 만기(萬基)·만중(萬重)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진규(鎭圭)는 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양택(陽澤)은 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춘택(春澤),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는 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진구(鎭龜)의 후손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 8936가구에 83만 70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 안동 김씨(安東 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김씨〉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방경(方慶)이다. ‘구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 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九容)·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구(九)가 있다. 구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만 2645가구에 42만 5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안동’의 시조 선평(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상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儷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州)·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신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5068가구에 4만 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 강릉 김씨(江陵 金氏)
시조는 신라의 시중(侍中)·명주군왕(溟州郡王) 주원(周元)이다. 인물로는 3대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기(上琦), 인존(仁存)·고(沽) 형제, 인존의 아들 영윤(永胤)·영관(永寬) 형제, 조선시대의 예조판서 첨경(添慶), 판서 시환(始換)·시형(始炯)·시위(始登)·상성(尙星), 판윤 시영(始煐), 우참찬 노진(魯鎭), 영의정 상철(尙喆), 판서 화진(華鎭)·상중(尙重), 우참찬 계락(啓洛)·상집(尙集), 공신·판서 기종(起宗), 서예가·목사 행(行), 40여 년 간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반(泮) 등이 있는데, 반의 후손을 세칭 ‘강서김씨(江西金氏)’라고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릉김씨(江陵金氏)를 빛낸 사람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만 2050가구에 16만 59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 연안 김씨(延安 金氏)
고려 사문박사(四門博士) 섬한(暹漢)을 시조로 하고 있다.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조선시대에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163명을 냈다. 시조의 제5대손 도(濤)가 고려 밀직제학(密直提學), 그의 아들 자지(自知)·여지(汝知)·하(何)가 조선시대에 판서를 지냈고, 자지의 후손에서 영의정 전(詮)·근사(謹思), 대제학 감(勘), 영의정 안로(安老), 선조의 국구 제남(悌男), 부자 영의정 익(操)·재찬(載瓚), 우의정 유연(有淵), 정란공신·판서 효성(孝誠)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5215가구에 7만 97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 의성 김씨(義城 金氏)
경순왕의 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인 석(錫)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용비(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용필계에서 대제학·학자 안국(安國), 참판·학자 정국(正國) 형제가 나왔고, 용비계에서 부제학 성일(誠一), 대사헌 우옹(宇勒) 등이 배출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인 근세 인물로는 학자 흥락(興洛), 독립운동가·유학자 창숙(昌淑)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7만 9368가구에 25만 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8) 선산 김씨(善山 金氏)
고려 공신·시중 선궁(宣弓)을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 시중 봉술(奉述), 삼사우윤 봉문(奉文)의 대에서 세계가 갈라져 봉술계에서 고려 말의 절신(節臣) 제(濟)·주(澍), 조선시대의 좌의정 응기(應箕), 동인(東人)의 영수 효원(孝元), 판서 이원(履元)·세렴(世廉) 등이 나왔다.
봉문계에서는 거유(巨儒) 숙자(淑滋), 판서·학자 종직(宗直)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 문과 60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만 4422가구에 10만 96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 청풍 김씨(淸風 金氏)
청풍김씨(淸風金氏)는 마의태자 일의 차남인 대장군공 순웅의 12세손인 고려 말의 문하시중 대유(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이 문중에서는 조선시대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을 냈다.
대표적 인물로는 성리학자·대사성 식(湜), 영의정 육(堉), 판서 좌명(佐明), 현종의 국구 우명(佑明), 우의정 석주(錫胄), 정조 국구·판서 시묵(時默), 판서 원식(元植)·경선(景善)·익문(益文), 우의정 구(構), 그의 아들 재로(在魯)와 손자 치인(致仁)의 부자 영의정, 좌의정 종수(鍾秀), 성리학자 종후(鍾厚), 대제학 유(辣), 판서 취로(取魯), 좌의정 약로(若魯), 영의정 상로(尙魯), 판서 종정(鍾正)·동건(東健)·학성(學性) 등이 배출되어 이름을 떨쳤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9527가구에 9만 4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 김녕 김씨(金寧 金氏)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시조는 은열(殷說)의 현손 봉기(鳳麒)의 넷째 아들 시흥(時興)이다. 고려시대에 평장사 향(珦), 병부상서 정병(挺丙) 및 판도판서 광저(光儲)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판서 익생(益生)·윤달(潤達)·문기(文起), 좌찬성 인찬(仁贊), 한성판윤 종남(從南)·응수(應壽), 그리고 방어사 언공(彦恭)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6만 2204가구에 51만 30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 순천 김씨(順天 金氏)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시조는 태봉국(泰封國)의 인가별감(仁駕別監) 총(摠)이며, 그 후손인 윤인(允仁)·대영(臺泳)을 각각 중시조로 하는 두 파가 있다. 인물로는 조선시대의 좌의정 종서(宗瑞), 판서 종한(宗漢), 검교좌의정 승주(承廚), 영의정에 추증된 여물(汝物), 학자이며 문학가(文學家)인 흥국(興國)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6178가구에 5만 22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2) 청도 김씨(淸道 金氏)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8대손이며 고려의 평장사 지대(之岱)이다. 조선시대에 좌참찬 점(漸), 대사간 난상(鸞祥), 공신 희방(希邦), 학자 응하(應夏)·익동(翊東), 지리학자 정호(正浩)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3675가구에 7만 55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3) 상산 김씨(商山 金氏)
상산김씨(商山金氏)를 상주김씨(尙州金氏)라고도 하며, 경순왕의 후손 수(需)를 시조로 하고 있다. ‘삼원수(三元帥)’ 득배(得培) 득제(得齊) 선치(先致) 3형제가 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14) 언양 김씨(彦陽 金氏)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 선(鐥)이다. 고려 때 병부판사 취려(就礪), 검교시중(檢校侍中) 경직(敬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천일(千鎰)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1818가구에 3만 8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5) 풍산 김씨(豊山 金氏)
풍산김씨(豊山金氏)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문적(文迪)이다. 조선시대의 중추부동지사 양진(楊震), 우참찬 수현(壽賢), 문장가 응조(應祖)·봉조(奉祖), 학자 종휴(宗烋)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872가구에 1만 24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 서흥 김씨(瑞興 金氏)
서흥김씨(瑞興金氏)의 시조는 은열(殷說)의 후손 중랑장 보(寶)이다. 판서 중건(中乾), 학자 굉필(宏弼), 의병장 충수(忠守), 왕자사부(王子師傅) 건(鍵), 학자 대진(大振)·하석(夏錫)·경(硬)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980가구에 2만 83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7) 울산 김씨(蔚山 金氏)
경순왕의 아들 덕지(德摯)를 시조로 하고, 고려의 삼중대광 환(環)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울산김씨(蔚山金氏)가 많이 살고 있는 호남에서는 예로부터 조선 중종 때의 명유(名儒) 인후(麟厚) 집안을 4대 명족의 하나로 꼽고 있다.
학자 시서(時瑞)·정수(正洙)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병로(炳魯), 제2대 부통령 인촌(仁村) 성수(性洙)를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1270가구에 3만 62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8) 나주 김씨(羅州 金氏)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손자 나주군(羅州君) 운발(雲發)이다. 고려시대의 대제학 대경(臺卿), 조선시대의 무신 정준(廷儁)·경석(景錫)·적(適)·충수(忠守)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4387가구에 4만 64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 전주 김씨(全州 金氏)
전주김씨(全州金氏)의 시조는 신라의 예(芮)로 전한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치원(致遠)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8126가구에 5만 7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 원주 김씨(原州 金氏)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후손 거공(巨公)이다. 좌의정 응남(應南), 우의정 덕원(德遠)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458가구에 1만 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1) 부안 김씨(扶安 金氏)
부안김씨(扶安金氏)는 경순왕의 장자 일(鎰)을 시조로, 고려시대의 이부상서 경수(景修)를 1세로 하고, 평장사 구(坵)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7391가구에 5만 63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2) 예안 김씨(禮安 金氏)
예안김씨(禮安金氏)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호장 상(尙)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역학자(曆學者)·판서 담(淡), 대사헌 륵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859가구에 1만 53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3) 안산 김씨(安山 金氏)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시조는 은열(殷說)의 후손 긍필(肯弼)이다. 세 딸이 고려 현종비가 된 은부(殷傅), 조선시대의 이조판서(吏曹判書) 정경(定卿), 기묘명현(己卯名賢)인 필(珌)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656가구에 1만 49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4) 영광 김씨(靈光 金氏)
영광김씨(靈光金氏)의 시조는 은열의(殷說) 현손이며 고려시대의 평장사 심언(審言)이다. 대호군 천보(千寶), 병부상서 사순(思順), 병마절제사 해(該), 참판 필(珌)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9,974가구에 3만 24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5) 도강 김씨(道康 金氏)
도강김씨(道康金氏)의 시조는 은열(殷說)의 7대손이며, 고려시대의 시중 희조(希祖)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회련(懷鍊), 목사 약묵(若默), 의병장 후진(後進), 학자 급(汲)·만정(萬挺)·도원(道元)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639가구에 2만 12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6) 개성 김씨(開城 金氏)
개성김씨(開城金氏)의 시조는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7대손이며 고려시대 평장사인 용주(龍珠)이다. 평장사 준(晙), 의병장 황(滉)·유(濡)·지(漬) 형제, 화가 응환(應煥)·득신(得臣)·석신(碩臣)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434가구에 2만 3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7) 진주 김씨(晉州 金氏)
진주김씨(晉州金氏)는 고려 문하시중 추(錘)를 시조로 하는 신라계와 유신(庾信)의 아들 원술(元述)을 시조로 하는 김수로계로 나뉜다. 신라계에서는 고려시대 집현전학사 무진(茂珍), 김수로왕계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진무공신(振武功臣) 양언(良彦)이 알려져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096가구에 1만 97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8) 고령 김씨(高靈 金氏)
고령김씨(高靈金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문하평리(門下評理)·익대공신(翊戴功臣)을 지낸 남득(南得)이다. 의병대장·병마절도사를 지낸 면(沔)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279가구에 1만 36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9) 영동 김씨(永同 金氏)
영동김씨(永同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전객서령(典客署令)으로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영이(令貽)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78가구에 2,9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 공주 김씨(公州 金氏)
공주김씨(公州金氏)의 시조는 예조판서 의손(義孫)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401가구에 7,5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1) 덕수 김씨(德水 金氏)
덕수김씨(德水金氏)의 시조는 부사(府使) 이(泥)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091가구에 3,5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2) 청주 김씨(淸州 金氏)
청주김씨(淸州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후손 정(錠)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9,161가구에 2만 91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3) 삼척 김씨(三陟 金氏)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추의 아들 위옹(渭翁)이다. 위옹은 고려때에 삼한벽상공신으로 벼슬이 좌승상에 이르고 실직(삼척)군왕에 봉해졌다. 고려의 관찰사 복영(僕永), 사공(司空)·승련(承鍊)·시중을 지낸 인궤(仁軌)·의궤(義軌), 평장사 영(泳), 조선의 왕자사부 양보(良輔), 공신 기문(起文)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5442가구에 7만 99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4) 함창 김씨(咸昌 金氏)
함창김씨(咸昌金氏)는 경상남도 김해 구지봉에서 수로왕과 함께 금합에서 태어난 고령가야의 왕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의 14세손 김선(金瑄)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391가구에 2만 63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5) 수원 김씨(水原 金氏)
수원김씨(水原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증손이며 고려의 태자소보(太子少保)인 품언(稟言)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997가구에 1만 60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6) 해평 김씨(海平 金氏)
해평김씨(海平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시중 훤술(萱述)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449가구에 4,6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7) 영암 김씨(靈巖 金氏)
영암김씨(靈巖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염찰사(廉察使) 숙(淑)이다. 고려의 평장사 세정(世貞), 첨의평리(僉議評理) 한빈(漢斌), 조선의 개국공신 호묵(浩默)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787가구에 2,5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8) 희천 김씨(熙川 金氏)
희천김씨(熙川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손자이며 고려의 대장군 우(佑)이다. 중시조 우(宇)가 온양에서 희천으로 개관(改貫)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772가구에 2,5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9) 영천 김씨(永川 金氏)
영천김씨(永川金氏)의 시조는 경주김씨 시조 명종의 20대손 천응(天應)이다. 조선시대에 판서 을초(乙舌)·장미(長美)가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100가구에 3,5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0) 금산 김씨(錦山 金氏)
금산김씨(錦山金氏)의 시조는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정보(正寶)인데, 경주김씨에서 분적되었다. 찬성 성(晟), 추밀부사 신(侁), 병조판서 세유(世惟), 중추부지사 언태(彦兌)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377가구에 1만 40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1) 영양 김씨(英陽 金氏)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전서(典書) 윤철(允轍)이다. 이밖에 신라 때 귀화한 충(忠)을 원조(遠祖)로, 그의 후손 충황(忠晃)을 시조로 하는 일파가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298가구에 7,4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2) 설성 김씨(雪城 金氏)
설성김씨(雪城金氏)의 시조는 알지의 39대손이며 고려의 대제학 지선(芝宣)이다. 고려의 상장군 원(源), 장악원정(掌樂院正) 대수(大壽), 중추부지사 윤방(潤邦) 등이 배출되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43가구에 2,0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3) 용궁 김씨(龍宮 金氏)
용궁김씨(龍宮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태자소보(太子少保) 존중(存中)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325가구에 1만 6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4) 고성 김씨(固城 金氏)
고성김씨(固城金氏)의 시조는 소가야국왕 말로(末露)이다. 판서 빈길(贇吉), 선략장군(宣略將軍) 원량(原亮)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709가구에 1만 18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5) 수안 김씨(遂安 金氏)
수안김씨(遂安金氏)는 알지의 36대손이며, 고려의 전법판서 선을 시조로, 후손 전리판서 위(爲)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88가구에 4,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6) 우봉 김씨(牛峰 金氏)
우봉김씨(牛峰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손자 우봉군(牛峰君) 오(墺)이다. 고려의 문하시중 항일(恒逸), 좌정승 관의(寬懿), 대제학 질, 조선의 판서 서덕(瑞德) ·우서(禹瑞), 중추부지사 지남(指南)·경문(慶門)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915가구에 2,9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7) 광주 김씨(廣州 金氏)
광주김씨(廣州金氏)는 경순왕의 7대손인 시조 녹광(祿光)이 고려 때 광주군에 봉해짐으로써 광주로 관적하였다. 고려의 찬성사(贊成事) 훤(玗), 조선의 좌찬성 희증(希曾), 중추부지사 태허(太虛)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845가구에 2만 19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8) 강화 김씨(江華 金氏)
강화김씨(江華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7대손인 성(晟:天伯)이다. 상장군 성손(性孫), 어모장군(禦侮將軍) 시하(時夏)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92가구에 4,4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9) 진천 김씨(鎭川 金氏)
진천김씨(鎭川金氏)의 시조는 강릉김씨의 시조인 주원(周元)의 21대손 맹아(孟雅)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80가구에 1,8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0) 해풍 김씨(海豊 金氏)
해풍김씨(海豊金氏)의 시조는 고려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숭선(崇善)이다. 문하평장사 대(岱), 조선시대의 훈련원정(訓鍊院正) 성(城)·수(洙)·상옥(相玉), 공조판서 영(煐), 병마절도사 혁(爀)·일(鎰), 어영대장 건(鍵)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859가구에 9,2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1) 영해 김씨(寧海 金氏)
영해김씨(寧海金氏)의 시조는 ‘구안동’의 중시조 방경(方慶)의 6대손인 조선시대의 영해부사(寧海府使) 억민(億敏:億東)이다. 오위장(五衛將) 세봉(世鳳),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 기영(基濚) 등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14가구에 7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2) 안로 김씨(安老 金氏)
안로김씨(安老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후손이며 고려시대의 중윤(中尹) 지경(之敬)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2가구에 1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3) 춘양 김씨(春陽 金氏)
춘양김씨(春陽金氏)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첨의중찬(僉議中贊)이며 공신인 경산군(慶山君) 이(怡)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0가구에 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4) 교하 김씨(交河 金氏)
시조는 고려 장군 교하군(交河君) 맹정(孟貞)인데, 나주(羅州)에서 분적하였다. 조선시대의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성구(成九)의 아버지 경행(景行)을 파조(派祖)로 하는 일파가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612가구에 1,9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5) 태원 김씨(太原 金氏)
태원김씨(太原金氏)의 시조는 중국 명나라의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태원백(太原伯)에 봉해진 학증(學曾)인데, 아들 평(坪)이 고려에 귀화하여 김해에 정착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00가구에 2,5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6) 낙안 김씨(樂安 金氏)
시조 김수징(粹澄,낙성당)은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김명종(鳴鍾)의 11세손인 김영고(永固)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명종때 감무(監務)로 있으면서 국난(國難)을 평정한 공으로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관하여 낙안(樂安)을 본관으로 하였다. 낙안은 현재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순천[승주(昇州)]의 낙안성은 김빈길(金贇吉)이 축조한 것이란 설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076가구에 3,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7) 무장 김씨(茂長 金氏)
무장김씨는 김알지계와 수로왕계등 각각 계통이 다른 시조가 있다.
김알지계의 시조 김자무(自武)는 대공보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나 선대의 기록이 없다. 그는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냈으며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장인이 화를 입자 황해도 장단에 숨어 살면서 본관을 무주(茂朱)로 하였다가 무장(茂長)으로 하였다.
수로왕계의 시조 김선(金璇)은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때 공을 세워 장사군에 봉해졌으며 고려 공민왕이 죽은후 관직을 버리고 장사로 낙향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무장(茂長)을 본관으로 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717가구에 2,3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8) 밀양 김씨(密陽 金氏)
시조 김승조(承祖, 호:홍의제)는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殷說)의 13세손이다. 그는 고려때 사직(司直)을 지내고 1272년(원종 13) 김방경의 막하장이 되어 삼별초(三別秒)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밀성군(密城君, 현 밀양)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009가구에 9,9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9) 월성 김씨(月城 金氏)
월성김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동원이면서도 계대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鳴鍾,영분공)의 17세손 김이진(以珍)을 1세조로 하는 월성김씨가 있고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殷說,대안공)의 15세손 김광우(光佑)를 1세손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월성김씨가 있다. 김광우(光佑)는 세종때 덕천군수로 있으면서 조정에 직간하다가 성천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후손들이 고향인 월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광우의 후손은 원래 토산김씨였다고 전하는 기록도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840가구에 1만 57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0) 창원 김씨(昌原 金氏)
창원김씨(昌原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17대손이며 고려시대의 태자첨사(太子詹事) 회원군(檜原君:회원은 창원의 옛 지명) 을진(乙珍)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983가구에 3,0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1) 파평 김씨(坡平 金氏)
파평김씨(坡平金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1등공신에 책록된 충간공(忠簡公) 장수(長壽)이다. 호는 포제 시호는 충간이다. 그는 경술의 일인자로 고려 공민왕때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한 공으로 상장군에 승진되고 1363년 김용(金鏞)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려다 순국했다. 평정후 충절로 일등공신 파평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35가구에 1,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