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비(石鐘碑)에 대해
▲ 왼쪽은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에 수록된 것으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경기도 일대를 조사할 때 촬영한 것이다. 이 당시 사나사(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는 1907년 의병항쟁 때 불타버렸으나 이 비석만은 간신히 그 형태를 유지하였더니, 그후 한국전쟁 때 총알받이가 되어 오른쪽 사진에서 보듯이 비면에 구멍이 여럿 생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 새로운 비각 안에 모셔진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이다. 석종의 비석의 조성경위와 연대로만 보면 거의 보물급인데, 지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에 머물고 있다.
▲ 석종비가 느닷없이 복을 비는 장소로 변했다.
▲ 이것은 태고 보우 스님(1301~1382)의 사리를 모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원증국사탑이다. 이끼가 잔뜩 올라 앉은 것이 참으로 애처로운 모습이다. 석종은 사리탑의 대용어이긴 하지만, 이건 온전하게 탑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석종(石鐘)'이라는 고유한 표기방법이 있으므로 차라리 '원증국사 석종'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이것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신륵사보제석종의 경우, 지정명칭이 보물 제 228호 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과 보물 제229호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인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 사나사의 한켠에 모여있는 원증국사석종, 원증국사 석종비, 용천리석탑(이걸 왜 사나사석탑이라고 부르지 않는거지?)의 모습이다. 원래 있던 절은 1907년 의병항쟁 때 완전히 불타버려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절 앞에 있는 '당상계불양비'란 것도 따로 놓여 있는데 이것 역시 총알자국이 역력하다.
[참고자료 1]
사나사원증국사석종비(舍那寺圓證國師石鐘碑)
원증국사(圓證國師) 석종명(石鐘銘) [전액(篆額)]
미지산(彌智山) 사나사(舍那寺)석종명(石鐘銘) 병서(幷序)
중현대부(中顯大夫)성균관(成均館) 제주(祭酒) 지제교(知製敎) 정도전(鄭道傳) 찬(撰)
고려국사 이웅존자(利雄尊者)께서 소설산(小雪山)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문인(門人)들이 화장하였는데, 많은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다. 양근군(楊根郡)에 살고 있는 부로(父老)들이 지군사(知郡事)인 강만령(姜萬령)에게 청하여 비석의 원석(原石)을 캐서 다듬어 석종탑(石鐘塔)을 만들어 사리(舍利) 10과(매, 枚)를 넣어 사나사(舍那寺)에 세웠다. 그 소요 경비가 서속(黍粟)이 30섬, 면포(棉布)가 3백필(百匹)이 사용되었다. 계해년(癸亥年) 9월 무신(戊申)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 경신(庚申)에 끝났는데, 문인(門人)인 달심(達心)이 사실상 그 공사(工事)를 주관하였다.
양근군(楊根郡)은 본시 익화현(益和縣)이었는데, 스님의 어머니의 고향이다. 군(郡)의 서쪽에 큰 강이 있는 바 그 이름이 한강(漢江)이다. 근원이 태백산(太白山) 북쪽에서 시작하여 6백리를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군(郡)의 동쪽에 미지산(彌智山)이 있는데 양광도(楊廣道)와 교주도(交州道)의 인접한 경계(境界)에 우뚝 솟아 있다. 그 산수(山水)의 청숙(淸淑)한 기백은 영걸(靈傑)을 잉산(孕産)할 기특(奇特)한 정기(精氣)를 지니고 있으니, 특별한 인물들이 나는 까닭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원증국사는 양근군(楊根郡) 대원리(大元里)에서 탄생하였다. 출가하여 수도하다가 중국에 유학하여 임제(臨濟)의 제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국사(國師)는 임제의 19대 법손이 된다. 석옥(石屋)이 국사에게 법의(法衣)와 선장(禪杖)을 주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상계(相契)하였음을 표하였다. 그 후 곧 귀국하니, 현릉(玄陵)이 예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고 곧이어 국사(國師)로 책봉하였다. 어머니 정씨(鄭氏)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封)하고, 익화현(益和縣)을 양근군(楊根郡)으로 승격시켰다. 가끔 인선(인選)된 조신(朝臣)들이 자주 와서 군인(郡人)을 위무(慰撫)하였으니, 그 까닭은 국사를 존중하며 그가 태어난 고향 지방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희계(李希桂)와 강만령(姜萬령)은 모두 옛 양리(良吏)의 가풍(家風을 지닌 현관(賢官)으로서 민초(民草)를 이롭게 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군민(郡民)들이 편안히 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국사가 끼쳐준 음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는 이 군(郡)을 살기 좋은 곳으로 창조한 덕인(德人)이므로, 군민(郡民)들도 흠모하여 국사(國師)가 입적하신 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님을 섬기는 자가 곧 사리(舍利)를 모시려는 것이니, 이는 본심(本心)에서 발(發)한 것이므로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명을 짓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명(銘)하여 이르기를
용문산봉(龍門山峰) 높고 높아 청숙(淸淑한 지령(地靈)
한강(漢江)물은 굽이굽이 비단결 같네!
맑고 높은 그 기운(氣運)이 이인(異人)을 낳니
그 기운(氣運)을 이어받아 국사(國師)가 탄생
임제법손(臨濟法孫)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法)을 받아서
임제의현(臨濟義玄) 19대(十九代)의 법손(法孫)이 되다.
익화현(益和縣)을 승격하여 양근군(楊根郡) 되니
군민(郡民)들은 너나 없이 칭송하도다.
높고 넓은 국사(國師)의 덕(德) 두루 미쳐서
양근군민(楊根郡民) 모든 사람 사모(思慕)하였네!
석종(石鐘) 세워 스님 위해 사리(舍利)를 봉안(奉安)
사리탑(舍利塔)이 있는 곳엔 스님이 있네!
돌을 깎아 석종비(石鐘碑)가 세워졌으니
내가 지은 이 비명(碑銘)을 비(碑)에 새겨서
미지산중(彌智山中) 사나사(舍那寺)에 유진(留鎭)하오니
천년만년 지나도록 전(傳)하여 지다.
홍무(洪武) 19년 병인(丙寅) 10월 일에
문인(門人) 달심(達心)이 비석을 세우고
재림사(梓林寺)주지(住持) 선사(禪師) 의문(誼聞)은 비문을 쓰며
훈곡(薰谷)과 명호(明昊)는 비문을 새기다
[음기(陰記)]
조연(助緣)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중실(李中實)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이척(李척)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자윤(金子贇)
사복세(司僕世) 이한(李澣)
인주사(仁州事) 신천용(申天用)
양근군사(楊根郡事) 오성식(吳成式)
서운부정(書雲副正) 함영필(咸英弼)
중랑장(中郞將) 김부(金富)
낭장(郎將) 이백공(李伯恭)
낭장(郎將) 이승보(李升甫)
낭장(郎將) 김천길(金天吉)
산원(散員) 이자영(李子榮)
산원(散員) 변인수(卞仁守)
참군(參軍) 이도(李稻)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 장천실(張天實) 삼반(三班) 함철(咸哲) 이옥(李玉) 함의(咸義) 지원(池元) 함정(咸貞) 함기(咸奇) 함설(咸雪) 이명(李明)
학생(學生) 김득주(金得珠) 방희(方熙) 김중남(金仲南) 최공신(崔公信) 안지수(安之守) 이란(李蘭) 소금(小金) 이성(李成) 함금(咸金) 신언(申彦)
시재(施財) 판선(辦善)
정조(正朝) 함길(咸吉) 천장(天莊) 원장(元莊)
조연(助緣) □□ □□ □□ 혜주(惠珠) 을시(乙時)
[출전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참고자료 2]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 (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국사(國師) 대조계사조(大曹溪嗣祖) 전불심인(傳佛心印) 행해묘엄(行解妙嚴) 비지원융(悲智圓融) 찬리왕화(贊理王化) 부종수교(扶宗樹敎) 대원(大願) 보제(普濟) 일국대종사(一國大宗師) 마가실다라(摩訶悉多羅) 이웅존자(利雄尊者) 시(諡) 원증탑명(圓證塔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추충보절(推忠保節)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령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인 신(臣) 이색(李穡)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비문(碑文)을 짓고 전봉익대부(前奉翊大夫)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인 신(臣) 권주(權鑄)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비문(碑文)과 아울러 붉은 전액(篆額)을 쓰다.
상(上)이 즉위(卽位)하신지 11년이 되는 해 1월 10일 좌대언(左代言)인 신(臣) 중용(仲容)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이르기를 태고국사(太古國師)의 사리탑비문(舍利塔碑文)을 경이 지으라고 명(命)하였다. 그리하여 신(臣)이 삼가 고찰하여 보니 국사의 휘는 보우(普愚)요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니 충남 홍주(洪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연(延)이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어느 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辛丑)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성동(成童)의 나이에도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13살 때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살 적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이언만 일귀하처화(一歸何處話)를 들어 참선하였다.
원통(元統) 계유년(癸酉年)에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만법귀일에 대한 의단(疑團)이 박락(剝落)하고 팔구(八句)의 송(頌)을 지었으니, "불조(佛祖)가 산하(山河)와 더불어 입이 없지만 모두 삼켜 버렸다" 함이 그 결구(結句)이다. 그 후 후지원(後至元) 정축년(丁丑年)에 스님의 나이 37세 되던 해 겨울에 전단원(전檀園)에서 안거(安居)하는 동안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1월 7일 5경(更)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팔구(八句)의 송(頌)을 지었으니 "굳은 조사관을 타파(打破)하고나니, 청풍(淸風)이 태고(太古)에서 불어오더라"는 것이 그 결구(結句)이다. 3월에 양근(楊根) 초당(草堂)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시양(侍養)하였다. 스님은 일찍이 공안(公案) 일천칠백칙(一千七百則)을 보다가 암두(巖頭)스님의 밀계처(密啓處)에 이르러 꽉 막혀서 통과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홀연히 깨닫고는 암두(巖頭)를 비웃으면서 "암두(巖頭)가 비록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이 적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라고 평(評)하였다.
신사년(辛巳年) 봄에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동봉(東峯)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는 편액(扁額)을 태고암(太古庵)이라 하고, 그곳에서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받아 태고암가(太古庵歌) 한 편을 지었다. 지정(至正 병술년(丙戌年)에 스님의 나이 46세 때 원(元)나라 연도(燕都)로 입원유학(入元遊學)하였다. 축원(竺源) 영성선사(永盛禪師)의 고명함을 듣고 남소(南巢)로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입적(入寂)한 후였다.그리하여 다시 방향을 바꾸어 호주(湖州)에 있는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石屋) 청공선사(淸珙禪師)를 친견하고, 자신이 얻은 바를 낱낱이 아뢰고 아울러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더니, 석옥(石屋)이 이를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큰 법기(法器)로 여겼다. 이어 일용사(日用事)를 묻는 데 대하여 스님은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또 여쭙기를 "지금 스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 이외에 더 일러주실 말씀이 있나이까" 하니, 석옥(石屋)이 이르기를 "노승(老僧)도 이와 같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하면서 드디어 신표(信表)로서 가사(袈裟)를 전해주고는 이르기를 "노승(老僧)이 이젠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석옥(石屋)은 임제(臨濟)의 18대(代) 법손(法孫)이다. 스님이 그곳에서 보름쯤 있다가 떠나올 때 주장자(柱杖子)를 주면서 "길 조심하여 잘 가라"고 당부하므로 스님은 주장자를 받고 하직 인사를 하고 다시 연도(燕都)로 돌아오니, 스님의 도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천자(天子)가 이 소문을 듣고는 영녕사(永寧寺)에서 수법(受法)한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열기를 청하였다. 이 때 순제(順帝)임금은 금란가사(金란袈裟)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황후(皇后)와 황태자(皇太子)는 향(香)과 폐물을 바쳤으며, 왕공(王公)과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투어 찾아와 예배(禮拜)를 올렸다.
무자년(戊子年) 봄 귀국하여 미원현(迷源縣)의 소설산(小雪山)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侍養)하였다. 임진년(壬辰年) 여름 현릉(玄陵)께서 스님을 왕도(王都)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固辭)하고 산으로 돌아갔는데, 그 후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병신년(丙申年)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법회(法會)를 열었는 바,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현릉(玄陵)도 친히 법회에 임석하여 만수가사(滿수袈裟)와 수정념주(水精念珠)와 기타 복용물(服用物) 등을 헌납하였고,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앉아 종지(宗旨)를 천양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께서 잡색(雜色) 비단으로 가사 3백 벌을 만들어 이 날 법회에 참석한 선교(禪敎) 대덕(大德)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에 가진 법회의 성대함은 미증유(未曾有)의 법연(法筵)이었다.
스님께서 산중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현릉(玄陵)이 이르시기를 "스님께서 나의 불교 중흥의 뜻을 유보(留保)치 않도록 힘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4월 24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여 정3품직 장관(長官)을 두어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종(一宗)으로 통합하려 하였으니, 스님을 존숭(尊崇)함이 지극함을 보인 것이다. 광명사에 있다가 이듬해에 왕사직(王師職)을 사양하였으나, 왕(王)이 윤허(允許)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스님은 밤을 이용하여 왕성(王城)을 빠져나와 산중으로 은둔하였다. 현릉(玄陵)이 스님의 확고한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법복(法服)·인장(印章) 등을 모두 스님의 처소로 되돌려 보냈다. 임인년(壬寅年) 가을 양산사(陽山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며, 계묘년(癸卯年) 봄에는 가지사(迦智寺)의 주지를 맡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모두 왕명에 따랐다. 병오년(丙午年) 10월에 또 왕사직(王師職)의 사임서를 인장(印章)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양진(任性養眞)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현릉(玄陵)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간특한 신돈(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스님이 왕에게 신돈을 논박(論駁)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펴야 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려면 사승(邪僧)이 그 기회를 편승하게 되오니, 원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이를 살펴 신돈(辛旽)을 멀리하신다면 종사(宗社)가 심히 다행(多幸)한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하였다.
무신(戊申)년봄 운수행각(雲水行脚)하다가 전주(全州) 보광사(普光寺)에 잠시 우거(寓居)하였다.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百計)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이 강절(江浙) 지방인 해외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신돈이 현릉(玄陵)에게 고하기를 "태고(太古)는 폐하(陛下)의 총은(寵恩)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노기(老期)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이제 멀리 해외로 유학(遊學)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意圖)가 있어서이니 청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급하게 느껴져서 현릉(玄陵)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신돈(辛旽)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推問)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左右)에 있는 이들을 무복(誣服)케 하고는 스님을 속리사(俗離寺)에 금고(禁錮)시켰다. 기유년(己酉年) 3월에 이르러 현릉(玄陵)이 스님을 금고(禁錮)한 것을 후회하고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신해년(辛亥年) 7월 신돈을 주살(誅殺)하고, 현릉(玄陵)은 사신을 보내어 예(禮)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영원사(瑩源寺) 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으로 멀리서 7년간 일을 맡아보던 중 무오년(戊午年) 겨울 지금의 폐하(陛下)이신 우왕(禑王)의 명을 받아 비로소 취임하여 1년 쯤 영원사에 주석(住錫)하다가 돌아갔다.
신유년(辛酉年) 겨울 양산사(陽山寺)로 옮겨 입원(入院)하는 날에 우왕(禑王)이 다시 국사(國師)로 책봉하였으니, 선군(先君)의 뜻을 따른 것이다. 임술년(壬戌年)여름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와 그 해 12월 17일 미질(微疾)을 느끼게 되었다. 23일에 이르러 문인(門人)을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내일 유시(酉時)에 나는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에게 청하여 국사의 인장(印章)과 구점(口占)으로 남긴 사세장(辭世狀) 수통(數通)등을 봉하여 임금께 전달하라"고 당부하였다. 때가 다가옴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단정히 앉아 임종게(臨終偈) 사구(四句)를 설하고,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부음을 우왕(禑王)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심히 진도(震悼)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월 12일 향목(香木)을 하사하여 화장하였다. 그 날 밤 광명(光明)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 100과를 내전(內殿)의 임금에게 올리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은 더욱 경중(敬重)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고 탑을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봉우리에 세우고,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라 이름하였다. 석종(石鍾)을 만들어 사리를 진장(鎭藏)한 것이 무려 세 곳이니, 가은(加恩)의 양산사(陽山寺)와 양근(楊根)의 사나사(舍那寺)와 이 절 부도(浮圖) 옆에 서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석탑(石塔)으로 만들어 조장(조藏)한 곳은 미원현(迷源縣)의 소설암(小雪庵)이다.
신(臣) 색(穡)이 엎드려 조용히 생각하여 본 즉 선왕(先王)께서 석교(釋敎)를 돈독히 신봉하여 가히 지극하였으나, 그 간에 참소가 횡행하였고, 생전에 태고(太古)가 부종(扶宗) 수교(樹敎)함도 가히 지극하다 하겠으나, 환난(患難)과 모함 등이 그의 몸에 미친 것은 그 까닭은 인연(因緣)의 과보(果報)인 것이니,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할 수 없는 것인저. 심지어 칭송하는 명성(名聲)이 화하(華夏)에까지 가득하며 사리(舍利)의 광명이 고금(古今)에 빛났으니 그것이 어찌 자주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신(臣) 색(穡)이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명(銘)하여 이른다.
홍대(弘大)하고 거룩하신 스님의 마음은
바다같이 깊고 넓어 하늘을 능가!
동분서주 쉴 새 없는 스님의 자취는
바다 건너 석장(錫杖) 짚고 구법(求法)하셨네!
귀국(歸國)해선 공민왕의 귀의(歸依)를 받아
임금의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다.
소설암(小雪庵)에 들어가서 밭을 갈으니
은(隱)과 현(現)을 때에 따라 자적(自適)하시다.
나라 위한 호국심(護國心)은 한결 같으나
신돈승(辛旽僧)이 시기하여 참소(讒訴)했지만
구름 속에 덮인 태양 컴컴하다고
광명(光明)이야 조금인들 손상(損傷)있으랴!
서산(西山)으로 넘어가는 새벽달이여!
달 진다고 달빛까지 사라질건가!
수정(水晶)같이 맑게 비친 사리(舍利) 광명(光明)이
임금 계신 옥문(玉門)까지 비추었도다!
삼각산중(三角山中)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능선의
나무 끝에 구름들이 덮이어 있네!
그 봉(峰) 밑에 사리탑(舍利塔)이 세워졌으니
영원토록 나라 운명 공고(鞏固)하소서!
고매하신 스님 가풍(家風) 차별이 없어
고려(高麗) 나라 동국(東國) 땅에 두루 불도다!
재배(再拜)하고 둔필(鈍筆)로서 명(銘)을 지으니
바라건대 영원토록 전(傳)하지이다!
홍무(洪武) 18년 을축(乙丑) 9월 11일
문인(門人) 전송광사(前松廣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석굉(釋宏)이 비석을 세우다.
[음기(陰記)]
문도(門徒)
국사(國師) 지웅존자(智雄尊者) 혼수(混脩)
왕사(王師) 원응존자(圓應尊者) 찬영(粲英)
내원당(內願堂) 묘엄존자(妙嚴尊者) 신이(神異)
내원당(內願堂)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원규(元珪)
도대선사(都大禪師) 광화군(廣化君) 현엄(玄嚴)
(우제일렬(右第一列))
대선사(大禪師) 수서(守西) 단굉(袒宏) 자소(慈紹) 선진(旋軫) 일영(一寧) 정유(定柔) 상총(尙聰) 혜렴(惠廉) 혜심(慧深) 경돈(慶敦) 등(等) 구십인(九十人)
선사(禪師) 신규(信規) 참교(참皎) 덕제(德齊) 의경(義瓊) 수윤(壽允) 내유(乃由) 내규(乃圭) 성잠(省岑) 천긍(天亘) 유창(惟昌) 등(等) 백칠인(百七人)
운수(雲水) 법공(法空) 정유(定乳) 환여(幻如) 달생(達生) 성명(省明) 중철(中哲) 복남(卜南) 정일(定一) 조행(祖行) 성인(省因) 법자(法慈) 법순(法淳) 달심(達心) 성여(省如) 희엄(希儼) 명회(明會) 각명(覺明) 선견(善見) 희오(希悟) 가신(可信) 가생(可生) 지천(止川) 설잉(雪仍) 선정(宣正) 가운(可雲) 가인(可印) 설상(雪祥) 설강(雪岡) 설사(雪思) 설서(雪栖) 요환(了幻) 설진(雪珍) 가송(可松) 가순(可淳) 내령(乃寧) 약무(若无) 등(等) 천삼인(千三人)」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영삼사사(領三司事) 이인임(李仁任)
판문하(判門下) 최영(崔瑩)
문하시중(門下侍中) 임견미(林堅味)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성계(李成桂)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廉興邦)
찬성사(贊成事) 우인열(禹仁烈)
연흥군(延興君) 박형(朴形)
개성군(開城郡) 왕복명(王福命)
상당군(上黨君) 한장(韓臧)
문하평리(門下評理) 반익순(潘益淳)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민(李仁敏)
김해군(金海君) 김사행(金師幸)
밀산군(密山君) 박성량(朴成亮)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
전공판서(典工判書) 최경만(崔敬萬)
김해부사(金海府使) 이희계(李希桂)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
비구니(比丘尼) 묘안(妙安)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인귀(金仁貴)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4】(1997)]
(정리 : 2006.4.9,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첫댓글 저...혹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나사 철불' 관련 자료 가지고 계신가요? 6.25 때 파손되었다는 말만 들었는데...
답변 삼아 아래에 사나사 철불 사진 두 장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글은 정영호 선생의 것인데, 우선 사진만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