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을 세운 주원장은 의심이 많고 신하들의 발호를 용납치않아 많은 공신과 신하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 그 치세는 가히 공포정치로 불릴만 했다. 그러나 그에 이어 등극한 주원장의 손자인 총명한 건문제(建文帝)는 할아버지와는 반대로 너그러운 정치를 펴서 많은 백성들이 그의 통치에 감읍하게 되며 이것이 결국 그의 미심쩍은 사망에 숱한 의혹을 더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너그러운 젊은 황제를 추앙하던 이들은 당연히 그의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않을 것이고 태조(주원장)에 이어서 조카(건문제)를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연왕 주체는 전형적인 무부(武夫)의 스타일이라 태조의 위세에 질렸던 신하들은 그를 내심꺼려했으며 이는 후일 숱한 의혹을 양산해내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 영락제, 연왕, 주체, 태종은 모두 한 사람인 영락제를 의미한다.)
■ 건문제의 최후에 대한 각종 소문과 진상
1. 자살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연왕이 금천문(金川門)으로 진입하자 건문제는 원래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이내 탄식하며 '내가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는가!' 라고 말하고 궁궐에 불을 놓으라 명령하고 그 불길이 사나워지자 황후 마(馬)씨와 함께 불길로 뛰어드니 주위의 비빈(妃嬪)들도 따라서 모두 뛰어들어 죽었다. 연왕이 궁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궁궐을 청소하며 그를 찾으니 나인들이 말하기를 건문제가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하였다. 이에 불탄 곳의 시신과 건물 잔해를 걷어내 건문제의 시체를 찾아냈다. 연왕이 그것을 보니 도무지 알아볼수 없이 처참하여 슬픔을 억누를수 없어 시체를 앉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저 황제를 도와 선정을 베풀도록 (도우려고) 한것 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라고 하였다. 천자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으며 3일 동안 조례를 보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명사 성조본기(明史·成祖本紀), 명사 방효유전(明史·方孝儒傳)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며 근래에는 맹삼(孟森) 같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연왕이 남경을 함락시켰을 때 이미 그의 군대가 성의 사방을 철통같이 애워싸 건문제가 설사 비밀통로를 알았다 하여도 탈출하기에는 늦었다는 분석이다. 뿐만아니라 평소 4째 삼촌인 연왕의 성격(잔혹, 정권욕)을 잘아는 그라 성이 함락되면 자신을 살려주지않을 거라고 쉽게 예상이 가능하였으므로 그로서는 자살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극히 승자(勝者) 위주의 평(評)일 뿐이다. 우리의 조선조 이방원(李芳遠)이나 세조 이유(李瑈)를 보라 등극전후를 자기들 입장을 옹호하는 위주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나 하물며 중국의 명(明)나라야 말해서 무엇할까!)
2. 탈출설: 태종실록의 기록은 그 신빙성에 의심을 사고 있다. 왜냐하면 영락제는 집권 후 3번이나 태조실록을 수정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기록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하여 태종실록의 기록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이에대해 영락제는 건문제에 대한 다른 기록을 일체 금하고 엄히 감시하였다. 영락제 사후 천순(天順), 정덕(正德) 연간이 되어서야 건문제의 죽음에 대한 의문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집권세력들인 후대의 황제들이나 정치가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 사건(1402년)으로부터 162년 후인 만력제(1563~1620 재위) 2년 10월 어느날 당시 13세의 어린 황제는 정승인 장거정(張居正)에게 건문제의 탈출설에 대해 묻는다. 장거정은 답하기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은 있는데 건문제가 궁궐이 함락되자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하고 비밀통로를 통해 궁을 나간 후 사방을 떠돌며 살았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일국의 황제나 정승도 정사와 달리 민간에 전해져 오는 것을 궁궐에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라면 정사의 기록에 대한 당시 사대부나 민간의 신뢰도가 어느정도였는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탈출설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곡응태(谷應泰)가 지은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에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건문4년 6월 을축, 황제는 연왕의 반란군이 금천문(金川門)을 돌파한 것을 알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을 하려하였다.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인 정제(程濟)가 "차라리 탈출을 하십시오" 라고 하니 환관인 왕월궤(王鉞跪)가 진언하기를 "옛날 고제(高帝.건문제의 할아버지 주원장을 의미)께서 돌아가실 때 상자를 하나 남기셨는데 환란을 당하면 꺼내보라 하셨습니다." 하니 그 상자를 가져오라 하였다. 붉은색 상자는 사면이 견고하게 쇠로 덮여있고 자물쇠는 두개나 달려 있었다. 상자를 열기 어렵다고 판단한 황제는 크게 놀라며 우선 반란군의 침입으로 황후가 욕보일 것을 두려워해 급히 명해 황후가 기거하는 내실에 불을 놓게 하고 황후 마씨를 그 불에 타 죽게 한다. 정제가 어렵사리 상자를 부수고 그안에 있던 도첩(度牒.승려의 신분증) 3개를 발견하니 거기에는 승려의 이름이 각각 응문(應文. 건문제를 의미), 응능(應能), 응현(應賢)이라 적혀있었다. 그 외에도 가사, 모자, 신발, 칼, 백금 10덩이가 나왔다. 붉은 글씨로 상자 안쪽에 적혀 있기를 "응문(應文)은 귀도(鬼道. 비밀통로)를 따라 궁을 나가라 그러면 배를 타고 수로를 통해 갈수 있으니 저녁 무렵에는 신락관(神樂館. 황실의 안녕을 기도하는 도교사원)의 서쪽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라 하니 "(할아버지께서)미리 방도를 해놓으셨구나!" 라며 황제가 탄복하였다. 정제가 황제의 머리를 깎으니 오왕교수(吳王敎授) 양응능(楊應能)이 또한 머리를 깎고 황제를 시종할 것을 청하니 감찰어사(監察御史) 엽희현(葉希賢)이 깜짝 놀라며 "신의 이름이 현(賢)이니 응현(應賢)이라는 법명이 신의 것 입니다" 하며 황제를 수행하기를 원했다. 세사람이 머리를 깎고 각기 승복과 도첩을 챙기니 주변에 있던 50여 명이 통곡을 하며 그들을 쫒아가려 하였다. 건문제가 이르기를 "이렇게 많은 이들이 가면 필경 발각되 죽기 쉽상이다. 처자가 있는 자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글을 쓰는 자들은 살아 남아서 이 사실을 기록해 주기바란다. 각기 사정에 따라 편히 하라 굳이 짐을 따라올 필요는 없다." 라고 하니 어사(御史) 증봉운(曾鳳韻)이 "원컨데 죽음으로써 폐하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 소리치며 자결하려하니 황제가 놀라 주위의 신하를 시켜 만류케하고 무리중에 9명을 추가로 뽑아 따르게 했다. 무리가 귀도를 따라 나간 후 배를 타고 신락관에 이르니 신락관의 도사(道士) 왕승(王升)이 황제를 보고 땅에 엎드려 인사를 한다. 인사 후 말하기를 "신이 어젯 밤 꿈속에 태조황제를 뵈었는데 신에게 여기서 폐하를 기다려 탈출을 도우라 하였나이다." 하며 황제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태평문에서 신락관까지 배가 몇차례 왕복하여 무리를 모두 싣어나르니 인원은 모두 13명이요 그 때는 해질 무렵이 되었다.
이 기록은 그 진실성에 또한 의심을 갖기가 충분하지만 저자 곡응태는 주원장이 도사의 꿈에 나타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오히려 후세들이 판단하기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청나라 시기의 여안세(吕安世)와 근대의 채동번(蔡東藩) 같은 이는 곡응태의 기록을 지지하는 측이다. 그러나 후대인 청조의 사관들 조차 이 부분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명사 공민제본기(明史 恭閔帝本紀)'를 편수한 서가염(徐嘉炎)은 건문제는 불속에서 죽지않고 탈출하였다 라고 적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저명한 사학자인 주이존(朱彛尊)은 정사의 기록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분분하였던 이 사건은 끝내 오리무중으로 빠지게 된다. 어쩌면 '명사 공민제본기'의 기록 처럼 "궁궐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지만 황제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는 기록까지만이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만일 건문제가 당시 반란군의 진입시 자살(타살)하였다면 연왕이 끌어앉고 통곡한 후 장례를 치룬 것은 당연히 건문제일 터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당시 무덤에 묻힌 이는 건문제가 아닌 그 부인 마황후 라는 설이 있다. 그 이유는 소위 건문제 라고 찾은 시체가 너무 불에 타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게다가 사료에는 마황후의 장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명조 중기 이후에는 건문제를 어디다 안장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사람들도 건문제를 위한 제사나 성묘의식이 없었기에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몰랐으니 후대인들의 무지는 과히 탓할 바가 못된다.
탈출설과 관련해 건문제의 두 아들의 행적도 생각해볼 만하다. 건문제의 두 아들은 장남이 주문규(朱文奎. 당시 7세), 차남은 주문규(朱文圭. 당시 2세)였다. 차남은 연왕에 의해 광안궁(光安宮)에 연금되어있다가 영종(英宗) 연간에야 풀려나는데 그때 나이 57세 였다. 그러나 줄곧 궁안에만 갇혀지내 그는 소나 말 조차도 구별 못하는 반푼이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차남과는 달리 장남은 건문제 처럼 그 종적이 묘연하다. 명사(明史)에는 "연왕이 궁궐을 함락했을 때 그는 7세였으며 그 행적을 알수 없다" 라고만 적고 있지 그 생사여부 조차 적지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왕이 일으킨 정난이 약 4년간 벌어졌기에 이미 그 전에 태어난 장남에 대해서는 명석한 건문제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방도를 마련해 놓았을 거라는 가설이 유력하다. 연왕의 군대와 정부군의 전투가 순식간에 끝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건문제에게는 그 만큼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비록 연왕이 남경을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일부지역(江南, 東南, 西北)은 그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건문제로서는 자신의 대비책을 충분히 구체화 시킬수 있었을 거라고 보인다.
부흡(溥洽)은 건문제의 주록승(主錄僧. 명나라 시기에 朱氏 황제 및 왕들에게 소속된 승려로서 황제 및 왕을 도와 제사나 占卜을 해주며 일종의 종교적 고문역할 수행하는 승려를 말하며 대표적인 사람이 영락제의 주록승인 요광효姚廣孝이다)인데 '명사 요광요전(明史 姚廣孝傳)'을 보면 "처음 황제(영락제)가 궁성에 진입했을 때 건문제가 중으로 변장하고 도망쳤으며 부흡이 이를 알고 있었다거나 건문제가 부흡의 처소에 숨어 있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하여 황제가 부흡을 감금하고 호영(胡濚) 등을 시켜 건문제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고 부흡은 이후 10여년간 연금되었다가 요광효가 병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영락제에게 그를 석방해줄 것을 부탁하자 마침내 석방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명사 호영전(明史 胡濚傳)'에도 나온다. "혜제(惠帝. 건문제의 시호)가 불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무리들이 말하였으나 황제(영락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영락5년 교지를 내려 도사(道士) 장탑랍(장삼풍을 의미)을 초빙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건문제의 종적을 탐문할 것을 명하니 그 기간이 무려 16년나 소요되었다." 이 수색작업의 책임자로 호영(胡濚)을 임명하였는데 심지어 그가 모친 정(丁)씨 상을 당해 퇴직(당시에는 사대부가 그 부모의 사망시 3년상을 치르는게 관례였음)을 청하였는데도 황제는 이을 윤허하지 않았다. 이처럼 영락제는 건문제의 수색에 집요하게 매달렸다고 한다.
3. 만일 탈출했다면 그 후의 건문제의 행적은 어떻게 되었나?
(1)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의 기록: "남경 탈출후 따라온 신하(양응능, 엽희현, 정제 등)들과 함께 중(중으로 가장해)이 되어 운남, 귀주, 사천, 호북, 절강, 광동 등지를 떠돌았다." 라고 적고 있다. 각 지역에 건문제와 연관된 전설이나 유적 등이 있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서하객(徐霞客)이 지은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에 보면 건문제가가 귀주(貴主) 백운산(白雲山)에서 수행할 때 거대한 삼나무 두 그루를 심어서 그것이 전해져 내려 온다고 하였다. 아울러 백운산의 수행처(암자)는 앞뒤로 2층으로 된 누각으로 되었 있는데 이 역시 그가 수행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2) 건문제 수색 포기설: 명사(明史)에 또 이런 기록이 있다. "건문제가 바다로 도망쳤다는 소문을 황제가 듣자 환관인 정화를 시켜 이를 찾아보게 한다." 이처럼 간절히 건문제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영락제는 1423년 어느날 드디어 기대하던 소식을 드게 된다. 건문제 수색의 총책임자인 호영이 깊은 밤 북경으로 돌아오나 황제는 오랑캐 정벌을 위해 북쪽으로 출궁한 후였다. 호영이 말을 달려 황제의 군막에 이르렀으나 이미 그는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영락제는 장막안에서 '호영이 왔다' 는 소리를 들었으나 신하들이 황제가 자는 줄 알고 감히 그를 깨우지 못하니 황제가 옷을 줏어 입고 호영을 부른다. 두 사람은 4경까지 독대하며 깊은 대화를 나눴는데 건문제의 행적에 대한 소식이었다. 황제가 듣건데 건문제는 이미 황제의 자리는 잊은지 오래라 그저 목숨이나 부지하고 살아가길 원한다고 하니 황제는 그 진심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이후로는 건문제에 대한 수색작업을 중지시킨다.
(3) 동남아 망명설: 당시에 이미 무역이나 장사 등을 위해 동남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지않았고 또 그곳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건문제의 동남아 망명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어떤이가 말하기를 건문제가 성루를 빠져나와 천주(泉州) 개원사(開元寺)에 숨어지내다가 다시 배를 타고 동남아로 갔는데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 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락제는 건문제가 황제의 신분을 이용해 동남아 당지의 중국인들이나 명나라의 속국을 규합해 자신에게 도전해 올것을 걱정하여 정화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의 치세를 널리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건문제를 찾아 이러한 가능성을 제거하라고 명한다.
명사에서 적기를 "황제는 혜제(건문제)가 海外로 도망친 것으로 의심하여 그를 찾고자 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군대를 파견해 그의 위세를 보이려 하니 영락3년 6월 정화에게 남해를 항해할 것을 명한다. 정화가 이끈 배에는 금의위(錦衣慰) 소속의 전문 스파이들이 있어 그들로 하여금 건문제의 종적을 찾게 하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라고 하였다.
(4) 북경서산설(北京西山說):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과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영종황제 때인 정통(正統) 7년(1434),이미 연로한 건문제(56세)가 광서(廣西) 사은주(思恩州) 관아로 찾아가 자신이 건문제라고 밝힌다.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그를 장차 북경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그 전에 먼저 건문제와 인연이 있는 늙은 관리인 오량(吳亮)을 파견해 그 진위를 가리게 하였다. 건문제는 오량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나 오량은 내심 아닌 척 하였다. 건문제가 예전에 그에게 음식을 하사할 때 거위고기 한 조각을 땅에 던져주었는데 오량이 개처럼 엎드려 그것을 먹은 이야기를 해주니 오량이 그 얘기를 듣고 크게 놀라며 땅에 엎드려 울다가 숙소로 돌아가 목을 매고 죽었다. 건문제는 북경으로 압송되 궁의 서쪽에 살다가 죽었다. 서산(西山)에 장사지냈으나 봉토를 만들지도 나무를 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영종실록(英宗實錄)의 내용에 살을 덧붙인 것으로 믿을 바가 못된다. 영종실록에 보면 정통 5년(1432年)11月 한 90여세의 중이 운남에서 광서로 떠돌며 자칭 건문제라 칭하고 다녔다. 당지의 관리가 이를 잡아 북경으로 압송하자 대신들이 그 진위를 신문하였다. 마침내 자신이 가짜라고 자백하기를 본명은 양행상(楊行祥)으로 하남(河南) 출신인데 홍무 17년에 중이되었다. 다른 이들(동료 객승들)의 충동으로 가짜 건문제 노릇을 하였다고 했다. 영종황제가 투옥하니 4개월 후 옥에서 사망하였다. 같이 공모한 12명의 승려들은 요동의 변방으로 유배시켰다.
(5) 강소오현설(江蘇吳縣說): 문회보(文匯報) 기자인 서작생(徐作生)이 여러 문헌과 현장답사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즉, 당시 건문제는 궁성인 자금궁(紫禁宮)을 빠져나와 머리를 깔고 신락관이나 서남부로 가지 않았고 정작 그가 향한 곳은 그의 주록승인 부흡(溥洽)의 권유를 따라 강소 오현의 보제사(普濟寺)로 숨어 든다. 여기서 불가에 귀의해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삭힌다. 오래지않아 연왕의 곁을 지키던 승려 요광효(姚廣孝. 황제의 고문)가 이 절로 은퇴한다. 여기서 요광효의 감독하에 건문제는 근처에 있는 궁륭산(穹窿山)의 황가암(皇駕庵)에 숨어 지내다 영락 21년(1423年)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47세였다. 암자 뒤의 언덕에 묻었다.
(6) 사천 망경사설(四川 望京寺說): 건문제가 사천성의 창평(平昌) 불나사(佛羅寺)에 숨어 살았다 병으로 죽자 산 언덕에 묻었다는 설이다. 건문제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너무나 궁벽한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자주 수도(남경)를 쳐다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 때문에 훗날 사람들이 불나사를 망경사(望京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7) 강유현지(江油縣志)의 기록: 건문제는 연왕에 패하고 이곳의 산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이외에 자세한 기록은 없다.)
(8) 건문제 후예(讓氏家谱): 건문제가 궁궐을 탈출해 각처를 떠돌다 결국 무창(武昌)에 정착해 숨어 살다가 죽자 그 시체를 무창의 홍산(洪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제의 족보에 등장하는 성 양(讓)씨는 그가 삼촌인 연왕(영락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했다고 하는 의미에서 양(讓. 양보했다는 뜻의 글자)을 취해 그 후손이 이어졌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