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쎌 웨폰>의 멜 깁슨은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고 술을 마시지만 성룡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술과 담배도 멀리 한다. 그러므로 성룡은 어떤 배우와도 다르다. 친근한 코미디언이면서 존경스러운 영웅이다.
<홍번구>가 중국 본토에서 개봉한 95년, ‘타임’ 지는 성룡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당시 그는 아시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였고 유럽과 호주, 심지어 남아메리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은 북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헐리우드였다. 그러나 헐리우드에 입성하지 못한다면, 영화배우는 감히 온 세상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성룡은 80년 <살수호>와 81년 <캐논볼>로 헐리우드에 진출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좌절한 성룡이 홍콩으로 돌아간 뒤 16년이 흘렀고, ‘타임’ 지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96년 미국에서 개봉한 <홍번구>는 첫 주말 9백 9십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동양인 배우가 주연한 영화로는 최고의 성적이었다. 2년 후에 개봉된 <러시 아워>는 개봉한 주에만 3천 3백만 달러를 거둬 들였다. 성룡은 “북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동시에 정복한 역사상 최초의 남자”가 되었다.
타란티노, “성룡은 내 인생 최고의 영웅”
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헐리우드에 안착했지만 그 동안 성룡이 아주 잊혀졌던 것은 아니다. 92년 뉴욕 차이나타운 필름 페스티벌에서 <용형호제>를 본 만화가 르네 비터스태터는 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엑스 맨>의 출판사로 유명한 마블 코믹스가 그 만화를 거절하자 그녀는 직장을 톱스 컴퍼니로 옮겨가면서까지 기어이 만화를 완성했다. 젊은이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방송국 MTV는 95년 성룡에게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시상자로 나온 <펄프 픽션>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내 인생 최고의 영웅”이라는 말로 성룡을 소개했다. 당시 헐리우드에는 타란티노가 성룡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러시 아워>가 성공하자마자 그의 자서전과 전기가 출판되었으며, 유명한 게임 회사 ‘플레이 스테이션’은 비디오 게임까지 만들었다. 몸짓과 표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성룡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배우였다. 그는 모두가 눈독 들이는 전천후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성룡은 또한 단순히 소비되는 상품에 그치지 않는다. 타란티노는 “성룡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성룡이 되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밥티스트 대학이 성룡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을 때 행사장 밖에는 “따거”, 다시 말해 ‘대형(大兄)’을 외치는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성룡이 MTV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왔을 때, 사람들은 “모든 미국인이 성룡을 사랑한다. 단지 일부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플래카드로 그를 맞았다. 이 때 ‘타임’ 지는 성룡에게 적절한 찬사를 선사한 셈이다. 그는 ‘사랑’받는 배우다. 언론은 그를 무성 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버스터 키튼과 해롤드 로이드, 찰리 채플린,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에 비교하곤 한다. 이들은 모두 몸으로 감정과 의사를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헐리우드 황금기를 살았던 이 배우들은 악의없는 애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들처럼 살고 싶어했고 영화를 볼 때마다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곤 했다. 성룡이 나타날 때까지 헐리우드는 그 따뜻한 관심을 잊고 있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해리슨 포드에 지친 헐리우드는 더 이상 새로운 영웅을 원하지 않았지만, “성룡은 영웅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은 착한 남자며, 동시에 아이들을 부탁하고 싶은 강한 남자다.
용(龍)이 되기까지
홍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룡은 먹여 주고 입혀 주는 중국 오페라 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한밤중까지 훈련하는 고된 일과였다. 그는 노래, 춤, 곡예를 배웠고 무엇보다 쿵후를 배웠다. 그가 학교를 졸업했을 때쯤 중국 오페라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 들었지만, 그는 오페라 대신 이소룡의 영화에 스턴트맨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무술을 연마한 그는 곧 제작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 즈음, 이소룡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성룡도 슬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소룡의 죽음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원래 이름 챈공상을 이소룡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의 성룡으로 바꾼 그는 여러 무술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모두 실패했다. 고민하던 성룡은 답을 찾았다. “사람들은 내게 이소룡의 연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이소룡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행동을 이소룡과 반대로 하기로 작정했다. 그가 발차기를 높이 했다면 나는 낮게 했다. 그는 부상도 입지 않고 벽을 부쉈지만, 나는 벽을 친 후 다쳐서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소룡은 한 번도 웃지 않았지만, 나는 항상 웃는다. 나는 재미있게 생겼다”. 존경하던 희극 배우 버스터 키튼의 연기를 도입한 성룡은 그 때까지 볼 수 없었던 무술 영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 시절의 대표작 <취권>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헐리우드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성룡은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그는 그것이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성영화 시대의 버스터 키튼이나 해롤드 로이드처럼, 그 역시 몸으로 말하는 배우였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그를 바꾸어 놓으려 했다. 성룡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오랜 세월 영화를 했다. 그런데 헐리우드에서는 고작 몇 년 전에 영화를 시작한 스턴트맨이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살수호>와 <캐논볼>, <캐논볼 2>가 모두 실패한 후 그는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다. 성룡은 자신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기 시작했고 홍콩에서 제작자의 간섭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가 되었다. <폴리스 스토리> <용형호제> <프로젝트 A> <미라클>… 그의 성공작은 끝이 없었다. “나는 아시아에서 E.T.같은 존재다. 사람들은 나만 보면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는 성룡은 아시아 인들이 그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가 몰랐던 것은 적은 수지만 열광적인 팬이 미국에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외국 배우를 쓰고 해외 로케를 하면서 헐리우드 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던 성룡은 결국 <홍번구>로 다시 헐리우드에 갔고,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백인들마저 거리낌없이 좋아할 수 있는 배우
‘타임’ 지는 “성룡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광동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성룡은 한 번 액션을 시작하면 10분에서 20분은 끌고 간다. 대사가 끼어 들 여지는 별로 없다. 호주를 배경으로 한 <나이스 가이>에서 성룡은 시작한 지 10분도 채 안 되어 익숙한 추격 장면을 보여 준다. 갱조직의 보스가 배신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찍은 여기자는 조직원들에게 쫓기다 성룡을 만난다. 정해진 법칙대로, 성룡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여자의 도주를 돕는다. 손에 걸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고, 벽을 짚으며 뛰어 넘고, 사람이 통과하기 힘든 창살 사이도 가뿐히 빠져 나간다. 이 긴 도주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당황해 하는 성룡의 과장된 연기와 보통 사람들처럼 얻어 맞고 다치는 그의 모습은 친근하고 코믹하다. 그는 매사가 이런 식이다. “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연기한다. 헐리우드 영화처럼 20층이나 되는 빌딩에서 무작정 뛰어 내리지는 않는다”.
트릭이나 스턴트를 쓰지 않는 그의 사실적인 연기는 사람들의 공감과 존경을 함께 얻었다. 이 때문에 성룡은 주윤발이나 이연걸처럼 근엄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코미디 배우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많은 코미디언들이 그렇듯 성룡도 자학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대표작인 <취권> <폴리스 스토리> <용형호제>에서 성룡은 불붙은 석탄 속으로 뛰어 들고 매운 고추를 삼키고 동동거리며 공업용 알코올까지 들이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승리한다. <덤 앤 더머>의 짐 캐리가 우연에 우연이 겹쳐 행운을 얻는 것과는 다르다. 성룡은 악전고투 끝에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리쎌 웨폰>의 멜 깁슨은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고 술을 마시지만 성룡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술과 담배도 멀리 한다. 그러므로 성룡은 어떤 배우와도 다르다. 친근한 코미디언이면서 존경스러운 영웅이다. 그는 웃기고 친근하지만 저질 코미디언의 한계를 뛰어 넘었고, 카리스마는 있지만 한없이 멀기만 한 영웅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하는 매력이다. 동양의 비장미를 간직한 주윤발과 이연걸이 이질적인 정서를 넘어서는 데 한참이 걸린 것과는 달리, 성룡은 백인들마저 거리낌없이 좋아할 수 있는 배우다.
성룡의 영화는 계속된다
<미션 임파서블 2>로 헐리우드에 확실하게 자리 잡은 감독 오우삼은 성룡을 등산가에 비유한다. “그는 산을 정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더 높은 산을 찾아 계속 올라간다”. 40편이 넘는 그의 영화는 모두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다른 아이디어를 첨가해 관객을 끌어 들인다. 성룡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취권>과 <폴리스 스토리>를 꼽는다. 흥행작이기 때문이 아니다. “<폴리스 스토리>를 찍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게 경찰영화는 한 물 갔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밀고 나갔고, 성공했다. <취권>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쿵후 영화를 외면할 때 나는 <취권>을 만들었다”. 헐리우드에서도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러시 아워>의 액션 장면은 전처럼 길지 않다. 몇 분이 고작이다. 홍콩에서는 액션이 먼저고 드라마가 따라 왔지만, 헐리우드에서는 드라마가 먼저다”. 결과는 눈부시다. ‘입에 모터를 단’ 수다스러운 코미디언 크리스 터커와 ‘다리에 모터를 단’ 쿵후의 달인 성룡은 멋진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한 편의 유쾌한 액션 영화를 만들어 냈다. <리쎌 웨폰>도 부럽지 않다.
성룡은 신작 <샹하이 눈>에서도 오래 전에 사라진 서부극에 위험천만한 도박을 걸었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지만, <샹하이 눈> 역시 ‘성룡의 영화’다. 말발굽에 다는 편자를 밧줄 끝에 달아 무기로 쓰는 성룡의 모습은 의자와 쓰레기통 같은 주위 물건을 익숙하게 이용하는 <폴리스 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전처럼 열심히 뛰어 다니지는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추격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인디언의 담배를 피우고 정신없이 취해 버리는 장면에서는 변함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모두 같은 것 같지만, 모두 다른 성룡의 영화들. 이런 식으로 성룡은 헐리우드에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