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는 짓인가? 아니면 상대방이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하는 짓일까? 이것은 몇년 전부터 실감이 된 일인데, 우리 할머니네 개는 항상 내 눈을 피하는 성향이 있다. 개의 눈을 보지 말라는 얘기는 어렸을 때부터 들었는데, 이 늙은 강아지는 내 눈을 쳐다볼 필요조차 없나보다. 물론 그 얘기는 일리가 있다: 개에 있어 시선 교착은 아주 강렬한 의미가 있다. 흥분된 개의 눈을 쳐다보는 것은 곧 황소 앞에서 빨간 옷만 입고 발칙하게 춤추는 것과 같은 "도전"이다. 개는 눈을 통해 남의 마음,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읽을 재능이 인간보다 백배 강해서 눈은 곧 마음의 창문이다. 허나 시선 교착은, 특히 오래된 교착이라면, 무엇을 나누는 개념이기도 하다, 개에 있어. 내가 네 눈을 보고 있으니 네 마음도 읽을 수 있지만, 당신도 똑같다. 그것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모르는 사이라면. 하긴, 문화적 차이를 떠나서 어디서든 남의 눈을 오래 쳐다보면 기분이 이상하겠다.
상대방의 눈을 볼 때마다 우리도 개처럼 남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런 능력이 부족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인간한테는 그 시선 교착이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따라서 인간은 시선 교착을 할 때마다 자기네 주관에서 벗어나고 상대방 주관의 일부가 된다. 즉, 갑자기 나는 내가 아는 "나"는 아니고, 상대방이 보이는 "나"일 뿐이다. 혼자서 세계를 바라보면 그것은 나의 세계이자 내 현실이지만, 만약 그런 세계를 상대방과 나누면 이미 "우리" 세계가 된다. 그것은 굳이 시선 교착만에 관한 일이 아니고, 인간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해석이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 혼자라면 사람은 그냥 마음대로 울고불고, 미친놈처럼 웃으며 흐름에 빠지고 외관이 어찌 됐는지 신경 쓰이지 않다. 근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누구와 함께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것은 이미 "내가" 어떤 정서를 느끼는 개념을 떠나는 상황이다. 물론 좋은 코미디를 친구와 함께 보면 재미있어질 확률이 높고, 친한 친구나 파트너와 슬픈 영화를 보면 뭔가 통하는 느낌이 난다. 그래도 이미 우리 주관을 떠나는 세계일 뿐이다.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만약 첫 데이트, 혹은 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연극 감상이라면? 그냥 마음대로 울고 웃으며 흐름에 빠진 미친놈처럼 행동할까? 뭐 그러면 부러울 일이지, 난 그건 못한다. 대신, 대부분 사람은 사르트르가 말한 "mauvaise foi"에 빠진다. 그 의미는 불성실함인데, 남을 속히는 것보다 자기 속히는 짓이라서 자기 기만으로 번역되었다. 물론 남을 속히는 일이기도 하지, 근데 그들의 문제는 그저 믿음이다. 그의 행동은 진심일까, 아닐까? 끝. 자기 기만에 빠지는 사람은 결국 자기 본 모습을 숨기고,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다. 이것은 진심에 관한 이슈만은 아니고, 결국 도덕성에 대한 문제다. 사르트르 말했듯이 전형적인 "도덕"의 의미는 뭔가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근본적인 정서를 숨기는 짓이다. 즉, 의미 그 자체가 아니고, 권모술수적인 동기가 만든 가짜 의미다. 역시 자기 기만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지배하는 개념이다.
수쳔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인의 라이트 모티브는 올바르게 민중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것은 늘 그 거탑의 꼭대기였다. 강한 놈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사는 놈이 강한 놈이다, 그 말이지. 그 목표에 도달하기에 가장 필수적인 몇 가지 요소는 바로 자기 기만과 타협이다. 그 타협은 결국 남의 의견을 듣고 자기 원하는 변화 중 몇 요소만 희생하면 끝날 문제일까? 아님 살아남기 위해 흐름을 타고, 소위 자기 이데올로기까지 배신하고, 내 밥그릇은 챙겼으니
남이 배고프면 뭐 어쩔 수 없다는 쉬운 철학일까? 자기 기만이야, 대선 몇개월 전인데, 여름만이 끝날 수 있다면 구라의 압박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하겠다. 사르트르는 그 자기 기만과 완성된 도덕성의 유토피아를 뭣보다 사회적 뉘앙스로 해결했다, 무지한 "백성"을 조작하기 위해 부르주아가 발명했던 장치라고 하면서. 하얀거탑이 보여주었듯이 사회생활이란 게임의 모순은 단순한 집단주의의 압박이 아니고, 항상 자기만의 길에 신경 쓰는 선수가 어쩔 수 없이 (?) 걸어야 할 길의 문제다.
글쎄, 왜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까, 인간이란 이 동물? 그 게임이 필요한 자기 기만과 타협에 너무 빠져서, 정말 자기 올바른 길이 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아주 먼 역사에 대한 논란이 생기면 주로 사학자와 몇몇 사람들만이 신경 쓰는 일일 뿐이다 (독도나 고구려 같은 뜨거운 감자가 아니라면). 헌데 살아 있는 정치인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아주 천둥소리의 축제다, 특히 문화 작품이라면.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박모씨에 대한 어떤 블랙 코미디와 그의 아들이 시작했던 개판이 생각나지? 그는 아직도 유신인 줄 알고 어떤 고추장스러운 진실이 나올까봐 표현의 자유에 거대한 "샷다마우스"라는 스티커를 붙였다. 정치란 게임에 있어 진실과 도덕, 정책과 개혁은 항상 심각한 주관성에 대한 문제니까. 각 사람은 항상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모든 역사 기록을 약간의 의심이라도 느끼며 늘 환경을 먼저 살펴보고 회의적인 마음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정사와 야사를 구분하는 방식은 뻔한데, 결국 이론적으로 효과적인 구분일 뿐이다, 다 같은 사람이 쓰는 역사에 대한
시선이니까. 역시 조선왕조실록까지, 정말 타국이 부러울만큼 훌륭하고 아주 소중한 기록인데, 결국 그냥 말일 뿐이다. 눈이 안
보이니 그들의 마음도 안 보이고, 마음으로 가는 그 창문은 열지 않아서 그들의 말이 진심인지 예쁜 구라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실록에 기록된 신하와 임금의 말은 불과의 자기 기만일 수도 있고, 정치 게임에 빠져서 그저 적시적소에 나타난 말일 수도
있다. 물론 사건의 결과와 사는 방식을 보고 사람의 성격을 "그리는" 사학자도 있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는 방식이다,
우리가 살펴볼 기록은 진실의 일부니까. 그래서 이 장르에 접근하는 작가의 개념도 그냥 프로로서 누구의 스타일만 아니고, 역사에
접근하는 그들의 사관도 보여주는 케이스다.
기록에 충실한 신봉승, 정당화에 올인하는 정하연, 민족주의적 위인론에
빠진 이환경, 돈을 벌려고 A.D.D. 세대의 얄팍함을 이용하는 최완규, 따지고 보면 그저 프로 정신의 이면일 뿐이다. 나 같은
사람이 한없이 후자를 욕할 수 밖에 없지만, 결국 드라마를 산업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부러울 팔자일 뿐이다. 어차피
작품성은 생활비에 효과가 없다. 사회생활이든, 정치든 간에, 다 같은 타협과 자기 기만의 밸런스다. 살아남기 위해 게임의 규칙에
충실해야 하고, 흐름에 역행하는 자가 되면 아주 골치 아픈 케이스가 될 수 밖에 없다, 현상유지가 항상 제일 쉬운 선택이니까.
이 와중에
한성별곡이란 드라마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까?
영정조시대를 다루는 마지막 몇 사극은 다 MBC에서 방송되었다. 1998년 사도세자와 영조의 비극을 다룬
대왕의 길, 정조와 홍국영의 복잡한 관계, 화완옹주와 정후겸과 임금의 대립을 다룬
홍국영 (둘 다 임충 극본), 그리고 젊은 영조와 암행어사 박문수의 관계를 보여준
어사 박문수. 갑자기 몇 편이 다시 그 시기에 집중하는 것은 조선후기 추리소설의 인기 때문일 수 있고, 2000년대 소재로서 아직도 어떤 신선함이 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역시
한성별곡이 이 시대에 빠져도 호 (呼)를 무시한 이유는 편리한 핑계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바로 이 드라마의 출발점이었다. 그 正. 정순왕후, 정조, 벽파와 시파, 1800년. 승하하시기 전에 정조의 마지막 날들, 그의 마지막 정책 (화성 천도, 양위), 그리고 그의 죽음. 관념에 따라서 이것은 정순왕후의 영향으로 벽파인 심환지가 조작한 독살일 수도 있고, 그냥 남인 시파가 꾸민 거짓 논란일 수도 있다. 결국 어떤 면에서 사극의 한계이기도 하다. 아무리 재해석을 해도, 새로운 사료를 통해 좀 더 깊이 상황을 살펴봐도 항상
추측 게임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아니, 정조대왕은 정말 등창으로 죽은 확률이 충분히 있다.
허나 그것은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무시한 개념이었다. 누가 정조를 죽였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반 독살 반 자살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조의 비참한 최후에 어떤 어마어마한 의미를 주었다. 마치 박진우 작가가 그의 마지막 해를 보고 승하하시기 전에 그 마지막 몇마디로 해결한 느낌이 난다. 살아서 인간이기 때문에 현실과 싸우는 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의 죽음을 통해 누구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것이다, 그 말이었지. 정조가 시해를 당할 것은 이미 임금이 예측한 상황이었다. 독살이든 어떤 방도든 간에 조만간 그것은 기다려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희생의 의미는 정말 중대하다. 따지고 보면 그는 실패했지만, 이참판이 한 말에 충실하게, 의미 있게 자기 인생을 마쳤다. 희생이 없으면 어찌 자기 신념을 지켜줄 수 있겠는가? 살아 계실 때 다하지 못한 그 희생은 죽음을 통해 해결한 이 드라마의 정조는 오히려 대왕의 이미지에 충실한 최후를 보여주었다.
그 희생의 의미는 결국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 한 신료들과 대비를 무시하고, 아직도 세상을 언젠가 바꿀 힘이 있는 젊은 피한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어차피 게임에 빠진 그 선수들은 어떻게 그의 정책을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생계의 문제가 된다면 자기 기만이든 뭐든 간에 무조건
막아야 할 일이다. 허나 훌륭한 연기를 떠나서 남아 있는 것은 슬픔보다 어떤 세계의 냄새를 전달하는 파토스였다. 이것은 굳이
공감할 것으로 승부하는 드라마가 아니라서 멋진 정조의 죽음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곽피디와 박작가의 목표가 아닌 듯
싶다. 그 대신에 정조의 죽음을 통해, 그 사건에 접근하는 여러 신료들, 상궁과 다른 캐릭터의 반응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정한
라이트 모티브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 그들의 正은 무엇일까?
정조의 최후는 결국 스토리상과 역사상의 의미가 강하지만, 뭣보다 어떤 철학적인 뉘앙스도 난다. 이 드라마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결국 놀라운 연출 솜씨나 적절한 고증, 거의 완벽한 앙상블 연기, 드디어 MBC 사극의 화면빨에 무섭게 가까워지는 미술과
의상이나 영화다운 흐름이 아니고. 철학이다. 온 작품이 나는 그 철학의 향기. 역모의 자식에서 임금까지 보여주는 그 한계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솔로보다 오케스트라의 조화처럼 느낀다.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하연의 드라마와 다른 얘기니까 (철학은
비슷하지만). 아예 이 드라마는 선악에서 벗어나고, 정치나 퓨전사극의 해골에서 완전히 벗어나니 거의 "인생 사극"이라 할만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그 패러다임이 뭔지, 각 캐릭터가 자기 신념으로 正을 따라가고 있으니 어찌 그의 선택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아들과 했던 박인빈의 얘기도 그렇고,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 항상 강조해왔던 "도덕"을 무시하는 이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
(임금을 비롯해서)는 우리와 다름이 없다. 양만오가 갑자기 그 새로운 조선의 목표를 배신한 이유는 그가 위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유일한 목표는 "자기" 조선, 즉 아씨와 함께 둘이 행복하게 살만한 나라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자기
기만과 타협의 불과하지. 이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는 우리 양심의 색조다, 대부분 우리 안에 양만오 같은 뉘앙스도 있고, 정조다운
부분도 있으며, 가끔은 심민구나 박인빈 같은 냄새도 난다. 모두 다 한계가 있지만 그 메시지는 결국 예쁜 구라를 벗고, 불편해도 아주 솔직한 고백이고 철학이다.
자기 소망대로 살아봐라. 끝까지 싸우고, 남이 자기 신념을 조롱해도 걱정 말고, 그 아름다운 곡을 끝까지 노래하라. 동상이몽의 지옥이
된 이 세상의 문제는 개혁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자기기만, 그 위선에서 벗어난다면 자기가 보이고, 그 正이 뭔지 드디어
보이며, 아마 그때 남에게 자기의 진정한 "나"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다 천천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