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여행을 계획...
올해 초(2009년)에 Be Smart 청주 본부장님의 권유로 정기 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다.
Be Smart의 최인혜사장님과 소장님의 교육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열정적인 삶의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분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로마 역사기행을 계획하고 있어 이에 동참하기로 하고 렘브란트전을 시작으로 루벤스와 바로크전, 피사로와 인상파전, 퐁피두전, 클림트전까지 주말마다 수도권을 오가며 서양사에 조금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행의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함에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공부를 못하고 출발을 하게 된 부담감은 여행기간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대로 이제까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가슴이 있어도 느끼지 못했던 내 자신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한다.
7월 24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25일 폼페이, 소렌토, 나폴리 관광에 이어 26일에서 29일까지 로마전역을 순방하고 31일 귀국했다.
이탈리아공화국(La Repubblica Italiana, The Italian Republic)는 유렵 중부에 있는 나라로 지중해성기후로 여름엔 기온은 높으나 습도가 낮고, 겨울은 -4도를 내려가는 일이 적은 나라로 수도는 로마(Rome)이며 면적은 301,336㎢, 인구는 5815만명(2008년 기준)이며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로마 카톨릭 신자가 90%이상이다.
화폐단위는 EURO【한화:1773.45원(2009.8.19기준)】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와는 1956년 11월 수교 이래 5500여명(2007년 12월 기준)으로 추산되는 교민이 있으며 교민 대다수는 유학생(약 2,900여명)이며 소수의 상사주재원, 종교인(유학중인 신부, 수녀), 장기 거주 교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마 지역 교민들은 대부분 여행업, 음식업에 종사하고 밀라노 지역 교민은 주로 무역업에 종사한다.
로마의 면적(1,285㎢) 인구 2,706,428명,
서울 (6,057.27㎢) 인구 10,456,034명.
로마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 본다.
1. 초기 7왕국 시대(BC 753-BC 509)
ㅇ BC 8C경부터 라틴과 사비나 도시국가를 병합하여 에투르스키 왕조를 포함한 7왕국 시대 형성
2. 로마 공화정 시대(BC 509-BC 27)
ㅇ 귀족중심의 원로원을 구성했으며 원로원이 매년 선출하는 2명의 집정관(consul)이 통치
ㅇ BC 3C경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BC 146년까지의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병합 과정에서 집정관의 장기 독재화 현상이 대두하였으며 제1차 삼두정치(시이저, 폼페이우스, 크락수스)를 계기로 공화정 퇴조
3. 로마 제정 시대(BC 27-AD 476)
ㅇ 제2차 삼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하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BC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받고 황제로 추대되면서 제정시대 개막
ㅇ BC 27 - AD 180년간 5현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업적으로 로마제국 최고의 번영과 평화(Pax Romana) 구가
ㅇ AD 180년 이후 사회 기강의 이완, 변방 속령의 반란, 게르만 민족의 압박 등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이 로마제국의 부흥을 기도했으나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당시 동·서 로마로 분열되며 서로마는 AD 476년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
- AD 313년 콘스탄니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 공인
4. 중세 도시국가 시대
가. 도시국가의 형성과 르네상스(11-16세기)
ㅇ 서로마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는 동고트족,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롬바르드족, 프랑크왕국(샤를마뉴 대제)의 지배를 거쳐,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나 11세기 이후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와 교황간의 세력다툼이 격화되고 지방영주가 통치하는 도시국가 출현
ㅇ 도시국가의 수공업 및 상업이 발달하면서 베니스, 제노바, 파비아, 밀라노, 플로렌스 등이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 대두, 세력 확장
나. 도시국가의 쇠퇴(16세기-19세기 초)
ㅇ 물질문명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 등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한 학문,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며 특히 피렌체 메디치가, 로마 교황청 등의 후원으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예술가 배출
ㅇ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 터키의 지중해 진출, 스페인, 프랑스 등 절대군주제 하의 강력한 신흥국가 등장으로 베니스, 제노아 등 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게 되며, 이탈리아가 이들 신흥 열강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16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이들 신흥국가들이 많은 도시 국가들을 지배
5. 이탈리아 국가통일(19세기 초)
ㅇ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사상을 이탈리아에 전파함에 따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 이탈리아인들은 1820년대 결사 조직(Massoneria), 카르보나당(Carboneria) 등의 비밀조직 활동을 해 오다가 1831년 마찌니가 결성한 이탈리아 청년당을 중심으로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국가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
ㅇ 1848년 이후 사보이 왕국의 임마누엘 국왕과 카부르 재상, 가리발디 장군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교섭 및 3차에 걸친 독립전쟁을 거쳐 1870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
6. 파시스트 정권 시대(1924-1944)
ㅇ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불 등의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나, 전후 경제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화되면서 1923년 뭇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 대두 ㅇ 1937년 독일, 일본과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한 뭇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이 눈부신 군사적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독일과 추축(Axis) 동맹을 맺게 되나 북아프리카 진출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 패퇴하고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권좌에서 쫓겨나고 바돌리오 임시정권(1943.7-1944.2)이 발족
ㅇ 이후 뭇솔리니는 독일의 지원으로 북부에서 명목상의 정권을 유지하나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략이 절정에 달한 1944년 항독 게릴라에 의해 살해되며 이에 따라 파시스트 세력도 완전히 붕괴
ㅇ 1946.6월 제헌의회 구성, 국민투표 실시후 1948.1.1 공화국 헌법을 정식 공포
7. 기민당 주도 연립정부시대(1948-1994)
ㅇ 1948년에 공포된 공화국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공산당 집권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비례대표제’를 도입, 제1당인 보수 기민당이 단독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중소정당이 난립, 기민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40여년간 집권 - 정당 난립에 기민당내 파벌간 알력 등도 작용하여 1996.5월까지 55회 내각변동 (평균 집권기간 10개월)
ㅇ 정계 구도는 제1당인 기민당이 제3당인 사회당 및 기타 중소 정당과 제휴하여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공산당(1991.2월 좌파민주당으로 개명)이 제2당으로서 야당세력을 주도
ㅇ 기민당 장기집권 체제 하에서 정경유착(부정부패)의 구조화 현상 초래 - 연정 참여 정당들이 국영 및 공공기업을 통하여 정치자금 조성
ㅇ 직업공무원 제도의 확립으로 정부의 대내외 정책은 안정적 기조 유지
7월 24일 금요일....
13시 35분 정확하게 인천공항을 출발한 네델란드 항공기(KLM 866기)가 11시간을 비행 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에 도착하니 17시35분이다. 7시간의 시차 때문에 네델란드는 아직 한낮이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국의 하늘은 뭉게구름으로 멋지게 치장을 하고 마치 우리에게 뽐내는 듯하다. 중간 기착지인 이곳에서 3시간을 기다렸다가 로마로 가는 KLM 1609편을 타야하는데 출발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어졌다. 아이들과 긴 비행시간에 오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공항내의 상점들을 구경했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음식과 진열상품들을 아주 진지하게 바라보던 아이들의 시선이 커다란 돌같이 생긴 쵸콜릿을 망치로 깨뜨려 판매하는 곳에 머문다. 우리나라의 예전 엿장수들과 흡사하다. 여러 종류의 꽃씨를 파는 상점들도 인상적이다.
예정 보다 늦어진 비행기를 타고 로마의 레오나드로 다빈치(fco)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11시 가까이 되었다. 수하물을 찾아 숙소로 가야하는데 최 사장님의 가방이 오지 않아 애를 태우며 1시간이나 기다렸건만 끝내 찾지 못하고 대기하던 버스를 타고 캄캄한 로마의 밤거리를 달린다.
우리나라의 현대간판이 밝게 빛나고 있어 어찌나 반갑던지....
공항에서 30여분 떨어진 Porta Maggiore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이 위치한 Porta Maggiore는 로마를 감싸고 있는 12km나 되는 성곽의 동남쪽 끝에 있어 창문을 열면 옛 로마의 성곽이 보이고 Termini역까지는 105번 버스를 비롯한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곳이다.
7월 25일 토요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연다.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빛 하늘은 우리나라 가을 하늘 같다.
미리 예약해 둔 전세버스를 타고 남부 이탈리아의 폼페이, 소렌토, 나폴리로 향한다.
35도를 윗도는 기온인데 에어컨이 고장 난 버스 안은 찜질방보다 더 뜨겁게 느껴진다.
유학을 와서 음악을 전공하고 부업으로 가이드를 한다는 한국인이 열심히 설명을 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우리나라와 비슷한 농촌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기원전 312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로마제국을 거미줄처럼 도로로 연결하는 토대를 마련한 아피아가도를 달린다.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의 모체란다. 도로표지판도 우리나라의 표지판과 참 흡사하다.
2시간 후 폼페이에 도착했다.
Pompeii의 Vesuvius산(1,281m).....
서기 79년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2만여명의 주민들을 하루아침에 잿더미 속에 잠들게 했다.
1,748년 Pompeii를 발굴하기까지 무려 1,700년을 지하에 있었던 Pompeii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2000년 전의 도시라고 믿기지 않는다. 규모에 제압당할 만큼 웅장한 건물과 잘 정돈된 도로와 상수도시설과 요즘과 별 차이가 없는 편의시설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시에 특별한 음향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숨소리도 극장의 맨 뒤쪽 꼭대기까지 들리도록 완벽하게 만든 원형극장도 보존되어 있다. 천정의 구멍을 통하여 자연광과 공기 순환까지도 생각하여 지은 목욕탕도.... 옛사람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놀랄 뿐이다.
고대 로마의 문화와 풍습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해물스파게티가 주 메뉴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린다. 에구머니..... 식당의 종업원들의 불친절이 눈살이 찌푸리게 한다. 세계적인 관광지인데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대충 담아 내주는 음식에 맘이 갈 리가 없다. 그러나 아침에 빵 한 조각 먹고 나온지라... 우리나라에서 먹어본 스파게티 맛과 큰 차이는 없는데 좀 짜다. 물도 사 먹어야 한다. 1.5L 한병에 4유로(약 8천원)나 한다. 종업원 팁도 따로 줘야 한다. 식사시간 후반에 기타를 든 젊은이들이 들어와 아름다운 노래를 두곡 들려주기에 맘이 좀 풀렸는데.... 아뿔사.... 돈을 요구한다.
Pompeii역에서 순환열차를 타고 Sorrento로 가서 버스도 타고 또 배도 타고 Capri로 이동한다. 순환열차는 한국에서는 자취를 감춘 옛날 완행열차를 연상케 한다. 낙서투성이의 열차는 지저분하기도 하고 35도의 더위임에도 에어컨도 없다.
20여분 후 Sorrento역에 도착하여 부두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 Capri로 가기위해 쾌속선을 타고 1시간 가까이 달려야 한다. 우리가 탄 배는 2층에 올라갈 수 있어 바다에서 보는 Sorrento의 아름다운 경치와 지중해의 맑고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만끽하고 이따금 지나가는 유람선들을 바라보며 즐기다 보니 어느 새 Capri 마리나그란테항에 도착했다.
카프리에 도착해 Anacapri로 이동하는 길은 바닷가 왕복2차선 절벽길인데 운전기사들의 곡예솜씨가 돋보인다. 현기증이 날만큼 깍아 지른 좁은 절벽길인데 빠르게 잘도 달린다. 일행들이 숨죽이며 운전솜씨에 감탄하는 듯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1인용 리푸트를 타고 해발 595M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는 참 아름답다.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바닷물과 하얀 포말의 꼬리를 달고 바다 위를 유영하는 요트들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Napoli행 배에 몸을 실었다.
세계 3대 미항중 하나인 나폴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나보다. 별로 볼게 없다.
남부 각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인구에 의한 빈민 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가 심각하여 도난사고가 자주 발생한단다. 가이드가 특별히 주의를 준다. 범죄의 온상이라며 혹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 항구만 눈에 담으라 한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로마로 돌아오니 오후 10시가 넘었다. 늦은 시간에 파스타와 샐러드 닭고기의 코스 요리로 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숙소에 들어와 어제 못한 짐정리를 하려는데 침대 이불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사물함에 쳐 박혀 있다.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 탓이오.
3성급 호텔이라는데 우리나라의 모텔수준도 되지 않는 것 같다.
7월 26일 일요일...
아침 식사 후 소장님의 Porta Maggiore 설명을 시작으로 로마 순방길에 나선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San Giovanni Laterano 성당은 전 세계 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가톨릭교회를 공인한 후 건립해 교황에게 기증한 것으로 화재로 두 번 파괴된 것을 보로미니가 1646년에 개축한 것이다.
성당 전면 꼭대기에는 약 6m 높이의 석상들이 있고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1718년에 로코코 조각가들이 만든 12사도들을 묘사한 조각상들로 채워 넣었다. 이 성당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의 머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 후문으로 나오니 콘스탄티누스 2세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현존하는 오벨리스크 중 가장 큰 455톤이나 나가는, 원래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의 암몬 신전 앞에 있던 것을 보고 잠깐 감상한 뒤 15분 정도 걸어 콜로세움으로 향한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 자리에 72년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성하였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의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80여개가 넘는 아치문을 통하여 5만여명의 관객이 입장하여 단 10분 만에 모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다고 하니 그 당시의 건축 설계기술이 얼마나 놀라웠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투기장으로 혈투를 벌리던 곳이었는데 442년 대지진의 영향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옆에서 보면 대리석들이 뜯겨 나간 흔적들이 많은데 피에트로 대성당이나 왕궁, 또는 각종 다리의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난 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Colosseo를 뒤로하고 Palatino언덕으로 가기 위해 Acro di Costantino 즉 로마에서 가장 큰 개선문을 지난다.
312년 Constantino황제가 Ponte di Milvio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높이 21m,넓이 25m의 크기로 나폴레옹이 이 개선문을 탐내어 프랑스로 가져가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파리의 샹젤리제거리에 있는 개선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는 Romjlus 이래 시작된 언덕의 역사는 Augustus 이후의 것만 남아 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은 보이지 않고 흔적들만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작은 언덕중 하나인 Palatino에서 시작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지나 지중해를 감싸 안은 후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갔다.
웅장한 규모의 정원과 Domus Augustana도 보인다.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초라한 집터도 있고, 집안에 마치 전차경기장이라고도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정원을 가진 황제들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생활이나 요즘 우리 사는 사회나 빈부의 격차와 사치와 금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Palatino 언덕에서 Roman Forum(일명 Foro Romano)를 볼 수 있다.
Forum은 고대 로마 도시의 공공광장을 말하는데 Palatino 언덕과 카피톨리노(Capitolino) 언덕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이자 화려했던 로마의 과거를 말해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그 시대 원로원(Curia)건물, 로마의 쌍둥이 신 카스토레와 폴루체를 위한 신전의 일부인 아름다운 코린트식의 기둥도 보이고 흔적만 남아있는 카이사르(Julius Caesar)신전....
로마를 주름잡던 카이사르가 암살되어 화장된 장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안토니우스의 추도사에 감동받은 군중들이 카이사르를 전통장례식을 치르는 대신 화장을 하였다고한다.
카이사르를 화장한 이곳은 마치 쓰레기더미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헌화된 꽃들이었다.
Curia 바로 앞에 있는 Acro di Settinio Servo아치는 로마의 아치중에서 균형미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203년 셉티미우스 황제가 아랍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공화정 때 최고의 정치기관으로 집정관을 선출하였다던 원로원....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중세시대에는 성 아드리아노 성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30년대에 무솔리니가 복원했다고 한다. 원로원 바로 옆 건물은 성 피에트로가 갇혔던 지하 감옥인 Carcere e Martima이다.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 죽이려했으나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처형하였고 그의 무덤은 바티칸의 성 피에트로 대성당에 자리하고 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카피톨리노 광장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Roma의 7개 언덕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이 광장은 포로 로마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이 있고 그 주변에는 로마시장의 집무실과 시의회가 있으며 카피톨리노 미술관도 있다.
계단으로 내려서면 베네치아광장과 오른쪽으로 Vittoriano Emanuele 2세의 기념관이 화려한 모습으로 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 후 1870년 왕국을 세워 초대 국왕이 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은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웨딩 케익’이라 불리운다. 야경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은데 ... 아쉽지만 조금 더 걸어가 한 개의 돌로 만들어진 Colonna Traiana를 만나게 된다. 커다란 원기둥의 이 Colonna를 어떻게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조각들을 어떻게 새겼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8시경 이곳에서 해산하여 각자 자유 시간을 가진 후 10시까지 숙소로 가라는 미션이 주어진다. 어둠이 드리워지는 시간에 까막눈인 내가 이탈리어로 된 지도 달랑 한 장에 의지해 가야한다니 가슴이 갑갑해진다. 지친 내 아이들을 데리고 오던 길 되짚어 가려니 엄두가 나질 않고, 교통편도 모르고, 시장기는 돈다. 걱정이 된다. 중 1인 울 아들의 국제미아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지나친 염려로 짜증이 나는가 보다.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을 두려워하는 내 아들이 좀 밉다. 힘 모아 뜻 모아 무얼 못할까?
7월 27일 월요일...
역시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다.
오늘의 일정은 바티칸(Vatican City)이다.
카톨릭의 총 본산인 바티간 궁전을 중심으로 한 성베드로 대성당, 카스텔 간돌포 (Castel Gandoito)에 있는 교황궁(Pontifical Palace),여름 휴양지를 포함한 로마 부근의 5개소 및 이탈리아에 흩어져 있는 일부 23개소를 영토로 한다. 카톨릭의 최고통치기관인 교황청이 있다.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있다.
바티칸 가기위해 Cipro Vaticani역에서 내려 5분정도 걸어가니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의 행렬이 족히 몇 백 미터는 되는 것 같다.
입구에 다다르자 경계가 삼엄하다. 반바지나 슬리퍼, 민소매차림은 입장부터 안 된단다.
X-ray를 통과하고 가방검사도 받는다.
브라만테가 설계했다고 하는 피나 정원. 가운데 4미터의 청동 솔방울이 떡 버티고 있어 솔방울 정원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각자 패널앞에 옹기종기 모여 각 나라말로 설명을 듣는다. 우리 일행 말고도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정원의 한가운데는 지구본 모양의 바티칸에서 유일한 현대 조형물이 있다.
Belvedere 정원은 15세기 브라만테가 교황 인노켄디우스 8세를 위해 지은 별장의 중심부라 하는데 정원의 모양이 팔각형이라 ‘팔각형의 안뜰’이라고도 부른다.
전시된 작품들이 워낙 방대하고 커서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참 낮 익은 조각상들이다. 살아있는 조각들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표정과 인체근육과 튀어나온 핏줄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낸 그들의 작품은 대리석에 조각한 작품이라 믿어지질 않는다.
트로이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헬레니즘 시대의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라오콘....
1506년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긴 회랑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 그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입체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느낌의 마치 부조 같다.
이 회랑을 지나면 현대작품들이 있는 전시관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유명한 시스티나(Sistina) 성당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수세기동안 교황선출을 위한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카메라 플래시를 사용하지 말라는 계속된 방송에도 불구하고 워낙 높은 천정에 그려진 그림들을 담기위해 플래시 터지는 불빛들이 번쩍인다.
긴 벽의 장식에는 르네상스 미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스코화로 되어있다.
1481년에서 1483년 사이에 그려졌다고 하며 천장화는 1508년에서 1512년 사이에 미켈란젤로가 그렸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534년부터 1541년에 그려진 그림이라한다.
성당의 긴 벽 장식에 걸려있던 신구약을 통틀어 환상적인 12장의 그림들...
토스카나움브리아 출신인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의 주요화가 대부분이 참여한 그림들이다.
즉, 핀토리키오, 보티첼리,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로셀리, 시뇨렐리 등으로 이름만 들어도 정말 대단한 화가들의 대작들이다.
Basilica S. pietro 성당
기원은 성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47명의 교황들이 묻혀 있고 전 세계의 모든 성당을 대표하는 성 베드로 성당...
그 장엄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326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봉헌했다고 전해지는 이 성당은 넓은 아트리움을 갖고 있지만 그 후 증개축을 하여 지금의 성당 모습은 1626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성당길이 187m, 돔의 높이 132.5m의 이 어마어마한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기도 하지만 바로크 건축기술과 예술을 집대성한 건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성당 전면에 있는 조각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상.. 그 앞에서 숙연해진다.
성당의 아트리움(중앙홀)...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돔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내부다 한눈에 다 들어온다. 사람들이 이뤄낸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의 영역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외부로 나가니 로마전역을 감상할 수 있다.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 성전을 건축하기위해 궁여지책으로 면죄부를 발급하는 등 제반 문제를 일으켜 결국 종교개혁을 불어 일으키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 성당이다.
성당을 나오면 1656년에서 1667년 사이에 베르니니가 만든 성 피에트로 광장이 나온다.
길이 340m, 너비 240m의 타원형 광장과 사다리꼴 광장은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천국 열쇠모양이다. 광장의 커다란 분수가 더위를 식혀준다.
걸어서 Sant' Angelo(산탄젤로 성)으로 간다. 이 성은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다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요새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교황의 피난처로 감옥으로 이용되었다는 이 성은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성 앞의 테베라 강을 가로지는 산탈젤로 다리는 로마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손꼽힌다고 한다. 다리위의 천사 조각들은 베르니니의 작품들로 예수님을 고문했던 기구들을 들고 있다. 이 다리 아래로 흐르는 테베레 강은 로마시내를 가로질러서 흐르는 강인데 우리나라의 한강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강이다. 이 강은 ‘Tras' 즉 건넌다는 이태리어로 트라스 테베레하면 테베레 강을 건넌다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 강 건너 있는 Maria Trastevere성당의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강을 끼고 오른쪽의 작은 언덕길을 오르면 로마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Gianicolo언덕이다. 강 건너 멀리 Emanuele 11세의 기념관도 보이고 Navona 광장까지도 보인다.
해질녘 불게 물들어 가는 로마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명멸하던 그들의 역사를 기억 해 본다.
지아니콜로 언덕의 중앙에 버디고 서 있는 가리발디장군의 동상...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우국지사라고 한다.
지아니콜로 언덕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Fonte Aoqua Paola라는 분수를 만난다.
분수 옆으로 이탈리언 식당이 문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로 분비고 있었다.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다. 하지만 아직 공식 일정이 계속된다.
San Pietro in Montorio성당. 지도에도 잘 나와 있지 않고 관광객도 거의 없는 성당...
이 성당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된 베드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바로 그 자리에 세운 건물로 브라만테의 작품이라 한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랐을 골고다 언덕 한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졌다.
가파른 언덕길...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많은 죄를 짊어지고 가신 분을 기리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마치 중세시대 도심 골목길을 걷는 착각이 들게 하던 골목길을 지나 Santa Maria in Trastevere성당에 도착한다.
마침 저녁 미사 중이었으나 너무 지친 나머지 성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221년에 건축을 시작한 로마 최초의 이 성당은 1130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성당 앞의 광장에도 베르니니 작품의 분수가 있다.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야경을 즐기자는 일행들과 호텔로 바로 가자는 일행들이 행동을 달리하기로 하던 도중 많이 지친 나를 앞서던 내 아이들이 보이질 않는다.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크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여권도 없고, 차비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순간 나의 머릿속이 텅 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행들에게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기에 애써 태연한 척 했어야 했다.
우리조보다 먼저 버스로 출발한 팀장에게 무전 연락을 했으나 신호가 가질 않는다. 호텔로 가려면 테르미니(Termini)역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기에 그 팀원들과 같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택시로 테르미니역으로 갔으나 넓고 복잡한 그 곳에서는 모래사장에서 동전을 주울 수 있는 확률을 기대해야 할 것 같아 다시 호텔로 가기위해 택시를 타려 Porta Maggiore Hotel(호텔 포르타 마조레 )이라 얘기를 해도 영어로 이야기를 해도 택시기사는 영 알아듣지를 못한다.
갑갑하기 마찬가지인 택시기사와 나는 다른 택시기사에게 길을 묻는다. 허걱...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었음에 내가 타려했던 택시기사는 초보 운전수였나 보다. 무사히 호텔로 왔으나 먼저 출발한 팀이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기에 가슴을 조이며 로비에서 기다길 얼마나 되었을까?
내 아이들이 상기되어 맨 먼저 들어오고 있질 않는가?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드려진다.
7월 28일 화요일...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플라미니오(Flaminio)에서 내려 Popolo광장과 Popolo성당을 방문한 뒤 핀치오 언덕을 넘어 보르게제 미술관 관람이 예정되어 있다.
이 광장은 로마지도를 보면 삼각형 도로인 Trident 꼭대기에 있는 광장으로 1820년에 주세페 발라디에르가 완성했다고 한다.
광장의 한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 앞에서 보면 세 갈래의 큰 길이 보이는데 그 중의 가운데 길 끝이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는 Corso 거리라고 한다. 그 거리의 끝자락에 엠마누엘레 2세의 하얀색 기념관도 볼 수 있다,
이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역시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보물들들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것일까? 마치 자기네의 유적인양...
쌍둥이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은 산타 미라콜리 성당. 왼쪽은 산타 마라아 몬테산토 성당인데 18~19세기까지만 해도 이 광장에서 사형수들을 공개 처형했다고 한다.
이 광장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Santa Maria del Popolo성당은 네로황제의 유모와 애인이 몰래 네로황제의 시체를 묻은 곳이라 해서 유명한 성당이기도 하다. 우리가 앉아 있었던 그 계간 바로 옆이 그 자리라고 하니 그 당시 황제까지도 애인이 있었다고 하니...
포롤로 성당을 나서서는 공원을 가로질러 보르게제 미술관까지 빠른 걸음으로 내달려야했다. 하루 2시간 문을 여는 시간외에 입장을 시키지 않는 엄격한 미술관의 규정 때문에 시각을 맞추기 위해 아름다운 공원의 한가로움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 미술관의 입장은 매우 엄격해서 카메라는 물론 작은 가방조차 가지고 들어 갈 수 없었다. 지하에 있는 보관소에다 짐을 맡겼다. 1613년 보르게제 추기경이 자신의 저택으로 지은 집이었는데 정부가 이 저택과 수집품들을 구입해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의 명작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는 ‘아폴론과 다프네’라는 대리석 조각을 보고 감탄하지 않은 수 없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베르니니의 조각품... 아폴로를 피해 달아나다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하는 순간을 조각한 작품인데 섬세한 나뭇잎 하나하나가 대리석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작품이었다.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로 저승신 플루토에게세 벗어나기 위한 페르세포네의 절박한 몸부림과 그런 그녀를 움켜쥐고 있는 하디스의 사투가 생생하게 조각된 대작들을 보면서 2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로마 시내의 주요도로의 기점에 위치하고 있는 바르베리니 광장의 중앙에는 4마리의 돌고래가 받치고 있는 조개위에 고동을 불고 있는 바다의 신 트리톤을 아름답게 표현한 베르니니의 트리톤분수가 참 아름다웠다. 만든 지 350년이 지났는데도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 못한다.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해골 사원으로 가는 길에는 벌들의 분수가 있었다. 가는 곳 마다 분수가 참 많다. 하루 종일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른다. 음용수를 사용되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물을 받아 마시기에 나도 한 모금으로 더위를 달래본다. 윽....... 물맛이 이상하다. 그래도 내 딸은 물만 보면 행복해 한다. 어찌 그리 어미와 많이 닮았는지....
해골사원은 다소 엽기적이다. 1528년 ~ 1870년 사망한 약 4천기의 성직자의 해골이 안치되어 있는 성당이다.
1626-1631년 사이에 만들어진 성당으로 카푸친 수도사들의 유골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납골당이다. 따라서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12시-오후3시까지는 문을 닫는다. 이 성당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교황 우르바누스8세의 형 안토니오 바르베리니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로마 변방에서도 그 권력과 위세를 확인할 수 있던 바르베리니 가문의 적자였다.
카푸친 소속 수도사들은 죽음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먼저 죽은 동료 수도사들의 뼈를 성당 곳곳에 쌓아 놓았다. 이런 의도에는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성당의 출구에는 ‘현재의 당신 모습이 곧 미래의 당신 모습’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성당 근처에 비아 베네토 거리가 있는데, 성당 맞은편 길과 골목골목이 유명한 사교의 거리였다. 저녘 이면 문을 여는 작은 바들이나 식당이 상당히 분위기가 좋다.
주변에 정부 주요 건물과 미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안전한 곳이다.
대통령의 궁...
입구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봐도 제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경비가 무척 삼엄할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참 많이 다르다.
트레비(Trevi)분수에 왔다.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의 마무리코스라고 한다.
첫 번째 동전을 던지며 로마에 다시 오기를 기원하고,
두 번째 동전을 던지며 평생의 연인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세 번째 동전을 던지며 이혼을 바랄 때 던진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들인 로마시민들의 이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란다.
트레비분수를 지나 퀴리날레 언덕으로 해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들어선다.
광장 양쪽에 1546년부터 230여년간 베네치아공화국의 대사관으로 쓰인 베네치아궁전이 있어 이 광장의 이름을 베네치아 광장이라 한다.
광장은 6개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로마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 지하철 3호선 공사 중이라 더욱 혼잡하다.
광장 건너편으로 Emanuele 2세의 기념관도 보인다.
베네치아광장에서 다시 걸어 도착한 곳은 판테온이다.
기원전 27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가 지은 이 건물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대변해주는 기념비적인 건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유일한 건축물이라 한다. 미켈란젤로도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 이 판테온은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을 덧댄 원형의 평면 건물로 벽 위에 직경 43.2m의 거대한 콘크리트 돔을 올리고 있다. 천정에는 지름 9m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이 신전 안에는 조명도 없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요철모양의 벽을 통한 반사로 실내를 밝게 하고 있어 실로 신비스러움과 2000년 전 그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현재 판테온은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움베르토 1세와 라파엘로의 납골당으로 쓰이고 있다.
나보나(Navona)광장에는 3개의 분수가 있다. 북쪽에는 데라 프르타가 만든 네투노의 분수이며, 가운데 있는 분수는 4대강의 분수라고 불리우는 피우미분수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남쪽의 모로 분수도 역시 베르니니의 작품인데 무어인의 분수라한다.
광장주변에는 분위기 좋은 노천 카페들이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광장의 곳곳에 크고 작은 그림들을 팔고 있다.
콘도티(Condotti)거리에 가면 세계의 유명한 명품거리가 길 양쪽으로 있다. 루비이똥도 보이고 구찌도 펜디도... 눈을 즐겁게 한다.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17세기 이곳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다고 해 이름 지어진 스페인 광장
137개 계단은 광장의 이름을 따서 스페인 계단이라 한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곳에 다 모인 것 같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소란다.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7월 29일 수요일..
로마의 마지막 날이다.
카라칼라 욕장으로 조별 이동이다. Manzoni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Termini역까지 가서 환승하여 Circo Massimo역까지 가던지 105번 버스로 Termini역까지 가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사전지식이 없어 우리 3조는 무진 고생 끝에 Termini역까지 걸어가는 무지함의 극치를 보였다. 카라칼라 욕장에 도착하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일행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217년에 완공하였다는 10만㎢가 넘는 넓이의 복합건물 의 레저타운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1600명이 동시에 입욕할 수 있는 대욕장 뿐만이 아니라 사교장, 야외수영장, 운동실, 도서관, 예술전시장과 정원등 그야말로 초호화판 레저시설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1800년전이 감히 상상이 안 된다. 6세기경 고트족이 로마를 침공하여 수로를 파괴함으로써 물 공급을 차단시킨 이래 거의 무질서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수세기 동안 수차례의 약탈로 인하여 장엄했던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무너지다만 붉은 벽돌로 쌓은 흔적들이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다시 국립박물관으로 찾아 가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국립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다시 전철을 타고 테르미니역에 내렸다.
로마시내의 교통의 중심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 테르미니역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미션수행을 하기로 했다. 마땅히 먹을 만한 곳이 눈에 띄질 않는다. 마침 맥도날드(McDonald)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Fast food로 끼니를 때우고 로마국립박물관(Museo Nazionale Romamo)을 잘 찾아 갔다. 그 유명한 ‘원반 던지는 사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고대의 정교한 모자이크 작품까지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역시 이곳도 조각품들이 대세다. 로마는 거대한 조각품의 저장고처럼 보인다.
아직 남은 미션이 있으나 포기하기로 했다. S. pietro in Vincoli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었는데 6일간의 로마에서의 기억들은 성당의 벽화와 조각상들이었기에...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섬세하고 강렬하게 돌에 표현 되어진 작품들에 감탄을 금할길 없었던 내 생애 내 눈이 가장 호강했던 기간이기도 하다.
어제 스페인광장으로 가기위해 눈요기만 했던 콘도티 거리에 다시 왔다.
로마 최대의 쇼핑거리라는데 대부분 보석과 가방, 신발가게들이 대부분이다.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는 내 딸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이들과 잘 진열된 가게로 들어가 차근차근 구경을 한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곳이라서인지 손님들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후 7시경인데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한다. 아직도 무척 많은 관광객들이 있는데도 상점에서 나가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거리에서 여러 가지 예술 활동들을 하고 있다. 땅 바닦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노래를 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등등...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는 방대한 문화유적을 발판으로 관광 산업을 발전시켜 연간 3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에스파냐와 함께 세계 3~4위권의 관광수입을 올려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선진국과는 좀 거리가 있는 나라였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거대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인지....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치며 멀지 않은 미래에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찾으리라 계획한다. 이방인에 느끼는 여행에 대한 소감은 자원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이 좀 슬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원고 초고인데 그냥 올려 본다.-수정할 부분도 많고 미흡한 부분도 많으나 멀지 않은 미래 다시 방문할 예정으로 ..........
첫댓글 눈이 아른거려 내일 또볼께 재미있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