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비소츠키 Vladimir Vysotsky, 1938 - 1980, 러시아
뒷걸음 치는 야생마(영어Fastidious Steeds)/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Владимир Высоцкий)/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music%2Fvysotsky%2Fviso02.jpg) 스탈린의 대숙청과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에게 그의 부모는 건축기사가 될 것을 바랬지만 비소츠키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music%2Fvysotsky%2Fviso03.jpg) 비소츠키는 1956년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작은 지부인 네미로비츠 단첸코 스튜디오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무명 배우로 지내야 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music%2Fvysotsky%2Fviso04.jpg)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그는 리얼리즘이 사라진 소련의 예술에 현실의 고통스러움을 알려주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indshoes.new21.org%2Fmusic%2Fvysotsky%2Fviso05.jpg) 만년의 비소츠키는 우울증 증세로 몹시 힘들고 괴로워했다. 25년간의 가수 활동 기간 동안 5장의 음반밖에 발표하지 못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은 비밀리에 제작된 지하의 카세트 녹음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 때는 그야말로 국장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였다.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전 기간 중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군중 집회로 기록된다.
비소츠키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 <백야(White Nights)>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사관과 신사>로도 유명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85년작으로 국내에는 1986년 국내 개봉작 중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백야(White Nights)>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라이오넬 리치'의 <세이 유 세이 미(Say You Say Me)>라는 대단한 히트곡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타며 자격 논란을 빚었던 이 음악보다(왜냐하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쓰이지 않다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비로소 흘러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영화음악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으므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니콜라이 로드첸코 역)가 키로프 극장에서 홀로 춤추는 장면과 그때 흘러나왔던 소련 가수의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노래가 더욱 인상적이었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였던 바리시니코프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배역 니콜라이 로드첸코를 연기하며 보여준 현란한 춤실력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뭇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물론 남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영화에 데뷔한 잉그리드 버그먼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라 로셀리니(헬렌 미렌 역)로 인해 가슴이 설렜겠지만.) 이때 바리시니코프가 보여준 춤동작은 이후 CF에도 사용되는 등 대단한 인상을 남겼고, 상대역을 맡았던 그레고리 하인즈의 탭댄스 역시 이 영화를 찾게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토록 인상적인 장면에 쓰였던 노래는 우리에게 흔히 <야생마>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였는데 잘 아시다시피 살아 생전에 단 한 장의 음반도 출반하지 못한 가수였던 비소츠키의 노래를 국내에서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한때는 소련의 유명한 합창단인 소련적군합창단(Red Army Chorus)의 음반을 구입하는 것조차 적성국의 고무 찬양 및 내통 혐의로 발전할 수 있는 중죄에 속하던 시절이므로 설령 음반이 있다고 해도 구하기 어렸을 것이다. 한때 라이센스 음반이 나온 적 있었는데 그 음반에는 이 곡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대숙청기에 태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죽은 가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는 1938년 스탈린의 숙청 작업이 서서히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태어나 1980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악의 제국'이란 비난을 듣던 시기에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가수이다.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모스크바 드라마 극장 소속의 배우로 햄릿과 돈 주안 등의 작품을 올렸고, 생전에 26편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소련 민중들이 사랑하는 시인이자 가수였다.
비소츠키는 독·이·일이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전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자는 추축국 동맹을 맺은 이듬해인 1938년 1월 25일 모스크바 도심의 한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의 소련은 레닌 사후 시작된 권력 투쟁의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36년 12월 5일. 스탈린은 헌법을 개정하여 소련을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키로프 암살사건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대숙청 작업은 그 결과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스탈린보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공이 컸던 혁명가들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숭배 분위기까지 만들어 갔다. 압제받는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은 키르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소련 연방에 가입시키고, 독일의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울렸다. 스탈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몰디비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를 소련 연방에 가입시켰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41년의 일이었고 비소츠키는 4살이었다. 비소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격과 공습 사이렌 속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자작시를 만들고 낭송하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이던 비소츠키였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이 험난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보다는 건축 기사가 되길 바랬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에 못이겨 건축기사 양성학교에 입학한 비소츠키는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는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기하학과 건축학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배우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이 시절을 회고했다.
세상의 혼란 - 배우 수업의 시작
1956년 6월 비소츠키는 드디어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작은 지부인 네미로비츠 단첸코 스튜디오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같은 해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나는 1986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3년의 고교 교육 과정을 통해 역사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았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광주 사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광주 민중 항쟁으로, 5·16 군사 혁명은 5.16 쿠데타로 사건의 본질은 그대로였지만 교과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해갔다. 어제까지 군사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치던 교사들은 오늘은 군사 쿠데타로, 그리고 광주 사태를 북한 간첩의 소요 책동으로 가르치던 것을 오늘은 민주화 운동으로 교육했다. 배우는 학생에게 교과서는 세상을 읽는 가장 초보적인 잣대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창은 혼미를 반복하더니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의 구실을 할 수 없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단 소련의 민중과 비소츠키 만의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가 죽었을 때 눈물 흘리며 슬퍼했던 이 땅의 소시민들도 함께 겪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진행 과정을 바라보는 전세계 민중과 지식인들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가 품고 있던 휴머니즘적 이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유토피아'의 이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 직후 레닌이 보여주었던 탁월한 활동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토피아라는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해주었다. 그는 혁명 과정의 어려움을 민중들에게 솔직히 고백했고, 민주적 토론 속에서도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과감히 실천해나가는 혁명의 대의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공식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러시아 공산당의 공식적인 예술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것은 레닌이 주도하던 혁명 전반기의 일이 아니라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뒤의 일이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리얼리즘과 같이 특정 사조의 인물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10월 혁명의 결과 수립된 볼셰비키 정권의 예술은 이들 아방가르디스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한 뒤부터 아방가르드 예술은 지도적 지위를 잃었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부르주아 사회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 결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현실은 사라지고 당의 공식적인 구호와 희망 사항만 남고 말았다.
비소츠키는 대학 4학년이 될 무렵부터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행인3, 걸인2와 같이 대사도 몇 마디 없는 형편없는 단역 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푸시킨 극단에 입단한 비소츠키는 여전히 싸구려 단역배우를 전전하였지만 극단은 그와 정식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후 몇 편의 영화와 영극에서 단역배우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레프코차리안과 몇몇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레프코차리안은 친구의 음성을 카세트에 녹음했고, 비소츠키의 이 음반은 곧 소련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우로서 고뇌의 길을 걷던 한 무명 배우에게 민중의 갈채와 사랑이 쏟아졌다.
자유를 향해 달린 음유시인. 비소츠키
우연히 친구 앞에서 자신의 자작곡을 부르고, 그 노래를 녹음하여 두었던 친구. 그는 친구의 노래가 혼자 듣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테이프를 복사해서 친구들에게 돌렸고 친구들 역시 비소츠키의 노래 테이프를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비소츠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소츠키의 노래들은 사실 단조로운 포크 리듬에 가사를 읊조리는 형태로 되어 있어 어찌 들으면 단순히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의 노래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다음의 일화를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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