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
Silk 염선영 |
Road 김명순 |
생년월일 |
1950. 04. 30 |
1951. 03. 29 |
대한항공 ID |
0430ysy |
butsio |
이메일 |
0430ysy@hanmail.net |
butsio@hanmail.net |
홈페이지 |
cafe.daum.net/crealand | |
자택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정림동 우성A 126-1102 | |
전화번호 |
042-585-0401 | |
휴대폰번호 |
010-9874-0401 |
010-7425-0041 |
우즈베키스탄에서
SILK ROAD 읽기
목 차
Ⅰ. 왜 실크로드인가? 1
1. 우즈베키스탄 2
2. 타슈겐트 7
Ⅱ. 어디에 가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8
1. 읽을 목적 8
2. 읽을 계획 8
3. 천산 북로 여행 9
가. 타슈켄트 10
나. 사마르칸트 14
다. 부하라 18
라. 히바 21
Ⅲ. 어떻게 준비하나? 25
1. 자기 소개서 25
가. Silk 염선영의 자기 소개서 26
나. Road 김명순의 자기 소개서 29
2. 예산 32
3. 준비 32
4. 주의사항 32
Ⅳ. 결론 33
※ 참고 사이트 34
Ⅰ. 왜 실크로드인가?
예전에 역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실크로드를 유럽으로부터 중국까지의 길로 배운 바 있다. 직역하면 중국의 비단을 유럽에 팔고 유럽의 산물을 중국으로 교역하는 육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통 수단의 발달로 실크로드를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 및 해로로 넓혀졌다. 각기 유럽에서 시발해 중국의 화북(초원로)과 장안(현 시안, 육로), 동남해안(해로)에서 멎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교역의 통로라기보다는 서구와 동양의 문명의 교류 통로로 확대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지금은 항공 해운 교통이 발달해 더 넓게 실크로드를 확대할 수도 있고 사이버 세상을 맞아 사이버 실크로드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 실크로드를 모두 답사할 수는 없지만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문명과 문화의 교류 현장에서 인류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서문명 교역로 실크로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극동에 위치해 있으나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역 지점을 중국으로 한 정한 것은 강대국 중심의 편협적인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대국중심주의적 발상대로라면 우리는 실크로드와 무관하며, 따라서 문명교류에서 버림받은 ‘기아’가 되고 만다. 5천년 한국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 늘 이웃과의 어울림 속에서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주고받음은 공간적 매체인 길을 통해 가능하다. 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한다. 실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요컨대, 실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 가는 이음길이다. 한국의 문명은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남방 문화는 해양을 통해서 남에서 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파 과정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기보다 해양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더 강하게 주장되는 것을 보면 해양 실크로드도 극동의 한반도까지 연장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 한반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고증을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우즈베키스탄 여행길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대한항공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공항 취항 이벤트에 응모하는 것이다.
1. 우즈베키스탄1)
가. 개요
공식명칭 |
우즈베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 | ||
인 구 |
26,383,000 |
면 적 |
447,400㎢ |
수 도 |
타슈켄트 |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
국가원수 |
대통령 |
공식 언어 |
우즈베크어 |
독립년월일 |
1991. 8. 31 |
화폐 단위 |
숨(sum, 복수형 sumy) |
우즈베키스탄 지도
중앙 아시아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다. 북쪽과 서쪽으로 카자흐스탄,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짧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고 수도는 타슈켄트이다. 대한항공은 2008년 9월 2일 역사적인 직항로를 개설 취항하여 양국 간의 실크로드가 열렸다.
나. 자연환경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대체로 남서쪽의 아무다리야 강(고대 이름은 옥수스 강)과 북동쪽의 시르다리야 강(고대 이름은 자카르테스 강) 사이에 위치한다. 국경 내에 카라칼파크스탄 공화국을 포함하고 있다. 남쪽과 동쪽에 기름진 오아시스와 높은 산맥이 있지만 국토의 거의 4/5는 햇볕에 말라붙은 평평한 저지대이다. 저지대는 중부와 서부에 있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키질쿰(사막)으로 바뀌고 서쪽으로 향하면 우스튜르트 고원과 이어진다. 북서쪽에는 아무다리야 강이 복합삼각주를 형성하면서 아랄 해로 유입된다. 아랄 해 남부의 2/3는 우즈베키스탄과 면해 있다. 남동부에 있는 제라프샨 강 계곡은 우즈베키스탄 고대 문화의 중심지로서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의 역사적인 도시들이 있다. 전체 면적의 1/4에 달하는 동부 지역은 산맥과 산맥을 따라 흐르는 강의 계곡이 전형적인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협곡 중에는 토양이 기름지고 인구가 밀집된 곳이 몇 군데 있다.
기후는 아주 건조하고 대륙적인 성격이 뚜렷하다. 여름이 길고 따뜻하며, 겨울은 짧고 대체로 온화한 편이다. 여름 평균기온은 32℃이다.
강들은 남동부의 타지키스탄 및 키르기스스탄 산맥에서 발원하여 중부와 동부의 메마른 저지대를 북서방향으로 지나면서 관개에 이용되거나 증발되어 유량이 줄어들고, 여러 개의 지류들은 사막에서 말라버리거나 본류에 이르기 전에 관개용으로 사용된다.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의 물을 관개용으로 끌어다 쓰는 바람에 한때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 해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랄 해의 염도가 높아지고, 강에서 유입되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수질이 오염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우즈베키스탄의 많은 농경지가 혹사당하면서 염화 작용을 일으키고 화학적인 독성에 오염되고 있는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 국민
남동부 언어 혹은 투르크어의 분파인 차가타이어를 사용하는 이슬람 민족인 우즈베크족이 전인구의 7/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인구의 1/10 미만이며, 타지크인·카자크인·타타르인·카라칼파크스인들이 소수 민족을 이룬다. 비교적 낮은 사망률과 매우 높은 출생률로 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은 동쪽 끝에 있는 페르가나와 이에 연결된 계곡들, 그리고 남중부 지역의 제라프샨 강 계곡이다.
라. 경제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주요 면화(목화) 재배국이며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다. 카라쿨양 사육과 양잠업 또한 중요하며, 이외에 목축 및 멜론·포도 등 다양한 과일·야채 재배가 농업의 나머지 부분을 이룬다.
천연 가스의 주요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며, 상당량의 석유·석탄과 다양한 금속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쿠라민 산맥에는 구리·아연·납·텅스텐·몰리브덴 광상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기계와 중장비의 주요생산지이다. 화학 산업은 우즈베키스탄의 면화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목화밭에 필요한 비료를 생산하는 한편, 면화 가공의 부산물과 폐기물로 여러 가지 화학제품을 생산한다.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교역량2)을 아래 표에서 보면 92년 수교 후 해마다 양이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폭이 더 커지고 있다. 교역양의 대부분은 수입보다 수출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망한 교역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연 도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수 출 |
188 |
247 |
359 |
493 |
649 |
수 입 |
97 |
79 |
77 |
29 |
40 |
계 |
285 |
326 |
436 |
522 |
689 |
마. 정치·사회
원래 소비에트 정부 형태를 근거로 했던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우즈베키스탄공산당(Communist Party of Uzbekistan/CPU)이 모든 부문에서 사실상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야당을 조직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나중에는 탄압을 받았고, CPU가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으로 개칭하고 1994년 치러진 선거 이후에도 계속해서 권력을 잡고 있다. 1992년 헌법상 행정수반은 대통령이고, 입법기관은 최고회의다.
6∼14세는 의무교육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통치의 붕괴를 전후로 한 몇 년 동안 공립학교 교과과정을 러시아식에서 우즈베키스탄식으로 변경하는 데 착수했다. 부하라·히바·사마르칸트에 있는 수세기 된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들은 소비에트 통치 기간 중 주정부의 재정에 의존했으며 지금도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바. 문화
여러 세기 동안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 문화의 중심으로 주목받아왔다. 이 지역 출신의 뛰어난 중세 학자로는 9세기의 수학자 무사 화레즈미, 10세기의 박학다식한 철학자 아부 레이한 알 비루니(973∼1048), 사마르칸트에 천문대를 세운 15세기 천문학자 울루그 베그, 15세기말의 시인 알리 시르 나바이가 있다. 소비에트 통치 기간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의 문화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 역사
우즈베크인들의 역사적 기원은 13세기 몽골족에서 시작한다. 13세기경 징기스칸의 손자인 시바칸은 시르다리야 북쪽, 즉 서쪽으로는 우랄 산맥과 동쪽으로는 이르티시 강 사이의 영토를 유산으로 받았다. 시바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황금 군단'(Golden Horde : 몽골 제국 서부)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거의 100개의 주요 투르크 부족들을 지배했다. 이 부족들이 결국 몽골족들과 혼인해 우즈베크인들과 중앙 아시아의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되었다. 우즈베크라는 이름은 14세기의 칸 우즈베크라는 인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통치하에서 '황금 군단'은 전성기를 누렸으며, 약 1340년 이후 그가 통치했던 영토는 '외즈 베그(또는 우즈베크)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부 알 하이르 칸(1468년 사망) 통치 시대에 몽골-우즈베크인들은 남동쪽으로 이동해 시르다리야 북쪽 강안에 다다랐다. 아부 알 하이르의 손자인 무하마드 샤이바니 칸 통치 시대에는 16세기초 우즈베크인들이 결성한 부족 연맹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정착 지역을 침입해 점령했고, 나중에는 우르겐치와 타슈켄트 지역까지 점령해 티무르 왕이 세웠던 옛 제국을 무너뜨렸다. 트란속사니아('옥수스를 넘어서')로 불리는 이 지역은 우즈베크인들의 영구적인 고향이 되었다.
이 시기에도 우즈베크인들은 단일혈통과는 거리가 멀어 고대 이란 지방 민족들의 후손, 투르크어를 쓰는 부족들, 몽골족 대군주들의 혈통이 섞여 있었다. 트란속사니아를 점령한 후 카를리크족과 위구르족 등 다른 부족들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샤이바니의 우즈베크 왕조는 1598년까지 트란속사니아를 통치했고, 이후 이 지역은 여러 민족들의 점령기를 거치면서 점차 물질적 번영과 문화생활 수준이 쇠퇴하게 되었다. 19세기 무렵 우즈베크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민족적 결합체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이들의 영토는 명목상 부하라·히바·코칸트 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세 지역은 1855∼76년 러시아가 팽창하면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924년 소련 내에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비에트 통치하에서 우즈베키스탄은 관개·기계화·화학비료·농약 등을 이용해 면화를 재배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정책들은 우즈베키스탄을 주요 면화생산국으로 만든 반면, 심각한 환경 피해를 야기해 전체 우즈베크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었다. 1990년 6월 우즈베키스탄은 중앙 아시아 공화국들 중 최초로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법률에 대한 자국 법률의 주권을 선언했다.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1991년 12월 실시된 최초의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 CPU의 초대 서기관이던 이슬람 카리모프가 86%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카리모프는 집권 후 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야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1993년에는 모든 야당에 대한 출판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같은 인권 유린에 대해 외국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항의가 있었으나 무시되었다.
아.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92년 1월 29일 수교했으며, 같은 해 2월 7일 북한과도 수교했다. 1993년 12월 21일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으며,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은 1996년 1월에 설치되었다. 주요협정체결 현황을 보면 1992년 6월 투자보장협정, 무역협정, 과학기술협정, 사증발급양해각서, 1994년 6월 항공협정, 문화협정, 1995년 2월 교육협력양해각서 등 여러 부문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6년 대한수출액은 1억 9,610만 달러였고 대한수입액은 4억 9,383만 달러였다. 1997년 현재 교민수는 22만 명이고 체류자는 350명이다.
2008년 5월 11일 오후 자원외교 순방을 나선 한승수 국무총리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도착해 12일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ev) 우즈벡 총리와 단독·확대회담을 갖고 에너지·자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협력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특히 양국 총리는 양국간 실질적 협력을 위해 앞으로 한 총리와 미르지요예프 총리간 '핫 라인'을 개설해 시간과 절차를 단축하기로 합의했다. 한 총리는 이 자리에서 "전략적 파트너인 우즈베키스탄을 제일 먼저 방문했다"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저의 방문을 통해 가까워지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르지요예프 총리는 이에 대해 "한 총리의 공식방문은 우즈벡과 한국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증진에 계기될 것"이라며 "한국 국민들의 저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답했다.
특히 양국 총리는 우즈베키스탄내에 거주하는 20만명의 고려인이 양국 관계 강화에 건설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고려인 독거노인 양로원 설립' 등 고려인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양국 총리는 회담이 끝난 직후 '조약 및 양해각서(MOU) 체결식'을 갖고 우라늄 장기도입 계약, 2008~2011년 우즈벡에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1억2000만 달러 지원, 6개월간 우즈벡 신규 특정 광구에 대한 평가 독점권 소유, 나망간·츄스트 유전 컨소시엄 공동탐사 및 운영, 우준쿠이 가스전 공동조사계약 등 구체적 협력을 약속했다.
한 총리는 이 외에 ▲아무다리야 유역 인근 대규모 광구 개발 참여 ▲알마릭 광구 인근 미탐사 광구 개발 참여 ▲알마릭광업공사 제련시설 현대화 사업 참여 등을 요청했고, 미르지요예프 총리는 이에 대해 "직접 모니터링을 하며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양국은 이 외에 ▲에너지 분야 공동연구 협력 MOU(에너지경제연구원-에너지 자동화 연구소) ▲부품소재 협력 MOU(지식경제부-과학기술협력위) ▲표준화기관간 협력 MOU(지경부-표준계량인증원)▲타쉬켄트 구도심 재개발 등 건설 협력 MOU(토지공사-타쉬켄트시) ▲나보이 공항 현대화 협력사업 등을 체결하고 분야별 경제협력의 토대를 구축키로 했다.3)
2.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에는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20만명이 넘게 살고 있다. 우리민족의 민족사를 웅변하는 고려인들은 과거 장대한 고구려 역사를 증거하고 있으며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의지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즈벡이 러시아로부터 독립되면서 우리나라와 선린의 관계가 돈독해 지고 있고 양국의 협조와 교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대한항공은 2008년 9월 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천-타슈켄트 노선 취항기념식을 갖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주 3회(화, 금, 토) 정기편 운항을 시작했다.4)
한국인에게 우즈벡 타슈켄트는 더 이상 낯선 이국의 도시 이름 같지가 않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향수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자로서 타슈켄트의 경험은 남다를 것으로 기대된다.
자세한 내용은 뒷면 여행지 소개에서 다루기로 한다.
Ⅱ. 어디에 가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1. 읽을 목적
본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으로서 여행이나 탐방이라는 일상적 단어보다 문화체험을 ‘읽기’로 보고자 한다. 읽기란 책이나 글을 읽는 단순한 행위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문화재에서 시작하여 심안(心眼)으로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를 몸으로 체득하겠다는 의미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실크로드를 탐방하며 옛 교역의 자취를 읽고 고려인들이 어떻게 문화적응을 하고 있는지를 읽어 올 것이다.
2. 읽을 계획
가. Silk Road
동방과 서방의 무역품중 동방에서는 주로 비단이 서방으로 전해졌고, 서방에서는 보석, 옥, 직물, 유리, 소금등이 전해 졌는데 비단의 이동통로라고 하여 SILK ROAD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크게 해상실크로드와 육상실크로드(초원길 포함)으로 나누어진다. 역사적으로 봐서도 고대 실크로드는 마케도니아의 대황제였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길 즉 마케도니아-페르시아-바빌론-힌두쿠시-인도-중국으로 이어지는 길이 해당 되며, 우리가 알고있는 초원길은 중세 실크로드로 역사상 최대의 정복가인 징기스칸의 말발굽이 만든 실크로드를 가리킨다.(옥문관-돈황-우루무치-중앙아시아-카스-쿤자랍-훈자-길기트-페샤와르-페르시아-터키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루트)
초원길 즉 중세 실크로드는 천산을 중심으로 천산남로와 천산북로로 나누어진다. 신장 위구르의 북쪽길 지금의 준가르분지(우루무치 북쪽)을 지나 키르키스탄-사마르칸트를 지나 유럽의 관문인 페르시아-터어키로 이어지는 루트를 우리는 천산북로로 부르며, 천산남로는 타림분지를 지나 카슈카르-쿤자랍-타클라흐칸 사막을 잇는(파키스탄쪽) 남쪽 루트를 말한다.
타슈켄트-사마르칸트-부하라를 잊는 실크로드 천산북로 여행을 통해 신비하고 웅장한 관광지와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문화의 현장 탐방하며 사막의 오아시스,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풍경, 회교문명, 유목민들의 애환을 읽고 싶다.
3. 천산 북로 여행 계획
대한 항공 홈피에 소개된 여행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일정을 잡아보았다.5) 현지 사정을 잘 몰라 더 구체적인 연구를 하여 준비해야 한다. 일정을 다음 표와 같이 계획하고 여행지 정보를 사진과 함께 제시하였다.
날 짜 |
여행 테마 |
세부 여행 계획 |
비 고 |
12.23 (화) |
시차적응 & 휴식 (타슈켄트) |
인천출발16:50 타슈켄트도착20:15 석식 기내식 시내로 이동 호텔투숙20:45 * MARKAZIY HOTEL http://www.markaziy-hotel.com |
비행기 KE941 |
12.24 (수) |
타슈켄트 |
* 만년설의 침간산 (리프트 탑승) * 챠르박 호수 * 김병화 농장: 김병화 박물관 *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인 꾸일륙 바자르 (재래시장) * 고려인 마을 관광 전통요리 샤실릭 (꼬치구이)으로 석식 후 호텔 투숙
▶침간산 : 해발 3,300m의 산으로 타슈켄트의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중턱까지 올라가 리프트 탑승 또는 승마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차르박 호수 : 침간산 중턱 해발 1,600m에 위치된 고산지대에 있는 호수로 텐산과 침간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을 받아 저장하는 인공담수이다. * MARKAZIY HOTEL |
석식:전통요리 샤실릭(꼬치구이) |
12.25 (목) |
타슈겐트 |
1. 아무르티무르 박물관 (Amir Timur Museum) 2. 나보이 극장 (Alisher Novoi Theater) 3. 바자르 (Bazaar) * MARKAZIY HOTEL |
조식 후 관광특급열차로 사마르칸트로 이동 (4시간) |
12.26 (금) |
사마르칸트 |
1. 레기스탄 광장 (The Registan) 2. 비비하님 모스크 (Bibi-Khanym Mosque) 3. 구르 에미르 (Gur Amir Mausoleum) *그랜드 사마르칸트 호텔 |
조식 후 부하라로 이동 (버스4시간) |
12.27 (토) |
부하라 |
1. 칼란 미나레트 (Kalon Minaret) 2.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Ismail Samani Mausoluem) *ASIA KHIVA HOTEL |
히바로 이동 (버스7시간) |
12.28 (일) |
히바 |
1. 이찬 칼라 (Ichon-Qala) 2. 이슬람 훗자 메드레세와 미나레트 (Islom-Hoja Medressa) 중식 후 우르켄치 - 국내선 - 타슈켄트 공항 도착 * MARKAZIY HOTEL |
타슈켄트로 출발 현지식 |
12.29 (월) |
타슈겐트 |
* 독립기념 광장 * 지진 기념비 * 구 시가지 * 압둘 카심세이흐 사원 * 인민친선우호광장 * 젊음의 거리 브로드 웨이 관광 * MARKAZIY HOTEL |
타슈겐트 시내 관광 현지식 |
12.30 (화) |
타슈겐트 |
타슈켄트출발: 21:50 인천국제공항 도착: 08:10 |
비행기 KE942 |
가. 타슈켄트
차치(Чач)-샤쉬(Шаш)-빈켄트(Бинкент)-타슈켄트(Ташкент). 이 이름들은 화려했던 지난 역사를 말해준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자 ‘중앙아시아의 수도’라 불리는 타슈켄트는 약 213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이다. 천산산맥의 지류에서 흘러나온 치르칙강을 끼고 형성된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과거 동양과 서양을 잇는 유라시아 횡단 길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모래바람을 뚫고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은 이곳에서 여독을 풀며 중국의 비단, 서역의 향료 등 각종 문물을 거래하였다.
타슈켄트라는 명칭은 투르크어로 ‘돌(타쉬)의 나라(켄트)’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석국(石國)’으로 적혀있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장수가 된 고선지 장군이 점령했던 ‘석국’이 바로 타슈켄트이다. 그런데 왜 ‘석국(石國)’으로 불렸을까? 타슈켄트는 돌이 유명한 곳이 아니다. 바로 타슈켄트는 보석공예가 유명했던 곳이었다. 실크로드 무역이 활발하던 시대에 중국, 몽골 등지에서 가져온 보석을 재가공하여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 서양에 팔았었다. 그래서 돌(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나라라는 의미로 석국으로 불렀다고 한다.
오아시스 도시로써의 역사는 길고, 2000년 전에는 ‘차치(Чач)’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11세기경부터 ‘타슈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실크로드의 중계점으로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도 이 때쯤이다.
몽골군에 패한 후 티무르제국, 샤이바니 왕조시대가 되어 도시는 부흥하게 된다. 1809년에 코칸트 칸국의 지배하에 들었을 쯤에는 길이 25Km의 성벽에 둘러싸인 인구 10만의 도시로 성장했다.
1865년 러시아군이 점령하여 1867년부터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그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6년 4월 26일에 도시를 최하단에서부터 흔들어버린 대지진으로 도시의 약 70% 파괴되었으나, 이 지진을 계기로 타슈켄트는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한다. 소련 각지에서부터 약 3만 이상의 ‘혁명적 노동자’가 투입되어 겨우 2-3년만에 도시를 완전히 새로운 근대도시로 변하게 했다. 건물은 도시계획에 따라 견고하게 다시 지어졌으며, 백화점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도로 또한 현대화되었다. 특히 각 공화국의 기술자들이 그들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건물을 지어 현재의 타슈켄트는 건축양식이 매우 다양함을 볼 수 있다. 이때 각 공화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세르겔리, 칠란자르 등의 위성도시가 건설되었다.5)
1) 아무르티무르 박물관(Amir Timur Museum)
서방에서 타메를란(TAMERLANE)으로 잘 알려진 14세기 정복자 ‘아무르 티무르’와 그의 제국에 관한 역사를 유네스코 지원으로 1966년 복원한 곳이다. 터키, 중동, 러시아, 인도, 이란까지 평정했던 이 위대한 정복자의 찬란한 역사만큼 박물관의 내외관이 화려하다. 박물관 앞 아무르 티무르 공원 중앙에는 말을 타고 힘차게 군대를 호령하는 동상이 있다.
“만약 너희들이 우리의 힘을 확인하고 싶거든, 우리의 건축물을 봐라” 아미르 티무르의 이 말은 그의 고향인 샤흐리 삽스의 악사라이 궁전의 정문에 새겨져있다. 박물관은 타슈켄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늘색 지붕이 이슬람 사원을 연상케하고 박물관 건물은 은빛 분수와 화려한 꽃들로 둘러싸여 있어, 현대와 고대의 건축술을 융합한 매우 특이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박물관은 아미르 티무르 탄생 660주년을 맞이하여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1996년 9월 개관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서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면 그 화려함과 아름다운 문양에 넋이 나간다. 그리고 대리석 기둥, 대리석 계단 등으로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10미터의 벽에는 ‘탄생’, ‘성장’, ‘영광(업적)’등의 테마로 나뉘어져 있는 이슬람 양식의 그림이 있으며, 1층에는 대리석의 주춧대 위에 거대한 코란이 놓여있다. 이 코란은 7세기 칼리프 오스만 자이트의 개인 비서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커다란 노란색 종이 위의 아랍글자는 보는이로 하여금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2층에는 은과 구리로 만든 13-14세기의 동전, 15세기 히바의 화려하게 조각된 나무 기둥, 19세기 부하라 통치자가 입었던 금으로 수놓은 관복, 갑옷,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벡 천문대의 모형, 비비하님 모스크의 모형, 타지마할 묘의 모형 등 찬란했던 티무르 제국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2) 나보이 극장 (Alisher Novoi Theater)
중앙아시아의 볼쇼이 극장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수준 높고 알찬 작품들을 많이 공연한다. 특히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테르메즈, 히바, 페르가나 등 6대 도시의 특징을 살려 꾸민 6개 휴식 공간의 실내 장식이 훌륭하다.
화려한 외관과 웅장한 모습으로 타슈켄트의 대표적인 명물인 나보이 극장은 2차 세계대전 때 잡힌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1947년에 완공을 했으며, 설계는 레닌의 묘를 설계했던 슈세프가 했는데, 그의 클래식적인 요소와 중앙아시아적인 요소의 적절한 결합체인 노란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완성 후 스탈린으로 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현관을 넘어서 들어가면 여섯 개의 휴게실이 나오는데 이것은 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트, 히바, 테르미즈, 페르가나 등을 각각 상징하고 있으며, 벽면에 조각들이 두껍게 휴게실 전체를 감싸고 있다. 각기 주제와 벽장식의 영감은 나보이의 시에서 얻었다고 한다. 샹들리에는 모자에 보석이 박힌 것 같으며, 1000여석에 이르는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홀은 러시아 오페라 홀과 우즈벡의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스타일을 혼합하여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매표소는 극장 정면에 있는 원주형의 기둥 안에 있다.
‘일본군이 세운 이 극장은 대지진이 일어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며 일본인들의 자랑이 대단하다. 물론 일본인 관광객들의 제1 방문지이다.
오페라, 발레 등의 공연은 세계 정상급이나, 가격은 아주 저렴하다. 1,000-1,500숨이면 된다. 타슈켄트를 방문하면 발레와 오페라에 문외한 사람이라도 꼭 한번쯤은 볼만하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다른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한다.(단, 7,8월은 공연 휴식기간이다.)
3) 바자르 (Bazaar)
타슈켄트에는 옛날 재래시장 같은 대형 바자르가 곳곳에 성시를 이루고 있어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열 곳이 넘는 바자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꾸일륙과 초르수다. 초르수 바자르는 실크로드 시대의 옛 정취를 간직 하고 있으며, 꾸일륙 바자르에서는 고려인 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주로 ‘철수’라고 주로 발음을 하나, 정확한 발음은 ‘초르수’에 가깝다. 철수라는 이름이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여서 가장 쉽게 그 이름을 기억하는 바자르이다. 타슈켄트의 대표적인 바자르로서 실크로드 시대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카페트에서 식료품, 일상용품까지 없는 것이 없다. ‘초르수’는 우즈벡어로 네 개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라는 뜻이다. 거대한 푸른 돔은 구 소련시대에 지어졌으며, 1층에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2층에는 건과류와 향신료가 쫙 펼쳐져 있다. 돔을 벗어나면 카페트와 이불 등의 일상용품 등이 있으며, 시장에서 빠질 수 없는 먹거리(샤실릭, 쁠롭 등)도 많다. 바자르의 북쪽 뒤에는 목제품을 직접 만들어 파는 목공소들이 줄지어 있다. 바자르 내에는 작은 이빠드롬으로 불리는 옷감 시장이 따로 있다. 이빠드롬 바자르와는 달리 옷감을 주로 취급한다.
4)타슈켄트의 명소들6)
* 우즈베키스탄 국립 역사박물관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
*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 истории Темуридов)
* 전쟁 기념박물관 (Музей Вооружених сил)
* 바라크 한 메드레세 (Медресе Барак-хана)
* 쿠켈다쉬 메드레세 (Медресе Кукельдаш)
* 압둘 카심세이흐 메드레세(Медресе Абдул-Касымшейха)
* 국민친선광장(Площадь Дружбы народов)
* 지진 기념비(Землетрясение Монумент)
* 타슈켄트 추모의 광장(무명용사의 묘)
* 무스따낄릭 광장(Площадь Мустакиллик)
* 아미르 티무르 광장(Площадь Амир Темур)
* 김병화 꼴호즈(Колхоз им. Ким Пен-Хва)
* 타슈켄트 TV탑(Ташкентская телебашня)
* 나보이 극장(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большо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театр им. А. Навои)
* 울루그벡 공원(Парк Улугбека)
* 바부르 공원(Парк Бабура)
* 나보이 국립공원(Национальный парк им. Алишера Навои)
* 철수 바자르(Чорсу базар)
* 꿀륙 바자르(Куйлюкский базар)
* 띠지꼬프 바자르(Тезиков базар)
* 침간(Чимган)과 차르박(Чарвак)
나. 사마르칸트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도시 티무르왕이 좋아하던 푸른색으로 만들어진 도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학창시절 우린 세계사 수업시간에 사마르칸트에 대해서 많이 들어봤다. ‘실크로드’가 나오면 반드시 따라 나오는 도시 ‘사마르칸트’.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사마르칸트’. 실크로드의 중심인 사마르칸트...
옛 문헌을 살펴보면 사마르칸트를 ‘동방의 낙원’, ‘중앙아시아의 로마’, ‘황금의 도시’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마르칸트는 현재 사마르칸트 주(州)의 주도(州都)로서 인구 약 36만 명으로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이다. 공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사마르칸트는 자랍샨 강(江)의 계곡과 구릉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자랍샨 강은 ‘황금을 뿌리는 강’이라는 뜻으로 일년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이 강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주민의 대부분은 타직민족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은 집에서는 타직어를 학교에선 우즈벡어를 그리고 길거리에선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3개 국어는 구사를 한다는 사실이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하지만 금,토,일에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왕복하는 특급 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열차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서 고대 호레즘시대 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1220년 징기스칸에 의해 패망되기까지는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번창하였다.
현재 도시는 징기스칸에 의해 파괴된 아프라샵(Afrasiap)언덕 아래에 다시 건설되었다. 11세기에는 티무르 왕조가 몽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사마르칸트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그는 사마르칸트를 동방의 로마로 키우고자 하였다.
도시의 주요 건물인 모스크와 메드레세들이 대부분 유약을 발라 구워내 푸른색 벽돌로 장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를 흔히 ‘푸른도시’라 부른다. 이처럼 사마르칸트가 푸른도시로 된 까닭은 티무르가 유독 푸른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마르칸트로 가는 동안의 풍경은 거의 일정하다. 광활한 목화밭과 쭉뻗은 도로...특별한 휴게소는 없다.
1) 레기스탄 광장 (The Registan)
실크로드의 중심인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우즈베키스탄 의 50숨 지폐에서도 볼 수 있다. 무슬림 종교 활동을 위해 필요한 이슬람 사원(모스크), 신학교(메드레세), 첨탑(미나레트)의 3개 건축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시장과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뜻으로 옛날에 모래로 뒤덮힌 사막이었다고 한다.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이 행해졌다.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메드레세가 세워졌으며 메드레세의
맞은편에 하나카가 있었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후 샤이바니 왕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써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써 제역할을 하고 있다.
광장은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 울루그벡 메드레세, 중간이 틸라카리 메드레세, 오른쪽이 쉬르도르 메드레세이다.
2) 비비하님 모스크 (Bibi-Khanym Mosque)
타키가 위치한 사거리에서 일명 ‘사마르칸트의 브로드웨이’로 불리는 길로 약 100m쯤 걸어서 내려가면 좌측으로 중앙아시아 최대규모의 모스크인 ‘비비하님 모스크’를 볼 수 있다.
‘비비하님’은 8명의 왕비 중 아미르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로 그녀의 이름을 딴 모스크이다. 현재는 수리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예전의 거대했던 위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스크의 넓이는 가로?세로가 100m가 훨씬 넘어 축구장 이상의 넓이였으며, 예전에는 입구 아치의 옆에 80m높이의 어마어마한 미나레트가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지붕의 큰 모스크와 작은 모스크가 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코란을 올려놓았던 받침대가 덩그런히 서있다. 이 받침대는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벡이 몽골에서 직접 가져왔으며, 현재 코란이 없음에도 현지인들 사이에는 인기가 대단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서 받침대 주위를 돌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를 하면서 받침대 주위를 도는 젊은 남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3) 구르 에미르(Gur Amir Mausoleum)
‘구르’는 묘, ‘에미르’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구르 에미르는 “왕의 묘"라는 뜻으로, 아미르 티무르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손자 등이 잠들어 있는 티무르 왕족의 묘이다. 푸른 도시라 불리는 사마르칸트에서도 한층 더 푸르름이 돋보이는 장대한 건축물이 아닐까 한다.
원래 이 장소는 티무르의 손자인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 건설된 메드레세와 하나카가 있었는데, 그러나 1405년 오트라르 원정에서 무하마드 술탄이 전사를 하자, 티무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장소에 묘를 건설했는데, 불과 10일만에 묘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묘는 1404년에 완성되었지만 1년 후 중국원정 중에 급사한 티무르 자신도 이곳에 묻히고 만다. 티무르는 원래 자신의 고향인 샤흐리샵스에 잠들길 원했고, 그곳에 묘도 조성을 했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세상을 호령했던 왕이었지만 죽어서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질 못했다.
현재 티무르의 손자가 건립한 메드레세와 하나카는 그 터만 남아있으며, 묘만 화려한 모습으로 서있다. 묘 내부는 1996년 수리가 완료되었고 건설 당시의 아름다움도 돌아왔다. 내부를 둘러싼 문양에는 금 3Kg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티무르의 묘는 흑녹색의 연옥(중국산이라고 한다.)으로 만들어졌고 중앙에 놓여져 있다. 그 북쪽에는 티무르의 선생, 손자 한 명, 동쪽에는 무하마드 술탄, 남쪽에는 울루그벡, 서쪽에는 가까운 쪽부터 아들 샤루흐, 이름모를 손자, 아들 미란샤의 묘석이 나란히 있다. 이것은 모두 묘의 위치를 표시한 묘석으로 진짜 관은 이 지하 3m에 있는 묘실에 같은 순서로 묻혀있다. 그리고 항상 머리는 메카 방향으로 안치되어있다.
4)사마르칸트(Самарканд)의 명소
* 레기스탄 광장 (Ансамбль Регистан)
* 울루그벡 메드레세 (Медресе Улугбека)
* 쉬르도르 메드레세 (Медресе Шир-дор)
* 틸라카리 메드레세 (Медресе Тилля-кари)
* 비비하님 모스크 (Мечеть Биби-Ханым)
* 루하밧 묘 (Мавзолей Рухабад)
* 구르에미르 (Мавзолей Гур-Эмир)
* 샤히진다 (Некрополь Шахи-Зинда)
* 울루그벡 천문대의 터 (Обсерватория Улугбека)
다. 부하라
이슬람교의 성지. 산스크리트어로 '사원' 이란 뜻의 이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박물관 도시이며 유명한 카펫 시장도 볼거리이다.
25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부하라는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최대의 관광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사마르칸트와 히바의 이름 값에 밀려 아직은 그렇게 관광객의 수요가 많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부하라를 방문해보면 아직도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순박한 정(情)을 느낄 수 있다
마을 주민들도 모두 친절하고 성심 성의껏 대해준다. 아직은 개발이 되지 않아서 고층 빌딩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며, 시설도 열악하지만 진정한 우즈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우즈벡에서 가장 적극 추천하는 관광도시이다.
부하라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주(州)의 주도(州都)로서 '보하라'(Bokhara)라고도 한다. ‘부하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사원(교회)’라는 뜻으로 부하라가 이슬람교의 성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에는 197개의 모스크와 167개의 메드레세가 있었으며, 이슬람 공부를 위해 각지에서 올라온 약 2만여명의 학생들이 부하라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최고 이슬람 성지로서 9~10세기에는 과학·문예의 중심지였으며, 16세기에는 과거 부하라 칸국의 수도로서, 이슬람 성직자의 양성기관이 있었고, 수많은 이슬람 사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도시로 유명하였다.
현재 인구는 약 23만명(2002년)으로 우즈베키스탄 중부지역의 문화중심지이며, 저지대에서 산출되는 가스와 농산물 가공, 모피 가공의 중심지이다. 주요 산업은 직물·피혁·유지 등이며, 융단, 금속조각, 목각 투조(透彫) 등의 공예품도 활발하다.
아무다리야 강에서 흘러 들어온 2개의 운하가 부하라를 가로 지르며 생명선의 역할을 한다. 사마르칸트와는 달리 부하라는 걸어서도 충분히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다.
1) 칼란 미나레트 (Kalon Minaret)
‘칼란’이란 타직어로 ‘크다’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높이가 46m에 이른다. 그래서 부하라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부하라의 상징이다.
1127년에 칼란칸 왕조 아루스 칸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본 산증인이라 일컬어진다. 탑의 기단부 직경은 9m, 토대부분이 지하로 10m 들어가 있다. 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원통형으로 탑의 벽면은 14층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벽돌을 다르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장식했다. 벽돌들은 햇빛에 구운 갈색 벽돌이며, 달걀의 흰자와 낙타젖으로 이긴 반죽으로 붙여 쌓았다고 한다. 미나레트는 모스크의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리로 이어져 있다. 내부에는 105개의 나선계단이 있으며, 관리인과 잘 협상만 하면 올라갈 수도 있다(현재 공식적으로는 금지하고 있다). 탑 꼭대기에서는 부하라 시내의 아름다운 전경이 모두 보여 ‘부하라 관광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다.
미나레트는 사막의 등대로써 사막 여행객에게 있어 중요한 길잡이였다. 또한 18세기 경에는 ‘공개 처형장’으로 꼭대기에서 자루에 넣어진 사형수를 던졌기 때문에 ‘사(ꠚ?의 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최후의 사형은 1884년에 행해졌다고 한다.
2)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Ismail Samani Mausoluem)
부하라가 자랑하는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며, 영묘 이슬람 통치 초기인 900년에 건설된 것으로 부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중앙아시아 건축물의 기념비적인 존재로까지 평가되는 이 영묘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흙벽돌의 무늬가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여 신비감을 더해 준다.
이슬람 초기 건축양식의 영묘로 892년에서 943년에 걸쳐 지어진, 중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이다. 9세기말에 부하라를 점령, 수도로 정한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사마니가 부친을 위해 지은 영묘지만, 그 후 그와 그의 자손도 묻혀 사만 왕조의 왕족 영묘가 되었다. 몽골 내습으로 마을이 파괴되었을 때 마고키 앗타리 모스크와 함께 거의 땅 속에 묻혔으며 주변이 모두 묘지였기 때문에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가 1925년에 발굴되었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아 올린 후 반구형 돔 지붕을 만든 단순한 구조지만 그 외관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벽면을 다양한 문양의 벽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 볼거리로 음영이 있고 당시 건축가의 기술과 미의식에 놀랄 수밖에 없다. 벽면은 햇살의 강약, 각도에 따라 그 음영의 변해 다양한 느낌을 준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숨을 참고 묘를 2바퀴 돈 후 소원을 빌면 반드시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실제로 해보면 숨을 쉬지 않고 2바퀴 도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3) 부하라(Бухара)의 명소들
* 라비 하우스 (Ляби-хауз)
* 나지라 지반베기 메드레세 (Медресе Надира Диван-беги)
* 훗자 나스렛딘의 동상
* 마고키 앗타리 모스크 (Мечеть Магоки Аттари)
* 칼란 미나레트 (Минарет Калян)
* 칼란 모스크 (Мечеть Калян)
* 미르 아랍 메드레세 (Медресе Мир-Араб)
* 아르크 성 (Арк)
* 챠슈마 아유프 묘 (Мавзолей Чашма Аюб)
* 이스마일 사마니 묘 (Мавзолей Саманидов)
라. 히바
도시전체가 유적지인 히바, 지금도 중앙아시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네스코 문화유산 도시이다.
전설에 따르면 히바는 노아의 아들인 셤이 이곳을 발견했을 때 세워졌다고 한다. 히바는 카스피해와 볼가강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지류에 위치한 작은 요새와 교역소로서 8세기까지 존재하였다. 16세기초에 히바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북적되는 노예 시장이 들어섰으며, 다음 3세기동안 티무르 영토의 중심이 된다. 히바는 샤이바니 왕조의 한 왕후인 일바르스가 1512년 히바 지방에 독립왕국을 세운 것을 기원으로 한다. 이후 히바 칸국은 주변의 카자흐, 칼무크, 투르크멘 등 여러 민족과 부하라 칸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제13대 군주 아불가지 바하두르 칸(재위 1643∼1663)은 유명한 역사가로 《투르크족의 계보(系譜)》를 저술하였다. 히바 칸국은 1717년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침략을 받았고, 1873년에는 다시 카우프만 장군에게 침략당하여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2월 혁명 후 1920년 완전히 멸망하여 1924년 히바 칸국의 영토는 우즈베키스탄에 편입되었다.
히바는 세계에 대수학을 전달해준 지루한 도시인 우루겐치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22마일)떨어진 곳에 있으며 면화숲과 과일나무, 끝없는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 현대의 히바는 아주 기이한 곳이다. 중앙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히바의 중심지는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너무 번쩍거리게 깨끗해서 모든 생명이 숨이 막힐 것같다. 히바가 이처럼 유물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 곳이 키질쿰이라는 극도의 건조한 사막성 기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건조한 기후는 과거 유물을 보존하는 데 최적의 기후를 제공하였고 찾아오는 이 없는 고립된 환경은 유적 보존의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19세기에 러시아가 마침내 티무르의 지배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게 될 때까지 가장 용맹스런 사람들조차 이 사나운 민족과 그들의 사막 영토에 들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두 명의 첩보원을 이곳에 보냈지만 한 명은 사형당하고 나머지 한 명은 노예로서 비참한 인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히바는 많이 친절한 편이다. 드문 드문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히바 사람들은 웃음을 아끼지 않는다. 시내에 밀집하여 있는 모스크사원, 무덤, 궁정, 메드레사에서조차 여행자는 고적한 침목과 실크로드의 영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사마르칸트가 청색, 부하라가 갈색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히바는 터키석 타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성벽 내부도시인 이촌 칼라(Ichon Qala)에서는 이러한 타일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히바의 명소에는 넓적한 터키석 타일로 된 칼타 미노르 첨탑(Kalta Minor minaret), 쿠크나 아르크 요새(Kukhna Ark fortress), 218개의 목재기둥으로 된 주마 모스크사원(Juma Mosque), 화려하게 장식된 토쉬-코블리 궁전(Tosh-KhovliPalace), 이슬롬-후자 메드레사(Islom-Huja Medressa)와 그 안의 등대처럼 보이는 첨탑, 정교하게 타일로 붙여져 있고 이슬람인들에 존경의 표본인 파라본 마무드 모슬럼(Pahlavon Mahmud Mausoleum)이 있다.
1) 이찬 칼라 (Ichon-Qala)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이찬칼라는 높이 약 8m, 두께 약 6m, 길이 2km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외적을 막기 위해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길이 있지만 길을 잃기 쉬운 미로 같은 이곳 은 잠자리 들기 전, 이른 아침, 그리고 한 낮, 이렇게 3번을 봐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이찬 칼라'라는 성의 안쪽은 많은 이슬람 건물과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중에서 독특한 유적을 꼽으라면 3개의 미나레트와 '꼬흐나 아르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메드레세와 성원이 있긴 하지만 그 건물들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보았던 것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른 메드레세와 성원을 대충 둘러본 나는 꼬흐나 아르크로 향했다. 꼬흐나 아르크는 '오래된 성'이라는 뜻이다. 히바 왕국의 왕이 살았던 궁전인 이곳은 18세기 말에 완성이 되고 19세기에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2) 이슬람 훗자 메드레세와 미나레트 (Islom-Hoja Medressa)
히바 최후의 칸인 이스판디야르 칸의 대신인 이슬람 홋자에 의해 1910년에 지어졌기 때문에 히바에서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 홋자는 아주 개방적인 인물로 러시아나 유럽을 자주 방문한 후 자국으로 돌아와 유럽식의 학교, 병원, 우체국 등을 지었으며, 새로운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여 히바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하지만 너무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의 반대와 음모로 살해당했다. 혹자는 사막에 생매장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메드레세의 앞 건물은 최근까지 통역사를 양성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었다. 메드레세는 타일로 장식된 정면 입구가 있지만 대칭은 아니다. 마당도 크지 않으며 1층에는 42개의 방이 있으며, 2층에는 입구들뿐이다.
미나레트는 히바에서 가장 높은 45m이며, 기단부 직경은 9.5m이지만 색타일 모양의 장식으로 실제보다는 높게 보인다. 밖의 계단을 올라 미나레트 내부의 99개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좀 힘이 들지만 꼭 한번 올라가 보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멋진 풍경이 눈앞에 들어올 것이다. 멀리 사막도 보인다.
3) 히바(Хива)의 명소들
* 아타 다르바자 (서문) (Ворота Ата-дарваза)
* 무함마드 아민 칸 메드레세 (Медресе Мухаммад-Амин-хана)
* 칼타 미노르 미나레트 (Минарет Кальта-Минор)
* 쿠냐 아르크 (Дворец-крепость Куня-Арк)
* 세이트 알라우딘 묘
* 쉬르가지 칸 메드레세 (Медресе Ширгази-хана)
Ⅲ. 어떻게 준비하나?
1. 자기 소개서
Silk 염선영은 Road김명순의 부인이며, Road(김명순)은 대전외삼중학교 교장이고 Silk(염선영)은 대전서부초등학교 교사이다. Road와 Silk는 지난 여름 난생 처음으로 부부 해외여행을 동유럽(독일, 항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다녀왔다. 동유럽을 돌면서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인류 문화 유적을 읽으며 개인의 생활에 더 진지해야겠다는 것과 다른 나라의 국가와 문화를 이해하여 세계 시민으로서 자질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행을 오갈 때 이용한 비행기가 대한항공이어서 마일리지를 적립하게 되었는데 마일리지 포인트 현황과 함께 타슈켄트공항 취항 이벤트를 접하게 되어 응모하게 되었다. 여행사 패키지여행을 하면 편하긴 하지만 현지 문화의 향취를 맛보기가 어려워 스스로 계획하여 단둘이 떠나는 커플여행을 계획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얻게 된 정보를 미리 공부하고 현장에서 확인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Silk Road 읽기’로 여행주제를 잡았다. 서로의 이름도 아내를 Silk로 남편을 Road로 부르기로 했다. Silk는 Road가 없으면 그 가치가 세계적으로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며 Road는 Silk로 인하여 교역과 문화교류의 통로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체코 프라하에서의 Silk와 Road
역사적인 Silk Road가 대륙과 해양으로 여러 갈래가 있어 물질의 교역과 문화의 교류 통로의 역할을 해왔지만 현대는 모든 하늘 길이 Silk Road이다. 오늘날 사이버 세상에서 IT Network은 최첨단의 Silk Road이다. 미래 세상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고전적 Silk Road에서부터 Cyber IT
이러한 소박한 우리의 여행의 꿈은 부부간의 의사소통도 잘 되어 Silk와 Road로서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 싶어 다음과 같은 자기 소개서를 수줍게 내 보인다.
가. Silk 염선영의 자기 소개서
프라하의 블타바 강에서 Silk 염선영
이름 : 염 선 영(廉善榮)
생년월일 : 1950. 04. 30
직업 : 대전서부초등학교 교사
학력 : 공주교육대학교 졸업
장래 희망 : 전문상담사
1) 마음이 비단(Silk)같은 염선영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연세가 사십이 넘자 중풍으로 편찮으셔서 퇴직을 하게 되었다. 늘 아버지 곁에서 사랑을 받아오던 셋째 딸로 아버지가 안 계신 학교는 쓸쓸하기만 했다. 형제가 모두 8남매 밑으로 남동생 두명 여동생이 세 명이나 있었다. 형제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지만 살아갈 길은 막연하였다. 생각 끝에 리에이 교육방법을 썼던 것이다. 언니가 교육대학으로 입학하여 일찍 교사가 되어 나를 가르쳐 주고 나도 뒤를 따라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부모의 가정경영을 돕게 되었다.
형제들은 모두 성장하여 사범계열 대학을 나와 초중고 대학 교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러한 가정환경을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 인줄 알았다. 늘 웃음꽃이 지지 않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자기 몫을 다하는 생활 자세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가꾸어 갔다.
모두가 선생님인 가정에서 만나기만 하면 교육 이야기 학생들 칭찬 이야기로 밤이 짧도록 교무회의를 한다. 한정된 학교 사회에서 사는 관계로 교육이야기나 학교 이야기가 아니면 대화 소재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곧 교육이야기로 되돌아온다.
그런 환경 속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왔고 다행인 것은 그 속에서 내가 낳은 자식(남자 형제)들이 그대로 동화되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든든 청년으로 사회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은 학생 때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 배낭여행까지 잘 다니는데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 동생들을 보살피는 가정생활과 부모님이 건강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자식을 둔 어미로서 자식을 잘 기르는 일만으로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남편의 제안으로 이번 이벤트를 함께 구상하여 새로운 삶의 장을 넓혀나가기 위해 둘이서 개척해 나가는 새로운 Silk Road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
2) 교육은 소통이다.
교육학에서 교육을 ‘의도적인 인간행동의 변화’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옛날에 공부할 때에는 학자가 책에 정의해 논 것은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로 교육을 정의할 수 있다.
남편 김명순(Road)는 ‘교육은 사랑이다.’라고 말했지만 내가 좀 더 자세히 말을 해보면 ‘교육은 관계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관계란 두 대상이 필요하며 두 대상은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되어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대상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 인간과 사물, 인간과 사상 등 형이하학적 대상에서 형이상학적 무형의 대상과의 관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비들기와 함께 학습자에게 의사소통 능력을 확장시켜주는 것이 교육이다. 역사교과는 과거사와 현재의 현상과의 관계를 공부하는 것이고 과학은 현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학습하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환경과 대상과의 관계, 사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능력이 좋은 사람을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소통능력이야말로 점수화된 지식이 아닌 현실적인 인간 생활 능력인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소통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교사는 부단히 소통의 대상과 영역을 확대해 가며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깨달음이 약해서 실천하지 못한 해외 문화 이해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소통활동을 못해 온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이벤트에 추천이 된다면 이러한 순수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3) 소통이 평화를 준다.
소통 중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가족 간의 소통, 형제 간의 소통, 부부 간의 소통, 친구 간의 소통은 좁은 영역이지만 가장 소중한 소통 관계에 있다. 가까운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어주라.’는 말을 곰곰이 해석해 보면 원수가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멀리 타 지역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란 부모, 형제, 부부, 친구인 것이다.
어찌하여 이 가까운 가족과 친지가 원수가 될 수 있을까? 의사소통의 통로가 막혀 서로의 뜻이 다를 때 미워지고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수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 간, 인종 간, 종교 간, 대륙 간에도 존재하며 이는 전쟁의 원인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같은 사회 속에서도 노동자와 사용자, 서민층과 중산층, 좌익 우익의 정치 집단, 농촌과 도시 간에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가 불안정해 지고 평화롭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 기반을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 의사소통 기술과 능력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단순 지식을 점검하는 수치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 교육에 과감한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는 바이다.
인간관계는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복합적 관계이므로 복잡한 문제가 있다. 형이상학적 인간은 형이상학적 대상과의 소통을 갈망하고 있다. 형이하학적 인간은 형이하학적 대상과의 소통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를 삶의 무대로 확장하여 이질적 국가와 문화의 주체인 이질적 종교와 인종과 소통을 꾀하는 것 또한 형이상학적 관계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이벤트 당첨과 관계없이 다문화 세계에서 소통의 쾌감을 맛보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다.
4) 새로운 세상, 새로운 생각
지금 나의 앞에는 인류 역사상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생이 너무나도 지루한 것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세계가 하루 생활권에 들어오고 있어 삶의 무대가 지구촌을 벗어나 우주를 향하여 도약하고 있다.
얼마 전 뉴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국가에서 제일 높고 그중에 60대의 자살률이 높게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모두가 원수 관계에 있으니 가까운 이웃을 원망하기보다 영원한 소외를 선택하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외되기보다는 소통의 평생학습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의 생활을 한다면 수명이 연장되어도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어도 세계적인 삶의 무대에서 소통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기준으로는 나이가 저물어간다고 하겠지만 영과 육의 건강을 다지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상에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반기리라고 생각하며 본 이벤트에 참가하기를 바란다.
Road 김명순 나. Road 김명순의 자기 소개서
이름 : 김 명 순(金明淳)
생년월일 : 1951.03.29
직업 : 대전외삼중학교 교장
학력 : 대전대학교 영문학 박사
장래희망 : 시인, 문학치료사
1) 어디서 와 어디로 가나?
본은 광산김(光山金)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15대 손으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 왔다. 한국 예학의 근원을 이룬 사계의 후손임을 늘 강조하셔 효와 예를 생활의 기본으로 배웠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입학 후 틈틈이 아버지로부터 명심보감을 배웠다.
봉건적인 전통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말씀에 복종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자기표현 욕구를 억압당하는 분위기에서 조용하고 사색을 많이 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억눌린 표현 욕구를 중학교 때에는 웅변으로 고등학교 때부터는 글쓰기로 대학에서는 연극과 문예 창작으로 분출되어 내면의 사고를 외부로 표현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반전하였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표현 활동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사회 발전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직업으로 교육자의 길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문학적 표현에도 관심을 가지고 시 창작 활동을 일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직업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2) 나의 생명사랑 교육관
교육의 정의를 여러 가지로 내리고 있지만 나는 ‘교육은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교육이라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가장 진솔한 행위이며, 교육의 내용도 ‘사랑’이어야 하며 교육의 방법도 ‘사랑’이어야 한다고 본다.
교육 과정에 의한 교육 내용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인간과 음악의 관계를 공부하는 것이 음악이며, 인간 생활과 수학의 관계가 수학이라는 교과의 내용이다. 과학은 자연과학과 인간의 삶이 주제가 된다. 이렇듯이 교육은 ‘관계사랑’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본다.
우주를 생명 울로 보면 우주 안에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물은 다 생명체이다. 다양한 생명체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 고리에 의해 서로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있다. 이러한 인식아래 생명(개체)사랑 교육이 교육의 기본이 되어 대인(對人)관계, 대물(對物)관계, 대사(對事)관계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인으로 생명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생명 사랑은
몸 밖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의 존재와 존재의 근원을 사랑하며
머리로 상상하는
모든 영혼의 유희를 사랑하며
가슴 속 심장을 격렬하게 박동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다문화 시대의 리더가 되어야
우리나라 환경이 다문화 사회로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단일 민족, 단일 언어가 장점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전 세계에 흩어져 정착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세계인이 들어와 함께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민족이나 인종과 같은 혈통주의로 나를 남으로부터 차별화하는 시대는 아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을 대립적인 구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엔나에서 음악회를 마치고 연주자와 함께 이미 세계는 사이버 세상에서 하나가 되어있다. 소통의 문명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교통의 발달로 세계를 여행하는 인구가 날로 늘어가고 문명과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가 다문화 사회의 구성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여 오해 없는 소통의 행복을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다른 문화 속에 뛰어들어 동화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다문화 글로벌 시대를 사는 평범한 리더가 되기 위해 이번 여행의 기회가 우리 팀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다.
4) 내일을 향한 비전
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며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세계 시민의 상으로 삼고 싶다. 글로벌시대와 디지털 시대에 맞아 세계시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홍익인간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교육CEO의 꿈을 가꾸어 가고 있다.
내일(tomorrow)의 내 일(my work)을 위한 교육 비전 실현을 위해 전공 교과 외에 경영학, 심리학, 미래학, 사이버 학습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국제이해 교육학회, 한국다문화교육학회 등 활동 영역도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확실하게 고정된 화석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내가 나를 조명해 본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바람직한 나를 정의하기 위해 진솔한 삶을 살고 있다. 모든 나의 정체요소들은 다양하게 변해야 하며 지금도 나의 업그레이드 비전이 준비되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본 이벤트 결과가 나를 크게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예산
예산은 대략적인 금액으로 국제 환율과 유가에 의해 변할 수 있으며 2인 기준으로 통합적 예산을 세워보았다.
구 분 |
비 용 |
대한항공 제공 |
개인 부담 |
항공비 |
864,000*2=1,728,000 |
1,728,000 |
|
숙 박 |
Radisson SAS Tashkent (190*2)*2=$760 Markaziy Hotel(ex.Sheraton Tashkent) (120,000*2)*4=$960,000 |
$760*1,136= 863,360 |
$960*1,136= 1,090,560 |
체재비 |
100,000*6=600,000 |
|
600,000 |
개인비자 |
80,000*2=160,000 |
|
160,000 |
유류할증료 |
43,000*2=86,000 |
|
86,000 |
합 계 |
|
2,591,360원 |
1,936,560원 |
총 경 비 |
4,527,920원 |
3. 준비
가. 개인 기호품 및 생수 등 개인비용 팁은 80 $/1인 정도 예상
나. 우즈베키스탄 비자 초청장 포함 (US$ 50) - 총 10일 소요, 사진 3매 필수
다. 20일전에 여권 카피 팩스로 관련 여행사에 송부 필수,
비자 소요기간으로 인해 20일전 마감 입니다.
라. 여권 유효기간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마. 기타 준비물 : 선글라스, 마스크, 개인 상비약, 창 넓은 모자, 카메라용 충전기, 밧데리, 따뜻한 숄. 등등
4. 주의 사항
가. 디지털카메라 및 전기제품 휴대 시 프리볼트 아답터를 준비한다.
나. 호텔마다 전압이 차이가 있다, 220V ~ 240V 50 헬츠다.
다. 현지 항공구간이나 열차의 경우 연착, 취소, 지연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통수단이 대체될 경우를 대비한다.
라. 예약 취소시 수수료에 관한 규정
① 출발일자 21일전-계약금 및 금액 전액환불
② 출발일자 19~10일전-여행경비의 5% 수수료
③ 출발일자 8~9일전-여행경비의 10% 수수료
④ 출발일자 1~7일전-여행경비의 20% 수수료
⑤ 출발일자 당일 취소시 : 여행경비의 50% 수수료
Ⅳ. 기대되는 결론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더듬어
과거의 문화와 인류사를 읽고
오늘의 문화와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ilk(염선영)과 Road(김명순)은 우즈베키스탄 Silk Road 문화 답사를 통해 몽골문명과 러시아 문명의 융합이 만들어 낸 오늘의 문화를 읽어 인간 삶의 동질성을 찾고 이해한다.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 적응상태를 읽고
앞으로의 양국 관계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인의 정착과정과 역사를 공부한 후 현재 정착 상태를 파악하여 양국 간의 선린의 관계를 유지하며 협조 및 지원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교육자로서 미래를 살 평생학습자로서
삶의 자세를 성찰하여
새로운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문화 탐방을 통해 교육자로서의 교육력과 전문성을 닦고 Silk 염선영과 Road 김명순은 교육현장에 Silk Road를 만들어 내어 자신은 물론 학생들과 이웃에게 아름답게 사는 Silk Road를 안내할 것이다.
세계문화를 이해하여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미래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문화 탐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와 같은 여행 계획을 세워 사전에 사이버 상에서 미리 여행을 하고 현장 체험을 하는 이상적인 답사 계속하여 세계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미래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년의 부부교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축복으로 알고
더 알찬 계획으로 성스런 마음으로 인류의 성지를 어루만지리라.
※ 참고한 사이트
1)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query1=b16a3619b#T2
2) http://cafe.daum.net/casiarealty
3)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466749
4)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080902180909302&p=newsis
5) http://kr.koreanair.com/KALMain/ 대한항공
5) http://blog.daum.net/prosumer/에서 우즈베키스탄 4대 도시를 설명한 자료를 인용하였음.
6) 우즈베키스탄 한인회 http://cafe.daum.net/kouz
첫댓글 정말 치밀하고 감동적인 여행 계획으로 훌륭한 여행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진도 잘 볼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