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독국 경산
경북 경산시 압량읍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삼한(三韓)시대 진한 지역의 소국(小國) 중 하나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2세기 초 신라에 병합됐다. 이후 신라에 의해 압독주(압량주)가 설치됐으며, 전쟁 시 경주를 지키는 주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시기에 김유신이 압독주도독으로 임명됐다는 기록이 있다.
압독국 시대의 고대 고분은 1980년대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에서 처음 발견됐다. 특히 임당동 1호 고분(국가사적 516호)에서는 은제 허리띠와 순금 귀걸이, 금동관모, 고리자루칼 등의 껴묻거리와 함께 금으로 치장한 성인 유골 1구와 순장자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인골(이빨)이 함께 출토된 바 있다. 또 도굴된 상태로 발견된 조영동 고분에서도 순장의 흔적과 유물 800여 점이 발견되었으며, 2017년 11월 경산 하양읍에서도 왕릉급 목관묘가 발굴된 바 있다.
■ 연혁
▶ 삼한시대 : 변진의 일국인 압량소국, 일명 압독국
▶ 신라시대
파사왕 23년(서기 102년) 신라에 합병
선덕여왕 11년(서기 642년) 압량주 설치(군주:김유신)
경덕왕 9년(서기 750년) 1군 2현 설치(장산군에 영현)
경산지역→장산군, 하양지역→화성현, 자인지역→자인현(노사화현, 인산, 자인 등)
▶ 고려시대
태조 23년(서기 940년) 군이 현으로 강등→장산현
현종 9년(서기 1018년) 장산, 하양현이 경주부에, 자인현 안동부에 속현
충선왕 2년(서기 1310년) 장산을 경산으로 개칭
충숙왕 4년(서기 1317년) 국사 일연의 고향이라 하여 복현
공양왕 3년(서기 1391년) 왕비 순비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
▶ 조선시대
태조 4년(서기 1395년) 경산군이 다시 현으로 강등
선조 34년(서기 1601년) 경산현, 하양현이 경주부에서 대구부에 속현
선조 40년(서기 1607년) 경산현, 하양현이 복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자인 복현
고종 32년(서기 1895년) 경산현, 하양현, 자인현이 군으로 승격
▶ 근대시대
1914. 하양, 자인 2개군과 신령군 남면 일부 경산군에 합병
1956. 7. 8 경산면이 읍으로 승격(법률 제393호)
1966. 7. 1 용성면에 육동출장소 설치(군조례 108호)
1973. 7. 1 안심, 하양면이 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6543호)
1981. 7. 1 안심읍, 고산면이 대구직할시 편입(법률 3424호) 2읍7면1출장소
1986.12. 1 육동출장소 폐지(군조례 1008호)
1987. 1. 1 와촌면, 경산읍, 압량면 일부 행정구역 조정(대통령령 제12007호)
1989. 1. 1 경산읍이 시로 승격, 경산군은 1읍 7면으로 행정구역 조정(법률 제4050호)
1995. 1. 1 경산시, 군 통합(법률 제4774호)
1997. 11. 1 진량면이 읍으로 승격(시조례 제226호)
2004. 10. 18 서부동 분동 (서부1동, 서부2동)
2004. 10. 2개읍(하양·진량), 6개면(와촌·자인·용성·남산·압량·남천),
7개동(중앙·동부·서부1동·서부2동·남부·북부·중방)으로 구성
2020. 1. 1. 현재 3개읍(하양·진량·압량), 5개면(와촌·자인·용성·남산·남천),
7개동(중앙·동부·서부1동·서부2동·남부·북부·중방)으로 구성
■ 경산의 3성현
▶ 원효 : 속성(俗姓)은 설(薛),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신당(新幢)이다. 법명(法名)은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栗谷)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赤大公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柰麻)의 지위에 있던 담날(談捺)이다.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다.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낭지(朗智)와 혜공(惠空)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完山州)에 머무르며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650년 의상(義湘)과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려 하였으나, 배를 타러 당항성(唐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뒤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하였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각지를 떠돌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高仙寺)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고려 명종(明宗) 때에도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宋)나라 때에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元曉不羈)’ 이외에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 ‘사복불언(蛇福不言)’, ‘의상전교(義湘傳敎)’, ‘이혜동진(二惠同塵)’,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광덕엄장(廣德嚴莊)’ 조(條) 등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 저술
원효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經論)들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 여종 240 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海東疏)’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三昧經疏)’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일심사상과 화쟁사상
원효의 사상의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대승기신론소)'며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파들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화쟁사상(和諍思想)’ 또는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 한다.
‘일심(一心)’은 원효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원효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一心)’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淨土)이다.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중생은 반드시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열반경종요)
‘화쟁(和諍)’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여러 불교 이론들이 서로 다투어서 쟁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집착 때문이라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中觀論)과 유식론(唯識論)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를 지녔다. 원효는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眞如)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生滅)이 모두 일심(一心)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諸法性空)’는 것을 전제로 ‘연기(緣起)’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론과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유식론의 대립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法藏)과 징관(澄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설총 :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 일연 :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받았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