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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눈보라
5-1. 시련 속의 출산
어머니의 고생스런 하루하루는 이미 시작되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조차도 품을 수 없는 처지였다.
행운이나 행복하고는 영영 이별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싸늘한 세상의 바람을 홀로 견디어야하는 인생이 시작 된 것이다.
졸지에 남겨진 어린 자식들을,
육십 후반의 시아버지를,
병원비로 짊어진 빚더미를 처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두어 양육하고, 받들어 모시고 마무리를 해야 했다.
정말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만삭(滿朔)의 몸으로도 할일은 모두 손수 해야 했다.
아침저녁마다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마루 한구석의 휘장을 걷고 영어 상(囹圄床)에 밥을 올렸다.
식구들의 밥상을 보기 전에 위패 앞에 올릴 밥부터 먼저 챙겼다.
산 사람이 식사를 하듯 수저는 물론 숭늉까지도 올렸다.
식어버린 그 밥은 늘 내가 먹어야했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 보름에는 장보기도 하였다가 이웃에 들릴 정도로 늘 혼자서 곡(哭)을 하셨다. 만 일 년을 그렇게 하였다.
아버지의 혼백은 아는지 모르는지…….
만삭의 몸으로 상(喪)을 치렀으니 거의 운신(運身)을 못할 지경이었다.
장애에 가까울 만큼 거동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생명의 섭리는 인간의 역경 같은 것을 눈감아주지 않았다.
출산일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상(喪)을 마치고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외할머니가 오셨다.
미역을 다발로 사오셨다. 출산 준비도 준비였지만 어머니의 산후조리에 쓰일 돈까지 챙겨 오셨다. (몇 년 후에 외가에서 들었다.)
아버지 장례에 오셨던 세 외삼촌들이나, 외할아버지를 통하여 만삭이라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이런 큰일을 치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건강치 못하다는 사정을 알고 있는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제대로 출산을 못할 것 같아서 서둘러 왔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출산을 앞두고 외할머니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가족들의 끼니를 차리는 것도 외할머니의 당연한 몫이 되어버렸다.
사위의 위패 앞에 밥을 올리는 일까지.......
외할머니는 보통의 키가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농구나 배구선수를 해야 할 만큼 컸다. 육십이 넘었음에도 꼿꼿한 허리하며 휘젓는 걸음걸이는 2-30대의 여인네 보다 가벼웠다.
슬슬 걷는 것 같은데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여야만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보폭(步幅)도 보폭이지만 산골에서 평생을 살아오셨기에 평탄한길은 힘도 들이지 않아보였다. 성큼성큼 그대로였다.
1964년 사월 초파일 하루 전에, 외할머니의 처량할 만큼 정성스런 손길 덕분에 비교적 순산했다.
‘현순’이는 이름보다 유복녀라는 슬픈 별명으로 세상에 햇볕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레도 가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이렇게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의 정성과 보약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집안과 전답(田畓)을 오가셨다.
어머니는 산후 조리도 마치고 외할머니와 논밭을 오가며 일꾼들의 새참이며 점심을 준비하셨다.
5월 초순경에 오셨다가 모내기 까지 마치고 6월말에 가셨다.
농사에 필요한 비료도 인건비도 한 여름을 살아갈 식량까지도 외할머니가 준비한 것이다.
이때의 심경을 고등학교 여름이나 겨울방학이면 외가에서 절절히 들었다.
‘딸 하나 키우기가 세 아들 키우기보다 힘들었다.’는 얘기며,
‘시할머니로부터 시집살이가 유별났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1964년 5월 중순 일요일 중보들 논에 못자리판을 논 가장자리에 했다.
난생처음으로 못자리라는 것을 해보았다. 5월인데도 논물은 몹시 차가웠다.
할아버지와 형, 나는 처음으로 못자리를 어설프게 하였다. 남들이 웃을 정도로 어설프게 모판을 만들었다. 벼 포기들이 판자로 매끄럽게 밀어 놓은 위로 삐쭉삐쭉 올라왔다. 그런 것들을 하나도 보이지 않게 밀어 넣든지 뽑아 냈어야했다. 그런 것들이 있어도 되는지, 어떤지를 전혀 몰랐다.
삼일 후 최만성씨가 볍씨를 뿌리고 못자리를 마쳤다.
싹이 나고 파릇파릇해지자 학교에 갈 때마다 들려서 물을 빼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물을 넣어야했다. 아침에는 물고를 터놓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저녁때에는 물이 알맞게 다 들어갈 때까지 책을 보면서 기다려야 했다. 점점 모가 자라면서 물을 넣는 양이 많아져서 물을 넣으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밤 동안에는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물로써 보온을 하기 위하여 물을 넣는 것이었다. 낮 동안에 햇볕을 받아 따듯하게 데워진 논물을 넣었다.
책을 통하여 하나하나 터득 하였다. 책이랄 수도 없는 팸플릿 종류였다.
낱장으로 된 이런 것들을 면사무소 옆 농촌지도소에서 구해서 읽었다.
그런 단편적인 지식마저도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 볼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국어사전도 구경할 수 없는 시골이다 보니 단어의 해석이 난제였다.
그래도 원론적인 의미는 할아버지를 통하여 들을 수 있어 큰 보탬이 되었다.
매일매일 물을 넣고 빼야하는 이유를 어머니가 묻기도 했다.
한 번에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알아들을 만큼씩 말했다. 기특해 하셨다.
그러면서 이웃 어른들이
‘왜 그렇게 성가실 정도로 물을 뺐다 넣었다하느냐’
고 묻더라는 것까지 말하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보온’이라는 것과, 따듯해야 ‘냉해’ 라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드렸다.
평생토록 농사를 지어온 어른들도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기에 물어 봤자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된다.’
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던 어른들이 한글을 제대로 해독할 능력이 없었다.
거기에 농사 용어가 정말 난해 하였다. 농사를 짓는 것은 고민거리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4학년 때부터 배웠던 실과(實科) 책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결과는 어른들의 농사보다 확실히 좋았다.
‘그래서 배워야한다.’
‘배운 대로 해보는 것이다.’
어머니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큰 힘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5-2 어머니의 우애(友愛)
외할머니가 외가로 가신 후 며칠 되지 않아서부터 편지를 정기적으로 받아 적는 일이 생겼다. 아버지가 쓰다가 남은 편지지에다가 어머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 외삼촌에게 때론 외할머니에게 어머니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썼던 것 같았다. 구체적인 문구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불러주면서 잔잔한 마음의 동요를 느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맞춤법이 엉망이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 늦어도 보름에 한번은 썼다.
자신이 불러준 말이었지만 한 문장을 쓰고 나면 그것을 나에게 읽어보게 하였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지우고 다시 썼다. 사투리에 소리 나는 대로 적고 읽은듯했다. 외가 쪽에서 답장은 꼭 막내 외삼촌이 했었다. 몇 해 동안은 쓰고 보내는 일만 했다. 외삼촌은 답장도 했었지만 어머니의 부름에 자주 우리 집에 오고는 했다. 적어도 석 달에 한번은 온 것 같다. 때로는 아버지가 빌려주고 받아야할 돈을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를 들어 갚지 않으려는 경우가 있었다. 외삼촌은 법과대학생답게 작은 목소리로 이해시키고 설득하였다. 여러 사건을 해결하였다. 한번은 어머니와 나도 따라갔었다. 채무자는 주고받은 증거를 대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외삼촌은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증거를 만들기 위하여 ‘형사 소송을 먼저 하겠다’고 그 집에서 나왔다.
외삼촌은 여름 방학을 맞아서 외가로 가던 길에 빚을 받아주려고 왔었다. 며칠을 머물면서 집안일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푼도 줄 수 없다던 그 사람의 형이 새벽 같은 이른 아침에 사립문 밖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집으로 찾아왔다. 그 시각에 마당을 쓸던 외삼촌은 그와 마주쳤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돈의 행방을 줄줄이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은 지가 쓰려고 형님(우리 아버지) 에게 부탁했구먼요.”
“지가 집을 비우고 없는 새에 지 동생에게 형님이 돈을 건넨 것이니 지가 갚아야 마땅혀유.”
“형님이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꿈에도 떠올리지 못 혔지라.”
“머슴살이 하는 놈에게 형님이 아니면 그만한 돈을 누군들 빌려 주기나 헌 대유. 골백번 고마운 일이지유.”
“엊그저께 행렬이(그의 동생) 놈 얘기를 듣고 선 새경을 내어 원금에다 이자 좀 보태어 가지고 왔서라우.”
사립문에서 발도 들여 놓지 않고 돈 뭉치를 허리춤에서 내놓았다. 외삼촌은 준비한 듯이 가방을 열더니 만년필로 영수증을 두 장 만들어 한 장을 그에게 주었다.
외삼촌은 “글자는 아시요?” 물었다.
“글자는 아는디 여기에 써진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지는 못 혀고만요. 지는 빨리 가서 밀린 일을 혀야 헌께 가봐야 것서라우”
급히 갈려는 그를 붙들고 외삼촌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읽으며 설명을 하였다. 외삼촌은 90킬로그램이 넘는 보기 드문 거구였고 힘도 황소 같았다. 외삼촌이 자주 들린 것은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없다고 깔보는 것을 막아보려는 심산이었다. 건장할 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동생이 뒤에 있으므로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외삼촌은 한일 외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로 인하여 수업이 불가능하여서도 더 자주 들렸다. 외삼촌들은 우리 집의 유일한 손님들이었다.
우리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요런 고사리 손이 언제 커서 누님 손을 덜어드릴까요?” 말하고는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막내 외삼촌만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찾아왔었다. 적적하고 고단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려고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고 그리고 찾아온 것이었다. 십년을 일 년처럼 정기적으로 찾아온 외삼촌을 통하여 형제의 우애를 배웠다. 이뿐만 아니라 편지를 받아 적으면서, 외삼촌의 답신으로 또는 문안으로 오는 편지를 어머니께 읽어드리면서, 글을 쓰는 것을 깨우치게 한 덕도 잊을 수 없다. 신문기자였던 외삼촌의 문장은 누에 입에서 명주실이 나오듯 막힘이 없었다. 문학적이고 사실적이었다. 시국(時局)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문장은 어머니의 마음을 불안하게도 하였다. 어머니는 정부에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며칠 안에 나를 통해 편지를 날리고는 했다. 몇 년 후에는 방죽골을 외삼촌의 주소로 알고 외부에서 수없이 편지가 날아들어 외삼촌의 실지 주소로 봉투를 덧 씌워 다시 발송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부와 맞서다가 은둔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지시로 일부의 편지는 읽기만하고 폐기하는 일도 했었다. 그 산골 초가집에 오지 말아야할 사람들의 발걸음도 있었다. 외삼촌의 행방은 외할아버지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행방에 관한 정보는 내 머릿속 외에는 기미도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외숙모의 연애편지도 읽어보는 행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외숙모는 방죽골 외딴집에까지 와서 외삼촌의 행방을 물었지만
‘이런 곳에 그런 사람이 살 것 같으십니까?’ 오히려
‘어디에 있는지 외할아버지께서도 알고 싶다’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문하여 되돌아가게 하였다.
어머니와 막내 외삼촌은 모자(母子)사이처럼 가까웠다.
둘의 우애 속에서 인생의 간단치 않은 철학을 조금이나마 터득할 수 있었다.
5-3 사무치는 그리움.
아버지를 사별(死別)한 그 이듬 해였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열네 살 되던 해 가을, 중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때였다.
시험기간이라서 애들은 시험공부 해야 한다며 집으로 갔다. 애들과 헤어졌다. 혼자서 낙수동으로 빙 돌아서 논으로 향하였다.
오전에 4교시 시험을 치르고 곧장 중보들 논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벼를 베어 묶고 볏단을 밖으로 끌어내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였다.
중보들 논은 일 년 내내 물이 고였다.
가을에도 거머리가 종종 발가락사이나 종아리를 식탁으로 알고 배를 채울 정도였다. 그런 무논이기에 언덕에 나오셔서 쉬었던 것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한쪽에서부터 벼를 베다가 잠시 언덕에 올라 쉬셨던 것이다.
논가에 모래무지는 높이가 4m이상 되는 언덕이었다.
자디잘고 고은잔디로 뒤덮인 언덕에서 멀거니 먼 곳을 응시하는 어머니 모습이 꽤 멀리서도 보였다.
어머니의 시선은 아버지의 묘가 보일 듯한 선산 끝자락이었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하염없이 누구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리워하는 그 대상을 떠올리니 마음이 찡하였다.
마음이 뭉클 하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이내 흐려졌다.
아버지의 생전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어머니의 기구한 운명보다도 내가 더 서러웠다.
문득 지난해 여름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지난해의 이 길을 한없이 바라보았던 내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몇 달 되지 아니하여 숙부께서 혜재를 데리고 여름방학 때 오셨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주하시고 방에서 무언가를 심각하게 상의(相議) 하는 것으로 보였다.
작은 마루에 앉아서 방에서 기어 나오는 말을 들으려 애썼다.
들일락 말락 한 대화였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무도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였기에.......
소나기는 대지(大地)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장대 같은 빗줄기로 한바탕 후려쳤다. 마당에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지나가듯 물줄기가 생겼다.
고샅마다 지저분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나기 그친 여름날 오후에 혜재와 숙부는 사립문을 나섰다.
소나기가 그치자마자, 동네 꼬마들은 호박 잎 자루를 꺾었다.
잎을 떼어내고 기다랗고 동그란 잎자루로 관을 연결하였다.
소나기에 질척해진 길바닥 흙으로 물길을 막고 물을 관속에 흐르게 하였다. 흘러오는 물이 없을 때까지 관을 연결하여 누가 멀리 까지 보내는가를 경주(競走)하는 놀이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혜재는 한여름의 햇볕에도 얼굴이며 팔 다리가 뽀얗다. 왠지 말을 걸기가 거북할 만큼 이질감을 느꼈다.
저렇게 예쁜 애들에게 어울릴만한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어쩌면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말을 건다는 것은,
‘공주 앞에서 거지가 구걸하는’
동화에 나오는 광경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말을 걸기에는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행복한 어린애였다.
말을 걸었다가는 나의 불행이 전염 될 것 같았다.
다하지 못한 말이 남았는지 말을 조요조용하게 하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마루에 걸터앉았다가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는 것처럼 빠르게 일어났다.
사립문밖까지 나오셨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끝으로 들어갔다.
소나기가 그치고 구름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나는 동네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성큼성큼 걸으시는 작은아버지를 따라가기에는 빠른 걸음이어야했다.
바삐 걸으면서 그러나 말은 상당히 더듬거리며
‘고고공부 자자 잘 혀야 허허 헌다.’
‘공부 못하면 노상 지게지고 산에 가서 나무나 혀야 혀!
저어기 가신골 까지 가서 말이여’
잘나가다가
‘시골에서 잘 혀야 별것도 없다만......’
‘그래도 잘 혀야 헌다’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태껏 자신이 한말을 스스로 부수어버리는 처사는.......
나는 그 많은 물음을 듣고 있다가 한번 ‘예’로 다짐했다.
이외에도 공자 왈, 맹자 왈을 빌려 썼다.
먼저 원문으로 말씀하시고 해석을 하시고, 나중에는 나에게 맞을 것 같은 수준으로 한바탕 훈계를 하셨다.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원문 해석 훈계는 변함없는 순서였다.
어머니는 그런 훈계를 싫어하였다.
‘그렇게 잘 아시는 양반네들이 왜 요 모양 요 꼴로 살아가는 것이냐?’
반문하셨고,
‘나 배웠네 하고 앉아서 남 등쳐먹고 사는 것보다는,
지게라도 지고 남보란 듯이 살면 되고,
남이 등쳐먹어도 모르는 무식쟁이만 아니면 된다.’ 하셨다.
동구 밖.
농업용수로 위에 가로 누운 콘크리트 다리에서 나마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혜재는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나보다 더 잰 걸음으로 경보(競步)를 하듯 따라가기에 바빴던지 나와 눈을 마주 보았다는 기억은 없다.
뒤돌아오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서서 두 父女를 돌아보고 싶었다.
족히 20분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멀어져 작아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행복의 나라로 춤을 추듯이 걸어가는 제왕(帝王)과 공주(公主)의 뒷모습이라도 몰래보려는 듯이.......
멀어져가는 그들이,
혹여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에서라도 한번쯤은 돌아보기를 기대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짝사랑하듯 혼자서 만이라도 그들과 몰래 눈길을 마주치려고 말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들과 함께 멀어지는 것 같은 석별(惜別)의 애달픔을 달래면서 하염없이 서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같이 따라가고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부녀는 정말로 바쁜 것 같았다.
동구 밖 다리에서 낙수동까지 1km가 넘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작은 아버지의 늠름함, 그 곁을 따르는 혜재가 한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동네 앞에서 낙수동 삼거리에 다다라 버스 오기를 기다리며 숙부는 몇 개의 궐련을 피웠다.
보일 듯 말 듯한 담배 연기가 그들의 주위에 맴돌았다가는 없어지곤 하였다. 뚫어져라 보면 보이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모습은 사라졌다.
전혀 아쉬움이 없이 휭 하니 그렇게 갔다.
버스를 타고 떠날 때까지 부러워하면서 서있었다.
부녀가 떠난 빈자리는 그림을 떼어낸 벽처럼 휑하니 비어있었다.
갑자기 눈이 아팠다. 너무도 골똘히 바라보아서 그런 것 같았다.
나에게는 불러봐야 다시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아버지’
라는 어휘를 속으로 되 뇌이면서 발길을 돌렸다.
나의 기대는 어느새 동쪽 산에 박힌 오색찬란한 무지개에 쓸쓸히 버려야했다.
소나기로 질척거리는 무궁화와 탱자나무가 간간이 섞인 구불거리는 울타리 옆 고샅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왔다.
운명을 마음 저리도록 서럽게 어루만지며.......
* * * * * * * * * * * * * * * * *
작은아버지와 혜재가 같이 걸어갔던 그 길을 반대 방향에서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내가 두 부녀(父女)를 한없이 부럽게 바라보았듯이,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가슴 저리도록 지극하게 기다리는 듯한 어머니 곁으로 걸었다. 기다림의 그 대상이 누구일까?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이 굳어졌다. 갑자기 서러워지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어머니도 나랑 같은 생각으로‘아버지를 그려보시지 않을까.’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을 주먹 손등으로 몇 번이고 훔쳤다.
그리고 어머니 옆에 조용하게 앉았다.
줄곧 앉아 있는 어머니는 종아리에 거머리를 매단 채였다.
나는 벼 베던 낫으로 면도하듯 거머리를 긁어서 떼었다.
우리들은 긁어 떼어낼 수 있는 거머리보다 더 달라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천륜(天倫)이라는 멍에를 어머니에게 씌운 건 아닐까?
책가방을 내려놓기 바쁘게 무뎌진 어머니의 낫을 숫돌에 문대어 날을 세웠다. 그래도 남자라고 낫을 갈아 날을 세우는 일은 어머니보다는 훨씬 노련했다. 내 몫으로 챙겨온 낫을 들고 무논으로 들어섰다. 벼 베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낫이 잘 들어 일하기가 수월하다.’고 칭찬을 했다.
조금 전까지의 속내를 말끔히 감추고 학교에서 치렀던 시험이야기를 두서없이 재잘댔다.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에게 기대게 하려고 재잘댔다.
얼마동안 듣고만 있던 어머니는 소녀시절에 읽고 필사했던 고대 소설을 떠올리며 얼굴을 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소년이 어렵게 세상을 해쳐나가 영웅이 되는 유충렬전 이야기를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간간이 나의 표정을 살펴가면서 처세(處世)의 원론(原論)을 가르쳤다.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까지 하면서도 옛날이야기를 줄곧 하셨다. 혼자서 벼를 베는 것 보다는 덜 심심 하셨을 것이다.
하시고, 또 하신 얘기였지만 혼자서는 하시지 못했을 것이니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고단함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바쁠 때에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여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으니 나는 두 몫을 하는 샘이었다. 옆에 있는 것으로 돕고, 같이 일하여 돕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일에 도움이 될 만큼 일을 하지는 못했다. 나의일이 아니라고 어머니 혼자서 가을걷이에 기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냥보고만 있기에는 마음이 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요일에는 마음먹고 어머니를 도우려고 벼르면 반수 이상은 비가 왔다. 벼 베는 것 외에도 고구마를 캐어 집으로 들여오는 일도 매우 큰일중의 하나였다.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골방 통가리에 쌓아야했다. 무논에서 벼를 베면서도 어머니는 그 일까지 미리 걱정을 하셨다. 무거워 등짐을 지는 일은 장정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뭇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언변을 구사했다.
“슬픔을 위로(慰勞) 할 수 있는 것은 기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위로하고자 한다면 그 슬픔을 앓고 있는 사람보다 더 큰 슬픔을 앓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래야 위로가 가능한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꾸미지마라. 너한테 나는, 나한테 너는 서로위로가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이 너나 나에게 동정은 가능하지만 위로는 하지 못한다.
억지로 기쁘게 꾸미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속내를 서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것을 너도 느끼지 않느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힘들여 꾸밀 필요가 없지 않느냐?”
무논에서 벼를 베며 들었던 이 말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려고 노트 뒤표지에 마구 갈겨썼던 나를 기억한다. 어머니 몰래 갈겨썼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우리모자(母子)는 단짝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로 고달픔을 삭이며 벼를 베었다.
아마도 시험 공부하는 다른 아이들을 좋은 조건의 아이들이라면, 유충렬전의 주인공 같은 처지일지라도 꿋꿋하게 자라야한다는 암시를 주신 것이었다.
공부하라고 성화를 대야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성화 댈 사람도 없지만 그럴 만큼 공부를 등한히 하지 않았다. 공부해야할 진지한 이유만 있을 뿐이었다.
‘안다고 하여 남을 속이거나, 남이 속여도 속은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배움의 목표가 분명했다. 목표보다도 더 근본 되는 힘, 원동력이 옆에 어머니였다.
이것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철학이기도 하였다. 인생의 바른 길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양적(量的)인 전진(前進)과 질적(質的)정진(精進)을 병행하는 것이 배움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했다.
앞장서서 이끌어 주실 아버지가 없는 나의 처지를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나를 이끌어야한다.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단호해야했다. 나에게 우리 가문의 체통이 달렸다.
아비 없이 막된 버릇없는 놈이 아니라, 어머니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로,
할아버지에게는 아버지 몫의 효(孝)까지도 다 해야 하는 효성스러운 손자로 자라야만 했다. 그리고 상당액의 학비를 내어주는 숙부의 은혜에 보은하는 일도 공부해야하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였다.
그저 그런 정도로, 가방 들고 시간 낭비하는, 폼만 잡는 학생이기를 이미 아버지의 상여 앞에서 버렸다.
중보들 논은 일곱 마지기정도였다. 아직도 절반 정도가 쉬지 않고 영글어 가고 있었다. 가을 햇살을 에너지 삼아서 영글어 가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어 시간 남짓 벼를 베고는 어머니는 저녁 식사 준비하러 먼저 들어갔다. 세상을 온통 휘저으면서 가늘어진 가을 햇살을 등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햇살을 등지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한없이 피곤해보였다. 그 피곤함을 조금이라도 더 덜어드리려고 부지런을 떨었다.
별 도움은 되지 못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험공부 하는 것보다 한층 깊은 모정을 느끼는 시간이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잔함 속에서도 행복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근본적 됨됨이를 반듯하게 하려 함일진대 어머니를 돕고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두고 집에서 공부랍시고 책을 뒤적이는 것은 공부다운 공부일수 없었다. 그것은 시험을 위한 공부일 수는 있지만 사람을 만드는 공부는 될 수없다. 시험을 잘 보는 것보다는 공부한 것을 실생활에 응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먼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껏 베어 묶었던 볏단을 두 단씩 어깨에 메고 논두렁으로 꺼내어 열차가 줄을 잇듯이 세웠다.
논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늘을 바라보니 석양이 장관이었다.
창공의 가을 해는 붉게 노을 속을 한가히 노닐었다.
서해에 반사된 햇살은 흰 구름을 제왕의 모습 바꾸고 있었다.
노을 위에 황금빛은 금관이었고, 아래에 붉은 빛은 주단 용포였다.
작은 야산은 검은 신발이었다.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황금 물결치는 평야를 걸어 내게로 오는 모습이었다.
볏단을 죄다 논 밖으로 나르고 해가 넘어가는 시각에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이 깊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잠든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가을 내내 호락질로 고단한 몸을 곤한 잠으로 추스르는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져본다.
이 위대한 손!
이 아름다운 손!
우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손!
세상의 비바람을 다 막아주는 포근한 손을 가만가만 어루만져본다.
아버지의 마지막 눈을 감기던 오열에 떨던 이 손을 어루만져본다.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마디마디 새겨있었다.
모두 잠든 방엔 호롱불만 우리들의 운명처럼 가물 가물거린다.
5- 4 아버지의 탈상(脫喪).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고, 우리를 버리고, 어머니를 버리고 갔다. 아버지는 갔는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늘 그대로 있었다. 마루 한쪽에 모셔진 위패 앞에 매일 밥을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이면 빠짐없이 제수를 장만하여 곡(哭)을 했다. 이렇게 상가(喪家)에서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삭망전(朔望奠)이라한다. 어머니 혼자서 하는 삭망전은 일과였다. 일 년을 꼬박 그랬다. 일 년을 외출도 못하였다. 곡을 하랴 치면 장례 치를 때에 입었던 상복을 차려 입었다. 상복이라야 흰 무명 저고리와 치마, 휘어진 오동나무 지팡이가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더니만 한 해가 되어 위패를 향불에 사르고 상복을 벗어 불에 넣었다.
할아버지의 물러섬은 어쩌면 위신(威信) 문제 아니었을까 한다. 양반가(兩班家)의 위엄과 신망에 관한 문제란 말이다. 아니 선비로서의 문제였을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아버지로서의 위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가 하는 모든 일을 모를 리 없는 할아버지가 일 년 내내 모르쇠로 일관한데에는 스러져 가는 한 가족사가 너무도 서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청상(靑孀: 청상과부)보다도 더 애처로운 며느리의 일상과 행색이 마음에 거슬렸을 것이다. 며느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입고 벗는 상복을 보며 마음은 차라리 자기가 대신 받는 형벌이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보내는 조롱을 홀로 삼켜야만 하는 처지가 모르쇠로 일관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양반에 대한 조롱, 안동 하회탈을 쓰고 별신굿을 하는 장면을 연상하여 보았다. 별신굿 대사를 같이 감상하여 보기로 한다.
양반. 선비
양 반 : (화를 왈칵 내면서 선비를 향하여) 자네가 감히 내 앞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
선 비 : 그대가 진정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양 반 : 아니, 그렇다면 지체가 나만 하단 말인가?
선 비 : 그러면 자네 지체가 나보다 낫단 말인가?
( 초랭이, 이매, 자기 상전의 세도 자랑을 몸짓으로 따라한다.)
양 반 : 암, 낫고말고.
선 비 : 뭣이 나아? 말해 봐?
양 반 : 나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인데.......
선 비 : 뭣이? 사대부? 나는 팔대부(八大夫)의 자손일세.
양 반 : 팔대부는 또 뭐냐?
선 비 :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양 반 : 우리 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거든.
선 비 : 아! 문하시중? 그까짓 것. 우리 아버지는 문상시대(門上侍大)인데.
양 반 : 문상시대? 그것은 또 뭔가?
선 비 : 문하보다는 문상이 높고, 시중보다는 시대가 더 크다.
양 반 : 그것 참 별꼴 다 보겠네.
선 비 : 지체만 높으면 제일인가?
양 반 : 그러면 또 뭣이 있단 말인가?
선 비 : 첫째, 학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네.
양 반 :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八書六經)을 다 읽었네.
선 비 :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데 있으며, 대관절 육경은 또 뭐야?
초랭 이 : 나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몰라요?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봉사의 안경, 약방의 길경, 처녀 월경, 머슴 새경.
양 반 : 이것들도 아는 육경을 소위 선비라는 자가 몰라?
할아버지 귀에는 이렇게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걸로 들리고도 남았으리라.
책을 읽지 아니하고도 잘살지 않느냐는. 더구나 양반과 선비를 둘 다 놓지 못하고서 힘들어하는 자신을 한탄하였다. 기울어만 가는 가산은 둘째로 친다하더라도 무엇하나 도움 되는 일을 찾지 못하는 자신이 암담하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고 새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 고상한 책들이 비바람 맞고 녹슬어가는 괭이나 삽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리.
할아버지는 체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다. 못자리를 처음 해보았는지 버선을 신은채로 무논에 들어간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무엇인가를 했다하면 동네에 화제가 되었다.
심지어 조그마한 뭔가를 지게에 얹어 지고 문 밖에 나가도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동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모든 사람이 그러리라고 체념하였다. 작은 비료포대를 지고 나가다가 아버지 친구들이나, 할아버지를 스승으로 하여 한학을 배운 제자들은 제일을 제켜놓고 할아버지 지게를 짊어지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것마저도 마음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가르쳤지만, 제자들에게 불편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못할 노릇이리라.
그야말로 당나귀를 팔러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처지가 되었다. 이래도 놀림감 저래도 놀림감이 되었다.
말이 없는 일 년은 끝없는 나락(奈落: 불교에서는 지옥. 도저히 벗어날 수없는 극한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에 빠진 세월이었다.
어머니는 일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복을 매일 입고 벗고, 빨았다가 다시 입고 벗었다. 아버지 탈상일(脫喪日)에는 치마 끝이나 저고리 소매 자락은 일상의 옷 모양이 아니었다. 형을 비롯하여 내가 장례 때 입었던 상복도 모두 불에 넣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돌아가신 그날을 생각하며 앞날을 불안하게 그려보았다. 동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작은집 가족, 전주 대고모 가족, 고모와 고모부, 외삼촌 셋, 임실의 종중 사람들, 아버지 친구들의 시선은 온통 어머니와 나에게 집중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마땅한 위로가 있을 수 없었다. 슬픔, 눈물 밖에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젖을 떼지 못한 현순이는 언제나 어머니 품에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현순이가 대신 대답을 하듯 옹알거렸다.
5-5. 겁 없는 상재
1965년 아직 여름이 잔 꼬리를 감추지 않은 초가을 어느 날 아침.
집안이 소란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온 식구가 소란을 피웠다. 놀라 일어났다. 할아버지부터 계재까지 모여 있는 헛간 앞으로 달려갔다. 헛간은 아버지가 부리던 말이나 소가 썼던 외양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몇 년 전부터 닭장으로 고쳐 사용하던 곳으로 변했다. 십여 마리의 닭이 있어야 할 곳에 초죽음 된 닭 몇 마리밖에 없었다. 미동도 없는 닭들은 여기저기에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닭으로 변신하였다. 무엇엔가 심하게 할퀴었고 물어뜯긴 것이었다. 물끄러미 닭장 안에 무언가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긴장감마저 느꼈다. 긴장감을 뚫고 점점 닭장으로 다가가 갔다. 가슴을 두근거리는 동생들 사이로 보이는 닭장 복판에는 긴장자체가 옆으로 누워있었다. 닭의 천적인 살쾡이(우리는 ‘살가지’라고 했다)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표독스럽고 험악한 이빨을 드러낸 살쾡이가 쓰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살기등등하게 뛰어 달려들 것 같았다. 으르렁거리며 나에게 달려드는 장면을 상상하며 잠긴 닭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우 조심하며 숨도 쉬지 않는 살쾡이를 향해서 다가갔다. 수컷이었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들어가면서도 ‘누가 이토록 무섭게 생긴 놈을 잡았을까?’ ‘용하기도 하지’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살쾡이 귀를 잡고 질질 끌면서 닭장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혼(魂)은 하늘로, 백(魄)은 흙으로 떠난 우리 집에는 일 년 내내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 해 동안 찾아온 손님이래야 작은아버지와 외삼촌들과 외할머니가 전부였다.
작은아버지는 집안 제삿날이면 오셨다. 음력으로 5월11일에 증조할머니, 5월 17일에 증조할아버지, 한 여름인 6월에 할머니, 동짓달에 작은 할머니 기일(忌日)에 맞추어 오셨다. 그리고 설날, 추석에는 작은집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왔다. 작은 아버지의 단골메뉴는 소 앞 무릎뼈 한 벌이었다. 특히 5월과 추석 때에는 꼭 소 무릎뼈를 사오셨다. 여름과 가을 내내 국을 끓일 때마다 고아서 먹었다. 정말이지 질리도록 적어도 두 달씩 넉 달은 먹었다. 고기는 생각도 못할 형편이었으니 뼈에서 우러난 국물이라도 빼놓고 먹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머니가 주는 대로 군소리 없이 먹었다. 감지덕지(感之德之) 하게 먹었다. 그 감지덕지는 그 단단하고 무겁던 소 무릎 뼈가 손으로 비비면 쉽게 부서져 가루로 변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내 나이 육십이에 이르렀는데도 국을 끓이고 또 끓인, 아니 첫 탕보다는 재탕(再湯), 재탕보다는 삼탕(三湯)이 더 맛있게 느끼고 즐기는 데에는 이때로부터 길들여진 것 아닌가 한다. 아침에 끓인 국을 저녁에 먹을 적이면 혼자서 아련한 옛날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한다.
농번기가 지나가고 여름이 되면 동네에서는 연중행사처럼 돼지를 도축하여 온 동네 집집마다 몸보신을 하였다. 동네 삼사십 대의 장년층이 주축이 되어 돼지를 고르고 어떻게 나누어 팔 것인지를 기획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한 여름마다 돼지를 잡아 보신을 했었다. 아버지는 동네일을 보는 반장
노릇을 했었기에 돼지를 도축하여 분배하고 집에 가져오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거의 그런 일은 주동적으로 했었다.
아버지 없는 여름은, 여름이 되어도 보신은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마져도 고기 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한참 먹고 또 먹고 보호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야할 나이에 먹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말할 수없는 서러움이었고 슬픔이었다. 눈에 띠게 커야할 때에 이웃에서 풍겨오는 고깃국 냄새는 괴로움이었다. 아니 아득한 향수(鄕愁)를 불러오는 냄새였다. 소달구지 앞 오른쪽에 걸터앉은 아버지 옆에 지푸라기 몇 가닥으로 꽁꽁 묶인 생선 꾸러미를 떠올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꽤 음식을 가렸다. 고기는 쇠고기나 먹고 생선은 참조기나 참게정도만을 입에 댔다. 특히 게를 좋아했다. 게는 간장에 담아 두고두고 매우 즐겼다. 게장 하나만으로 한 끼 식사를 거뜬히 마칠 정도였다. 그럼에도 민물고기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런 식성은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태어나 자란 곳이 섬진강 상류에 자리 잡은 강변 마을이다. 눈만 뜨면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곳이다.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바다 어장처럼 떼를 지어 다녔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물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기도 하였다. 손재주를 믿고 강물이 휘돌아 굽이치는 소(沼)에 들어가 그들의 세계에서 진귀한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혼쭐이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물고기란 뱀처럼 얼룩진 가물치였다. 그것들을 잡으면 먹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높은 가격에 팔기도하고 약처럼 긴요하게 이웃과 나누어썼다.
우리가 흔히 보는 붕어나 메기 잉어는 물고기 축에도 못 끼었다. 나가기만하면 구경하고 잡을 수 있는 물고기는 잘 잡지도 않았지만 먹지도 않았다. 소위 고급어종만을 가리고 충분히 성장한 것으로 추려서 잡고 먹고 즐긴 것이다. 음식으로 만드는 방법도 무슨 물고기든지 끓여서 잡탕으로 즐기는 김제 쪽의 풍습하고는 사뭇 달랐다고 했다.
그렇지만, 게걸스런 남자였다면 농한기에 천렵(川獵)이랍시고 또래들과 어울려 강가에 나가 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잡아 매운탕에 막걸리 한 잔 쯤 어렵지 않았겠지만, 어머니는 고명딸이었다. 고명이란 떡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기본 되는 떡을 높이 쌓고 맨 위에다가 꽃 모양 등을 살짝 얹어 매무시도 갖추고 맛도 있어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장식이다. 그러니 남동생을 여럿 둔 장녀이면서 외딸이 고명딸이다. 셋이나 되는 남동생들 덕에 물고기는 떨어질 새 없었다고 한다. 물고기가 지천으로 널린 환경에서 살다보니 물고기는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지만 돈을 주고 사먹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컸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으로 생각되는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중보뜰 논에 모내기를 끝내고 막걸리를 담았던 주전자에 미꾸라지 붕어 작은 메기 피라미 등을 꽤 많이 잡아왔다. 잘 웃지 않던 작은아버지도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상당히 기분이 들떴다. 팔십 노구의 증조할머니는 힘없이 마루에서 내려와
“애어미는 먹지도 않는데 어쩌려고 집으로 가져왔어?”
걱정스럽게 말을 던졌다.
우물가에서 한껏 고조되어 물고기 배를 가르고 지느러미를 다듬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노상 그랬다는 듯 증조할머니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였다.
“우리가 알아서 다 할 테니 할머니는 구경만 하세요.”
말을 하면서 일어선 작은아버지는 물고기를 담았던 주전자를 씻어 들었다.
“형님, 배다리댁네 전방(廛房)에 가서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올게요.”
“그려, 제기남이보고 이번 모심으며 먹은 것까지 장끼도 뽑아달라고 혀서 가지고와.”
그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길고 널따란 마루에 매운탕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타고 인생의 벌판을 누볐다.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듯........
그 날도 난 어김없이 우리 집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할아버지 방으로 글공부를 하러 들어갔다.
아버지는 5일마다 서는 원평 장날이면 으레 꽁치 갈치 고등어를 가리지 않고 들고 들어왔다. 신선도 같은 것은 아예 따지지 않고 사들고 들어왔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원평 장날은 상한 생선을 처분하는 최종 처리장이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날 다 팔리지 않은 생선은 과수원에 밑거름으로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니 생선 장수들은 어떻게든 죄다 처분하려면 원평 장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상해서 못 팔 것 과수원에 왔다가 복불복(福不福)으로 시장에서 팔면 괜찮은 장사니 복이 아닌가. 못 팔면 불복으로 과수원 밑거름으로 헐값에 넘기면 그만이었다. 생선을 밑거름으로 원평 배는 그 맛을 전국에 날리기도 하였다. 원평초등학교 교표(마크)가 배 3개를 맞대어 도안한 것을 보아도 썩은 생선과 배와 원평은 서로 인연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가 싱글거리며 사들고 오는 상한 생선이 늘 달갑지만 않았다. 편찮은 내색을 좀처럼 하지 않는 어머니는 제대로 된 싱싱한 참조기를 묶음으로 사들고 올 때면 매우 흡족한 마음을 서슴없이 내보였다.
“조상님 덕에 이 서방이 양반 노릇 제대로 하네요.”
“현숙이 마음에도 칭찬 주머니가 있기는 있네? 조상님에게만 올리지 말고 먹고 또 사면되지 않을까?”
일 년이면 조상 제사가 5월에 두 번, 유월에, 추석 차례, 동짓달에 한번, 설날차례에 제수로 쓸 조기를 한꺼번에 사서 소금에 절이는 일이 연례 행사였음을 두고 하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기제사 때에는 네 마리 정도면 되는 데 추석과 설날에 지내는 차례에는 조상 하나 하나씩 제사지내듯 한 분상을 챙겨 진설(陳設)하고 철상(撤床)하였다. 그런 일을 다시 반복하였으니 제사를 세 번 치를 제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말 만만치 않은 참조기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일 년분 제수를 한꺼번에 장만하는 날이었으니 경건하기도하고 즐겁기도 한 날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경건하기만 하거나 즐겁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소금 독에 넣어두고 다섯이 넘는 자식들의 입을 자린고비처럼 맨밥 끼니를 때우게 하는 속내가 경건과 효도로 치유되지 않음이었다.
“제수로 맘먹고 샀으면 그날부터 제수인거 아니요?”
어머니는 손댈 수 없는 이유를 불만스럽게 따졌다.
“아따, 세어서 산 게 아니어. 충분히 쓰고도 남는다니까.”
아버지는 손가락을 굽혔다가 폈다하며 셈을 하였다. 셈이 다 되었는지 두 마리씩 세어나갔다.
“둘허고, 일곱허고, 열야달, 스물너이, 서른이라”
옆에서 참조기의 머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어머니는 환한 웃음을 띠고서 우리들을 바라보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넉넉하기는 하네요. 당신이 따로 내놓아요. 애들 입가심이라도 하게끔”
“그럽시다. 열 마리는 남으렷다.”
이렇게 제수 장만하는 날이라야 어머니 자신이 좋아하는 참조기 맛을 자식들에게도 알게 하였다. 사실 우리들은 참조기보다는 상했건 싱싱하건 따지지 않고 자주 먹는 게 좋았다. 썩은 생선이라 할지라도 맛은 있었다. 아버지의 단골생선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지 꽁치를 즐긴 것 같았다. 겨울에 울안 장독대 옆 땅에 묻어둔 무를 파내어 얇게 삐져 넣고 국물이 훙덩하게 끓인 국 같은 찌게, 아니면 찌게 같은 국을 무척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생시에는 우리들과는 동떨어져 우리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구경만 하였다.
내가 살쾡이를 질질 끌고 나올 때까지 몽둥이를 들고 있는 상재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상재가 일을 냈다! 새벽 같은 아침에 두엄자리에
‘오줌을 갈기려 나왔다가 닭장 안에서 사납게 닭들을 공격하는 살쾡이를 본 것’이었다.
‘허청에 있는 홀태 발을 추켜들고 닭장에 들어가 살쾡이를 향하여 마구 휘둘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한순간에 쓰러지더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다가보니 쓰러졌는데, 살아날 것 같아 쓰러진 뒤에 마구 때렸다’는 것이다.
“겁나게 때려 버렸어. 죽어라고 때렸어.”
상재는 한바탕 재미난 장난을 치고 나서 그 재미가 채 다 가시지 아니한 애가 되었다. 귀를 잡고 끌고 나오면서 살쾡이 입 언저리를 내려다보니 소름이 돋았다. 날카로운 송곳이, 푸른 빛 감도는 눈동자, 무엇이든 갈기갈기 찢고 할퀴고도 남을만한 살기등등한 눈매가 소름을 돋게 했다.
아무리 날래고 사나운 짐승일지라도 숨이 끊어진 뒤에는 한낱 온순한 짐승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외삼촌들이 산에서 잡아온 토끼들을 잡아서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며 상재가 포획한 살쾡이를 아침 밥상에 올렸다. 어머니는 기뻐했다. 손놀림은 마냥 가벼웠다. 가르고 자르고 손으로 찢고 빠르다 못해 날렵했다. 얼굴에도 화색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몸은 활기찼고 마음은 즐거움으로 넘치고 있었다. 몇 년간 챙기지 못한 고기를 자식들에게 양껏 먹일 수 있는 것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할아버지는 상재의 영양실조 상태를 염려했다. 기아(飢餓)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나타나는 증세가 상재에게 나타났다고 보았다. 아래배가 튀어나오는 증세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보는 상재의 염려스러운 모습을 어머니인들 못 볼 리가 없다.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을까!
상재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순식간에 해결해버렸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환한 얼굴을, 가벼운 손놀림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기쁘게 하는 것이 참다운 효도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보는 어머니의 환한 표정이 생생하다. 한 번도 이렇게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참 효도를 한 번도 바치지 못한 나를 한스럽게 꾸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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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옜일을 볼수잇어 좋은 시간 이엇습니다 이런 고은글 쓰는 형의 고은 심성이 눈에 선하네 -주- 이글을 쓰시는분은 이명재 (본인에 형) 글 올리는 분은 손경록(본인에 형수님)
저는 이글들을 가끔씩 보면서 향수 를 달래기도하고 나를 키워주고 나를 세상에 있게 해준 분들 이 대단함에 자부심도 느낌이다.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유복함이 그분이 그렇게 남을 배려하는 생활이 몸에 배었던것임을 알것 같습니다. 대단한분이라는게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