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및 불교음악
부처님을 상(象)으로 만들어 모시는 일은 처음에는 금지된 일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거의 5-600년 동안은 부처님을 상으로 만들어 모시지 않았다.
이 기간에 부처님이 바퀴, 의자, 족적, 수건 등으로 표현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시대를 인도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한다. 불상제작의 최초기록은 우전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하지만,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남아있지 않다. 처음에는 불상을 만드는 일보다는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는 사리신앙이 대세인 인도의 아쇼카왕 시대에는 부처의 성적지에 기념주를 세우는 일이 유행하다가 실제로 상을 만드는 일은 인도의 슝가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게 바로 1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러한 불상의 발생지는 바로 서북 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 지역이다. 이곳에서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으로 전파되고 바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한국의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일은 부처님을 유형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과정에는 일련의 법칙과 규칙이 존재하였다. 그것이 바로 32상80종호이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대각자인 부처님이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사람은 서른 두 가지의 신체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32상이라는 특출한 대인상을 타고 태어난다는 내용이 브라만교의 베다성전에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옮겨지면서 80종호가 더 추가된 것이다. 사실상 32상80종호의 내용들에 의해 상을 만들어야 되기보다는 그만큼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더욱이 32상80종호의 세세한 내용들에 의거해서 불상을 제작 하고자 하는 경우 사실상 조형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상을 대부분 금(金)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32상80종호에 부처님의 피부를 부드럽고 곱고 매끄러워 자금색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금동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상황에 맞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흙으로 제작한 소조불, 건칠불, 철로 제작한 철불, 목조불상, 석불상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 불상이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불상은 뚝섬출토금동불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단은 현존하는 최고의 불상으로 금동으로 제작된 소형의 불상이다. 금동불은 소형에서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제작된다. 시기가 올라가는 불상의 경우는 휴대가 용이하게 소형으로 제작된 금동의 불상이 많으며, 더불어 석조로 제작된 경우도 많이 전해진다. 소조불은 흙으로 빚어 자연적으로 건조시키는 방법과 굽는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소조불로는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인 예로서 구운 경우에 해당된다.
향나무, 은행나무, 육송, 적송 등의 목재로 제작되어지는 목조불상은 화재에 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은 1274년의 하한선을 가지고 있는 개운사(開運寺) 아미타목조불상이다. 건칠불(乾漆佛)은 흙으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한 종이로 형태를 감싸면서 만든 후에 처음의 소조상을 제거하면 남은 종이 형태가 불상이 되는 제작방법을 말한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많이 제작된 방법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칠불좌상은 보물1544호로 지정된 고려후기에 제작된 나주 심향사 건칠불좌상이다. 석불은 아마도 제작 조건과 내구성이 강했던 이유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한국에는 전국에 걸쳐 순백 양질의 화강석이 대량으로 분포되어있는 자연조건의 혜택을 입어 일찍 석조기술이 발달한데 있다.
이것은 마애불, 즉 바위에 저부조나 고부조, 혹은 선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이 산천에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시기가 앞선 석불로는 부여 시내 군수리 탑의 심초석(礎石石)에 발견된 석불좌상이다. 부여에 이어 삼국시대의 수많은 석불들과 석굴사원의 개착에 이어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사실상 한국의 석불조각은 성황을 이루고 있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석조불상이 많은 편이다.
철불(鐵佛)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수반하여 제작된 종류이다. 특히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초 지방의 호족들을 배경으로 하고 중앙보다는 강원도와 같은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같은 양식과 계보를 갖는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다.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되어지는 금동불과는 달리 철불은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재료에 의해 제작되는 불상을 구분하는 방법은 손의 표현, 즉 수인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하여, 한 손은 바닥을 내어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는 수인이다. 로자나 부처님은 한손의 엄지를 다른 손이 감싸안는 지권인(智拳印)으로서 구분한다. 아미타여래의 수인은 흔히 구품인(九品印)이라고 하는데, 각 손의 엄지와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 중 어느 손가락을 잇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9개의 구분된 손갖춤을 말한다. 이는 중생을 구제할 때 그 중생의 근기에 따라 9가지로 나누어 구제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이러한 수인 말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로 부처님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으며, 보살상의 경우 관음보살은 정병(靜甁)을 들고 있거나 머리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표현된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종교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교리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 대중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불교회화 역시 종교화로서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부처님에서부터 여러 부처님들을 시각화하거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회화는 시대에 따라서는 크게 고려불화와 조선불화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려지는 재료 등에 의해서 벽화(壁畵), 탱화(幀畵), 사경화(寫經畵)로 나눌 수 있고, 야외의식용불화인 괘불(掛佛) 등이 있다.
우선 시대구분에 의해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현재 고려시대의 사찰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순 없지만,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화들은 내세의 왕생과 구제를 기원하는 아미타여래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2-3점이지만 석가모니불도, 비로자나불도, 오백나한도, 16나한도, 제석천도 등이 전하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기법 등의 이유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많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다. 사찰의 전각 안에는 불상(佛像)과 불상의 바로 뒤나 전각의 내부 좌우벽면에 걸리는 불화(佛畵)가 있다. 전각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불화는 바로 불상의 뒤에 모셔지는 것으로 불상의 뒤에 걸리는 그림이라 하여 흔히 후불탱화(後佛幀畵)라 한다. ‘탱화(幀畵: ’幀‘자를 불교에서 ’탱‘으로 읽음)’는 불교의 그림을 가리켜 흔히 부르는 명칭으로, 대부분 전각에 그림이 걸려있게 되어있어 ‘걸려진 그림’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의 전각은 그 전각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가에 따라 전각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마찬가지로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이 누구냐에 따라 후불탱화나 전각 내부의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석가모니후불탱이 그려지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려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각 내부를 불상을 모신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상단(上壇)·중단(中壇)·하단(下壇)으로 나누어 각 단에 걸리게 되는 그림의 종류와 성격을 달리한다. 즉 상단인 주불단에 메인이 되는 불화가 그려지고,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 등과 같은 그림들이 중단에 걸리고, 하단에는 영단(靈壇)이나 명부전(冥府殿) 등에 걸리는 그림이 모셔진다. 이처럼 어떤 부처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불화의 종류는 달라지며, 우선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과 보살을 그린 그림, 그리고 불교의 신들을 그린 신중탱, 의식그림인 감로탱 정도로 격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의식을 중시하게 된 조선시대 사찰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불교회화에까지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
이처럼 현존하는 불교회화들은 전각 안에 모셔지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다. 이러한 전각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석가모니후불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전각의 차이에 따라 팔상전에는 영산회상도와 더불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지며, 나한전 등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걸리기도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 등에는 비로자나불회도가 모셔진다. 약사부처님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에는 약사불회도가,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에는 아미타불회도 등이 모셔진다. 보살이 주존인 전각에는 관음전에는 관음도(觀音圖)가 그려지고, 지장보살이 모셔진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에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그려진다. 주불이 누구냐에 따라 모셔지는 그림은 다르지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중단에는 그 전각을 지키는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이 대부분 걸리게 된다.
벽화는 전각의 내벽이나 외벽 등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전각의 구조에 따라 그려지는 장소가 달라지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벽화는 전각 내부의 공간이 상단을 중심으로 ‘ㅁ’자형인 경우 후불탱화가 걸리는 바깥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좌우측 내벽에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전각외벽에 그려지는 경우에는 선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표현된다.
대규모의 그림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불교회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사경의 조성이다. 사경을 조성하는 것을 사성(寫成)이라고 하는데, 즉 손으로 경전의 내용을 베껴쓰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가 워낙 경제력 있는 계층에 의해 신봉되었기 때문에 불상, 불화 조성의 불사를 넘어서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 자체를 직접 사서하여 조성하는 것은 실로 큰 공덕이라 여겼다. 실제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사경의 수는 100여점이 넘는다. 특히 종이를 쪽이나 도토리 등으로 염색한 감지나 상지에 금은자로 사서하거나 머리그림을 금니로 그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경들은 고려불화의 그 유려하고 섬세한 미감과 같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불화의 성격과는 또 다른 불화로는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거는 그림’이란 뜻으로 야외의식에서 사용하던 불화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에는 그 예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의식이 공공연히 야외에서 행해지면서 제작된 것이다. 야외의식의 규모 정도를 감안한 전각 안에 걸리던 불화의 크기와는 사뭇 다른 엄청난 규모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의 무용, 음악 등은 의식인 재(齋)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의식을 어떤 방법과 절차를 가지고 행하느냐에 따라 무용 및 음악의 성격과 종류도 달라지며, 그 의식을 장엄하고 보다 의식의 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불교음악은 옛 경전에서부터 부처님과 스님께 올리는 음악의 공덕을 인정하고 있어, 불보살을 장엄하고 찬탄하는 의식에서 공양음악으로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불과 수행을 중심으로 한 독경(讀經), 염불(念佛) 형식의 의식음악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기악반주가 덧붙여져 점차 불교의식음악으로서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불교의식과 관련된 불교음악을 총칭하여 범패(梵唄)라고 한다.
범패의 기원에 대해서는 영산회상(靈山會上) 기원설,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음악공양설, 중국 조식(曺植)의 창작설 등이 있으며, 그 전승에 대해서는 중국 오(吳)나라의 지겸(支謙)이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짓고, 강승회(康僧會)가 니항범패(泥恒梵唄)를 만들어 중국의 강남지방에 범패성명(梵唄聲明)을 크게 유생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범패는 당시 당(唐)에 유학갔었던 신라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해 한국 범패로 이어지게 된다.
불교 전래와 더불어 이어진 한국의 범패는 진감국사의 의한 전래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한 내용이 '삼국유사'의 '월명사(月明師) 도설가(兜率家)'에서 엿볼 수 있고, 또한 일본의 승려 자각대사(慈覺大師)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적산에서 불리는 범패가 당풍(唐風), 향풍(鄕風;신라풍), 고풍(高風;일본풍)의 세 종류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범패가 오래전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교로서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국가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백좌도량(白座道場) 등이 왕궁에 설치되었으며, 특히 의종(1147-1170) 이 각(角)을 부는 취각군사(吹角軍事)와 소라를 부는 취라군사(吹螺軍事)를 세워 연등회에 참석하였던 사실 등을 볼 때, 범패 또한 상당히 성행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범패는 적극적으로 행해지진 않았으나, 세종13년(1431) 8월에 범패가 행해졌던 사실이 문헌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범패의 기록은 '범음종보(梵音宗譜)'(1478), '신간책보범음집(新刊冊補梵音集)'(1713), 백파(白坡)스님의 '작법귀감(作法龜鑑)'(1828) 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영조24년(1748년) 범패의 대가 대휘(大煇) 화상의 '범음집(梵音集)'이 저술되기도 하였으며, '범음족파(梵音族派)'에 많은 수의 범패승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볼 때 민간신앙의 주체로서 범패가 꾸준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1년 6월 사찰령과 더불어 각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제정되자 조선승려의 범패와 작법이 금지되었고, 의식은 간소화되면서 맥이 끊어지는 듯했으나 1931년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불교의식을 모은 '석문의범(釋門儀範)'을 펴내게 되면서 이후 불교의식예법의 필독서가 되었다.
근대에는 서양음악의 도입으로 오선보로 제작 및 편찬된 찬불가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권상로스님의 1925년에 제작된 찬불가집 '은듕뎐', 조학유 스님의 '불교'에 게재한 24곡의 찬불가(1926-1927) 등이 있으며, 특히 백용성 스님은 자신의 '대각교의식'에 찬불가 등을 수록하여 찬불가 운동을 통해 대중의 교화를 시도하였다.
해방 이후 불교의 권공의식이 점차 쇠퇴하여 갔지만 영남, 호남, 경기를 중심으로 이어졌던 범음이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지정과 더불어 전승되어가고 있다. 근대의 맥을 이어 해방 이후 찬불가의 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정묵 스님의 '찬불가(讚佛歌)', 정운문 스님의 '불교동요집'(1964), '행복의 문'(1979), '어린이찬불가'(1985), '불교성가집'(1983)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점차 불교계의 공식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찬불가가 확고히 자리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불교음악은 범패를 중심으로 한 전통불교음악과 새롭게 창작된 다양한 찬불가가 서로 공존하면서 발전한다.
불교음악 부분에서 불교음악사와 관련하여 큰 범주의 범패의 의미를 알아보았다면, 좁은 의미의 범패는 전문적 스님들에 의해 불려지는 안채비소리, 바깥채소리, 화청(和靑) 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
범패의‘범’은 천상의 소리를 말하며,‘패’는 산스크리트어의 Phasa의 음역으로 찬탄의 의미이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에 하나이며,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범패는 장단(長短)과 화성(和聲)이 없는 단성시율(單聲施聿)이며, 또한 일정한 악보가 없이 입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전승이 어려워 배우기 힘들다.
범패를 위의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안채비는 본사의 큰 스님이나 재(齋)의 진행을 맡은 법주(法主)에 의해 불리는데, 권공(權共) 이유가 담겨있는 4·6체 형식이나 산문형식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 안에서 불리우는 일반적인 염불(念佛)이 여기에 해당되며 유치성(由致聲), 착어성(着語聲), 편게성(偏偈聲), 개탁성(開鐸聲) 등이 있다.
바깥채비는 홋소리, 반짓소리, 짓소리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범패는 홋소리를 가리키기도 하며, 범음(梵音)은 짓소리의 별칭이기도 하다. 훗소리는 오언사구(五言四句), 칠언사구(七言四句) 등 한문으로 된 사설과 범어로 된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창 또는 대중창으로 부른다. 반짓소리는 일부만 짓소리로, 나머지 소리는 훗소리나 평염불로 불리는 곡을 말한다. 짓소리는 훗소리에 비해 소리가 청아하며 짧은 게송으로 되어있지만 연주시간이 길고 장엄하다. 현재 짓소리는 과거 72곡(曲) 중에서 15곡만이 전해진다. 이러한 홋소리, 짓소리를 모두 하는 스님을 어장(魚丈)이라고 하며, 어장은 모든 소리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은 물론 의식의 전반적 흐름과 이론에도 밝아야 하므로 말강(末講), 중강(中講), 상강(上講)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안채비와 바깥채비 등은 의식의 규모에 따라 구별되는데, 간단한 불공과 시식은 안채비소리로, 그 외 영산재 등은 안채비와 바깥채비소리가 모두 불리워진다. 화청(和靑)은 재를 지내는 여러 절차 사이에 어장이 징·북·목탁 등의 타악기를 치며 부르는 것으로서 화청과 회심곡(回心曲)으로 나눌 수 있다. 사설형식의 가사를 개개인의 독특한 음성으로 부르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음이 쉬워 대중적인 특징이 있다. 화청의 내용은 불보살을 청하여 공덕을 찬탄하며 재를 지내는 신도의 소원성취를 기원하거나 영가의 극락정토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적 내용으로 되어있다. 회심곡은 인간의 권선징악과 희로애락 그리고 생로병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된 것과 '부모은중경' 중 덕담 부분을 뽑아서 한글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축원화청을 부르기전에 독창으로 부르며, 실로 종류가 매우 다양한 편이며《왕생가》,《열반가》,《몽환가》 등이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