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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호(號) | 관직 및 품계 | 사원(祠院) |
朝鮮 |
諱 응환(應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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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유형문화재 제130호 (고창군)
*청백리가선대부 동래수사 (淸白吏嘉善大夫東萊水使)
字:명서(命瑞),호:물기재(勿欺齋).
증영의정 희맹(希孟)의 9세손으로 전라도 무송(茂松:지금의 高敞)에서 태어났다.
1735년 영조 을묘생
경과정시(慶科庭試)에 합격하여, 부장(部長)·사헌부감찰·칠원현감(漆原縣監)·초계군수(草溪郡守)·대구영장(大丘營將)·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창성부사(昌城府使)·동래부사 등을 지냈다. 창성부사가 되어서는 부근의 지도를 작성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한 바도 있다.
이 문집에 그가 남긴 시조 〈창성감고가 昌城感古歌〉 1수와 가사 〈무호가 武豪歌〉 1편, 고령진의 백성들이 지은 가사 〈고령진민선정가 高嶺鎭民善政歌〉 1편이 실려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의 퇴폐한 시대상에 비통해하였으며, 이러한 의식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애국애족을 주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임금의 특별 배려로 영정(影禎)을 하사 받았다. 1795년 10.7일 졸 향수 60세
규장각 직학사 송규헌(宋奎憲) 찬.
참고문헌:勿欺齋集, 時調의 文獻的 硏究(沈載完, 世宗文化社, 1972)
配位:정부인 장택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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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당(影堂) |
諱 필리(必履) |
*고구마 연구보급 통정대부 사옹원 부제조 겸 사간원 대사간 (通政大夫司甕院副製調兼司諫院大司諫)
자:석여(錫汝),호:독립정(獨立亭)향수 55세
전라남도 강진출생. 아버지는 진사 선(선)이다.
1713년 숙종 계사 9월 4일생 1741년 신유 생원,1747년 정묘 문과등제 부정자,1749년 영조 기사 성현찰방,성균관전적,형조,병조정랑,사간원 정언,헌납,사헌부 지평,
1762년 지평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옹호하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당록(都堂錄)에 뽑히고,
이어 홍문관교리로 남양어사(南陽御史)· 강화순심어사(江華巡審御史)로 나가는 등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陞통정대부 호조참의,동부,우부,좌부승지, 1763년 영조 계미 5월14일 特命 순천부사,1764년 갑신 동래부사,
이때 앞서 조엄(趙엄)이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심고 가꾸는 법을 연구, 지도하여 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1766년 병술 12월 사옹원 부제조 겸 사간원 대사간(司甕院副製調兼司諫院大司諫) 우승지,병조참의,1767년 정해 11월 1일졸.
저서로는 《감저보 甘藷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순천시에서 유림 종회 석우탑(石牛塔)건립하였다.
참고문헌:英祖實錄, 海行摠載, 萬姓大同譜. 〈韓榮國〉 감저종식법 [甘藷種植法]
配位:숙부인 안동권씨 父:수찬 부(扶) 祖:안은군(安恩君) 우(寓) 曾祖:이조참판 안선군(安善君) 석(碩) |
석우탑(石牛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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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윤(潤) *종1품* |
해시계 직접 제작 *숭정대부 중추원 일등의관 (崇政大夫中樞院 一等議官)
자는 덕여(德汝), 호는 호운(湖雲).
1830∼1898 파주, 장단, 양주, 1864년(고종 1) 서산군수(瑞山郡守), 1873(고종 10) 5월 훈련도감 실무담당 관리에서 통진부사가 되었다. 1885년 11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 1887년 동도(同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89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중추원 일등의관(從一品 中樞院 一等議官)을 지냈다. 1881년(고종 18) 직접 제작한 해시계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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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공(同知公)
諱 순국(順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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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증3대(追贈三代)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使 兼 五衛將)
1761~1835 [조선] 字는 효겸(孝兼), 호는 간오재(澗塢齋). 1815년 곡식 천여석을 진휼(賑恤)하여 나라에서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嘉善大夫 中樞府同知事)로 특명을 내렸다. 군수(郡守) 김경필(金庚弼)이 지은 간오정기(澗塢亭記)가 있다. 동지공께서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하셨으나 성실하고 근면하며 늘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인보정신을 실천하며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사셔서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配位:정부인 순천박씨
配位:정부인 함양박씨 |
간오정(澗塢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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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희주(熙周) |
*군녹원훈(軍錄原勳) 증통정대부 절충장군(通政大夫折忠將軍)
자:주백(周伯),호:초은(樵隱),정묘생
군녹원훈(軍錄原勳),영조 특증통정대부 절충장군(通政大夫折忠將軍), 見:무신일기(戊申日記),6월 20일졸.
配位:숙부인 여양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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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신(必愼) |
*참원종일등공신(參原從一等攻臣)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자:은경(恩卿),호:모헌(慕軒)
예문관제학 사필(士弼)의 5세손, 아버지는 병조랑 영(영)이며,어려서부터 학문에 탐닉하였으며, 특히 경사(經史)에 밝았다.
1713년(숙종 39)에 생원이 되었으며, 이어 1718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으며, 안주현감이 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나, 그때 상신(相臣)이던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 등이 탕평책을 주장할 때 이에 맞서 반대하였기 때문에 관운이 순탄하지 못했다. 1751년 장령으로 호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주장한 균역론(均役論)의 폐단을 극론하여 미움을 샀고,
그뒤 평안도관찰사였던 남태량(南泰良)이 상신 정우량(鄭羽良)형제의 추천으로 일약 재상에 승진된 사실을 지적하여 상소했다가 정우량 형제에게 밀려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오직 시문에만 전념했다.
1756년 병자 8,6일졸.향수 69세
참고문헌: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警弦齋集. 〈孫承喆〉
配位:숙부인 사천목씨 父:대사헌 임일(林一) 祖:우의정 래선(來善) 曾祖:지중추 증영의정 서흠(敍欽)
配位:숙부인 벽진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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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경(必慶) |
*분무원종1등훈 통정대부 (奮武原從1等勳通政大夫)
자:일선(一善),호:헌와(獻窩)
1680년 경신생, 1705년 을유 사마(司馬) 1713년 계사 삼사춘방 선(三司春訪選),지제교,1718년 기신 녹분무원종1등훈(錄奮武原從1等勳) 陞통정대부(通政大夫) 1794년 기사 졸,향수 114세
配位:숙부인 원주이씨 父:진사 연제(延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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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진(진) |
*시·서·화의 삼절(三絶) 안협현감(安峽縣監)
자는 진여(進汝), 호는 대산(對山). 1807(순조 7)∼1858(철종 9).
증조부는 정헌대부 세황(世晃)이다.
이어서 1852년(철종 2)에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나가 읍민을 잘 보살펴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동시에 시와 초서(草書)·예서(隷書) 등 글씨에도 뛰어나 사람들은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칭송하였다.
강진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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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사문 (士文) |
*고종때의 의병장
1876~1909 일명 판렬(判烈), 장성 출생 1908년(융희 2) 1월 함평(咸平) 의병장 김태원(金太元)의 부하가 되었다가 그해 2월 광주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모집,
장성군 고산리(長城郡 古山里)의 의병과 연합하여 총대장(摠大將)으로 광주, 창평(昌平), 동복(同福), 화순(和順)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이해 11월 전해산(全海山). 유진여(柳鎭汝) 등과 연합부대를 편성광주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추월산(秋月山) 전투에서 대패.
1909년 나주 영산포(榮山浦)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서순국했다.
198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愛國章)이 추서되었다.
[문헌] 한국독립운동사. |
건국공로훈장 애국장(愛國章 |
朝鮮 |
서천공(西川公)
諱 화석(華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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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근대교육의 선구자.
자(字)는 윤승(允升)이며 호는 서천(西川)
1868년 고종 5년에 출생하시어 증광 사마시 진사(進士)에 합격하시고1929년에 돌아가심
부녀자 독학자습서 부유독습(婦幼獨習)펴내 여성교육 필요성 강조.
구한말 민족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8년 월남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남궁억(南宮檍)선생등과 함께 자본을 마련해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 국한문 혼용)을 설립.
창간하여 1910년 한일합병으로 폐간될 때까지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독립협회 사법위원으로도 활약한 애국운동가이기도 하다.
1907년 7월 서북학회(西北學會, 또는 서우학회 西友學會, 한북흥학회 漢北興學會 라고도 함.)를 설립해 설립자로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서북협성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오성학교 5대교장을 역임
선생의 저서 부유독습은 1909년(강희 2년) 7월 사동(社洞)제책소에서 발행된 상.하권 489쪽으로 되어 있으며 원본(原本)이 국회도서관에 개화기 교과서 총서 20권중 8권에 분류되어 있다.
*찬기문 보기 ㅡ>서천(西川) 강화석(姜華錫)선생
부유독습 [婦幼獨習] 임호집 [林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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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동(基東) |
*항일 의병장 일본국 격파 순국
1884∼1911. 의병장. 본관은 진주. 본명은 기주(基周). 서울 출신.
이때 각지의 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기회를 노렸다. 당시 헌병대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10여명의 동지와 많은 포로의병들이 있었는데, 그는 숙직을 기하여 이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함께 무기 및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수일 후 그곳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던 중 왼쪽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연기우 의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그 해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 경무총감부에 수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를 묵자하고 옥중항쟁을 하다가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참고문헌:梅泉野錄,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朴成壽〉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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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동진(東鎭) |
*국사학자. 일본최초 쓰쿠바대학(筑波大學) 외국인 교수
1925∼1986.본관은 진양(晉陽). 경상남도 진주 출신. 치섭(致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성원(李聖源), 1951년 서울대학교 법학부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5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부교수, 1958년부터 건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중 197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7년 이 대학 일본사연구과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생동안 다수의 논문과 6권의 저서 등을 남겼는데, 주로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에 관한 연구였다.
配:청주 한영순(韓英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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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진(文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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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대동단(大同團)
호는 중현(中見, 또는 仲現).
1869(고종 6)∼1929.향수 60세,나주 출생.
1920년에 전협(全#협10)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입단,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조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활동지역은 금산과 공주지역으로 1920년에 단원인 백남식(白南式)·윤상기(尹相起)·윤태병(尹太炳) 등과 권총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0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6년 7개월간 복역한 후에 3년 5개월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추서.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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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포장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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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홍열 (弘烈) |
*독립운동가.의열단(義烈團)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경남지부장
1895~1958 호는 학암(鶴巖) 경남 합천 출생 중앙중학(中央中學) 수료. 1919년 3.1 운동 때 영남학생대표(嶺南學生大表)로 활약하였다. 1922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고 이듬해 국내 활동차 입국, 군자금 모집에 질력하다가 1924년 체포되어2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임시정부 경상남도 내무부장으로 해방까지 활약했으며,
해방후 국민회 경상남도 부위원장, 미군정 경상남도 고문,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경남지부장, 민주당 경남도당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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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건국공로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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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태홍 (泰弘) |
*가야금 산조의 명인(名人)
호는 효산(曉山)1897~1957전남 무안 출생.
협율사(협율사)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하여 연주활동을 하면서 가야금 산조외 가야금 병창을 취입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만년에는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제자들이 도와주는 것에 의지하여 어렵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의 예술은 제자들에 의하여 널리 전승되고 있으며, 그가 연주한 가야금 산조의 병창은 축음기판으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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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종완 (宗完) |
*독립운동가.비밀결사대를 조직
1900~1962 경남 마산 출생 1919년 3.1 운동 때 진주, 함안, 마산 등지에서 동지 180여 명을 규합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지하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부산 형무소에서 3년 8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愛族章)이추서 되었다.
[문헌] 독립유공인물록, 한국독립사. |
대통령표창 건국공로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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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원명 (元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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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군경독찰처 상위독찰관 (軍警督察處上尉督察官)
1917~ ? 호는 청암(淸庵), 함북 회령 출생
북간도에서 독립투사 강병일(姜秉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군에 입대하여 주 용(朱 榕) 단장 휘항에서 항일구국군으로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滿州)에서 일본인 회사인 삼능상사(三능商社)청도(靑島)지점에 근무하면서 국부군(國府軍)과 접선하여 대적 정보활동을 하였다.
1945년 8월에는 중국 신포(新浦) 및 연운(連雲)에서 군경독찰처(軍警督察處) 상위독찰관(上尉督察官)으로 임명을 받고 중국군 장립 중장 군지휘부(張立 中將 軍指揮部)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獨立章)을 받았다.
[문헌] 주중주한대사관, 독립유공인물록. |
대통령표창 건국공로훈장 독립장(獨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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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태현(泰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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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국민결사대를 조직
선생은 1907. 7. 20 국민결사대를 조직 구국선언서를 살포했으며 대한 자강회를 선도하여 이완용의 집을 습격 불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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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진해(鎭海) |
*독립운동가.전사 별동대장(別動隊長)
정의부(正義府)의 서란총관(舒蘭摠管) 한국독립군 별동대장(別動隊長),
1896~1933 ,함남 단천(端川)출신. 3.1운동에 참가하고,1926년 만주에 망명, 정의부(正義府)의 서란총관(舒蘭摠管)이 되었다. 1931년 한국독립군 별동대장(別動隊長)으로 지청천(池靑天). 조경한(趙擎韓)등과 함께 동경성(東京城). 대전자(大甸子)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나 1933년 동녕현(東寧縣)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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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泌) |
*독립운동가 군자금 조달
1878. 4. 10∼1942. 3. 31경북 봉화(奉化) .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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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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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운(基云) |
*독립군 독립운동가
1897. 4.24~1944. 9. 5함북 회령(會寧)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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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獨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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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준(祺俊) |
*3.1운동 열지사
1919;29세~1954. 9.12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동년 4월 8일 철원군 내문면 오동리(梧洞里)에서 만세시위를 펴고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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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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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팔(基팔) |
*3.1운동 열지사,독립선언서 낭독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의사
1896. 9.11~1936. 9.17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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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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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덕수(德壽) |
*3·1운동 열지사 밀양공립보통학교 생도 규합 만세시위
1919년 당시 그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의 소년으로, 4월 1일 동교 졸업생인 윤차암(尹且岩)·윤수선(尹秀善)·김성선(金性善)·박소수(朴小守) 등과 함께 밀양면(密陽面, 현재 밀양시) 내일동(內一洞) 영남루(嶺南樓) 뒷산으로 놀러갔다.
이때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 윤수선이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고창하였다고 말하자, 그는 친구들에게 밀양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대오를 이루어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와 동지들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학교 서쪽 무안가도(武安街道)를 행진하고 우측으로 돌아 북문(北門)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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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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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두안(斗安) |
*항일 독립 학생운동 항일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 조직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원고를 편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졸업기를 당하여 회원들이 졸업을 하게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간사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했는데 이때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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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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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두영(斗永) |
*3·1운동 열지사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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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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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만갑(萬甲) |
*3·1운동 순국 열지사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군(靑陽郡)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1백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를 강제 연행해 가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달려들며 더욱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 헌병은 야만적으로 그의 가슴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태형을 받은 인사는 그를 비롯하여 166인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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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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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만년(萬年) |
*항일 독립운동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 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 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을 통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무력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독립단의 활동은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을 산발적으로 추진하는데 그쳤다.
수백 명을 난타하였으며, 독립단총지단(獨立團總支團) 총무 박문용(朴文瑢), 임원 한병기(韓炳基), 독립운동가 박운석(朴云錫), 70세 노인 4명 등을 강변 나무숲에서 사살하였다. 이 때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던 강만년도 최경화(崔敬和)·장형도(張亨道)·임봉익(林奉益) 등과 함께 독립군에 연락한 혐의로 피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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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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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만형(萬馨) |
*3·1운동 열지사
강원도 원성(原城)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결국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이해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 중,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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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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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면하(冕夏) |
*3·1운동 열지사 대한 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조직
함남 이원(利原) 사람이다.
그는 이원교통국의 연락통신원이 되어 이를 토대로 군자금을 모집키 위하여 동지 김병기(金秉琦) 김창열(金昌烈) 등과 협의하고 활약하다가 1921년 1월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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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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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양성(凉星) |
*항일 순국 독립운동가
중국 길림성 연길현 북일양구(吉林省 延吉縣 北一兩溝)에서 의군단(義軍團)의 정찰사무원(偵察事務員)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10월 24일 일군에게 사살당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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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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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연중(鍊中) |
*항일 독립운동가
경남 진양(晋陽)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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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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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각(泳珏) |
*항일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총회 아래 북미·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 등 다섯 곳에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지방총회 아래 116개의 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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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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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국(永國) |
*3.1운동 열지사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보령군 청소면(靑所面) 성연리(聖淵里)에 사는 신태중(申泰重)의 집에 모인 임경진(林庚鎭)·이병철(李秉喆)·고광춘(高光春)·박제건(朴齊乾) 등에게
"근래 다른 지방에서는 산 위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조상의 은혜를 망각한 처사이다.
이제 우리가 주모자가 되어 진두산(陳頭山) 위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운동을 할 것인데 이에 가담하라"고 고무(鼓舞)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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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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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문(永文, 益文) |
*항일 독립운동가,순창(淳昌) 전투 참가 대한 광복군정사 전라도 부재무부장 (大韓光復軍政司副財務府長)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그는 1914년 2월 독립의군부 참모관에 임명되는 칙명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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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朝鮮 |
諱 영삼(永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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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3일 중국 용정(龍井)에서는 북간도 최대 규모의 3·1운동 집회라 할 수 있는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북간도 각 지방대표들은 '3·13운동'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다.
조선독립기성회의 주요 인맥은 1910년대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 활동을 통해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고 회의 명칭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
대한국민회 규칙에 "임시정부 법령 범위 내에서 독립사업 완성을 기도함을 목적"한다고 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상삼봉(上三峯) 병참수비대장 교본(橋本)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하고 한인들을 학살할 때, 피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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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諱 영석(永錫) |
*학생운동
전남 광주(光州)사람이다. 1927년 9월 23일 강석봉(姜錫奉)·김재명(金在明)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1927년 11월 청년운동의 통일을 위해 결성된 광주청년동맹(光州靑年同盟)의 창립준비위원과 위원에 선임되어 청년단체의 통일에 힘썼다.
전국에 확산시키고자 장석천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조선청년동맹원(朝鮮靑年同盟員)인 차재정(車載貞)·황대용(黃大用) 등과 이를 협의하고 학생구속자의 석방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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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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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순(永淳, 瀚淳,伯文) |
*항일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병홍(李炳洪)이 강재순(姜在淳)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정황을 전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진주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고, 이종언(李鍾彦)에게 독립선언서를 판각하여 등사하도록 하는 한편 인근 진주의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각지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도중에 사천(泗川)의 일본군 헌병대와 진주의 일본군 수비대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칠암리(七岩里)에 도착했을 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화 충돌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남달리 힘이 센 그는 한손에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한손으로 일본 헌병의 칼을 빼앗아 남강(南江)에 던지며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시위군중의 필사적인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주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포승을 절단하고 일본 경찰 2명을 발로 차 쓰러뜨린 뒤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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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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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조(永祚) |
*항일 독립운동가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이다.
당우리(堂隅里)의 공북학교(拱北學校)에 모인 8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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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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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영직(永直,永植,永燮) |
*항일 독립운동가
충남 부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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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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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완수(完洙) |
*항일 독립운동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선언문의 내용은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 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 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작성된 선언문을 2백여 장 인쇄하여 3월 29일 밤을 이용하여 진접면 일대에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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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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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익승(益勝) |
*항일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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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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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익형(益亨) |
*항일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金泉) 사람이다.
1920년 동단의 김달규(金達奎)·박승엽(朴承燁)·이원보(李元甫) 등은 국내와의 연계투쟁을 위해 평남지단(平南支團)을 결성하고 영원(寧遠)·맹산(孟山)·덕천(德川) 지역으로 지단조직을 확대하였다.
각 지단은 본부의 방침에 따라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의 무장력에 바탕한 직접투쟁을 행동목표로 하였다.
지단장은 이윤실(李潤實), 부단장은 정계록이 선임되었는데 동단은 이후 전단·격문·〈독립신문〉 배포·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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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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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진여(辰汝) |
*항일 독립운동가
문태익(文泰翼) 의진의 부장으로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과 교육부문에 의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의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4월 전북 장수(長水)를 습격하고, 무주(茂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18일 전북 황산(黃山)에서 군자금 3,100냥을 징수하던 중, 신종삼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경남 거창(居昌)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본부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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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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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화순(和淳) |
*항일 독립운동가
서울 사람이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과 교육부문에 의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의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는 노봉현의 지시에 따라 김종식(金鐘植)·손영식(孫永植) 등과 함께 이동희를 연행하여 조사한 후, 그가 밀정임이 밝혀지자 북한산 산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9년 12월 1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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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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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환진(桓珍) |
*항일 독립운동가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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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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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흥문(興文) |
*항일 독립운동가
강흥문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과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국권이 위협받자 1908년 3월부터 정봉택(鄭鳳澤)·김일선(金日善)·박일선(朴一善)·조동주(趙同朱) 등과 함께 안진(安進) 의진에 참여하여 전남 보성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09년 9월 6일 오후 3시 경 보성군 겸어면(兼於面) 입석(立石) 부근에서 일본군에 의해 김치선(金致善)·서장수(徐長水)·조동주(趙同朱) 등과 함께 피체되었다.
피체된 후 동년 9월 11일 밤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법화(法化)로 압송 도중 조동주와 함께 탈주를 시도하다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으나 12일 끝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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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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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희류(喜柳) |
*항일 독립운동가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일제에 피살되었다.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간도침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왕사해(王四海) 등을 두목으로 한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그들의 훈춘(琿春)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본정부는 영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1920년 10월 7일 급속히 군대를 간도로 출병시켰다.
훈춘방면은 기림(磯林)소장이, 왕청방면은 대촌(大村)대좌가, 용정방면은 동소장(東少將)이, 도문강 대안은 경찰관, 헌병 및 수비대에서 수시로 강을 건너 진출하여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었던 안서(安西)지대의 1,000여 명의 병력 등 합계 약 18,000명에서 2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병력을 사방에서 침입시켰다. 이들 침략군들은 1920년 10월 12일부터 간도를 향해 4면에서 포위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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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
朝鮮 |
*인조의 며느리, 소현세자 빈 (昭顯世子嬪)
민회빈 강씨는 조선조 최초의 CEO로 평가 받으며 왕실의 여인들 중 궁궐을 벗어난 유일한 여인이다.
또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신 고려 최고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19대 손녀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했으며 우수한 조선의 물품으로 무역을 전개하고 조선 포로들을 해방시켜 농장을 경영한다. 강빈(姜嬪) 그녀는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원인 모르게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1646년 억울하게 사약을 받았다.
숙종 44년(1718)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위되고, 고종 7년(1903)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 1612(광해군 4)~1645(인조 23). * 인조의 맏아들.
주:민회빈이 왕비가 되어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그렇듯 비참하지 않고 크게 창성했으리라...
시대를 앞선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작은 그릇의 김자점(金自點)과 같은 간신들이 망친 조선 역사의 슬픔이었다.
*찬기문 보기 ㅡ>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민회빈 강씨 묘소 김자점이란 자는 어떤자인가!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본관은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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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회원(永懷園) =애기능. 사적 제357호 | |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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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명재(命載) |
*가선대부 용양위 대호군 (嘉善大夫龍陽衛大護軍)
자:여진(汝眞),호:청우(菁愚)
숙종 기사생,무과 가선대부 용양위 대호군(嘉善大夫龍陽衛大護軍),신축 5,16일 졸.
配位:정부인 충주이씨 父:통정대부 영준(永俊)
配位:정부인 달성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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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명(文明) |
*익위사 세마(翊衛司 洗馬),현감.
1613~1647 자는 공저(公著).
강빈(姜嬪)의 오빠로 익위사 세마(翊衛司 洗馬)를 지내고 1637(인조 15)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배종신(陪從臣)으로 심양(審陽)에 함께 갔다가 1645년 귀국하여 현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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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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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벽(文壁) |
*선공감역(繕工監役).
1687~? 자는 자장(子章). 서울에 살았으며 1723(경종 3)년 계묘 무과(癸卯武科)급제하였고 벼슬은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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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좌(文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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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部使)
자 군망(君望) 신미 12월 4일생. 신축 부사(部使) 정묘 5월 21일 졸.
配位:숙부인 전주이씨 父ㅡ 헌창군 익철(憲昌君 翼哲) 曾祖ㅡ조천군 순(鳥川君 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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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주호(周祜) |
*생원시 장원(壯元),불사(不仕)
자:수천(受天),호:옥천(玉泉)
영조 갑술 2월 10일생, 정조 계묘 생원시 장원(壯元) 벼슬을 마다하고 후학양성에 주력하셨다. 유문집,신사 10월 4일 졸.
配位:유인 함안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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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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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장(必章) |
*옥동서원 원장(玉洞書院院長).
자 희회(希晦) 1722년 임인생,통덕랑(通德郞) 1796년 병진 옥동서원(玉洞書院) 원장(院長),1798년 기오 졸.
配位:공인 안동김씨 父ㅡ참의,曾祖ㅡ승지 귀만(龜萬)
配位:공인 풍산김씨 父ㅡ서대(瑞大) 대제학 응(應)后
配位:공인 밀직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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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악(必岳) |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진은군. (贈資憲大夫吏曹判書晉恩君)
자 희원(希遠) 호 평와(萍窩) 1723년 경종 계묘생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진은군(晉恩君),증자헌대부 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 1795년 을묘 11월 9일 졸 수 73세
配位:정부인 려천이씨 父ㅡ 정언 재후(載厚) 祖ㅡ사평 증 이조참판 동환(東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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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회(文會) |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通訓大夫司憲府執義)
1742~1810 자는 경백(慶伯).
양주(楊州)에 살았으며 1771(영조 47)년 신묘정시(辛卯庭試)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경성. 회령. 북청부사를 거쳐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通訓大夫司憲府執義)를 역임했다.
운계(雲溪) 최영조(崔永祚)가 찬(撰)한 행장(行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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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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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성필(聖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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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官)
자:병원(炳元),호:운포(雲圃)
정미 5월5일생,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官) 을유 3월 1일 졸.
配位:정부인 전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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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문성(文星) |
*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큰오빠이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큰처남.
1603~1647 자는 재명(再明),
1624(인조 2)년 갑자사마시(甲子司馬試)에 생원으로 등제하고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지냈다.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이다.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큰오빠이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큰처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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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교(必敎) |
*진사시 장원(壯元)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자:유방(幼方),호:청봉(淸峰)
1722년 임인 5월5일생 1750년 경오 진사시 장원(壯元) 1758년 기인 8월 통덕랑(通德郞) 1762년 임오 6월 제능참봉,의금부도사 1770년 경인 6월 20일 통훈대부 전의현감 정산현감 1794년 정조 갑인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1798년 정조 기오 2월 16일 졸,향수 77세
配位:숙부인 전주이씨 父:동지중추부사 과(菓) 祖:한성판윤 만선(萬選) 曾祖:이조판서 약(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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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
諱 필경(必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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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오위장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五衛將)
자는 선경(善慶).
1680(숙종 6)∼? 아버지는 헌(櫶).
이어 부수찬·필선 등을 지내고, 1727년(영조 3)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래 보덕·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곧 이어 사간으로 옮겼는데, 이때 역적과 내통한 전 목천현감 윤취은(尹就殷)과 전 부안현감 이문표(李文標) 등을 극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여 영조의 윤허를 얻었다.
참고문헌:景宗實錄, 英祖實錄. 〈金容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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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
諱 주호(周祜) |
*효행(孝行) 관불사 생원(生員) 후진양성
자는 수천(受天), 호는 옥천(玉泉).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우정(禹鼎)의 딸이다.
강시환(姜始煥)과 강한(姜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83년(정조 7)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장상환(張相煥) 등을 들 수 있으며,
저서로는 그의 아우 주우(周祐)와 함께 저술한 《옥천연방고 玉泉聯芳稿》 3권이 있다.
참고문헌:玉泉聯芳稿. 〈尹#혁09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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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석구(碩龜) |
*가의대부 한성우윤(嘉義大夫漢城右尹)
字 낙서(洛瑞). 이중(而仲), 호는 학암(鶴岩)
1726~1810 향수 84세,금산(金山)출신. 1768(영조 44)년 무자식년(武子式年)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한림주부, 양사(兩司) 이조(吏曹). 병조(兵曹) 정랑(正郞),
1789(정조 13)년 부사과(副司果), 좌승지, 1809(순조 9)년 한성우윤(漢城右尹) 이조참의,의금부동지사(義禁府同知事)를 역임하였고 1811(순조 11)년 임금이 제수(祭需)를 하사하고 세세손손(世世孫孫) 양반의 가문으로 소박한 살림을 즐기는 청백(淸白)의 지조를 이으라 했다.
유이춘(柳彛春)이 행장을 짓고 지애(芝厓) 정위(鄭褘)가 비명을 지었다. 문집(鶴岩集) 三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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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시환(時煥) |
*비서감승(秘書監承)
1766~1842 字는 성여(聖汝). 1789(정조 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1811(순조 11)년 양양부사(襄陽府使).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내고, 1825년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836(헌종 2)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으면서 순조비(純祖비) 김씨의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규탄하고 학문의 권장, 빈민구제 등 20개 조의 시정책을 상소했다가 추자도(楸子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840(헌종 6)년 헌종이 친정(親政)하게 되자 풀려나왔다.
함평 기산서원(箕山書院)에 배향(配享)되고 1845년 손자 두흠(斗欽)의 귀(貴)로 비서감승(秘書監承)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古鮮冊譜. 〈吳星〉 |
기산서원 (箕山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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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문(必文) |
*증가선대부 예조참판 제학(禮曹參判提學)
자:질경(質卿),1687년 정묘생 1713년 계사 생원,신해 대과급제,홍문관 정자(正字),승정원 주서(主書) 1732년 임자 졸,증예조참판 제학(禮曹參判提學)
配位:증정부인 여흥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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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휘옥(彙鈺) |
*문과장원(文科壯元),유학(幼學)
자:원덕(爰德),
무진1748(戊辰1748)생, 영조(英祖) 51년 (을미, 1775년), 전시(殿試) 을과1(乙科1) 장원(壯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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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정환(鼎煥) |
*가선대부(嘉善大夫) 수선(首選)
字:계승(季昇),호:전암(典庵). 심시재(尋是齋) 1741~1816 향수 75세
칠원(漆原) 무기리 출신. 아버지는 장릉참봉(章陵參奉) 주제(柱齊)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진망(震望)의 딸이다.
17,18세에 문예(文藝)가 성취되었고,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스승이 심시(尋是)라는 두 글자를 써주고 격려하였다.
성리학에 밝아 이에 대한 저술이 여러편 있으며, 이직보(李直輔), 김이안(金履安)등과 학문을 토론했다.
한편,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시권(試券)을 보고 이같이 훌륭한 문장이 빛을 보지 못한것은 유사(有司)의 과실이다.라 하고, 특별히 수선(首選)에 올려 놓았다.
또, 응제(應製)때 정조가 그의 문사(文詞)를 칭찬하고 붉은 보자기로 시권을 싸서 집에 소장하게 했다.
정조가 영남 선비중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규장각 강의(講義)를 교정하라는 영(永)을 내리자, 도신(道臣)이 그를 추천하였다. 이 일을 마치자 왕은 쌀과 종이 및 붓을 상으로 주었다.
그는 심경(心經), 근심록, 주자대전 등을 강론하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의 천명도(天命圖)를 토대로 심성도(心性圖)와 대학강령도등 고금의 성리설에 관한 많은 도식과 차록(箚錄)을 만들어 성리학에도 이바지 하였다.
그는 《심경 心經》·《근사록》·《주자대전》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의 〈천명도 天命圖〉를 토대로 〈심성도 心性圖〉와 〈대학강령도 大學綱領圖〉 등 고금의 성리설에 관한 많은 도식과 차록(箚錄)을 만들어 성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典庵文集. 〈權虎基〉
配位:정부인 창원황씨:효부정려(孝婦旌閭) :남편이 병들매 손가락을 찢어서 피를 쏟아 3일동안 목숨을 연장시켰으나 결국
곧 집안 무리에게 이별을 고한 뒤에 드디어 자재하여 하종하였다. |
효부정려 (孝婦旌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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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구(必龜) |
*入괴원(槐院)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자:예경(禮卿),호:규은(珪隱),1684년 갑자생
1722년 임인 연시 문과급제,入괴원(槐院) 전적,예조,병조좌랑,창평현감,陞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1763년 계미 10,27졸,향수 79세
配位:정부인 전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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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시환(始煥) |
*증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
字는 유종(有終), 호는 백록(白麓).
1761년 신사 6월 14일생 성주(星州)에 살았다 1786(정조 10)년 병오식년 사마시에 진사로 급제하여 주자학(朱子學)에 전념.
1799(정조 23)년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천거하여 부세마(副洗馬)에 제수되고 이어 참봉(參奉)을 거쳐 1802(순조 2)년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851(철종 2)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영부사(領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찬한 행장이 있고 유고(遺稿)가 있다. 1813년 계유 12월 12일 졸,향수 53세
配位:숙부인 성주이씨 父:생원 민철(敏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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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두환(斗煥) |
*통훈대부 행 시강원필선 (通訓大夫行侍講院弼善)
자는 칠서(七瑞) 호는 기헌(起軒).
1781년 신축 3월24일생 , 1807년 정묘식년(丁卯式年)에 문과 급제하여 1813(순조 13)년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이듬해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1833년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이듬해 홍원현감(洪原縣監), 조경묘 별검(肇慶廟 別檢), 사간원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했고
헌종이 즉위하자 학문에 힘써 성군(聖君)이 되라고 직언하다가 경성현(鏡城縣)에 적배(謫配)되었다가 그해 10월에 풀려 나왔다.
1854년 갑인 12월 6일졸,향수 74세 저서(著書):기헌유고(起軒遺稿)
配位:숙인 성주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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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효(必孝) |
*통훈대부 돈녕부 도정(通訓大夫敦寧府都正)
자:중순(仲順),호:해은(海隱),법은(法隱) 향수 85세
안동출신으로 아버지는 식(植)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중연(重延)의 딸이다.
1764년 갑신 11,12생,순능참봉,세마, 통훈대부돈녕부 도정(通訓大夫敦寧府都正)
1800년(정조 24)집 동쪽에 창주(滄洲) 경의재(敬義齋)를 모방하여 서실(書室)을 짓고, 〈백록동규 白鹿洞規〉와 〈우계서실의 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畵一圖)를 준칙으로 삼았는데,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논하였다.
1848년 무신 11,17졸,有문집 13권, 문경공 성근묵(成近默)찬행장, 이량연(李亮淵)찬비문
첨고문헌:海隱遺稿, 朝鮮儒學史(玄相允, 正音社, 1982). 〈趙駿河〉
配位:숙인 의성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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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로(必魯) |
*통정대부 동부승지 겸 대사간 (通政大夫同副承旨兼大司諫)
자:치가(稚可),호:로와(魯窩)
아버지는 첨지사 목(穆)이다.
1782년 임인 2월 21일생, 1809년(순조 9)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치사관(致詞官)·종부시주부·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교리·승지·회양부사를 거쳐
1843년(헌종 9) 선원보첩(璿源譜牒)을 계속 만든 공로로 종부시정으로 가자되었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삼주(三州)의 외관을 지냈으나 말년에는 초가에서 독서를 낙으로 삼고 스스로를 작약산인(芍藥山人)이라 칭하며 살았다.
통정대부 동부승지 겸대사간(通政大夫同副承旨兼大司諫),1854년 갑인 9월 28일 졸, 향수 72세
참고문헌: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農盧集. 〈裵鍾茂〉
配位:숙부인 전주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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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헌공(翼憲公) 諱 로 [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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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기로소(耆老所),진사3등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左議政)
字:기중(期仲) 호는 표운(豹雲).정은(貞隱) 1809~1887 향수 78세
현감 이구(彛九)의 아들이다. 1837(헌종 3)년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1848(헌종 14)년 무신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1850(철종 1)년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고, 응교(應敎)를 거쳐 1857(철종 8)년 대사간이 되었다.
원래 당쟁으로 거세당했던 북인(北人)의 한사람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執政)을 하자 다시 중용되어 1866(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로 피폐해진 강화도에 위유사(慰諭使)로 나갔다.
1871년 병조판서를 거쳐 1872년 좌의정이 되고 이듬해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항의했다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되었다.
1874년 용서되어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지내던 중 1878년 효휘전(孝徽殿)의 참례(參禮)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중화(中和)에 유배, 이해 풀려나와 중추부판사로서 치사(致仕),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83년 앞서 임오군란(壬午軍亂)때 난도(亂徒)와 작당했다는 탄핵을 받아 안의(安義)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1887년 용서받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며 화상(畵像 명정)이 있고 文集이 있다.
*찬기문 보기 ㅡ> 의정부 좌의정 휘 노(人+老).
참고문헌: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高宗紀事, 金#구66錄, 梅泉野錄. 〈趙恒來〉
配位:정경부인 풍첨임씨 父:백우(百祐)
사위:청풍 김규식(김규식)ㅡ판서 전주 이승우(이승우)ㅡ제학 영월 엄주영(엄주영)ㅡ승지 의령 남정운(남정운)ㅡ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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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건(水+建)
종 1품(從一品) |
*숭정대부 중추원의관 겸 한성판윤 (崇政大夫中樞院議官兼漢城判尹)
字는 은중(殷中) 호는 학산(學山)이다.
음사(蔭仕)로 벼슬을 시작하여 1896(건양 1)년 영선사장(營繕司長)으로 나아가 이듬해 별감동(別監童)에서 가자되고 또 별간역(別看役)에서 가자되고 1899(광무 3)년 백천군수,
이듬해 종 1품(從一品) 숭정대부 중추원의관, 한성판윤(崇政大夫中樞院議官兼漢城判尹)이 되었으나 1903(광무 7)년 견책을 받았던 사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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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기) |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경연 춘추관동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嘉善大夫刑曹參判兼經筵春秋官同知事五衛都摠府都摠官)
자는 기백(耆伯), 1787~?
현감으로 있으면서 1844년 갑진증광시(甲辰增廣試) 갑과(甲科)에 급제.
1845(현종 11)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1848년 예방승지(禮房承旨)때 가자되어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경연 춘추관동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嘉善大夫刑曹參判兼經筵春秋官同知事五衛都摠府都摠官)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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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기환(基煥) |
*효행정려(孝行旌閭)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通訓大夫 司憲府 監察)
자는 성흥(聖興), 호는 송간(松澗).
1778~1812 안동에 살았으며 1803(순조 3)년 계해증광시(癸亥增廣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通訓大夫 司憲府 監察)을 역임했다.
벼슬을 내놓고 학문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서(著書)로는 시고(詩稿)가 있다.
配位:숙인 담양전씨 |
효행정려(孝行旌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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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두성(斗成) |
*백세노인(百歲老人)
자는 경오(景五) 1771~?
조선말기인 1870(고종 7)년 백세노인(百歲老人)으로 가자(加資)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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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필응(必應) |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
자는 시가(時可),호는 만대옹(晩對翁) 천성적으로 숭조정신이 유별하여 종당(宗黨)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 한규(漢奎)의 공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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