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떠난 옥천 기행
--오일장과 정지용 생가, 그리고 장령산 얼음 썰매장까지
겨울은 두 얼굴의 계절이다. 사람들에게 포근한 눈발을 안겨주다가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파와 폭설을 몰아오기도 한다. 야생화 기행을 할 때도 가장 곤혹스런 계절이 단연 겨울이다. 맹추위를 뚫고 피어난 야생화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산행을 한다는 것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야모 계획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겨울이면 겨울에 맞게 그에 걸 맞는 계획을 잡아 야생화 기행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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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이 열린 옥천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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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들을 앞에 놓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할머니
옥천 오일장과 정지용 시인 생가 방문을 위해 떠나는 차량은 한파에 얼어붙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잘도 달린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도로변 산자락은 지난 번 쏟아진 폭설에 파묻혀 희끗희끗하다. 무성한 나무는 서로 손을 맞잡아 안개처럼 눈꽃을 피우고 있다. 아름다운 설경에 젖다보니 차는 어느새 오일장이 열리는 옥천 장터 입구에 도착해 일행을 쏟아내고 있다.
없는 것이 없네, 삶과 애환이 숨쉬는 장터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로 장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지만 아직도 시골의 오일장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떠밀려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된 오일장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장이 설 때마다 모여드는 시골 인심 때문에 아직은 훈훈하다. 장터에 쌓아놓은 물건은 값이 싸고 흔한 것이 많지만 전국의 물건들이 다 모여 있을 정도로 오만가지 물건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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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에 많이 보았던 풍경, 튀밥 튀기는 소리,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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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 된 튀밥들
옥천의 오일장에도 없는 것이 없다. 금구천 일대에 자리를 잡아 전통적인 오일장을 형성한 장터를 둘러보는 맛도 쏠쏠하다. 몰아닥친 한파에 장터는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물건을 파는 시장 상인들의 손끝엔 따스함이 묻어있다. 건어물과 곡물류, 의류, 각종 농산물 등 육지와 바다, 공중에서 나는 것들이 한 곳에 자리를 잡아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생선의 비린내와 오뎅과 떡볶이의 냄새에 젖거나 눈요기를 하다보면 시간이 언제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장 삼매경에 푹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튀밥 튀기는 풍경이다. 개천 건너편 한쪽에 봉고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튀밥을 튀기는 풍경은 지나간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튀밥기계 모양은 엣날과 비슷했지만 수동 핸들은 모터로 연결돼 소리조차 없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그 곳에 도착했을 무렵, 튀밥 장수가 마침 튀밥 한 방을 튀겼다. 호루라기 소리 휘리릭 울려퍼지더니 지축을 흔드는 폭음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주변을 에워 쌌다. 사라지는 수증기 속에서 훅 풍겨오는 내음. 튀밥 냄새였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맡아보던 냄새였던가. 한 됫박의 쌀과 옥수수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쓸쓸했지만 옛날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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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놓인 당근도 가판대 위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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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장터 풍경
장터로 돌아오니 일행들이 사라지고 없다. 일행들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묵을 진열한 가판대 앞에 멈춰섰다. 묵의 빛깔도 다양했다. 흔히 보던 묵도 있었지만 검은 빛깔을 띤 묵에 특히 눈길이 갔다. 맛 좀 보라며 주인이 요지에 묵 한 점을 찍어주는데 그 맛이 유별나게 고소했다. 이름이 흑임자라고 했다. 검은 깨로 만든 묵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도토리나 굴밤, 메밀묵 밖에 없었는데 흐르는 세월속에서 묵의 재료와 색깔도 아주 다양하게 변해갔다. 흑임자묵 맛이 혀끝에서 채 가시기 전 일행들을 간신히 찾아냈다. 좁은 식당에 자리를 잡아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는 중이다. 장터를 돌아다니느라 허기가 졌는지 모두들 선채로 막걸리 사발을 부딪히느라 정신이 없다. 안주로 먹는 닭발과 깨를 뿌린 돼지껍데기가 혀끝에서 살살 녹았다. 장터를 벗어나면서 일행들은 여러가지 술 안주감을 샀다. 여정이 끝난 후 대전에 돌아가 백당 카페에서 먹고 즐길 안주들이다.
꽁꽁 얼어붙은 실개천도 얼음 속에서 “향수”를 노래 하네
정지용 생가는 구읍 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옥천 장터에서 차량으로 거의 20분을 달렸을까. 둥근 돌담이 초가지붕을 둘러싼 집 한 채가 고즈넉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돌담 앞에 향수를 새긴 시비가 서있고 이엉으로 엮어 만든 초가지붕 아래로 굵은 고드름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집, 이 곳이 정지용 생가다. 74년에 허물어 96년 7월에 복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생가는 이제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다. 지용제가 열리는 날이면 옥천은 전국의 방문객들로 넘쳐난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아직 설왕설래가 많지만 그가 해금된 이후 이렇게 전국적인 문학제의 열기로 승화된 지역은 단연 옥천이 으뜸이다. 옥천을 눈앞에 두고도 오늘 처음 정지용 생가를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소위 문학을 한다고 하면서도 시를 쓴다고 하면서도 정지용 시인을 관심 밖에 둔 것은 그의 문학적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내 무능 탓이다. 생가를 둘러싼 돌담 앞에 서서 “향수”에 젖어본다. 언어의 마법사나 연금술사라고 칭한 사람들의 찬사가 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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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생가, 담장에 둘러싸인 초가집이 향토적인 서정을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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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연일 계속된 한파를 실감할 수 있다
마당 한쪽에 오글쪼글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아그배나무를 가로질러 여러 공간을 둘러본다. 부엌에서 솔가지 뚝뚝 분질러 밥을 짓던 어머니와 대청에서 짚신을 삼고 있던 아버지가 달려 나와 반갑게 손을 잡을 것 같은 집,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옛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생가에 남아있다. 박넝쿨 치렁치렁 뒤덮은 초가집에서 시를 짓다가 돌담 밖 실개천을 한 번씩 바라보았을 시인, 그러나 이제 실개천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가를 잔득 뒤덮은 풀이나 녹은 얼음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소리엔 문명의 손길에 부대낀 슬픈 울음소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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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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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에 멈춰있는 물레방아
열려진 생가의 사립문을 통해 정지용 문학관이 연결돼있다. 한파에 얼어붙어 쉬고 있는 물레방아와 시인의 동상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앉아있는 정지용 문학관, 단층 슬라브의 전시실에는 정지용 시인이 남긴 문학작품과 어린 시절의 삶, 그리고 그의 문학적 채취들이 묻어났다. 전시실 앞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흉상 옆에서 사진 한 방을 찍었다. 밀랍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인의 흉상은 사실감이 묻어나 생전의 정지용 시인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전시실을 빠져나올 무렵, 여자 도우미의 낭랑한 목소리가 내 뒤에 꽂혔다.
“올 꼭 지용제에 오라” 는 그 말과 함께 "향수"가 잔잔한 선율이 되어 실개천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넓은 들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생략)
정지용 생가에서 장령산 얼음 썰매장까지
정지용 생가에서 장령산 썰매장까지 가는 도로는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이다. 지난 며칠 겁나게 쏟아진 폭설 탓이다. 얼마나 심하게 폭설이 쏟아졌던지 도로는 물론 산자락의 숲까지 신비스런 눈꽃을 맘껏 피워 물고 있다. 야생화 못지않게 눈꽃들이 뿌옇게 산을 덮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가 얼마쯤 빙판길을 달려 갔을까. 장령산 주차장 못 미쳐 도로 오른쪽 산자락에 형성된 거대한 빙벽 폭포가 눈에 띄었다. 산의 중간쯤에서 도로변까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던 폭포수가 한파에 꽁꽁 얼어붙은 것 같은 빙벽, 센 물줄기와 나뭇가지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그대로 얼어붙어 마치 산자락에 눈시린 비단 한 폭을 걸쳐 놓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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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인공 빙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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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붉은 열매가 따스함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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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를 타며 노는 사람들, 모두가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이번 겨울처럼 한꺼번에 쏟아진 폭설과 한파가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다. 빙벽 아래 마주보며 전개되는 얼음 썰매장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모두들 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어른들도 어린이들과 뒤섞어 한껏 유년 시절의 즐거움을 뽐내고 있다. 그래도 이처럼 유년시절의 즐거움을 맛보는 게 어디인가. 갈수록 한반도가 온난화로 변해간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리지만 그래도 이런 멋스러운 겨울이 있어 행복하다. 눈에 뒤덮인 대지 위로 하늘이 실오라기 같은 눈발을 날려준다. 또 다시 한파가 시작될 모양이다. 백당 카페에 들러 목 축일 막걸리와 옥천장에서 사온 안주감들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첫댓글![와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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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그날로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이...잘보고 읽었습니다-아마 2부도 있을듯...기대 할께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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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옥천시장과 정지용 생가, 장령산 휴양림에서의 산야모 회원들의 활동모습을 구수하고 재미 있게 보요주시네요. 잘 보고 갑니다.
사실 후기 쓴다는 것이 얼마나 신경쓰이고 힘들다는 것은 저는 알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표현해 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