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왜, 누굴 위해 하는가 (2)
미술 교육과 공동작업 -Tim Rollins + K.O.S.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 태 호 /미술비평
살아남은 아이들 Kids of Survival
롤린스는 해마다 10여명의 학생을 선발한다. 그동안 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웍샵멤버로 들어와 함께 작업을 해왔다.
함께 작업한 학생들이 모두 좋은 결과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웍샵을 함께 하다가 규칙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아이도 있었다. 나간 멤버 중에는 이미 총맞아 죽은 아이도 있다. 금팔찌를 갖고 있다가 살해당하기도 했고, 또 어느 아이는 옆집 아이로 오인돼 잠자다 총 맞아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 중에는 에이즈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가족이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모두가 빈곤과 폭력의 환경 탓이다.
작업중인 K.O.S.의 멤버.
이들 멤버는 웍샵에서 평균 시간당(1990년도 기준) 7~10달러를 받고 일한다. 그러나 일의 수준에 따라 더많은 돈을 받기도 한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이 4~5달러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편이다. 롤린스는 말한다.
“꾸준히 제작에 참여해온 멤버는 꽤 돈을 벌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지급하진 않는다. 나는 그들이 대중문화의 스타나 된 듯 착각하고 (돈 때문에) 생활을 망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K.O.S.고정 멤버 중하나인 아네트 로사도(고2)는 “내가 처음 워크샵에 들어와 일할 때, 내 여자친구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살해당한 것으로, 어쩌면 마약을 하고 있을 것으로, 아니면 우리 가족이 이사한 것 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소위 ‘파티’에 내가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거기 가는 대신에 나는 웍샵에 와서 그림을 그렸고 돈을 벌었다.”고 말한다.
그는 웃으며 말을 잇는다. “이제 여자친구는 내가 뭘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미술은 지겨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운아이다. 여기서 이런 친구들하고 함께 일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지나자 10명 이상의 고정 멤버가 생겼다. 이제 그들 중 몇 명은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또한 미술선생이 되기로 결심한 학생도 나오고 있다. 사우스 브롱스에 사는 이들에겐 대학 입학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롤린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대학에 진학하는 일을 꿈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편 롤린스는 이 재단에서 자신에게 5만달러의 연봉을 지급하고 있다. 초창기의 3만달러에서 크게 오른 셈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공공작업을 몇 개 했고 전시회가 줄이어 계획돼 있으며, 작은 작품은 5백달러 그리고 대형작품은 10만달러 내외로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 토론하고, 그리기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할 책은 주로 롤린스가 선택하지만 토론 도중 학생이 어떤 책을 읽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그에게 주기도 한다. 책의 내용은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도하는 것을 고른다. 그동안 그들이 다룬 책은 학생들 또래의 청소년이 주인공인 것이 많다.
그들이 다룬 책들은 ‘유리창 너머’(루이스 캐럴), ‘용기의 붉은 뱃지’(스테픈 크레인), ‘주홍글씨’(나타니엘 호돈), ‘모비 딕’(허만 멜빌), ‘말콤 X 자서전’, ‘피노키오’(카를로 콜로디), ‘어메리카’(프란츠 카프카), ‘변태’(프란츠 카프카) ‘한 여름밤의 꿈’(세익스피어) 등이다. 꼭 책만이 이들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만화도 있고 음악도 있었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나그네’1)에 이들은 흠뻑 빠지기도 했다. '겨울나그네'는 악보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또한 신문과 TV를 시청하며 시사적인 토론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책들을 팀 롤린스와 K.O.S.는 함께 읽는다. 그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도 있기 때문에 크게 소리내 읽을 때가 많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공의 성격, 처해진 상황, 작품의 주제, 작가의 의도 등. 이들은 토론할 때 대개 녹음을 해둔다. 토론과 함께, 혹은 토론 후에 이들은 책의 주제와 관련해 수백개의 드로잉을 한다. 이들은 드로잉작업을 ‘끼워넣기(jamming)’라 부른다. 이 드로잉들이 이후 여러 변화를 거쳐 캔버스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론과 드로잉작업이 길어져 작품으로 옮겨지는데 1~2년이 걸리는 일이 흔하다.
K.O.S.의 드로잉작업은 폭넓은 지식과 자료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들은 함께 미술사를 공부하고, 현실 문화현상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지식을 쌓는다. 그들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주 방문한다. 이들은 뉴욕시의 행정과 국가, 그리고 세계의 정치를 토론한다. 드로잉은 책의 삽화적인 성격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책의 전체 내용의 시각적 상징물들이다. 그룹 토의를 거쳐 그 드로잉들이 선별되고 수정된다. 이들은 읽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내 캔버스에 붙여 큰 화면을 만든다. 그 위에 오버헤드 프로젝트(O.H.P.)나 슬라이드 프로젝트를 이용해 드로잉을 투사하며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아메리카'를 텍스트로 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아메리카’는 우리에게 완벽한 텍스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16살 소년 칼(Karl)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 그런 것처럼 칼도 유명과 행운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소년이다. 그런데 칼이 만난 것(카프카 특유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은 그런 것들을 이미 주류사회의 아이들이 다 나누어 가졌다는 ‘인식’이다. 이 ‘인식’은 푸에르토리칸 같은 소수민족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특별히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AMERIKA시리즈 4.
이와같은 소수민족의 소외의식이 책을 선택하게 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팀 롤린스와 K.O.S.는 작품의 구체적 모티브를 발견하고 있다.
“그 해 마지막 즈음해서 칼은 고향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난 실패한 거야. 난 아메리카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어.’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할 때, 그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마치 구세군밴드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오클라호마 극단에 들어오라. 오클라호마극단에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누구나 환영한다.’ 이것을 보며 칼은 생각한다.
‘나는 속았어. 난 사기 당해왔던 거야. 저것은 나에게 사기치는 또 하나의 속임수가 분명해. 하지만 한 번 더 해보자. 저들의 간판 ‘우리는 누구나 환영한다’가 또다시 사기꾼들의 꾐이라 해도, 난 다시 시도해볼 꺼야. 아메리카에서 이전에 내가 저 간판을 본 적은 없으니까.’ 라면서 그는 그들에 가입하기로 한다.
가입하기 위해서는 경마장에 가 등록을 해야 한다. 경마장으로 갈 때 그는 길에 밀려있는 자동차들을 만나게 되며 거기서 그 자동차의 엄청난 경적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는 그에게 재즈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한다. 그는 그때 경마장에 들어서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멋진 옷을 입고 금색 나팔을 불고 있는 것을 본다. 칼은 어떤 노인에게 묻는다.
‘이게 뭐하는 일이요?’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한다.
‘여기는 아메리카야. 누구나 목소리를 갖고 있고,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라고.
바로 이것이다. 나는 K.O.S.에게 말한다.
‘봐라. 너희들은 모두 너만의 취향과 남과 다른 너만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만약 너희들이 금관 악기라면, 그리고 만약 너희들이 아메리카와 이 나라에 대해 느끼는 모든 것, 너희들의 미래, 자존심, 자유의 노래를 연주할 수 있다면, 그 나팔은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팀 롤린스+ K.O.S.가 함께 제작한 벽화
이런 질문과 함께 작품 ‘Amerika'가 시작됐다. 그리하여 카프카가 태워 없애라고 한 유언을 배반하고 세상에 알려진 소설, 미국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면서 카프카가 쓴 소설 ‘Amerika’가 ‘America’에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롤린스는 “우리는 책으로 미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미술로 바꾼다.(We make art with books, and we turn books into art.)”라고 말한다.
K.O.S.의 멤버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 미술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가 하는 우리의 시각을 나타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리차드 크루즈)
“우리의 그림은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인다. 마치 펼쳐진 책처럼.”(아네트 로사도)
롤린스는 한 대담에서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나 저작을 소개하고 있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갈릴레오’의 부록- ‘진실쓰기: 다섯개의 어려움’은 끊임없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고 한다.), 브라질의 교육가 파올로 프레이리(논문 ‘자유를 위한 문화적 실천’), 그밖에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들뢰즈와 가타리 등이고, 조셉 보이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을 보면 팀 롤린스의 사상과 철학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롤린스는 미래에 ‘사우스 브롱스 미술학교’를 만들어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14세부터 18살의 학생이 미술을 공부하는 사립학교, 수업료가 없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다.
미국미술과 한국미술의 차이?
공교롭게도 나는 우리 화단에서 팀 롤린스+ K.O.S.와 같은 방식으로 책의 페이지를 뜯어 붙인 후 거기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됐다. 나는 누가 먼저 책의 페이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는지, “누가 오리지날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두 작품들에 있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다. 그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이렇다.
(1)팀 롤린스+K.O.S.와 한국의 작가는(영어 이외의 글이 인쇄된 책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흔히) 공히 영어로 된 텍스트를 쓰고 있다. 그런데 팀 롤린스+K.O.S.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영어책을 실제로 학생들과 함께 읽고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 화가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국사람이다. 한국화가는 왜, 무엇 때문에 영어책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책을 사용하는걸까?
(2)팀 롤린스+K.O.S.의 그림은 의미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 언제나 텍스트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작품 ‘주홍글씨’에는 소설에 나오는 ‘A'자(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머릿글자)를 여러 형태로 변형하고 있고, 작품 'AMERIKA'에선 소설 끝 부분에 나오는 주인공의 현실과 환상 체험을 ‘금빛 나팔’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그려진 이미지들은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화가의 작품에선 그림 아래 페이지의 내용과 그림이 전혀 관계가 없거나 애매하다. 한국작가는 그 페이지를 읽었는지, 그 내용을 숙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국작가는 책을 그 내용과 관계없이 하나의 그럴듯한 배경으로, 혹은 단순히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3)팀 롤린스+K.O.S.의 작품은 그 책을 읽고 토론을 가진 여러명의 공동작업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한국 작가의 작품은 온전히 개인작업이다. 나는 이런 비교에서 나타난 상이점에 큰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다른 점’이 한국미술의 ‘형식주의’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의 결과만으로도 우리는 무늬만 있고 내용이 없는, 그래서 ‘눈요기꺼리’와 ‘새로운 형식’만이 활개치는 오늘 한국미술의 한 단면을 만날 수 있다. -------------끝--------- <참고> -2000년 현재 K.O.S. 멤버 Angel Abreu, born Philadelphia, 1974, currently attending University of Washington, Seattle.Nelson Savinon, born New York City, 1971. Jorge Abreu, born New York City, 1979, currently attending Bard College, New York. Robert Branch, born New York City, 1977, currently attending Cooper Union, New York City. Emanuel Carvajal, born New York City, 1981, currently attending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urchase, New York. Daniel Castillo, born New York City, 1982, currently attending Landmark High School, New York City. Roberto Roman, born New York City, 1983, currently attending Monroe Academy of Art, New York City. Cedric Constant, born Antigua, 1983, currently attending the High School of Art and Design, New York City Alan Johnson, born Barbados, 1983, currently attending the High School of Art and Design, New York City Luis Santiago Pagan, Jr., born New York City, 1983 Quincy Bass, born Atlanta, Georgia, 1978, currently attending Cooper Union, New York City. Michael Adetutu, born Germany, 1984, currently attending IS 52, New York 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