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살미, 생깃꼴, 구름터, 돌모산, 역꾸지 [아름다운 우리말 마을이름들-2] 부안읍 |
부안 행정의 중심지인 부안읍의 경우 멀리 백제(百濟)때는 개불이현(皆火縣)이었고, 통일신라 이후 부령(扶寧·부리영) 또는 계발(戒發. 게바리)이라 하여 고려 때까지 이어 왔었는데 그 행정적 치소(治所)가 1416년(조선 태종 16)에 지금의 행안면 역리(驛里), 송정리(松亭里)에서 현재의 부안읍내 성황산 밑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조 초에 이르러 보안현(保安縣)과 부령이 합병되면서 부안(扶安)이라는 새로운 고을이름이 생겨났으며, 500여년이 지난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하여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안현의 동도방(東道坊)과 하동방(下東坊)을 병합하여 부령면(扶寧面)을 만들어 부령이라는 옛 이름이 부활되었으나 1943년 부령면이 읍(邑)으로 승격되면서 부안읍이라는 새로운 행정 지명이 탄생하게 되어서 부령(扶寧)이라는 이름은 또 다시 30여년의 단명을 누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져버렸다. 부안읍(扶安邑)은 조선조 초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585여 년 동안 부안을 다스려 온 행정의 치소였다. 따라서 고을의 진산(鎭山)인 성황산의 일부를 포함시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치소성을 쌓고 성안의 요지에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扶風館)를 비롯한 관아와 공해(公廨)를 배치하여 부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의 중심이 되어 왔었다. 그래서 한자 사용중심의 행정적 치소문화가 강하였으므로 순수 우리말 마을 이름은 비교적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부안읍의 우리말 마을 이름들은 어디에 얼마나 살아남아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웃장터 : 객사가 있었던 지금의 군청 앞과 동편의 도로변 일대가 웃장터였다. ●아랫장터 : 부안신용협동조합의 앞 도로변과 화성탕의 주변 부안초등학교 뒤 도로변 일대가 아랫장터였다. ●구장터 : 동아약국앞에서 매산메에 이르는 일대. 1951년 이후 시장이 지금의 상설시장으로 옮겨가기 전의 옛 장터 ●도깨비장터 : 지금의 부안신용협동조합 자리. 새벽부터 해뜨기 전까지 반짝 시장이 형성되었다가 해가 뜨면서 파장되었던 시장 ●웃거테 : 동중리 마을의 북쪽. 마을의 위쪽. ●남바끄 : 동중리의 서남쪽 마을. 옛 부안읍성의 남문밖에 있는 마을. 지금의 부안읍사무소를 중심으로 그 서남쪽 마을의 이름. ●서답바위 : 동중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뒤 성황산 밑에 넓은 바위가 있고 실개천의 물이 흘러 빨래(서답)터로 알려진 마을. 그 위 산자락에 빨래를 너는 바위가 있었음. ●돌팍거리 : 옛 관아 동헌이 있었던 지금의 감리교회 옆 동편 마을. 지금도 이 일대는 그 지반이 돌로 되어 있다. ●한뼘거리 : 동헌밑 장방청에서 동중리 남밖으로 가는 길의 양쪽으로 큰 바위가 있어 길이 매우 좁아서 한뼘거리라 했다고 한다. 그 옆에 감옥이 있어서 갇힌 죄수를 뇌물을 주고 빼내어 이 한뼘길로 도망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매산미 : 매살미 또는 매산메(梅山)라고도 하며 부풍율회 앞이다. 왜정(倭政)때까지 공동묘지였으며 매화낙지혈(梅花落地穴)의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숲정이 : 대림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그 일대다. 읍성의 남문밖으로 옛날 애장터였다. 일정때 왜놈들 소학교가 이곳에 있었으며, 부안여자중·고등학교가 처음 이곳에 있었다. ●구역말 : 구역(舊驛)마을이다. 군영마을이라고도 한다. 읍성 동문안의 마을인데 혹 아홉 명의 영리(營吏 : 監營의 아전)가 난 마을이란 뜻이라는 설도 있다. 구영말(九英里)로 쓰기도 한다. 고려 말까지 부령현의 우역원(郵驛院)이 이곳에 있다가 부안현의 치소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종전의 우역원은 행안의 옛 치소자리로 옮겨져 갔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옛 역이 있던 마을. 즉 구역마을이라 불린 것으로 보아진다. ●생깃꼴 : 생기꼴 또는 향교꼴, 즉 서외리를 말한다. 향교(鄕校)가 있는 고을이란 뜻이다. ●섬밖그 : 읍성 서문밖 즉 성밖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서외리를 말한다. ●서낭댕이 : 향교골 서편 세미산(三山) 마을로 넘어가는 잔등마을. 길가의 우측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아라지 : 아제리(阿堤里), 부안중학교 앞 아라지방죽 남쪽 마을. 아라지방죽은 메워졌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군민의 예술회관이 들어서고 있다. ●짐대거리 : 서외리 석간당간(石竿幢竿)이 서있는 거리. 당간을 짐대로 호칭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적인 시설물인 당간이 민간신앙의 신체로 바뀌어진 보기이다. ●당산거리 : 중요민속자료 제18호인 서문안 당산이 있는 거리를 말한다. 서외리 1구에 있다. ●동문거리 : 중요민속자료 제19호인 동문안 당산이 있는 부안읍성의 동문 주변의 거리 ●서문거리 : 읍성의 서문과 서문안 당산이 있는 거리를 말한다. ●남문거리 : 부안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부안동초등학교 옆 남쪽 일대를 남문거리라 하였다. 이곳에도 지방민속자료 제18호인 남문안 솟대당산이 있다. ●서문안 : 부안읍성의 서문 안쪽 마을. 성문을 경계로 안쪽 마을을 서문안, 밖쪽의 마을은 성밖의 마을를 성밖으, 섬밖그라 불렀다. ●삼문거리 : 부안군청 뒤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가 동헌(東軒)이었으며, 그 앞에 진석루(鎭石樓)라는 2층 외삼문 누각이 있었다. 이 외삼문 거리에는 너럭바위 암반과 옹달샘 옥천(玉泉)이 있고 현감 박기수(朴耆壽)가 쓴 「봉래동천(蓬萊洞天)」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삼문거리를 주림(珠林)이라 하였다. 서민들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삼문거리 치고는 매우 운치가 있고 아름다웠던 거리였는데 요즈음 군에서 그 개발에 힘을 기우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독우물 : 옹정(瓮井)의 원래 우리말 이름이 독우물이다. 독항라리(瓮)를 묻어 만든 우물(井)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옹정은 「옹정팔리(瓮井八里)」라 하여 부안에서는 읍내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부안김씨(扶安金氏)들의 집성마을의 반촌(班村)이었다. 고려말(高麗末)에 고부군사(古阜郡事)를 지낸 김광서(金光敍)가 나라가 망함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지금의 낡은터라는 마을에 터를 잡고 독항아리 우물을 파고 숨어 살았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30년대 말경까지도 독우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독우물이 옹정의 원래 이름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독우물, 얼마나 향토적이고 옛 문화가 숨쉬고 있는 순수 우리말 마을 이름인가. ● 낡은터 : 옹정 여덟 마을 중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낡은터가 모체가 되어 웃말, 구석뜸, 중거리, 월리, 새터, 똘두럭, 이민촌 등의 마을들이 생겨난 것이며, 독우물(瓮井)이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한문으로는 구리(舊里)라 쓴다. ● 구석뜸 : 낡은터 앞 서편의 마을이다. 중심에 있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 담겨져 있는 이름이다. ● 웃말 : 낡은터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인데 낡은터 서편 옹정서원(瓮井書院)이 있었던 마을은 상리(上里·웃말)라 하고 북쪽 마을은 웃말이라고 부른다. 북쪽의 마을이다. ● 중거리 : 낡은터의 동남쪽 마을로 중리(中里)라고도 한다. ● 샛터 : 중거리 동북쪽 마을이다. 새로 생긴 마을(新里)이란 뜻이다. ● 두가호뜸 : 중거리와 샛터의 중간에 있었던 두 가호(家戶)의 집이 있던 곳이다. ● 똘두럭 : 샛터의 동쪽 들녘 똘(水路)의 제방에 일자형(一字)으로 형성된 마을 이름이다. 일제(日帝)가 1920년대 초에 이 일대를 개간한 곳에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 돗골 : 낡은터 앞 석동산(席洞山)의 남쪽 골짜기 부안김씨 제작이 있는 곳을 돗골((猪洞)이라 한다. 석동(席洞)이란 땅이름이 돗골에서 나온 것이다. 석동산의 원래 이름은 돗산(猪山)이었으며, 돗(猪)은 돼지인데 돼지의 돗이 돗자리(席)의 석동으로 바뀐 것이다. 돼지의 돗(猪)→돗자리의 석(席) ● 소주멀 : 옹정의 북쪽 산두재(傘頭峴)의 동남의 밑에 있는 마을이다. 소줏대가 세워진 마을, 또는 효자가 난 마을이란 설이 있다. 멀은 마을의 변형어다. ● 각생꼴 : 소주멀 뒤 산두재의 서북기슭에 있는 마을. 꼴은 골, 고을, 골짜기의 경음화 현상 ● 행낭골 : 행중리, 모산리(茅山里)앞에 있는 마을 ● 한가매 : 선은동 앞 서편 마을. 성황산의 북쪽 황갯재(黃蓋峴)의 우리말 이름에서 생겨난 명칭이다. ● 덕더리 : 덕촌리(德村), 덕다리라고도 한다. 돌다리(石橋)가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 장승배기 : 망기산(望旗山) 동편 혜성병원 앞 고개. 고개의 주막거리에 이정표지(里程標識)의 장승 한쌍이 서 있었다. ● 구름터 : 운기리(雲基里), 구운기와 신운기를 통틀어 구름터라 부른다. 운중반월형(雲中半月)의 명당혈이 있다고 한다. ● 솔대거리 : 신운리 마을안에 있는 길거리 명칭. 조선조 말에 이동일(李東一)이 진사에 입격하여 이곳에 솟대(소주)를 세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역꾸지 : 요곶이(蓼串), 내요리(內蓼里), 외하리(外下里)의 통칭. 곶이(串)란 산등성이의 줄기가 강이나 바다 쪽으로 쑥 불거져 나간 반도형의 지형을 말한다. 역꾸지, 역구지가 아니라 요곶이가 정확한 이름이다. 요파리(蓼坡里)라고도 하였는데 일제때 내요리로 바꾸었다. ● 돌모산 : 내요리의 남쪽 마을. 석제리(石堤里), 서편에 있는 방죽의 제방을 돌로 쌓은 안쪽의 마을, 즉 「돌못안(石堤內)」이 연음화되어 돌모산이라 부르는 것이다. ● 구석뜸 : 돌모산의 새터 동남 구석에 있는 마을 ● 박짐터 : 돌모산 동쪽에 있는 마을. 박씨와 김씨가 처음 살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 새 터 : 돌모산에서 파생된 새로 생긴 마을. 신리, 신기리, 새말, 신흥리 등이 모두 이 계열의 마을 이름이다. ● 웃뜸과 아랫뜸 : 돌모산 마을을 이등분하여 위쪽과 아래쪽으로 부르는 이름 ● 요꼴 : 돌모산 방죽밑에 있는 마을. 요곶이의 고을이란 뜻의 요곶의 원 이름이 남아 있는 마을이름이다. ● 여술 : 신흥리(新興里)의 예동(禮洞)이다. 원래 이름은 여우실(狐谷·狐洞)이며 고부군 덕림면의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이후 부안으로 이속되었다. 안여술과 밧여술이 있는데 여우골이란 뜻의 이름이 마음에 안들어 예의 바른 마을이란 뜻의 예동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도 여술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다. ● 네거리 : 내요리 입구, 조선조말까지 우시장(牛市場)이 이곳에 섰으며 교통의 요지로 주막거리였다. ● 상각실 : 밧여술 동쪽에 있는 마을. 됫박산(升岩山)밑 골, 실이란 곡(谷)의 뜻이다. ● 가마못 : 네거리 앞 가마못(부지(釜池) 방죽이 있는 마을. ● 검덩골 : 외하리 서쪽에 있는 마을. ● 큰 뜸 : 밧여꾸지(외하리)의 큰 마을. ● 모산 : 모산은 한자의 지명이 아니며 못(방죽) 안쪽 마을이란 뜻이다. 못안이 연음화되어 모산이 되었으며, 모산(茅山)이라 쓰고 있다. 방죽안이라는 마을 이름과 같다. 큰모산과 작은모산이 있다. 마을의 옆과 뒤에 소제(蘇提)와 다정제(多情提) 두 방죽이 있었다. ● 북꾸지 : 모산 3구로 분토동(粉土洞)옆의 마을이다. 북꾸지는 불곶이(火串)다. 곶이지형으로 생성된 마을 이름이다. ● 수반 : 모산 동쪽 마을, 숲안 즉 나무숲 안의 마을이다. 수내(藪內)로 쓴다. 이 마을의 뒤 서북으로 방풍림격의 나무숲이 무성하였었다. ● 칡뜸 : 안쟁가리 앞 칡산(葛山) 아래에 있었던 마을 ● 쟁가리 : 마을앞에 칡산이 있어 칡갈(葛)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 부치뎅이 : 안쟁가리 앞 평강채씨 재실이 있는 마을의 서북쪽 끝을 부치댕이라 하였다. ● 구석뜸 : 수봉리의 북쪽 끝에 있는 마을. ● 봉두매 : 봉두산(鳳頭山)밑 마을. 봉두메. 봉두산은 깎이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 매창뜸 : 교육청 앞 마을. 공동묘지에 조선조 때 명기(名妓) 이매창(李梅窓)이 묻혀 있어 생긴 이름이다. 뜸이란 마을안의 일정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공동묘지였는데 지금은 잘 정비되어 공원을 조성하고 매창공원이라 한다.. ● 새머리 : 봉두매 남쪽 마을 봉황새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 새말 : 밧쟁가리 동남쪽 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 신촌(新村), 새터와 같다. ● 신술터 : 봉두매 남쪽에 있는 마을 ● 작은뜸 : 수복리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김형주 김형주선생님은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속신어와 실아 온 민초들의 이야기'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
첫댓글 좋은자료이네요,
읽어들 보시고
내가 살았던 마을 이름을
정확히들 알아 놓으세요
담주 시험들어 갑니다.
갑자기 머언~먼 산이 눈앞으로 쑤욱~ 다가온 느낌이네요.
정감있고, 구수하고 ,깊은 고향냄새가 가슴 깊이 스며듭니다.저도 김형주 선생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고향는 언제나 푸근한 엄마품 같아요~
부안을 상징하는 이름들이 이렇게 예쁠수가..
정말 좋은 자료네요..울 아이들에게 보여줄랍니다..
김형주 선생님,,,살아계신거죠??
어려운 여고시절을 보내는 내등을 가끔씩 토닥여 주셨는데... 뵙고 싶네요..
내 고향
정말 많은 일을 하신 분이군요. 한번 만나뵈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