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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회복지인의 자세
여러분과 말장난을 하고 싶다. 가톨릭이란 말과 사회라는 말과 복지라는 말에서 품행이 방정한 복지인의 기본자세를 끄집어내고 싶다. 그리고 평신도교령 제8항의 실천적인 행동원칙에 따라 여러분이 하는 사회복지활동이 바르고 점잖아 보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가톨릭이란 말에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의미가 있다. 고로 우리 가톨릭교회는 온 인류가 그 모든 우주만물과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려고 효율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831항 참조) 사회라는 말에는 빵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이 빵은 육신에 필요한 온갖 것들과 영혼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상징한다. 영혼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성체를 받아 모셔야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의 온갖 축복과 은총을 상속으로 이미 받았다고 믿는다. 고로 이런 믿음으로 성체를 올바로 모시는 사람은 자기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가난한 이웃 형제들과 기꺼이 나눌 수 있다. 복지라는 말에는 ‘잘 살다. 잘 가라’는 의미가 있다. 올바르게 잘 살아야 천국에 잘 갈 수 있다. 장래 고별식을 영어로 farewel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사회복지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떠올려야하고,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가난한사람, 특히 가난한 북쪽형제들을 생각하고,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재물을 내 자신이 가로 챈 것은 아닌가를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평신도교령 제8항에서 말하는 행동원칙은 사회복지의 실제 내용과 그 모습에서 비난도 비판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과 닮은 점을 보고,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봐야한다. 다음 구체적인 4가지 원칙들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의무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긴급명령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못 배운 이들의 존엄과 자유를 세심하게 존중한다. 순수한 초심이 자기 편익추구나 지배욕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당연히 정의에 따라 주었어야할 것을 사랑의 선물처럼 베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행의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들까지 없애야한다. 불행의 원인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정권을 연대적인 책임의식을 갖고 세워야하며, 그 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도록 적극적으로 선거에 투신해야한다.
끝으로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도처에는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나라도 많다. 당장 우리 핏줄인 북한 동포의 비참한 삶을 보라.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하든 공적인 기관을 통하여 하든, 올 한 해에 50만 명이 굶어 죽어가는 우리 동포들을 살려내야 한다.
본 강의를 통하여 정치적인 사안에서도 상기 원칙에 비추어 영적이고 윤리적인 올바른 판단과 분별력이 생기기를 바란다. 이냐시오는 ‘사랑의 분별력’만을 요구했다. 십자가 성 요한은 ‘사랑으로 심판 받는다.’고 했다. 가톨릭미사는 사랑의 성사이다.
저는 약 2시간 동안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자세’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이 자세도 가톨릭인의 자세입니다. 가톨릭인중에서도 사회복지기관에 종사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자세’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몸을 가지는 모양(appearance)이나 태도(attitude)’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모양은 ‘사람의 겉에 나타난 꼴’이고, 태도는 ‘일정한 안정도를 가지고 어느 정도 지속하여 그것에 의하여 미래의 경험이 정해지는 어떤 심적 경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세는 인간의 지녀할 겉보기요 속보기이며, 밖에 나타난 꼴이요 안에 새겨진 꼴입니다. 사회복지인의 측면에서 설명하면 이 복지사업과 활동 그 자체요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교령은 이 사업과 활동의 ‘그 자체(fact)도 그 겉모습(appearance)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도 비판도 받지 않도록’(8항)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본 강의에서 먼저 지난 1801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한반도역사의 흐름을 사회복지의 영·육적인 질서의 측면에서 간단히 분석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사회복지대상인 인류에 대한 교회의 3가지 호칭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사회복지라는 말 자체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 진리인 성체성사적인 삶을 끄집어내보겠습니다. 끝으로 가톨릭사회복지인으로서 올바른 삶의 자세에 관한 대원칙을 제시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 사회복지에 반하는 냉전분단세력
‘이제 문제는 냉전분단세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력이 지배하게 되면 사회복지예산이 줄어들 뿐 아니라 한반도의 운명이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국가는 물론 민족의 장래도 안중에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가문과 자기 집단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들 세력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발 독재세력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가족과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위한 개발 독식세력입니다. 그 이유를 1801년 전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집어봅니다. 왕조국가는 현대 정치체제의 분류로 볼 때 민주국가보다는 독재국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왕조국가라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세력이 지배한다면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조선의 세종시대가 바로 그 시절입니다. 정조는 그런 시대를 만들고자 모든 정치·경제·사회분야를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졸지에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계기로 개혁세력은 모두 추방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정두언과 언론사가인 강준만 교수는 ‘이 신유박해를 계기로 조선은 망하기 시작했다.’(한국근대사산책1권45쪽) 보고 있습니다. 그 이후 권력을 잡은 벽파와 연대한 노론과 그 후손들의 세력은 자기 문중과 자기 파 사람들의 이익만을 챙기기에만 몰두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팔아 넘겼습니다. 이 친일파 매국노들은 식민기간 동안 계속 영화를 누렸으며, 해방 후에도 일제청산을 하지 못한 이유로 지금까지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복지문제를 비롯한 통일·외교와 정치·경제문제, 그리고 모든 사회문제가 안 풀리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후손들이 지배세력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질서의 세계에서 볼 때도 이들 세력의 사람들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의 후손들입니다.
2. 인류에 대한 교회의 3가지 호칭
우리 가톨릭교회가르침은 인류를 한 나라(a nation)의 한 민족(a race), 한 백성(a people)으로 봅니다. 우리나라에도 백성이 있고 이 백성을 다스리시는 한 통치자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통치자가 둘이 있습니다. 민족이 분단되어 남쪽에도 있고 북쪽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류를 오직 한분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한 백성으로 본다면, 민족분단의 비극을 넘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인류를 한 가정(a house)의 한 가족(a human family)으로 보고 있습니다. 너무 개인 가족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한 백성의 개념으로는 인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assuming human nature)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온 인류를 초자연적인 연대로 당신 가족이 되도록 모우시고, 사랑을 그 표지로 삼으셨습니다.(평신도교령8항) 우리가 한 가족의 개념으로 산다면 남쪽의 동·서 분열을 치유할 수 있고 북쪽 사람들도 한겨레의 동포, 한 형제자매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의 해를 지내면서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 인류를 자기 몸의 지체(parts of one body)들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는 에페소서 1장 9-10절과 22-23절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완성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인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들로 여긴다면, 그 아픈 내 지체를 보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사회복지 사도직과 성체성사적인 삶
사회는 영어로 society입니다. 이 society라는 말은 라틴어 socius에서 나왔습니다. 그 뜻은 companion입니다. 이 companion은 com=with+panis=bread의 합성어입니다. ‘함께 빵을’ ‘빵을 나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먹고 살자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신자들은 panis(빵)하면 인간의 양식뿐 아니라 천사의 양식도 생각했으며 이 두 양식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양식인 성체를 모시는 신자들은 실제로 인간의 양식도 나누는 친교의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teaching of apostles)과 친교(communal)생활과 영성체(communion)와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우리도 이 천사의 양식이 우리 양식이 되었다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천사의 양식(panis angelicus)은 우리 양식 되고 천상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네. 오묘한 신비여, 가난한 주의 종, 주님 모신 이 큰 감격. 삼위의 천주여, 주께 구하오니 우리의 믿음을 어여삐 보시어 하느님 계시는 광명의 나라로 당신 백성 이끄소서. 아멘.’(성가188장)
복지는 영어로 welfare입니다. 중세영어 wel=well+고대영어 faran=go의 합성어입니다. 장례미사 때 고별식을 하는데, 이 고별식이 영어로는 farewell입니다. 이 고별식 farewell은 복지 welfare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바꾸어 놓은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지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기본적인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특히 우리사도직의 대상인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시는 광명의 나라로 잘 가게 해줄 의무가 우리 사회복지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회복지의 신학은 빵의 신학, 즉 성체신학입니다. 빵은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빵은 먹거리 뿐만 아니라 인간에 꼭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육과 영의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되어야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필요한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어야합니다. 평신도교령 제4항에 의하면 모든 사도직의 성공은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일치(living union)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복지 사도직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모든 사도직의 원천이며 기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15,5)
이렇게 매우 친밀한 일치(intimate union)의 삶은 적극적인 거룩한 미사참여에서 영적인 도움을 받고 육적인 힘이 솟아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사에 적극적인 참여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충만한 참여이고 또 하나는 열매 맺는 참여입니다.(사랑의 성사52-55항) 전자는 미사에서 하늘의 온갖 축복과 땅의 모든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굳게 믿고 천사의 양식인 성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드리는 빵과 포도주의 예물 안에는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역사의 모든 질서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모든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사랑의 성사47항)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온 우주를 상징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로 산다.’회칙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됩니다. 우리는 이 실체변화의 기적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더 나아가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모든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다는 신앙을 고백할 수가 있고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동적으로 적극적인 미사참여의 또 다른 의미인 열매 맺는 참여도 가능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적인 삶이 바로 열매 맺는 미사참여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삶은 가장 억울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우선시 하는 생각과 마음, 말과 행동의 총체적인 안목의 삶입니다. 삶 자체가 혼자 살 수가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일상생활은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또 인생은 선택의 연속과정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선택할 때, 과연 이 선택이야말로 대다수 일반 서민들에게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성생활이 가정이나 사회의 모든 일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상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평신도교령4항) 특히 우리나라에서 언론선택과 정당지지는 매우 중요한 영성생활입니다. 잘못된 선택과 지지는 우리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한다.’(골로3,17)
이렇게 영성생활을 하는 자들은 올바른 자세로 사회복지 사도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도직자세에 관한 대원칙을 설명하기 전에 사회복지를 표현하는 교회의 용어 두 가지를 알아봅니다. 하나는 caritas이고 또 하나는 cor unum이다. 까리따스는 영어로 charity이고 우리말로 애덕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식적으로 사랑의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꼬르 우눔은 라틴어로 한 마음, 한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이가 한 몸이고 자기 자신처럼 여겨야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지체들을 살리는 일이 가톨릭사회복지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민족 중에 가장 아픈 지체들은 북쪽에 사는 동포들입니다. 남쪽에 사는 가장 아픈 지체들도 북쪽 지체들보다는 덜 아픕니다. 우리는 이 지체들을 어떻게 고쳐줄 것인가를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남쪽이 북쪽 동포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알면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모스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대로 그 대가를 우리 남쪽은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4. 우리 사회복지인의 기본자세에 관한 원칙
우리가 가톨릭사회복지인의 기본자세에 관한 원칙은 평신도교령 제8항에 열거되어있습니다. 그 기본원칙은 내용과 방법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뿐만 아니라 비판도 받을 소지가 전혀 없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과 닮은 점을 보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 모습을 (좀)닮은 인간을 만든다.’(창세1,26)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고, 이 가난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잘 해주는 것이 곧 나에게 잘 해주는 것이다.’(마태25,40)라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음 세부원칙들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의무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황제인 주님의 '피할 수 없는 긴급명령'(imperative)입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배우지 못한 이들의 위엄과 자유를 세심할 정도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회복지활동의 순수한 초심이 자기 편익 추구나 지배욕구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정의에 따라 이미 돌려주었어야 할 것을 사랑의 선물처럼 베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원인(causes)까지 없애서 그들이 점차로 외부인들에게 의존하는 삶에서 해방되어 자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일종의 악이라면 악의 원인에는 가까운 원인이 있고, 먼 원인이 있습니다. 전자는 미시적인 원인으로서 개인이 저지른 잘못이고, 후자는 거시적인 원인으로서 공동체가 저지른 잘못입니다. 사회공동체에서 고착화된 병폐를 사회 구조 악이라 합니다. 사회구조악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 회개하여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정부를 통하여 서서히 없어지게 됩니다. 이런 정부를 세우지 못한다면 그런 복지정책을 우선시하는 정당이 국회에서 최소한 2분의 1 이상을 차지해야합니다. 웬만한 법은 과반수로 통과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회복지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 도처에는 우리기관보다도 더 어렵게 운영되는 기관도 많고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 사는 나라도 많습니다. 당장 우리 핏줄인 북한 동포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적으로 하든 공적인 기관을 통하여 하든, 곤경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민족을 도와주어야하고, 이러한 활동을 하는 선의를 지닌 사람과 기관에 기꺼이 후원을 하고, 그들과 연대활동이 필요하면 협력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한반도라는 역사의 큰 줄기에서 바라본 사회복지의 개념을 그 말 자체의 어원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빵을 나누는 것이 사회요, 천국에 잘 가게 하는 것이 복지였습니다. 빵은 영·육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영적으로 필요한 빵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복지인은 육에 필요한 모든 것도 나눌 수 있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것이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이런 은총을 굳게 믿고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가톨릭 사회복지인으로서 기본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시각은 미시적인 안목보다는 거시적인 안목입니다. 거시적인 안목은 불행한 사회복지구조를 행복한 사회복지구조로 변화시키게 합니다. 이 같은 변화는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정당과 언론을 지지하고 선택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연대활동에서 일어납니다. 본 강의를 통하여 ‘정치적인 사안에서도 교회가르침에 비추어 영성적이고 윤리적인 분별력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평신도교령7항)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요구되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냐시오는 마지막 피정에서 ‘사랑의 분별력’만 요구했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은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능력을 우리는 적극적인 미사참여에서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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