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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칼빈의 주석 연구
- 창4:1-7을 중심으로
윤용진 교수(구약학)
I. 칼빈의 주석 원리
J. 칼빈의 주석은 두 말할 것 없이 역사적 중요성과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
림없다. 그 이유를 새삼 언급한다면 그의 주석 작업은 성경에서 벗어난 중세교회의 부패성
과 모든 비성경적 행태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여 성경적인 바른 신학과 사도적 개혁신앙
의 역사적인 금자탑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결과에
서 이유를 찾기 이전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주석가로서의 그의 태도이다. 방대한 주
석 시리즈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 영문번역 서문에 붙인 필라델피아 개혁주의 신학교 교수인
R. K. 루돌프의 찬사가 이 사실을 잘 대변해 준다.
“사상가이며 주석가로서 칼빈이 지니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든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
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자기 자신의 것인 양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의 정신을 그 진리의 특
별한 의미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내어맡기는 방법에 있다고 하겠다.”1)
이러한 칼빈의 태도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바른 자세, 즉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수용하고2) 성령의 내적 증거를 그것의 기원과 권위에 대한 최고 유일의 인식
수단으로써 믿는 것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3) 물론 이것도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
이라는 절대적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4)
루돌프는 계속하여 칼빈의 주석 원리가 인격적인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승인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단순하고 명쾌하게 하
나님을 나타낸다. J. 칼빈은 성경을 믿음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위대한 성경을 올바르
게 인식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인하여 그에게 그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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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칼빈, 창세기 주석 1, 존・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2), 19.
2) J. 칼빈, 기독교강요 1.7.1 cited by Donald K. McKIM, 칼빈의 성경관,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역편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76.
3) Ibid., 1.7.4; cf. 3.1.1; 3.1.3f; 3.2.15, 33-36.
4) D.K. McKIM, Ibid., 81-87.
5) J. 칼빈, 창세기 주석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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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칼빈의 주석 원리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
실을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말씀을 통하여 깨
닫는다”6)
이렇게 볼 때 칼빈이 인정하는 성경의 권위는 믿음을 통하여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증거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세워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7)
더 구체적으로 칼빈의 주석적 원리를 이해하자면 McKIM이 지적하는 다음 두 가지 내용
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간결성”(brevitas)의 원리이다. 칼빈이 행하는 주석의 목적은 성경의 각 부분
에 대한 관련성이나 적합성을 찾아내어 가능한 짧고 분명한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었다.8) 이 점에서 칼빈은 Martin Bucer의 주석을 좋아하였다.
두 번째는 “용이성”(facilitas)의 원리이다. 칼빈은 “쉽게 이해가 되는 것”과 “단순한 것”
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주석가들의 견해를 과도하게 참고하지 않고 가능한 빨
리 본문의 자명하고 분명한 의미에 도달하는 것을 원했다.9)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칼빈의 주석 배경을 살펴보면 철학적 문제와 본문상의 문제 그리
고 해석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면에서는 어거스틴, 성경해석적인 면
에서는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초대 교회 신학자들을 의거했고, 길라움 부데
(Gillaume Bude)와 에라스무스(Erasmus) 같은 신학자들을 의지했다.10)
그러나 칼빈은 저자의 의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밝히 알리는 것
을 주석가의 의무로 보았으며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고 독자들을 혼란하게 만들 수
있는 어거스틴의 은유적 주석(allegorical exegesis)을 거부하였다. 칼빈이 그의 주석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 것은 성경의 단순하고(plain), 자연스럽고(natural), 진정한(genuine) 의미, 혹
은 문자적인(literal) 의미였던 것이다.11)
주석가 칼빈이 성경 해석을 시행한 주요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빈
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지 아니하는 불필요한 명제들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추측하지도, 혹
은 알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일축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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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J. 칼빈, 기독교강요, 3.2.6; cf. 1.2.2; 1.10.2.
7) McKIM, 80.
8) Ibid., 90.
9) T.H.L. Parker의 Commentaries, 51, 59를 참조하자면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가 신학적 주제(loci)를 체계적으로 정리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주석들(Commentaries)은 신학교재인 「기독교강요」에서 다루기에 적합지 않은 자료들에 대한 해설서라고 생각했다.
10) cf. McKIM, 89.
11) cf. Kraus,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CR 59. 800:59, 14 cited by McKIM,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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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칼빈의 성경관과 주석의 자세는 계시 의존적 절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루돌프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여러 주석들 중 특히, 창세기 주석을 통해서 확
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특성, 즉 그의 마음이 완전히 성경에 도취되어 버리는 사실을 그의 저서 어느 곳에
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만물의 기원을 말해주는 창세기
주석 가운데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13)
주석가로서 칼빈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회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볼 때 칼빈 주석은 곧 주해 설교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언
급한 서론적 서술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주석에 대한 평가를
창4장의 일부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극히 일부분의 구절이기에 칼빈의
의도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선택한 본문을 그가 어떻게 취급하는지 고찰할 때에 역사
적인 종교개혁의 주체이자 유명한 주석학자요 설교가로서 그의 수고와 노력의 진가가 무엇
인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II. 창4:1-7 주석에 나타난 칼빈의 설교 포인트
칼빈의 창4:1-7 주석을 살핌에 있어서 우선 그가 석의(釋義)하기 위하여 선택했던 구절과
그 구절 내에서의 용어들을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어떤 주석가도 지면상의 이유와 내용에
대한 이해도상의 이유로 인하여 매 구절을 일일이 주석할 수는 없지만 그가 주해한 내용들
이 본문주해 설교를 위한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점에서 좋고 또는 아쉬운지 비평적으로 고
찰할 것이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 1 ,והאד ידע את חוה אשׁתו a절)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만 다루고 있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
하라’는 문화명령(창1:28)의 효과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도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즉,
아담이 신적 확증을 갖게 되어 이제는 타락의 죄로 인한 공포로 인하여 좌절하지 않으며 자
녀 생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사실을 언급하며 그 의미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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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직 “성경을 해석하고 읽을 때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을 줄만한 통찰력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또 그것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변한다(J. 칼빈, 기독교강요, 1.14.4).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의 서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에서 얻을 수 유익이 무엇인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며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다”(Kraus, Ibid. CR 9. 825, 11).
13) Ibid.,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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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적인 관대함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곁들여 주석한다.14)
또 한 가지는 가인과 아벨을 쌍둥이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 모세의 해설 가운데 그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백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모든 사실을 다 보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지만 성경
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칼빈도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론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15)
1a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그가 중요시
하여 주석하고 있는 내용이다. 바로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전자는 다소 주석의 가치가 있다
고 볼 수 있으나 후자의 쌍둥이론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본다. 두 번째는 한글개역이 ‘동침
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 동사 ידע 에 대한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는 점이다. 대
부분의 현대 영역본들이 He Knew로 직역하고 있으나 LXX을 비롯하여 NIV, NASB, NLT,
BBE 등의 현대 영역본들이 ‘부부관계를 갖다’라고 의역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
에서의 용법이 무엇임을 잘 안다.
그러나 이 동사의 진정한 의미가 대상에 대한 관념적 이해라기보다는 인격적이고 감각적
이며 체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석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 동사의 깊은 의미가 롯의 집에 들어간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던 소돔성
의 남자들의 목적( נדעה אתם , 창19:5)과 베냐민지파의 경내 한 노인의 집에 묵게 된 레위인
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던 베냐민지파 남정네들의 목적( נדענו , 삿19:22)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 דעת )이 없기 때문
에 망한다(호4:1,6)’고 안타까워하시는 여호와의 탄식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עה
נד ). 여호와를 알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 נרדפה לדעת את יהוה )’(호6:1-3)라고 외치는 선
지자의 호소에서 그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16) 이렇듯 중요한 구절에 대하
여 칼빈은 간과하고 있다. 용어 연구에 대한 각주 정도의 배려에도 인색함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의 주석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세 번째 특징은 본문의 모세 저
작권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특히, 오경 주석에 있어서 일관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칼빈
은 창1:1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주석하고 있는 거의 모든 구절에서 “모세는 ~라고 설명한
다”, “모세는 ~라고 말한다”, “모세는 ~라고 묘사한다”, “모세는 ~을 언급하지 않고 있
다” 등의 문학적 표현 형식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여기의 1a절의 주석도
“모세는 ~을 묘사하기 시작한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오경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
세를 통해 기록하신 계시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기초하여 성경의 신적 권위를 매 구절마다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로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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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trans. J. King(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6), 189.
15)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하여 주석가에게는 조심스러운 상상과 묵상과 추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칼빈은 그의 주석과정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구체적인 예는 4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의 주해를 통해 알 수 있다.
16) 이 뿐만 아니라 암3:2( רק אתכם ידעתי )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지식의 한계를 말하는 것 같으나 여호
와께서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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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관은 주석가와 신학자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설교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칼빈의 주석적 입장은 바른 성경관에 입각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1 ,קניתי אישׁ את יהוה b절)
이 구절에서 칼빈이 관심하는 핵심은 את יהוה 이다. 직역하면 ‘여호와와 함께’라는 뜻이
다. 그는 이 용어에 대한 전래적인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한다. 한 가지는 ‘여호와의 은혜로’
또는 ‘여호와의 호의로’라고 번역하는 것인데 그는 이 입장의 근거로 시127:3을 인용하며 어
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글개역에서와 같이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이해하였는데 이 입장의 근본을 그는 Jerome의 Vulgate(Adam vero cognovit Havam uxorem
suam quae concepit et peperit Cain dicens possedi hominem per Dominum)17)에서 찾는다. 마지막
한 가지는 ‘여호와를 통하여’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 세 가지 입장들을 종합하여 하와가 영
원한 불임의 벌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의 열매를 주께 허락받았으므로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정리한다.18)
그러나, ‘내가 여호와의 사람을 얻었다’라는 입장을 추가로 소개하며 그것은 하와가 창
3:15에서 약속하신 뱀의 정복자, 즉 그리스도를 얻은 기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19)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입장을 자기 주석의 기반으로 삼아 이 구절을 ‘내가 여호와로부터(from
the Lord) 득남하였다’라고 읽어서 하와가 득남의 사실을 자축하며 그 아들을 인류의 첫 열
매로서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1b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도출하는 것이 다소 성급한 결론일 수 있지
만 그의 주석의 기조는 항상 기독론적 틀 위에 서 있었다.
3.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2-5a절)
칼빈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두 아들의 장래를 예견하는 듯한 하와의 성명철학
을 소개한다.20) “내가 얻었다”( 1 ,קניתי b절)에서 유래한 가인의 이름을 통하여 출산의 축복
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 출산의 고통을 저주로 받은
그녀였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문화명령의 복이 자신에게 임한 것으로 노래하는 것
이다. 그러나 “허무” 또는 “공허”( 2 ,הבל a절)의 의미를 지닌 아벨의 이름에서 하와는 그의
운명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가 아벨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에 대하여
칼빈은 인간의 공허성을 모든 이들에게 회상케 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에 관하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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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LXX에서는 ‘하나님을 통하여’(ei\pen ejkthsavmhn a[nqrwpon dia; tou' qeou')라고 읽었다.
18) J. Calvin, 190.
19)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하와의 믿음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소개한다.
20) Ibid.,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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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런히 회상하게 위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두 아들의 생업과 그들의 제사 문제를 주석하며 그 사건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육 문제에 관련된 것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석가요 설교가로서의 그의
실력과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두 아들의 제사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칼빈은 몇 구절 안되는
짧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론한다.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함에 있어서 필요한 추리를 가능한 많이 이끌어내고 있다.21) 우선 두 아들의 거룩하고
칭찬받을 만한 생활 태도에 대하여 그들은 문화명령에 성실한 생활 태도를 소유한 자들22)로
서 부모에게 하나님 경배에 관해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추론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단순히 자기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부모들
의 교육을 통해 체득되었을 것으로 추리한다. 이 점에 대해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논거에 대한 주석을 그는 생략하고 있다.23)
가. 두 사람이 드린 제사의 성격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말한
다. 여기에서 ‘열납하다’라고 번역된 동사 שׁעה 는 “주목하여 보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
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24) 칼빈은 그들의 제사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는 그들이 드려야 할 제사의 목적 내지는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 드리는 자의 자
세이다.
우선 칼빈은 그들이 드린 제사의 목적과 의의를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당연한 의무로 이해한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조상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방편으로서의 속
죄적 성격을 강조한다.25) 여기에서 그는 “제물”을 가리키는 용어 מנחה 가 피를 흘린 희생제
물과 곡식 제물에 병용되어 모든 종류의 헌물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곡식 제사이든 희생 제사이든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종류에는 문제가 없는 것
이다. 왜냐하면 두 종류의 제사가 지니는 의의는 첫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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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Ibid., 192-194.
22) 그 이유를 칼빈은 두 사람의 생업이 모두 인간생활의 공통적인 용도에 필요했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노동에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Ibid., 192.
23) ”세월이 지난 후에“(!ymy $qm yhyw, 4:3)라는 어구는 ”날들의 끝에 이르렀다“, ”날들의 끝이 되었다“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현대어 성경번역자들이 막연한 세월의 흐름으로 보거나 아니면 일년 단위로 볼 때 추수할 때가 이른 것으로 보지만 필자는 그 무엇보다도 두 아들이 장성하여 이제는 부모를 떠나 독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칼빈은 이 때 두 사람의 결혼과 분가 여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먹고 사는 생활면에서의 독립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주체로서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인 위치로 장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어구로 시작하여 모세는 그들의 제사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24) 당시에 하나님이 그들의 제사를 열납하시는 방법이 무엇이었겠는가. 칼빈은 하늘의 불로써 태우셨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점성술에 의거하여 상상하는 하나의 우화로 단정하고 성경적 근거가 빈약한 상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 문제에 관한 대안적인 정확한 진술은 없으나 어떤 정황으로든지 가인은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만 기뻐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불쾌하게 여기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만 해석한다. Ibid., 197.
25) Ibid.,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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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과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짐승의 희생제
사는 대속적 죽음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제사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분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6) 그
러니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종류의 제물로 제사한 것은 당대의 정황 속에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주석을 통해 약간의 혼동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생계를 위한 노동에 충실했으며 그 결과로써
얻은 산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깨닫고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했다고 하면
서도 가인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이유가 마치 그가 속죄제의 성격이 강한 희생제사가 아
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할 위험성이 있다.
나. 반응이 엇갈린 두 제사(4-5a절)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종류 내지 그 성격은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주목하여 보셨고 가인의 제사에 대하여는
외면하셨다. 즉 두 형제 중 아우의 것만 기쁘게 받으셨고 형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 그 원인
은 무엇이었겠는가? 여기에서 칼빈은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에 따라 드린
제사요, 믿음으로 드린 제사이며(히11: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인 순종함으로 드린
제사였다는 것이다(삼상15:22). 그리고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심중을 감찰하
시는 하나님(삼상16:7)께서 외식적으로 드리는 것은 결코 받지 않으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을 주석할 때 그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문법적 분석과 해석을 가하지 않고 신약
의 몇 구절에 근거한 추론을 마치 설교하듯이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주석
이 마치 설교문 작성하듯 전개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해야 하리니 ‘믿음 외에 다른 수단으로 한 일들
이 제 아무리 그 자체로는 성대하고 호화찬란하게 보일지라도 그리고 굉장히 의롭게 보일지라도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오직 죄들의 무더기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나는 이 자리를 빌어서 지금 그들 두
사람이 자기들의 자유 의지의 동작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상상해오고 있
는 자들은 부디 이 사실을 꼭 묵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27)
그러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함을 받은 자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베드로의 교훈을 예로 들며 강론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류 역사 초기의 사람들이 행한 제사 문제를 가지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현대를 살고 있는 크리스챤의 성도들의 삶을 묶어서 교훈함으로써 그
의 주석의 기조를 목회적 적용에 이르기까지 끌고 간다. 이 사실은 그가 성경 주석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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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Loc. cit.
27) Ibid., 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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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궁극적 목적과 관심의 촛점이 신자들의 영적 삶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필자는 칼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벨의 제사에 대한 본문의 설명
에 대하여 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점과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는 점만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이 핵심
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에 대한 본문의 설명은 무엇인가. 그는 “그의 양의 첫
새끼들 중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들 중에서( מבכרות צאנו ומחלבהן )” 가져왔다(4절). 무엇을
말하는가. 첫 새끼보다는 둘째나 셋째 새끼들이 더욱 토실토실할 수 있다. 그러나 첫 새끼로
드렸다는 것은 첫 새끼로부터 마지막 새끼까지의 모든 가축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믿
었음을 시사한다. 그 믿음에 근거하여 그는 첫 새끼들 중에서도 가장 기름진 것, 즉 가장 좋
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흐뭇한 마음으
로 주목하여 보셨다.
4 וישׁע יהוה אל הבל ואל מנחתו b절
“그러자 여호와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향하여 주목하여 보셨다.”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주목하여 보신 것은 단지 제물이 아니다. “아벨을 향하여 그
리고 그의 제물을 향하여”( אל הבל ואל מנחתו )라고 밝히는 점에서 볼 때 칼빈이 제대로 지적
하고 있는 것은 단지 제물만이 아니라 그 제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인격을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이다.28)
또한 칼빈은 그들이 드린 “제사”를 신약시대의 용어인 “예배”(Worship)로 해석하며 예배
의 정신과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주석 방법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
점에서 접근하되 현대 목회현장을 염두에 두고 독자 내지 청중들의 영적 유익을 목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주석책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하
고도 세밀한 주해설교집으로 평가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에 관한 칼빈의 주석은 어떠한가. 가인의 제사는 온전한 헌신이 결여된 형식
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배척을 당했다고 설명한다.29) 그는 농사지어 얻은 첫 소산
물 중에서 최상의 것으로 드렸다고 하는 설명이나 강조가 전혀 없다. 그의 제사는 아벨의
제사처럼 감사와 정성을 기울인 믿음의 제사가 아니었다. 가인의 제사에 있어서 문제는 믿
음이 결여된 제사, 다시 말해서 가인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수여자
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 리가 없
다는데 있었다. 그는 농사를 통해 얻은 곡식을 자신의 땀의 대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여러 곡물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님께 바치려고 가져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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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Ibid., 194.
29) Ibid., 196. 이에 덧붙여서 칼빈은 가인의 제사가 덜 여문 곡식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속였기에 열납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의 견해와 동물의 희생제사는 고기타는 냄새가 강하므로 그 냄새가 하나님을 달래서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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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사람의 제사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
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30)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11:4)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가인의 제사와 동생을 죽인 악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평
가하고 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
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12; cf. 유11)
위의 구절들에 등장하는 “더 나은 제사”를 비롯하여 “의로운 자”와 “악한 자”, ‘의로운
제사 행위’와 ‘악한 제사 행위’ 등의 평가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제사 드리는 자의
믿음과 그 믿음의 여하에 따라 준비된 제물의 성격, 즉 믿음을 겸한 정성의 유무가 결정하
였다고 볼 수 있다.
4. 제사의 열납 여하에 대한 반응들(5b-7절)
칼빈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 여하에 대하여 두 사람이 어떻게 반응
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물론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며 가인이 자신의 제사
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몹시 화를 냈다고 그 정황을 주석하고 있다.
LXX과 Vulgate 등의 고대어역본들, KJV, NKJV, ASV, RSV, NASB 등의 영역본들, 한글
개역과 공동번역, 표준 새번역 등의 현대어 성경들이 5b-6절의 번역에 있어서 칼빈과 같은
입장에 서있다31). 그것은 LXX이나 Vulgate의 고대역본의 입장을 칼빈이 따른 것인지 아니
면 칼빈도 제사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짐작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성경들은 히브리 원문과 다소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분노하여 화를 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지면을 할애하여 좀더 깊이 논의해 보자. 5절의 히
브리 본문은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 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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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위의 헬라어 문구는 관사 없는 분사가 명사나 대명사의 소유격과 함께 사용된 독립 소유격 용법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훨씬 훌륭한 제사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31) 그 중 LXX은 가인이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몹시 화를 냈다기보다는 불쾌한 상태로 되었다고 다소 완곡하게 번역하였다. ejpi; de; Kain kai; ejpi; tai'" qusivai" aujtou' ouj prosevscen kai; ejluvphsen to;n Kain livan kai; sunevpesentw'/ proswvpw/
32)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개혁신학 12호(서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2), 16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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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ואל־קין ואל־מנחת לא שׁעה ויהר לקין מאד ויפלו פניו 절
“그러나 그(하나님)는 가인을 향하여 그리고 그의 제물을 향하여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가인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랬더니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5절)
위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어구는 밑줄 친 ויהר לקין 부분이다. 이 어구는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한 가지는 “그러자, 그가 가인에게 몹시 화를 냈다”이다. 이 경우에 화를
낸 주체가 누구인지 모호하다. 가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 구절만 가지고는 화를 낸
“그”(3인칭 남성 단수)가 하나님인지 아니면 제 3자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른 한
가지는 “그러자, 가인이 몹시 화를 냈다”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 어구의 단문 구조상 그리
어렵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전치사 ל의 특수용법 중의 하나로서 윤리적
여격(ethical dative)으로 사용되는 경우에 가능한 번역이다. 이 용법은 동사의 행위 안에 주
어가 갖는 몫이나 이익을 강조하면서 전치사 ל으로 이끌리는 명사나 대명사 접미가 주어처
럼 사용되는 것이다. 이 용법을 구성하는 두 단어, 즉 동사와 그 동사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ל으로 이끌리는 단어 사이에는 인칭과 성, 수가 일치해야한다.33) 5절에서는 위의 밑
줄 친 두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ויהר 와 לקין 은 3인칭 남성 단수로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후자의 번역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구절의 마지막 어구에서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자 가인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
어뜨린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일련의 모든 동작들은 앞 선 동작의 결과나 연속되는 효과로서 점진적, 연속
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5절에 등장하는 동사들의 문법적 특징이 가르쳐 준다. 즉,
맨 앞에 등장한 동사 שׁעה 는 완료형(perfect)으로 되어 있고 다음에 등장하는 두 개의 미완료
(imperfect) 동사 ויהר 와 ויפלו 는 접속사 ו(waw)에 이끌리는 와우 계속법(Waw-consecutive)으
로 이어지고 있다. 와우 계속법(Waw-consecutive)이란 맨 앞의 동사가 뒤에 이어지는 동사
들의 시제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동작의 내용도 앞 동사의 결과 내지 연속되는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첫째,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둘째, 화를 내는 반응
이 나타났고 셋째,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어뜨리는 동작이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법적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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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W. L. Holladay, A Concis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1971), p. 168; B. D. B., p. 515. 전치사 ל이 윤리적 여격으로 사용된 경우, 앞에 위치하는 동사의 주어와 전치사 ל에 의하여 이끌리는 사람의 인칭은 일치해야 한다. 이 용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타동사와 더불어 사용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특히 명령법에 자주 사용되곤 한다. ה לך
עשׂ (창6:14; 민21:8); לך־לך (창12:1;22:2); ותשׁב לה (창21:16); ברח לך (창27:43); וילך לו (출18:27); 모세 오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용례들은 이 외에도 קה־לך (창6:21), עשׂיתם לכם (신4:16,23;암5:26), הבו לכם (신1:13), ויקח לו (창
אשׁובה לי ,( 15:10 (민22:34), תנו לכם (출7:9;수20:2) 등으로 무수히 많다. 이러한 용법들은 오경 외에 역사서나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 등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창세기 초반부에 나타난 ויעשׂה להם (창3:7)는 동일한
용법으로 출32:31; 호13:2; 렘11:17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 외에도 לך ובאת־לך (삼상22:5), ונלכה לנו (삼상26:11), לך
םנ טלהו (삼טע 하י(욥2:1221:)1, 1 ל)וך תובכןנ־ילתה ל,(ך 욥(왕13상:11),7 ; י)י לשׁךו ה,־(ל 3ו 호1על (사0:14)0, :9 ל)י כגהיד ולי ל,מ(ו 사4)א 렘4:57:)5 )등, ו의 ד ל 어 בוד 구(호들8이:9 )동, ך일ל־한דע ( 욥용5법:2의7) , 사לי 례 תי 들 חל 이הנ 다(욥.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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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은 전자의 입장에서 번역할 때 더욱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먼저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자 기쁜 마음으로 형 가인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던 동생 아벨은 형 가인의 제사가 하
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자 놀라움이 가득하고 흥분한 상태에서 격앙된 소리로 형
에게 의분을 발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번역 가능성을 볼 때 화를 낸 주체가 전자의 경우 가인이 아닌 제
3자로 보아야 하고, 후자의 경우 제사를 응답받지 못한 가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다음 6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6절을 밑줄 친 부분에 유의하여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6 ואמר יהוה אל־קין למה חרה לך ולמה נפלו פניך׃ 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그가 너에게 화를 내느냐? 그리고 어찌하여 너의 얼굴이 떨어졌느냐?’“
다른 부분은 번역상 문제가 없으나 역시 밑줄 친 부분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앞의 5절
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구절에서도 전치사 ל이 윤리적 여격으로 사용되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밑줄 친 어구 חרה לך 를 자세히 살펴보자. 앞의 동사는 “화를 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חרה 의 기본형으로서 일반동사의 능동태(Qal), 완료형, 3인칭 남성 단수이다. 즉,
“그가 화를 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לך 는 전치사 ל에 2인칭 남성 단수
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명사 접미가 붙어 있다.34) 그 의미를 번역하면 “너를 위하여” 또
는 “너에게”이다. 즉, 위의 밑줄 친 어구의 두 단어는 인칭이 서로 불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위의 밑줄 친 어구가 전치사 ל의 윤리적 여격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위의 밑줄 친 어구는 “어찌하여 그가 너에게 화를 내느냐?”로 읽어야 한다. 이
렇게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화를 낸 주체는 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
인은 화냄을 당한 객체로 나타나 있다. 모든 번역본들이 화를 낸 사람을 가인으로 보는 이
유는 아마 당시의 정황에 대한 심정적 추측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사를 거부당한 가인
은 면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얼굴은 땅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감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폭발한다든지 아니면 그 분을 향해서
예의 불손하게 성질을 낸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 점이 바로 가인이 화를 냈다
고 주장하는 이들과 칼빈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위에서 필자가 논한 것과
같은 문법적 해석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께 대한 외식적인 신앙행위가 받
아들여지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을 넘어서 대항하고 맹렬한 분노를 발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
의 보편적인 특성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 격렬한 화를
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 없는 동생에게 질투와 살의로써 발산되어 결국에는 동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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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Bible Works 5.0에서는 2인칭 여성 단수 접미로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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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게 되었다고 그의 살인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5)
화를 낸 사람이 가인이 아니라고 할진대 그렇다면 가인에게 화를 낸 “그”(3인칭 남성 단
수)는 누구일까? 그것은 위의 6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
씀하여 물으시기를 “어찌하여 그가 너(가인)에게 화를 내느냐?”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에게 몹시 화를 낸 “그(He)”는 하나님도 아니고 가인도 아닌 제 3자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의 전후문맥을 살펴 볼 때 화를 낸 제 3자는 아벨이다.
그렇다면 왜 아벨이 가인에게 화를 낸 것일까? 먼저 자기의 예물을 기쁘게 받으신 하나
님 앞에서 물러난 아벨은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 차례인 형 가인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아벨은 예기치 못했던 일에 몹시 놀라며 의
분이 치밀어 올라 형 가인에게 몹시 화를 낸 것이다. 화를 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추정
할 수 있다. 첫 번째, 아벨의 분노는 공의로운 의분이었던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요 엄위하
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제사를 드린 한 죄인을 엄히 꾸짖는 질책이다. 두 번째는 한
가족 된 안타까움에서 ‘도대체 형, 어떻게 준비하여 드렸기에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오?’
라고 분을 발하는 형제애적인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그 역사적 배경
에는 금단의 열매규정(창2:16-17)을 어긴 부모의 범죄와 타락사건(3:1-7), 그리고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후에 살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이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유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달
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자신들이 먼저 성실하게 시행하였을 뿐만 아
니라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법을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으로 가르
쳤을 것이다.36)
가인의 제사 결과에 대한 가인 또는 아벨의 반응에 대하여 하나님의 반응을 어떻게 정리
해야 할 것인가? 가인의 제사 결과에 대하여 화를 낸 사람을 가인으로 이해하는 칼빈은 6절
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신 방법은 불명확하지만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하나님 자신이 직접 가인의 범죄 사실을 심리하시는 법적 공판의 정황으로 이해하고 있
다.37)
그리고 그는 7절의 ‘죄의 소원38)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의미를 가인
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죄책(the guilt)과 그 결과적인 정죄(the condemnation)에 대해 강조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도 칼빈은 일반적인 죄성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목
회적 적용에만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따라서 칼빈은 7절의 내용이 5-6절과 자연스럽게 이
어져 가인이 화를 낸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형식적인 신앙과 그 결과 악행으로 나아가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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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J. Calvin, Ibid., 196 - 197.
36) 아담이 소유한 가르치는 직능과 자녀들에 대한 성실한 교육에 대하여 칼빈도 수긍하고 있다. Ibid., 192.
37) 이 부분에 대하여 칼빈은 아담이 하나님의 선지자 내지 통역자 역할을 했다는 당대의 일부 의견에 대하여 혹독하게 비판한다. Ibid., 198.
38) 한글개역성경이 “죄의 소원”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תשׁוקה 는 남자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여자의 열망(창3:16, 한글개역은 ‘사모하다’로 번역했음)과 동일한 용어로서 자신의 잘못과 열등감을 범죄로 표출하는 타락한 인간의 사악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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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7절의 주해에 있어서 그는 헬라어 역본 LXX와 라틴어 역본
Vulgate을 깊이 다루고 있다. 특히, שׂיאת 의 해석 문제에 관하여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MT와 LXX 그리고 Vulgate의 입장을 면밀히 비교하고 있다. 그 결과
칼빈은 가인이 잘못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7절 주해의 결론을 중재자 그리스
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값없는 화해를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예배, 즉 가식없는 예배라고 말하여 가인과 아벨의 제
사의 문제를 신약시대의 예배 문제로 귀결시킨다.39)
7절의 주석에서 칼빈이 취급하고 있는 신학적인 잇슈를 한 가지 꼽는다면 가인의 범죄
의지와 관련된 의지의 자유 문제이다. 그러나 칼빈은 당대의 신학자들이 중요시하는 자유
의지의 문제를 이 구절에서 도출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이요 시간 낭비라고 일축하고 있
다.40) 위의 실예들은 극히 칼빈의 주석 전체를 놓고 볼 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그의
주석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칼빈은 본문의 문법적 기초에 근거하면서도 현대학자들
처럼 분석 과정이나 내용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필요한 경
우에 신학적 잇슈를 다루기는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목회적 적용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III. 결언
위에서 다룬 칼빈 주석의 범주는 지극히 작은 분량이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칼빈의 오경
주석의 특징을 몇 가지 꼽는다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거의 매 구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개혁주의신학에 대한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오경의 모세 저작권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다. 놀
랍게도 칼빈은 20세기 이후에 극대화될 이 문제를 훤히 내다본 듯 모세의 저작권을 매우 강
조한다. 일부러 강조한다기보다는 당연한 전제하에 주석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가 성
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믿는, 즉 성령에 의한 완전 영감, 축자 영
감, 유기적 영감이라는 그의 성경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석을 위해 그가 선택한 구절들의 내용이 본문을 문법적으로 밀도 있게 분석
한 후 역사적 해석 및 신학적 해석 그리고 목회적 적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문
법적 이해를 전제한 상태에서 곧바로 목회적 적용 내지 신학적 잇슈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 이 사실은 그의 주석의 경향 내지 목적이 성경 각 책의 총체적 메시지가 신자들의 삶속
에 구체적으로 녹아들도록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가 꼬집어 다루고 있
는 본문의 구와 절들에 대한 주석적 설명은 하나의 설교문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는 기독교 변증적인 차원과 바른 신학사상이 바른 신앙생활을 좌우한다는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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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Ibid., 201.
40) Ibid.,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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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 당대의 이단적 해석 경향을 단호히 배척하며 구체적인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면들에 대
한 적용을 용의주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가 학자인 동시에 목회
자요 설교가로서 얼마나 말씀의 생명력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석의 끝은 거의 다 그리스도 중심적 삶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해석의 방향은 지극히 구속사적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적 결론으
로 이끌어 간다. 오래된 과거 사건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공시적
관점에서 독자들을 설득하고 때로는 통시적 관점에서 불변의 진리임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점은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바르게 이끌어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고 보
전하며 발전시키는 개혁신학의 거목으로서의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가 비성경적 해
석과 사상 체계에 대하여는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며 경계시키고 있음을 볼 때 온갖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영적 혼란과 혼합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큰 귀
감이 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주체요 개혁주의신학의 체계를 구축한
신학자임을 보여주는 기독교강요와 방대한 성경 주석은 그가 한 시대를 좌우하는 위대한 사
상가일 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과 인종과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영적 지도자요 세
계를 변화시키는 설교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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