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말 안에는 어떤 의미들이 담겨져 있을까? 향수병(鄕愁病)은 단
순히 고향땅을 밟고 싶어하고, 그곳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만을 담고 있을
까? 아마도 향수병(鄕愁病)에 걸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 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도저히 현실 어느 곳에서도
내 존재를 찾을 수 없을 때 항체가 없는 나약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이상한 병을 향수병
(鄕愁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고향은 나 자신을 의미하고 있으며, 향수병(鄕愁病)은
나 자신을 잃어버림, 찾을 수 없음에서 오는 불치병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시대
에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 온 최치원의 좌절과 은둔이라는 최후의 모습 역시‘자신을 잃어버
림’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 전국을 지배한 귀족들은 불교의 정신적인 지원 아래 사치스러운 생
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반 민중들의 삶은 행복과는 먼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귀족은 골품제에 의해 서열이 구분되어 있었고, 서열에 따라 사회적 진출에 많은 제
약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서열은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출신성분에 의해 규정되
었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진골 체제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은 대부분 육두품
출신의 인물들이었는데 최치원 역시 그런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육두품 출신이면서 당에 유학을 간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은 강수와 설총이었다. 강수
는 진골이 누리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진골처럼 진출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육두품 출신
이었기 때문에 유학을 기초로 한 문학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문서를 통해 고구
려와 백제를 평정했다는 이유로 문무왕(文武王)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설총 역시
강수의 뒤를 이어 당으로 유학을 떠났고, 신문왕(神文王)에게‘화왕계(花王戒)’를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의 유학은 개인적인 목표달성을 위한 의미를 갖기보다는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라시대의 당 유학은 육두품 지식인들이 바라는
바를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일종의 실마리 역할을 해 주었다. 먼저 유학을 통해서 배워온 문
장은 외교문서를 잘 작성하는 데 쓰였고, 왕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德治를 베풀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밖의 세계에서 배워 온 정치학은 안의 세계로 들어와 특권층의 지나
친 횡포를 견제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도구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사회구조는 쉽게
개혁되지 않았고, 신라 하대로 내려올수록 사회적 모순(능력이 아닌 신분으로 인재를 등용
하는 등의 모순)과 귀족들의 횡포는 심해져만 갔다. 이 와중에 육두품 출신의 귀족들은 과
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개인의 능력을 시험하는 당나라에서 선진 문물을 배워오려는 노
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최치원 역시 그런 육두품의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당에 유학을 간지 6년 만
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고, 강소성 강녕(江寧) 현위(縣尉)를 거쳐 고변의 종사관이 되었
다. 그리고 10년 간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던 황소(黃巢)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도행영병마도
통 직을 맡고 있었고, 황소를 토벌하는‘격황소서’를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긍정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陳情上太尉詩(진정상태위시)
海內誰憐海外人 海內의 누가 海外의 사람을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리.
問津何處是通津 묻노라, 어디메가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지.
本求食祿非求利 애초에 食祿(식록)만 구했고 利(이)를 구하지 않았으며
只爲榮親不爲身 어버이의 영광을 위했고 내 몸 위하지 않았네.
客路離愁江上雨 떠도는 나그네의 시름, 강 위의 비처럼 내리고
故苑歸夢日邊春 고향 가고 싶은 꿈은 봄 햇살처럼 떠오른다.
濟川幸遇恩波廣 은덕 입어 다행히 국난극복에도 참여했으니
願濯凡纓十載塵 이제 갓 끈의 십 년 먼지 씻으려오.
바다건너 외국 땅에서 학문을 배우고, 이름을 드높였지만 12살 소년의 몸으로 정든 고향
을 떠났던 최치원은 수 만리 타국에서 늘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海內의 누가
海外의 사람을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리.”라는 부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당나라의
넓은 땅은 최치원에게 있어 낯선 땅으로 다가왔다. 특히, 당시 유학 중에 쓰여진 시들이 나
그네의 외로움과 이방인이 느끼는 객수감 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타국 땅에
서도 고국을 그리며 세상에서 격리되어 있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
론 당시의 당나라는 많은 유학생들을 받으며 외부인들에게 여러면에서의 혜택(과거에 응시,
벼슬 수여 등)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치원의 시 속에서 드러나듯이 당나라는 海內 사람을 중심으로 한 타국에 불과했
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으며,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하고 벼슬을 주는 것 역시 다른 민
족을 무마하려는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을 참고:唐書
의 文藝列傳 최치원을 두지 않은 중국인의 편협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그곳에서 외국의 유학생들이 느끼게 되는 이방인의 심리는 무엇보다도 큰
고통과 고난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의 심리를 최치원 역시도 느
끼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故園에 돌아가는 꿈에 봄이 아득히 멀구나.”라는 마지막 말은
이방인으로써 최치원이 느끼는 향수의식을 간절히 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
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이며,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문이다.
“묻노라 어디 길이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가?”라는 말을 통해서 보면 유학생활 중에 있는
최치원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방황을 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 현재의 상황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의 현실은 컴컴
한 겨울이었고, 그는 고원(故園)으로 상징되는 고국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면에서 상황은 매우 다르지만 타국에서 느끼는 최치원의 이 같은 고뇌와 방황은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느 새부터 전체적인 중
심축을 서양 사회에 두기 시작했다. 새로움이 시작되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새로운 사
건들이 일어나는 곳은 모두 거대한 도시 미국이다. 그리고 그런 중심축을 바라보며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국의 말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분야,
대중문화, 패션, 상품, 스포츠, 놀이 등 모든 문화가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 사
실이다. 이렇듯 전 세계는 서구문화 중심의 사상과 문화, 기술 등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토대로 조금씩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나가게 되었다. 즉, 이 세계는 서구문화 위주로 발전하
고,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결국 과거의 많은 인물
들이 신세계로 불리는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세계로의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 결과로 인해 우리 사회는‘조기 유학파’라 불리
는 새로운 집단들을 만들어나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양을 향해 눈을 돌렸고, 영어를
배우겠다며 비행기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치 어린 나이의 최치원이 그랬던 것처럼 넓고, 번
잡한 세상에 들어가 이방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최치원 시대의 유학생들이 자기 자
신의 입신양명과 국가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하나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면 지금의
유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입신양명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앞세워 놓은 채 넓은 땅으로 향
한다. 최치원 시대의 인물들이 이곳의 발전을 위해 원대한 꿈을 갖고 당 유학길에 올랐다면,
현재의 유학생들은 이곳에서 더 쉽게 살아남기 위해서 외국에서 수여하는 학위증을 얻으려
고 애쓴다. 그러나 조기유학이라는 명분아래 유학을 떠난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방인만이 느
끼는 아픔의 시간을 갖게 된다. 물론, 좋은 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지만 많은 학생들이 위험지대 앞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치 신라 시대의 최치원이 느꼈던 것과 같은 정신적인 향수
(鄕愁)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한국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한국 땅에 대한
그리움이자 낯선 땅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앓고 있는 큰 병은 결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학생들이
자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치원의 향수병 역시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당 유학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하
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였지만 신라의 집권층인 진골 귀족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시무책(時務策)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최치원은 여행길을 통해서 영
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지 못했다. 그는 국제
적으로 신라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 되었지만 자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개혁안을 성공시키
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고국의 현실을 개혁하지 못하고 골품제가 가진 모순 역시 타
파하지 못한 채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최치원의 존재는 당나라에서도, 자국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행길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렸고, 정신적인 고향
도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어렵게 찾아온 고향 땅에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어쩜 최치원이 느끼는 상실감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조기 유학생들이 경험하는 상실
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조기 유학을 통해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게 되는 학생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설자리를 잃어가게 된다.
그래서 학업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거나 끝냈다 하더라도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
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
기도 한다. 결국, 그들 역시 긴 여행길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돌아올 때의 상실
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라 시대의 최치원이 그의 삶 속에서 느꼈던 향수(鄕愁)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단순
한 마음과 함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황과 성격이 매우 다르긴 하지만 지금 현재의 사회상
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의 조기 유학생들이 느끼는 이중의 상실감과 객수감 역시 이와 비
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최치원이 이중의 상실감을 맛보고
좌절한 인물로 남게 되기까지는 당대 사회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능
력을 통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회, 민중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사회였다면 아마도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 출신의 인물들이 당 유학길을 통해 시련과 고통을 겪지 않을 수도(자
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타국에서도 올바른 대접을 받는)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치원
본인 역시 소극적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용기 있는 자세를 가졌더라면 삶의 마지막을 그
토록 비참하게 마무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현재의 우리 사회가 우리 나름의 건실한 힘을 갖고 있다면 외국으로 학문을 배우러 간 학생
들 역시‘나약하고 말 많은 소국의 아이들‘로 불리며 위험지대에 서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러 간 학생들 역시 무작정 떠나는 유학길이
아닌 뚜렷한 목표를 가진 유학길을 떠날 수 있도록 나름대로의 노력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이다. 그렇게 나와 사회의 역할이 충실히 이루어졌을 때 여행길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불행
한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쓰고보니 억지스러운 면도 많고 확대 해석을 한 부분도 많은 것
같네요. ^^
당나라 유학생이 많았던 당시 시대에 당나라에서 과거제, 벼슬 등의
혜택을 부여했고 특히 최치원의 경우에는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관직을 임명
받았더라도 자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타국으로 간 입장의 사람들이
느끼는 비애감과 고독감은 상당히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당나라가 외부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편협성을 갖고 외부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죠. 그래서 정말 작은 부분이지만 당시 당나라의 내부적
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견해들을 찾아서 제 의견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는
외국인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고, 우리나라에서도 58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관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