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포교이해론 -포교의 의의, 필요성 및 포교의 전개과정
1. 포교(布敎)
1). 포교의 정의
(1). 포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활동.
(2). 포교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실천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
(3). 포교에서 포(布)는 고대에 일종의 통화로서 유통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포교'란 재화가 유통되듯이 법보를 유통시켜 만인에 이익되게 하는 것.
(4). 포(布)는 실천적 측면에, 교(敎)는 이론적 측면에 관련한다.
(5). 설법은 직접 언설로써 교의하는 것이지만, 포교는 간접적인 방법까지 포괄하는 것.
*신(信) : 불교에서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믿게 함.
*해(解) : 교리를 충분히 이해시킴.
*행(行) : 실천하게 함.
*증(證) :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행위.
2). 포교의 의의
[1] .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 실현
(1).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의 고통 없이는 행복한 삶"이야말로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다.
*법화경 : '이제 너희들에게 부촉하노니,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서 이 가르침을 전파해 널리 이롭도록 하라.'
(2). 칠불통계에서도 잘 표현하고 있음.
***칠불통계(七佛通戒) : [뜻까지 암기 바람]
[2]. 자리이타의 실천
*금강경 : '만약 어떤 사람에게 이 경 중에서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해준다면 그 복덕은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느리라.'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 [암기 바람]
[3]. 불법홍포와 교단 외호
*법화경 : '그 법을 들은 바와 같이 친척, 착한 벗, 지인 등을 위해 힘닿는데 까지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듣고 나서 기뻐하여 다시 부처님을 대신하여 가르침을 설함으로써 차례차례 영향을 미칠 것이다.'
2. 현대적 포교방법의 필요성과 과제
1). 현대적 포교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현실적인 난관들은?
(1).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할 때는 다종교 사회라는 조건과 세계화의 난관을 검토.
(2). 산업화에 따른 과학은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어, 이는 사회구성원들이 불교(종교)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양을 미침.
(3). 세대별 계층 차이와 종교적 욕구의 변화.
(4). 근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로 사회분화...각 분야는 독자적인 체계성, 전문성을 띠고 있음.
3. 포교방법의 전개과정과 현대적 의의 : 강의 함 / 중요함
1). 포교의 기원
2). 부처님의 포교방법과 그 사례
3). 전도선언에 대한 내용과 현대적 의의
포교의 기원은 초전법륜이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을 시작한 이래 열반의 순간까지 45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셨다. 그리고 법을 설하는 전략이나 방법은 다양했다. 살인자인 앙굴리마라처럼 삼독에 빠진 사람에 대한 포교와 손녀를 잃은 슬픔에 빠져살던 비사카처럼 삶의 위기에 빠진 사람에 대한 포교, 철없는 아이나 피교육자에 대한 포교, 개인문제 해결을 통한 포교,사회문제 해결을 통한 포교 등 포교방법은 대상과 주변상황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달랐다. 부처님의 포교원칙과 방법은 <잡아함경>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전도선언문’을 통해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① 자,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②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과 하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떠나라. ③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은 길로 가지 말아라. ④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⑤ 또한 원만무결하고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⑥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때가 덜 묻은 사람도 있으나,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그들도 법을 깨달을 것 아닌가. ⑦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장군총)로 가리라.” 이 전도선언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문장은 불제자에게 포교를 부촉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를 대상으로 전도 선언을 하셨지만 오늘날에는 위의를 갖춘 부처님의 제자들이 함께 전도에 임하고 있다. 둘째 문장은 포교의 목적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인류의 보편적 이상의 실현, 자리이타의 실천, 더 나아가 불법홍포와 교단외호 등에 포교의 목적이 있지 개인의 복덕이나 종단 발전 등으로 좁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문장은 많은 사람에 의한 포교방법의 다양성을 암시하고 있다. 즉, 포교대상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포교방법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넷째 문장은 포교대상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하는 문장이다. 다섯째 문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업(善業)을 증장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어떻게 포교하는 것이 참으로 부처님의 법에 부응하는 것인지’를 꼭 염두에 둬야 한다. 여섯째 문장은 대기설법의 필요성과 효과성을 암시하고 있다. 포교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활동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 문장이다. 마지막 일곱째 문장은 부처님의 포교원력이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불제자들이 부처님을 모범으로 삼아 실천할 것을 다시 한번 간접적으로 부촉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부처님의 포교방법과 현대적 의의 : ‘전도선언’이 포교의 기원 ->사람 행복하게 하는 활동
4). 부처님의 포교방법에 대한 종합적인 재해석
5). 부처님 당시 포교사의 포교방법과 의미를 알아 봄.
6). 부처님 제자의 표준과 척도
7). 한국불교의 현대적 전개와 포교의 제도화.
4. 포교의 역사 : 강의함 / 중요함
1). 불교의 세계적 전파
불교는 부처님의 초전법륜과 전도선언 후 전파됐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까지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과 코살라국의 사위성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전했다.
당시 불교는 이미 동쪽으로 갠지스강 하류에,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전파됐다고 한다.
불교를 인도전역으로 급속하게 확산시킨 결정적인 인물로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을 들 수 있다.
아쇼카왕은 인도 전역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와 미얀마, 이집트,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해외에까지 포교사를 파견했다.
1세기 후반에 성립된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은 대승불교를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걸쳐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파됐다. 이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불교교리를 체계화해 나갔다. 또한 각지에 불탑이 조성되어 신행의 중심인 승원이 건립되고 예불당을 완비해서 불교를 믿는 이들이 늘어 났다. 불교는 이미 기원 전후에 인도 전역과 스리랑카,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됐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세계종교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14세기 이후 인도의 불교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파 교권이 잠식당하고 세력이 약해졌다. 최근에는 인도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이자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로 칭송받는 인도 초대 법무장관인 암베드카르 박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교가 인도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인도 통일한 아쇼카왕 ‘일등공신’ 동북아는 물론 서구에 까지 영향
불교는 발생지 인도에서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 남방과 북방으로 전파돼 각기 독특한 특징을 지닌 불교로 발전했다.
팔리어 경전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불교(남방불교)와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북방불교)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불교는 서구에도 전파됐다.
기원전에 서양에 모습을 드러냈던 불교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시기의 불교는 고고학과 언어학,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학문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 불교가 서양에서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서양인들은 불교가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마음수련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열어주고, 삶과 죽음 등 인간 실종에 관계되는 사안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서양에 내재된 문제점의 해답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
히 1881년 영국의 리즈 데이비스 박사가 주도해 창립된 팔리경전학회가 발간한 영문판 남방불교 성전과 주석서가 부처님의 말씀을 서서히 그리고 비교적 정확하게 서구인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어 1950년대 중국의 티베트의 공산화, 1970년대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등으로 많은 스님과 불교도가 유럽으로 이민가면서 이민불교가 서양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동서의 문화교류가 본격화되면서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양의 불교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스님을 서양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서구인들 가운데서도 동양의 불교국가로 유학와서 스님이 돼 불교를 배우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포교활동을 펼치는 사례도 늘고 있다.
(1). 인도불교 및 상좌부불교, 대승불교, 서구불교의 전파
(2). 세계의 포교사 인물 정리
1). 세계의 포교사
불법(佛法)을 후세에 널리 전한 큰 인물들 가운데에는 수행과 역경 등 학문연구를 통해 이름을 떨친 출가수행자 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사회운동가, 국제구호활동가로서 지대한 포교업적을 남긴 재가자들도 많다.
특히 불교발생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세계종교로 성장하는데 크게 공헌한 아쇼카왕, 스리랑카 뿐만 아니라 경전의 주석을 통해 상좌부불교의 수행지침을 전한 붓다고사스님, 불교전파 경로를 따라 중국에 선법을 전한 달마대사와 교법체계를 완성한 천태지의대사, 불교대중화와 한국불교의 사상적 전통을 확립한 신라의 원효대사, 일본불교를 대표해 생활불교를 지향한 조동종 개산조 도원선사 등이 두각을 내고 있다.
또한 20세기 들어서는 근대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 암베드카르 인도 초대 법무장관, ‘푸른 옷의 천사’로 불리는 대만의 국제구호활동가 증엄스님,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창한 티베트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현대 참여불교운동의 선구자인 태국 슐락 시바락사 등의 포교방법과 업적 등이 탁월하다.
인도 아쇼카왕 - 중국 달마스님 . 일본 도원스님 - 한국 원효스님
이 가운데 인도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아쇼카왕은 불교의 세계종교화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아쇼카왕의 업적 가운데 포교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3차 결집을 통해 최초로 경전을 문자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경전은 부처님 입멸 후 200년 동안 문자없이 구전돼 전해져 오다가 아쇼카왕에 이르러 문자로 정착됐다.
또한 아쇼카왕은 자녀들을 출가시켜 수행자로 만들었으며, 포교사들을 세계 각지로 파견해 불교를 널리 알렸다.
이와 더불어 인도 전역에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설립하고 부처님의 발자취에는 석주를 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단상들을 새겼다.
붓다고사스님은 5세기 중엽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와 싱할리어로 된 삼장, 즉 패엽경을 팔리(Pali)어로 번역하고 오늘날까지도 남방불교계의 가장 권위있는 논서를 손꼽히는 <청정도론> 등 여러 주석서를 집필했다.
달마대사는 선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깨달음과 평정한 마음을 내세우는 실천불교를 강조해 새로운 선 포교의 지평을 열었다. 달마대사의 선풍은 중국불교사에서 선종의 발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조계종에서 중히 여기고 있는 간화선 수행법의 뿌리가 됐다.
원효대사는 한국 불교사상과 철학사상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처음으로 대중화하고 실천화한 고승이다.
일본 조동종 개산조인 도원스님은 세속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이타행의 실천을 중시했다. 또한 신앙과 현실, 사회생활을 결부시키는 생활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보임으로써 불교의 생활화에 크게 기여했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 불가촉천민의 해방자,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 등으로 추앙받는 암베드카르 박사는 인도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던 불교의 불씨를 다시 살린 인물이다.
암바데카르 박사는 1956년 불가촉천민 50만명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그의 정신과 운동은 제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른 옷의 천사들’로 불리는 대만의 자제공덕회를 설립한 증엄스님은 대만에서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 한국불교의 포교전통의 특색과 업적을 남긴 스님
포교는 불교 안팎의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개인, 단체, 종단 등의 포교활동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전자가 객관적 요인이라면 후자는 주체적 요인이다. 포교는 이 두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며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의 전개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는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의 굴레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일제강점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서구 근대문명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이나 일본불교의 영향, 기독교 선교활동 등이 당시 포교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 종단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지식들은 혁신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각 교구본사가 인근 도시에 한 곳씩의 포교당을 세운 일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친 기독교적 종교정책과 한국전쟁 등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더불어 정화운동의 과정에서 비롯된 종단 내부의 분열과 갈등 등은 일제강점기에 태동된 포교활동의 계승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억불정책 벗어난 일제때부터 전개. 선지식들의 혁신적 포교활동 돋보여
한국불교에서 포교가 제도적으로 본격 추진된 것은 1960년대 초 통합종단에서 포교와 역경, 도제양성을 종단의 3대 숙원사업으로 설정한 뒤부터다.
이러한 포교의 제도화는 1970년대 초 종단분규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곧바로 포교효과로 나타났다. 다양한 포교단체들이 결성되어 포교활동을 집합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전국적 차원에서 포교단체들이 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장 단위의 직능별 포교조직도 활발하게 결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국의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불교학생회가 조직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94년 개혁종단의 탄생은 포교에 있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의 계기가 됐다. 이는 포교원이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포교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체제를 완비했기 때문이다. 우선 합법적 기반인 법적 근거로는 조계종 종헌 제66조에 “종단은 포교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포교원을 둔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종던 제66조부터 제72조까지 포교원과 관련된 법적 근거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이를 근거로 ‘포교법’이 입법화됐으며 조계종 신도법과 사찰운영위원회법, 군종특별교구법, 국제포교사관리령, 포교사단 관리에 관한 령, 일반포교사 선발 및 자격관리에 관한 령, 중앙신도회 설립 운영에 관한 령 등 포교와 관련된 다양한 법적 장치를 구비하게 됐다.
이어 포교원의 기구와 기능을 살펴보면 포교원은 크게 포교부와 포교연구실로 나눠진다.
포교부는 다시 포교국과 신도국으로 나눠지며, 포교원 산하에 신도교육위원회와 포교연구위원회 등 2개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앞서 살펴본 개괄적인 포교방법의 전개과정은 정등각자인 부처님의 개인적 능력에 의존했던 포교가 부처님께 포교의 부촉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포교대상의 지역별.영역별.분야별.시대별 확장이 이뤄졌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도화됐다고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근.현대 한국불교의 포교의 전개, 성과 및 대표 단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를 단순히 모방하거나 중국불교를 일본에 전한 가교구실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불교는 전래초기부터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사상면에서도 나름대로 독창성과 주체성을 갖고 있다. 한국불교는 교학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종파불교를 계승하면서도 그들 사이의 화해와 융합을 강조한 회통불교적 성적을 갖추고 있다.
겸익-원광-자장-의상스님
겸익스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계율을 통한 포교의 의미에 눈뜬 스님이다.
겸익스님은 최초로 불교 계율에 관한 경전을 인도에서 직접 들여와 번역해서 백제 율종을 창시한 스님이다. 겸익스님은 인도의 불교4대성지를 두로 참배하고 중인도의 상가나 대율사(大律寺)에 머물면서 인도 말과 학문을 깊이 연구했다.
스님은 귀국 후 범어 율문을 국내의 고승 28인과 함께 율부 72권으로 번역했다.
신라 원광스님은 진평왕의 명을 받고 ‘걸사표’를 지어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주술의 힘을 크게 믿던 시기에 맞게 점찰보를 개설해 불교에 입각한 도덕관으로 계율을 지키고 참회생활을 하도록 가르쳐 불교 토착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화랑도의 실천덕목인 세속오계(* 암기요함] 는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 군포교의 효시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자장율사는 당 유학을 마친 뒤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5대 적멸보궁을 세운 신라시대의 고승이다.
자장율사는 신라 조정의 비어있는 재상자리에 스님을 기용하려는 왕의 칙명을 듣고는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계율을 중시했다.
수행과 계율을 위해 벼슬도 마다한 자장율사의 업적과 일화는 명예와 권력을 지향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의상스님 은 한국 화엄종의 시조로서 이 땅에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 화엄의 가치관을 심은 대표적인 스님이다.
도의국사 는 신라 말 당시 교학 중심의 불교를 비판하고, 불성의 보편성을 강조해 신분 고하를 묻지 않는 선종의 본래 정신을 펼치고자 애썼다. 도
의국사를 중심으로 한 구산선문의 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사상을 ‘교’에서 ‘선’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교사적 의의가 크다.
의천-보조-보우-휴정스님
고려 의천스님 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태어난 뒤 11세 출가해 오직 전법을 발원하며 일생을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으며 천태교학을 발전시킨 고려 전기의 대표적 고승이다.
조계종 중흥조인 보조국사는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대립하고 있던 종래의 선교 양종에 대해 선을 중심으로 교를 통합한다는 전통을 확립했다. 돈오점수사상을 통해 본성이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그치지 말고 깨달음을 의지해 계속 닦아 나가라고 가르쳤다.
보우국사는 중국에 가서 임제종의 법을 잇고 귀국해 한국 선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임제종의 간화 종풍을 널리 떨치게 했다. 휴정스님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승군을 조직해 국가를 구하고 불교의 위상을 높여 군포교의 지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