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기다. 봄같기도 하고 여름같기도 하다. 거리마다 줄장미가 빼곡하다. 줄장미를 볼 수 있는 건 5월의 어느 한 때 뿐이다. 간절기는 간이역 가판대에서 급하게 사는 물건처럼 자세히 들여다 볼 여력을 주지 않는다.
계절이 바뀔 즈음이면 다음 계절을 맞이하는 바람이 쉼없이 불어온다. 봄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내리쬐는 햇살에 겉옷을 벗어들고 걷는다.
블라우스 사이로 파고든 바람은 어디에서 놀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아이들처럼 마음이 바쁘다. 치마 아랫단을 펄럭이던 바람은 이내 소맷단으로 빠져나간다. 휙 돌아선 바람이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머리 위로 뻗어있는 배롱나무 가지로 옮겨간다.
바람은 햇볕 아래 배롱나무꽃을 살짝 흔들어 그늘 속으로 데려간다. 그늘로 숨었다 다시 햇볕에 나타난 배롱나무는 태양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늘 다니는 길이라 배롱나무가 이토록 빛나는 꽃임을 알지 못했다. 여름을 알리는 배롱나무가 충실히 피어나 봄이 가고 있음을 알게 했다.
때마다 피는 꽃나무가 햇볕 속에서 빛나는 존재임을 알게 해준 건 바람때문이다. 배롱나무가 잠시 그늘 속으로 숨었다. 저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배롱나무를 밀고, 이쪽에 있던 나무는 순간 햇볕으로 떠밀린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건 꽃잎이 아니라 꽃을 받치고 있던 푸른 잎이었다. 배롱나무의 화려함이 햇볕에 돋보인거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전까지는. 바람은 배롱나무꽃을 잠시 그늘 속으로 데려가고, 다시 불어온 바람은 나무를 다시 햇볕으로 데려다 놓았다.
꽃잎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태양으로 향할 수 있게 떠민 바람이 배롱나무를 빛나게 해주었다. 꽃잎이 더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것도 꽃잎 아래서 열심히 꽃을 받치고 있던 잎들 때문이었다. 흡사 광고를 찍는 모델의 얼굴을 빛나보이게 하려고 밑에서 조명등을 쏘아올린 것 같았다.
곁에서 빛나는 것들을 알지 못하는 건 그것이 한 번도 그늘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은 무슨 무슨 날로 이름붙여진 날이 많다. 제목만큼 빛나는 부모도 제목에 붙일 빛도 잃어버린 부모도 한때 누군가를 반짝이는 햇볕으로 데려갈 수 있는 바람의 위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뉴스마다 어버이날이라고 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택가 골목길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어디를 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조명이 켜지기 전에 대기하는 배우같기도 하고, 완벽한 연극을 마친 배우의 여유같기도 했다.
지는 해를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위로 보이는 배롱나무잎이 돋보였다. 가만히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햇볕 아래에서도 햇볕을 찾는 모양새였다.
빛나는 것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반짝임도 함께 데려간다. 반짝임은 태양이 있어 알게 되지만 태양이 있음을 실감하는 건 바람이 우리를 그늘 속으로 데리고 갈 때다.
태양이 사라질 때 비로소 반짝이는 태양이 그립고, 바람이 불때 비로소 그 자리를 그리워하게 된다. 간절기는 늘 무언가 나가고 들어오고 반짝이고, 사라지고, 다시 채워지는 계절이다.
몰랐다.
배롱나무가 바람에 저토록 반짝이는 존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