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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창교수 동양학 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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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횡설수설 스크랩 고위공직자 111명과 아들의 병역 실태
바람공자 추천 0 조회 1,003 08.04.21 12: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李明博 정부」고위공직자 111명과 아들의 병역 실태
 
장관 15명 중 5명이 병역 면제,「盧武鉉 정부」보다 면제율 높아
차관·청와대 수석·비서관 70명 중 63명이 병역필… 盧정권보다 양호
 
수석비서관 9명 전원 병역의무 다해, 6명은 장교 출신

취재지원 : 金正友 月刊朝鮮 인턴기자〈hgu@chosun.com〉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장관 중 병역 면제자는 5명
李明博 대통령이 지난 3월12일 3군사령부에서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기 전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李明博(이명박) 정부」 내각 장관 15명 가운데 5명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月刊朝鮮은 李明博 정부의 장·차관급 인사, 청와대 수석비서관 111명, 그리고 그들의 아들의 병역의무 실태를 조사했다.
 
  이 가운데 병역을 면제받은 장관은 姜萬洙(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高齡·고령)과 金慶漢(김경한) 법무부 장관(獨子·독자), 李萬儀(이만의) 환경부 장관(생계곤란), 鄭鍾煥(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장기대기), 元世勳(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질병) 5명으로 조사됐다. 장관급인 全光宇(전광우) 금융위원회 위원장(질병)까지 포함하면 李明博 정부 장관급 면제자는 6명에 달한다.
 
  李明博 정부 장관들의 면제율은 33%를 기록, 「盧武鉉 정부」의 18명 중 5명(27.7%)을 앞지르고 있다. 총리와 장관 인선과정에서 논란이 된 부동산 투기 의혹, 논문 표절 못지않게 병역의무 이행에서도 문제가 컸음이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국가관을 의심받았던 盧武鉉 정부 장관들의 병역 면제율을 상회했다.
 
  李明博 정부의 병역검증 시스템 부재는 총리인준 청문회에서 드러났다. 지난 2월20일 국회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는 韓昇洙(한승수) 총리 후보자의 장남 병역 문제를 놓고 與野 간 공방이 벌어졌다.
 
  통합민주당 의원들은 『후보자의 장남이 현역 복무 대신에 방위산업체에서 병역특례로 근무하던 중 14차례 해외를 방문, 244일간 해외에 체류했다』며 『이 중 두 차례는 해외로 골프를 치러 가는 등 불성실하게 근무했다』고 주장했다.
 
  姜萬洙 기획재정부 장관은 1969년 입영 후 귀가조치됐으며, 「2을종」 판정으로 1973년 보충역 복무 대상자였다. 그는 행정고시 합격 후, 1974년부터 국세청과 세제국에 근무하다 1976년 「고령」(31세)을 이유로 소집이 면제됐다. 그의 장남은 보충역(육군 이병)으로 복무했고, 차남은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金慶漢 법무부 장관은 「독자」인 관계로 1970년 보충역에 편입됐다가 5년뒤 고령(31세)이라는 이유로 소집이 면제됐다. 장남은 보충역(육군 이병)으로 제대했다.
 
 
  元世勳 장관 장남, 병역특혜 의혹
 
 
  元世勳 행정안전부 장관은 1971년 보충역으로 분류된 뒤 「질병」을 이유로 소집이 면제됐다. 元장관은 청문회에서 장남의 병역특혜 의혹으로 야당 의원들의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다.
 
  서울지방병무청이 국회에 제출한 元世勳 장관 장남(29)의 병적기록에 따르면, 元장관의 장남은 2003년 8월 입대한 뒤 그해 10월 서울소방방재본부 산하의 동작소방서에서 의무소방대원으로 대체복무를 시작했다.
 
  元世勳 장관은 그해 11월 서울소방재난본부를 지휘, 감독하는 서울시 행정1부시장으로 승진했다. 행정1부시장은 소방재난본부 등의 인사권을 갖는 자리였다.
 
  통합민주당 李仁榮(이인영) 의원은 『아들 元모씨가 「6개월 파출소 근무」라는 관례를 깨고 자대 배치 한 달 만에 동작소방서 소방행정과에서 지원근무를 하기 시작했다』면서 『아들은 2004년 서울시 산하기관인 소방방재본부 경리팀과 총무팀으로 보직이 변경돼 복무를 마쳤다』고 주장했다.
 
  의무소방대원은 화재가 났을 때 현장에 출동해 소방원을 돕는 역할을 하나, 아들 元씨는 상대적으로 편한 행정부서 내근만 했다는 것이다.
 
  元世勳 장관의 아들은 근무기간 중 많은 휴가를 사용해 또 다른 특혜 의혹을 샀다. 아들 元씨는 2005년 10월30일 제대하기까지 10개월 동안 외박 20일, 정기휴가 20일 등 도합 40일의 휴가를 사용한 것으로 병적기록에 적혀 있다. 元장관의 아들은 2005년 10월 제대하면서 李明博 당시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월중 직무 유공」이란 명목으로 「표창」을 받았다.
 
  鄭鍾煥 국토해양부 장관은 1970년 「무종」(再신체검사 대상)으로 분류돼 귀가한 뒤 재검을 통해 1974년 보충역에 편입됐다. 이후 1975년 「장기대기」라는 이유로 소집이 면제됐다. 장남은 신체검사에서 「위 절제술」이라는 질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鄭장관은 「본태성 고혈압」으로 재검 대상이 된 뒤 입영을 기다리다 소집면제됐고, 장남은 십이지장 천공수술이라는 큰수술을 받아 면제됐다』고 했다. 鄭장관의 차남은 보충역(육군 이병)으로 복무했고, 3남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복무했다.
 
  李萬儀 환경부 장관은 신검에서 「갑종」 판정을 받고 세 차례에 걸쳐 입영연기를 하다 면제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李장관은 「1969~1971년 동안 세 차례 입영을 연기하다 면제를 받은 게 생계곤란 때문이 아니라 행정고시 준비를 위한 병역기피 아니냐」는 추궁에 『대학 4년 동안 하루도 점심을 먹지 못해 어지럼증(현운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부인했다. 李장관은 1972년 제11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李장관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서 『선친 소유의 논을 처분하고 1971, 1972년 전남 담양의 논(1071m2)과 밭(3455m2)을 각각 매입해 장손인 내 명의로 등기했다』고 밝혔다. 통합민주당은 『그 정도 논 살 돈 있는 집안 사람이 「못 먹어 병이 있다」고 해명하느냐』고 반박했다.
 
  李永熙(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경우 1962년 1월 입대했으나 이듬해 7월 육군 상병으로 「귀휴」 조치된 것으로 기록됐다.
 
 
  梁建 위원장, 陸士에서 법학 교관
 
 
  金道然(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보충역(육군 이병)으로 복무를 마쳤고, 李允鎬(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柳仁村(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鄭雲天(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육군 병장, 柳明桓(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金夏中(김하중) 통일부 장관, 金聖二(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합참의장을 지낸 李相憙 국방장관은 육군 대장으로 전역했다.
 
  장관급 고위 공직자 중 崔時仲(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복무했다. 崔時仲 위원장은 1958년 7월 입영해 1960년 8월까지 육군 일병으로 복무하다 「귀휴」 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장남은 1989년 「제2국민역」 처분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 120kg에 육박하는 過(과)체중으로 신체검사에서 5등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金成浩(김성호) 국정원장은 1979년 10월 해군 대위로 만기 전역했고, 장남은 2006년 1월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차남은 1996년 4월 신체등급 3급으로 현역병 입영대상 처분을 받았지만, 1997년 3월 콩팥 계통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腎(신)증후군」을 이유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全光宇(전광우)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병역을 면제받았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全光宇 위원장은 고교 3년을 6년에 다닐 만큼 기흉 등 각종 질병을 앓았고, 「체중과소」로 면제판정을 받았다』면서 『2007년 외교통상부 국제금융대사 임명을 받을 때 전부 검증을 받았다』고 했다.
 
  全光宇 금융위원장의 장남은 미국 국적자로 병역의무 이행 대상이 아니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全光宇 위원장이 미국 유학 때(1985년) 태어난 장남은 특수한 질병을 앓고 있어 고민 끝에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으로 안다』면서 『현재 미국에서 신병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柳佑益(류우익) 대통령실장은 1971년 2월 학군장교(ROTC) 9期로 임관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지리학을 강의했다. 1975년 6월까지 4년 4개월간 교수부에 근무하다가 독일 킬大로 유학을 떠났다. 柳실장의 장남은 1군단 예하 1포병여단에서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趙重杓(조중표) 국무총리실장은 해군중위로 복무했고, 梁建(양건)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은 「특수간부후보생」으로 선발돼 1972~1975년 육군사관학교에서 법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다 대위로 전역했다. 白容鎬(백용호)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근무했다.
 
  정치컨설팅 「민」의 朴聖珉(박성민ㆍ44) 대표는 『李明博 대통령은 大選 때 국민들이 몰아 준 530만 표라는 표의 힘을 믿고 능력만 있다면 대중들이 경력과 병역이행 여부를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면서 『임명직에 대해 국민들이 도덕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후보자들의 병역사항을 더 면밀하게 조사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차관 아들 가운데 8명이 병역면제
 
 
  月刊朝鮮이 李明博 정부 내각·청와대의 장·차관급 인사 77명 중 여성(4명)을 제외한 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1명(69.8%)이 장교·사병으로 복무했으며, 보충역 12명(16.4%), 면제 10명(13.6%)인 것으로 나타났다.
 
  月刊朝鮮이 조사한 李明博 정부의 장·차관급 인사들의 병역의무 이행률(86.3%)은 盧武鉉 정부 초기 내각의 병역 이행률(82%)보다 약간 높게 나타났다. 盧武鉉 정부 내각·청와대의 장·차관급 인사 중 여성(5명)을 제외한 67명의 병역이행 실태는 35명(52.5%)이 장교·사병으로 현역복무를 했으며, 보충역 20명(29.9%), 면제 12명(17.9%)인 것으로 나타났다.
 
  月刊朝鮮은 李明博 정부의 장·차관급 이상 아들들의 병역 이행실태를 분석했다. 조사 결과, 병역이행 대상자 72명 중 45명이 병역 의무를 이행했거나 복무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필자 27명 가운데 8명은 과체중과 미국 국적 등의 사유로 면제(11.1%)를 받았다.
 
  장관급 공직자의 아들(18세 이상 남자) 중에는 崔時仲 방송통신위원장의 장남, 金成浩 국정원장의 장남, 鄭鍾煥 국토해양부 장관의 장남, 全光宇 금융위원회 위원장 장남, 魚淸秀(어청수) 경찰청장의 장남 등이 면제를 받았다.
 
  2004년 병무청에서 밝힌 출생연대별 국민 평균 병역 면제율은 1940년대 출생자 38.5%, 1950년대 출생자 33.8%, 1960년대 출생자 30.5%, 1970년대 출생자 16%다.
 
  병무청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년간 평균 면제율(4.1%)은 최초 징병검사 면제율을 의미한다』면서 『당사자들이 병역의무를 이행하면서 최종적으로 집계되는 면제율은 당연히 30%대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관 병역 면제자 4명뿐
 
  차관급 고위공직자의 경우, 43명 가운데 39명이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병역을 마쳐, 실제 병역이행률은 90.6%에 달했다. 여성인 李鳳和(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을 제외한 차관 43명 중 병역 면제자는 4명(7.8%)이다.
 
  朴鍾九(박종구) 교육과학기술부 2차관이 「고도근시」, 金長實(김장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중이염」, 尹汝杓(윤여표)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은 「생계곤란」, 李昌鏞(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무릎인대 절단」으로 각각 면제를 받았다.
 
  육사 27기 출신인 金鍾千(김종천) 국방부 차관은 2006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장남은 23사단에서, 차남은 8사단에서 각각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崔重卿(최중경) 기획재정부 1차관, 文晟祐(문성우) 법무부 차관이 육군 중위로 전역했고, 權鍾洛(권종락) 외교통상부 1차관, 鄭鍾秀(정종수) 노동부 차관이 해군 중위로 병역을 마쳤다. 金榮浩(김영호) 행정안전부 1차관이 공군 대위로 군 생활을 했다.
 
  裵國煥(배국환) 기획재정부 2차관, 禹亨植(우형식) 교육과학기술부 1차관, 洪良浩(홍양호) 통일부 차관, 丁鶴秀(정학수) 농림수산식품부 1차관, 林采民(임채민) 지식경제부 1차관, 權度燁(권도엽) 국토해양부 1차관, 李在均(이재균) 국토해양부 2차관 등이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李載勳(이재훈) 지식경제부 2차관, 朴德培(박덕배) 농림수산식품부 2차관은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다. 朴차관의 장남은 3군지사 보급대에서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고, 차남은 제1포병여단에서 육군 병장으로 병역을 필했다.
 
  보충역으로 군에 다녀온 차관들은 金星煥(김성환) 외교통상부 2차관(육군 일병), 鄭男埈(정남준) 행정안전부 2차관(공군 일병), 申載旻(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육군 일병) 등이 있다. 申차관은 「獨子」 사유로 6개월 보충역 처분을 받았다. 鄭차관의 장남은 「불안정성 대관절」로 면제됐다. 李炳旭(이병욱) 환경부 차관은 남양주 미금훈련장에서 3주간 훈련을 받고 1980년 특례보충역으로 「대한전선」에서 3년간 근무했다고 한다.
 
  朴鐵坤(박철곤)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고, 장남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정독도서관에서 근무 중이다. 金永哲(김영철)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차관급)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39사단에서 복무했고, 장남은 작년 6월 전투경찰로 입대해 중앙경찰학교에서 복무하고 있다.
 
 
  白凡 손자 김양씨, 공군 중위 전역
 
 
  白凡 金九 선생의 손자인 金揚(김양) 국가보훈처장은 아버지 金信(김신) 前 공군 참모총장의 뒤를 이어 공군 중위로 군에 다녀왔다. 장남은 조지워싱턴大에 유학하고 있다고 한다.
 
  차관급인 徐東源(서동원)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해군 대위로 복무했다. 朴仁濟(박인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은 육군 병장, 李榮根(이영근)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은 보충역(육군 일병), 金弼圭(김필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은 공군법무관(대위)으로 근무했다.
 
  李昌鏞(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병역이 면제됐다. 그는 『석사장교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하버드大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농구시합을 하다 무릎 인대가 절단됐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수술하고 1년 후 재신검을 받아 제2국민역으로 편입됐다』면서 『지금도 수영과 골프 등 가벼운 운동만 가능하고, 농구나 테니스, 축구 등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다』고 했다.
 
  魚淸秀(어청수) 경찰청장의 장남은 「질병」으로 면제를 받았다. 魚청장 본인은 해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李明博 정부 들어서 임명한 韓相律(한상률) 국세청장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병역을 마쳤고, 장남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제대군인 가산점 폐지는 곤란』
 
 
  李石淵(이석연) 법제처장은 5사단 정훈장교(육군 중위)로 병역을 마쳤다. 1981년 5월부터 1984년 7월까지 3년을 복무했다.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법제처로 발령을 받은 그는 「특임장교」제도에 따라 중위로 임관했다.
 
  ─어떤 보직을 받고 어느 부대로 가셨습니까.
 
  『45명의 동기들과 함께 5사단 정훈장교로 갔습니다. 적 GP(경계초소)가 불과 40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리 측 GP에 가서 「패튼 대전차 군단」이라든지 「미워도 다시 한번」 등 일반 영화를 상영해 주었습니다. 수색대대 병사가 지뢰를 밟아 즉사하는 현장도 목격했습니다. 합참의장을 지낸 鄭鎬根(정호근) 당시 5사단장이 軍紀를 세게 잡았습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된 이재흥 5사단 법무참모(대위)를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정훈교육했던 것 중에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5공화국 때 장교들을 대상으로 헌법교육을 했어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하는 조항만 손보면 기본권은 진보적이고 괜찮다」는 취지로 강의했더니 보안대에서 펄쩍 뛰면서 내게 경위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장남은 군에 다녀왔습니까.
 
  『눈이 워낙 나빠 재검까지 받은 끝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다녀왔습니다. 군대를 보내려고 당시 許南吾(허남오) 서울지방병무청장을 찾아가 「현역으로 가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라식수술을 받고 현역으로 가려다 수술의 부담 때문에 결국 공익요원으로 서울시립병원(現 서울의료원)에서 2년 2개월간 근무했습니다. 영안실에서 근무하고 돌아와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더군요』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인 1999년 「제대군인 가산점제도」가 부당하다며 위헌신청을 하셨죠. 군대에 갔다 오신 분으로서 왜 「제대군인 가산점」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습니까.
 
  『헌법적 양식에 비춰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용시험에서 제대 군인에게 만점의 3% 또는 5%를 가산해 주는 것은 명백하게 「평등권」, 「공무담임권」을 위배한 겁니다. 장애인들은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헌법소원을 내 「단순위헌 결정」을 받아낸 겁니다.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향후 「제대군인 가산점」 제도가 어떻게 정비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국방부 주장처럼 옛날처럼 부활시킬 수는 없지만 조화롭게 추진해야 합니다. 동점자 처리에서 우선권을 주거나 1~2% 선에서 가산점을 주는 절충안이 있습니다. 게다가 헌법 제35조 2항에는 「병역의무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병역의무 이행자에 대해 국가가 헌법적 가치를 구현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 엄마, 혹시 계모 아니냐』
 
 
  南一浩(남일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대입수능시험, 「황우석 사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감사를 무리 없이 지휘했다. 그는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고, 장남은 2006년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朴鍾達(박종달) 병무청장(육사 29期)은 육군인사사령관 시절, 「유가족찾기특별팀」을 설치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육군인사사령관(중장)으로 예편했다. 장남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고, 차남은 보충역(육군 이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梁致奎(양치규) 방위사업청장(육사 29期)은 방사청 KHP사업단 체계관리부장을 지내면서 백두사업 등 굵직한 사업을 맡아 왔다. 그는 2006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崔成龍(최성룡) 소방방재청장은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했고, 장남은 육군 병장으로, 차남은 공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李健茂(이건무) 문화재청장은 30년 넘게 박물관에서 일해 온 대표적인 고고학자다. 그는 학군장교(ROTC)로 1971년 중위로 전역했다. 장남은 원주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상병으로 군복무 중이라고 한다. 李秀華(이수화) 농촌진흥청장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尹汝杓(윤여표)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은 20년 넘게 충북大 약대에서 약대교수로 일하면서 국제학술지에 1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예방약분 분야의 권위자다. 그는 「가사사유」로 면제됐다. 尹청장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남이 집안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가사사유로 면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尹청장의 장남은 공군 병장으로 제대했고, 대학생인 차남은 입영대기 중이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大 규장각 관장에 올랐던 鄭玉子(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그녀는 여자로서 병역의무는 없지만 두 아들의 병역 때문에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차남은 병역면제가 됐고, 장남은 대전국립묘지에서 조리병으로 전역(육군 병장)했다고 한다.
 
  『1986년 서울大 교수 49명과 함께 全斗煥(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하면서 차남의 軍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운동에 나서자 남편의 사업체가 타격을 받았고, 충격을 받은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공장을 전전했습니다. 1986년 춘천지방병무청에 알아보니 중졸 학력으로는 현역으로 갈 수 없었어요.
 
  체력도 좋은 아이였는데 학력 미비로 軍에 못 갔으니 부모로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방황하던 아들이 마음을 잡고 충남産業大(청운大)에서 주경야독 했어요. 지금은 서울大 대학원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에 진학해 기술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옵니다.
 
  첫째 아이는 대전국립묘지에서 육군병장으로 제대했어요. 수증기로 밥을 짓는 아들에게 고참이 「네 엄마가 교수라면 이런 곳에 보내겠느냐」, 「혹시 엄마가 계모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아무튼 고생들을 했지만 군에서 어려움을 이겨 내고 강한 자식들로 성장한 게 얼마나 대견스러운지요』
 
  수필가인 鄭章植(정장식) 중앙공무원연수원장은 1979년 해군 중위로 전역했고, 지방행정관료인 姜秉圭(강병규) 소청심사위원장은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그의 장남은 올 7월 입대 예정이다. 동북공정 이론가인 고대사학자 崔光植(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학군장교(ROTC) 14期 출신으로 1978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수석비서관 9명 전원 병역필, 장교 출신 6명
 
 
  李明博 정부의 청와대 파워 엘리트들의 병역 이행실태는 어떨까. 한밤중까지 계속되는 회의 중간중간 전화를 시도해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을 취재했다.
 
  月刊朝鮮 취재 결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9명 가운데 면제자가 한 명도 없었고, 장교 출신이 6명이나 됐다. 비서관 38명(여자 4명 제외)은 현역 24명, 보충역 9명, 면제 5명으로 병역을 마친 것으로 조사됐다. 비서관들의 병역이행률은 86.8%, 면제율은 13.2%였다.
 
  장관급인 대통령실장을 제외한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 51명 가운데 黃俊基(황준기) 행정자치비서관, 姜薰(강훈) 법무비서관, 金泰孝(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金在信(김재신) 외교비서관, 李善龍(이선룡) 환경비서관 등 5명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郭承俊(곽승준) 국정기획수석은 1986년 6개월간 석사장교로 복무했다. 郭수석은 『미국에서 출생한 장남은 洪準杓(홍준표) 의원이 주도한 「신국적법」 때문에 현재 「이중국적」 상태』라면서 『카네기멜론大 1학년생인 아들이 학업을 마치는 대로 귀국시켜 병역을 마친 다음 한국 국적을 선택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洪準杓 의원이 주도해 2005년 통과된 「新국적법」은 해외 단기체류자의 자녀가 해당 국가의 국적을 취득한 경우, 병역 의무를 마치기 전에는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朴宰完(박재완) 정무수석은 1978년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朴수석은 『동국大 의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장남은 의대를 졸업하는 대로 군의관으로 입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李鍾燦(이종찬) 민정수석은 1975년 10월 특전사령부에서 법무관(대위)으로 전역했다. 장남은 美2사단에서 카투사병으로 근무 중이다.
 
  金炳局(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보충역(육군 상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그는 『육군본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다』면서 『미국 유학 중인 장남(23)은 올 8월 징병신체검사를 위해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
 
  金仲秀(김중수) 경제수석은 육군 병장으로 35개월간 군생활을 했고, 李周浩(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은 1986년 2월 석사장교(육군소위)로 군 생활을 했다. 李東官(이동관) 홍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은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金仁鍾 처장의 사연
 
 
  金仁鍾(김인종) 경호처장(육사 24期)은 육군본부 2군작전처장, 수도방위사령관, 국방부정책보좌관(중장) 등 요직을 거쳐 2군사령관(대장)을 끝으로 2001년 10월 軍門을 나섰다. 장남은 의병전역(육군 상병)을 했고, 차남은 2기갑여단에서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장남의 병역과 관련, 일부 언론에서 병역특혜가 아니냐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쓰입니다. 장남의 의병전역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장군의 아들」이라며 비아냥거려선 안 됩니다』
 
  金仁鍾 처장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1994년 육사 50期로 장남이 입학할 때만 해도 군인의 길을 함께 가는 아들이 나왔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1년간 육사생도로서 생활을 잘 하던 아들이 어느 날 「못 다니겠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아버지도 생도 시절 퇴교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며 달랬지만 1년 만에 퇴교하고 말았습니다』
 
  ─퇴교한 이유를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본인은 끝내 말을 안 했어요. 육사 선배들이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가혹행위를 해서 위장을 다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 당시 제가 50사단장이었어요. 아들은 다시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치려 했으나, 「거식증」으로 1년 만에 상병으로 「의병전역」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회복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金처장은 『아들은 24개월을 복무하고 상병으로 제대했지만, 아비로서 軍에 들어온 자식을 지키지 못한 것은 恨(한)으로 남는다』고 했다.
 
 
  金伯駿 총무비서관, ROTC 1期
 
  金伯駿(김백준)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은 학군장교(ROTC) 1期로 병역을 마쳤다. 장남은 질병으로 징병검사 5급판정을 받아 면제됐고, 차남은 보충역(공익근무요원)으로 26개월을 근무했다. 金禧中(김희중) 제1부속실비서관은 1991년 강원도 화천 15사단에서 육군 병장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朴明順(박명순) 제2부속실비서관은 『큰아들은 연세大 법대에 다니다 공군 학사장교(115期)로 입대해 중위로 복무하고 있다』면서 『고려大에 다니는 둘째도 대학을 마치고 장교로 가려고 한다』고 했다.
 
  李泰珪(이태규) 연설기록비서관은 공군 병장으로 35개월간 서울 동작구 대방동 공군본부에서 근무했다. 金昌範(김창범) 의전비서관은 『1982년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복무했고, 장남은 올 3월 해병대 통역장교(소위)로 임관해 「악으로 깡으로!」를 외치고 있다』고 했다.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15개월간 근무했다.
 
  金明植(김명식) 인사비서관은 해군 중위로 복무했다. 장남과 차남 모두 재학생 입영연기를 한 상태다. 金相浹(김상협) 미래비전비서관은 석사장교로 6개월간 복무했고, 許京旭(허경욱) 국책과제1비서관은 해군 중위로 병역을 마쳤다. 李星求(이성구) 국책과제2비서관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복무했다.
 
  梁裕錫(양유석) 방송통신비서관은 『암호병으로 27개월간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면서 『장남은 미국에서 출생했고, 얼마 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했다. 張다사로 정무1비서관은 『1982년 진해의 육군군수사령부에서 30개월간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고 했다.
 
 
  李相睦 비서관, 방공포병 출신
 
  기자 시절,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를 했던 金斗宇(김두우) 정무2비서관은 1989년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秋富吉(추부길) 홍보기획비서관은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복무했고, 장남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고 한다.
 
  黃俊基(황준기) 행정자치비서관은 1978년 병역면제를 받았다. 사유는 「고도근시」였다. 장남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고, 차남은 산업기능요원으로 「게임빌」社에서 대체복무를 했다. 張容碩(장용석) 민정1비서관은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입대해 1987년부터 3년간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근무했다』면서 『군법무장교(헌병 소속)로서 중위로 임관해 중위로 전역했다』고 했다. 金康旭(김강욱) 민정2비서관은 1985년 2월 석사장교로 병역을 마쳤다.
 
  姜薰(강훈) 법무비서관은 1978년 징집면제를 받았다. 姜비서관은 『마이너스 6.75디옵터(수정체 굴절률)의 고도근시로 인해 병역을 면제받았다』면서 『장남(22)은 송파구청 소속 공익근무요원으로 2년2개월간 근무했다』고 했다. 牟康仁(모강인) 치안비서관은 가사사정으로 6개월간 복무하다 제대했고, 장남은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李相睦(이상목) 민원제도개선비서관은 방공포병 출신이다.
 
  『방공포병은 현재 공군이지만, 1976년 제가 군생활을 할 무렵에는 소속이 육군이었습니다. 33개월10일간 육군 하사로 원없이 복무하다 나왔습니다』
 
  金泰孝(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은 신체검사에서 「제2국민역」 판정을 받고 병역이 면제됐다. 金비서관은 『어릴 적부터 고도근시가 심해 병역을 면제받았다』면서 『라식수술을 했으나 시력이 0.3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을 지낸 金在信(김재신) 외교비서관은 『대학 3학년 때 받은 신체검사에서 「마이너스 8디옵터」가 나오는 바람에 병역을 면제받았다』면서 『장남은 올해 신검을 받고 현역병 입영대상』이라고 했다.
 
  李弘基(이홍기) 국방비서관(육사 33期)은 합동참모본부 합동작전과장, 3군사령부 작전처장, 32사단장을 거쳐 국방부 정책기획관(육군 소장)을 지낸 「현역」이다. 장남은 공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嚴鍾植(엄종식) 통일비서관은 1986년 공군 중위로 전역했고, 김동연 재정경제1비서관은 1978년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학군장교(ROTC) 출신인 金俊經(김준경) 금융비서관은 중위로 전역했다. 金東善(김동선) 산업비서관, 宋宗鎬(송종호) 중소기업비서관, 閔勝奎(민승규) 농수산비서관은 육군 병장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본부장을 지낸 盧然弘(노연홍) 보건복지비서관은 1996년 2월부터 1998년 9월까지 육군 하사로 복무했다.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은 학군장교 26期로 27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李善龍 환경비서관은 병역을 면제받았다. 李비서관은 『초등학교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무릎에 복합골절이 생겼다』면서 『3차 신체검사를 거쳐서 군의관들이 훈련하기에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지금도 체중이 늘면 활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배용수 춘추관장, GP서 근무
 
  千歲英(천세영) 교육비서관은 7사단군단포병으로 근무하고 1980년 육군병장으로 제대했다. 金昌經(김창경) 과학비서관은 1985년 6개월간 석사장교를 다녀왔다. 金烋鐘(김휴종) 문화예술비서관은 보충역(육군상병)으로 육군35사단에서 근무했다. 牟喆敏(모철민) 관광체육비서관은 1983년 보충역(육군 일병)으로 복무했다.
 
  청와대 춘추관장인 裵庸壽(배용수) 대변인실 2부대변인은 28사단 81연대에서 1979년 11월까지 근무하다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그는 『2005년 연천총기사건이 났던 530 GP가 내가 경계 근무하던 GOP초소 바로 앞에 있었다』면서 『제대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예비군복을 입고 후배 병사들이 포탄을 나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장남(22)은 포병 병장으로 강원도 홍천에 근무하다 작년 7월 제대했다.
 
  朴興信(박흥신) 대변인실 언론1비서관은 25사단에서 육군병장으로 군생활을 마쳤고, 郭卿洙(곽경수) 대변인실 언론2비서관은 육군 병장으로 병역을 마쳤다. 郭비서관은 『2군단 포병여단 직할부대에서 견인포를 설치하기 위해 추운 겨울날 곡괭이질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고 했다.
 
  3代에 걸쳐 10명이 현역으로 복무해 2007년 병무청이 선정한 「최고의 병역이행 명문가」 대상을 받은 김형중(52·경기도 양평)씨. 그는 『우리 사회 부유층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병역문제를 둘러싼 비리는 힘없는 서민들에게 「有錢(유전) 면제, 無錢(무전) 복무」라는 말을 실감케 하고 있다』고 했다.
 
  金씨는 『정부 인사가 발표돼 병역 잡음이 생길 때마다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면서 『군대에 안 간 사람들이 「장군의 아들」이나 「神의 아들」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는 한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 駐美공사 시절, 유학생 아들 군복무시킨 柳明桓 외교통상부 장관
 
  『「배고픔의 의미 알게 됐다」는 이등병 아들의 편지 받고 가슴 뭉클』
 
 
  장교에 매력 느껴 ROTC 지원
 
  육군 중위로 전역한 柳明桓 외교통상부 장관은 駐美공사 시절인 199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아들(유현준)을 한국에 보내 군복무를 마치게 했다. 지난 3월12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장관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1970년 2월 학군장교(ROTC) 8期로 임관하셨더군요.
 
  『당시 서울大 법대생들은 학군 장교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선·후배들 가운데 ROTC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죠. 육군 장교에 매력을 느껴 ROTC를 지원했습니다. 李東震(이동진) 前 나이지리아 대사, 김용국(金箕斗 서울법대 학장의 아들) 등 서울법대 66학번 동기들이 신청을 했습니다. 제복을 입고 법대 강의실에 나타나니까 전부 놀랐어요』
 
  ─임관해서 병과는 어디로 결정됐습니까.
 
  『광주의 보병학교로 가는 대신 통역장교에 합격해 용산 국방회관 자리에 있던 통역장교 교육대로 갔습니다. 8사단 포병장교로 발령이 날 즈음, 육군 보안사령부(舊특무대)로 가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습니다』
 
  1970년 초 국방부는 베트남 전쟁과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정세 분석의 필요를 느껴 정세 분석기관인 「시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柳明桓 소위는 서울大 동기인 李在明(이재명, 李甲成 선생 증손자) 前 국회의원, 연세大 출신인 홍성복(在美)씨와 함께 그곳에서 근무했다.
 
  『간부들에게 브리핑을 하기 위해 뉴스위크」나 「타임」, 일본의 「세계주보」 등 국내외 신문이나 잡지들을 분석했습니다. 군생활을 이곳에서 한 것은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1972년 전역한 그는 외환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외무고시를 준비해 1973년 7월 외무부에 入部(입부)했다.
 
  『외무부 입부 동기 24명 가운데 나와 愼長範(신장범) 한국국제협력단 총재, 金夏中 통일부 장관 셋이 여권과에 배속됐습니다. 당시 中東 진출 러시라 하루 여권신청 건수가 700건을 넘었습니다. 여행사들이 창구에서 「빨리 발급해 달라」며 난리를 피우자 여권과 직원들은 행정경험 있고 통솔력이 있는 장교 출신들을 그곳에 배치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군대 가는 아들 전송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아드님 병역 문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장남이 미국 조지워싱턴大 비즈니스스쿨 3학년에 다닐 때였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들어와서는 「영주권이 있는 여성과 결혼한 친구가 군대를 안 가게 돼 축하파티를 해주었다」고 해요. 아차, 싶어 서둘러 토플시험을 치르게 하고 1998년 연말에 카투사 입대신청을 하게 했습니다』
 
  柳明桓 장관은 당시 駐美공사로 워싱턴에 근무하고 있었다.
 
  『징집영장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찰스 카트만 KEDO 사무총장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어요. 군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아들을 공항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한 달 후 柳明桓 공사 앞으로 한국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아들 현준씨가 보낸 편지였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제가 이제껏 부모님의 고마움도 모르고 부르주아처럼 살았습니다. 훈련소에서 배고픔의 의미도 알았습니다. 앞으로 아버지의 부끄럽지 않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군생활해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생겨』
 
  『추운 겨울날 美8군內에서 차를 정비하느라 고생했답니다. 아들이 26개월 복무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왔습니다. 군대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나타난 아들이 그렇게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체중이 줄고 스마트해졌더군요. 지금 미국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요』
 
  ─최근 미국 유학 중 출산해서 미국국적을 취득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으려는 풍조가 있습니다.
 
  『외교관 자녀의 어려움은 외국어는 할 줄 알지만 한국 문화에 약합니다. 군대에 안 가면 조국에 대한 애착심이 없습니다. 안 보내려면 안 보내는 이유가 생기는 것이고, 보내려고 한다면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조국에 대한 유대가 없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조국에 추억이 없습니다. 연어가 회귀본능이 있듯이 군생활을 해야 조국을 찾게 됩니다. 아들은 카투사 복무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이란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해외 공직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어떻게 실천합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는 서양사회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을 잘 아실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폰트랩家(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오스트리아 해군 대령인 폰트랩처럼 귀족들은 군대에 가고 전쟁터에서 죽기 때문에 존경받습니다.
 
  영국 왕위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자가 아프가니스탄 교전 지역 근무를 자원한 것을 보십시오. 그런 철학을 우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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