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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동서문학 제32호 시조 계간평
시조에서의 비유와 참신성
권 혁 모
“얘가 파랑이란다 / 여기는 파랑이네 집이야, 엄마 아빠랑 파랑이 세 식구가 살지 / 파랑이는 친구도 많아 /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는 노랑이야 ~
유치원만 끝나면 달리기도 하고, 팔짝팔짝 뛰기도 해 / 어느 날 엄마가 나가면서 말했어 ‘집 잘 보고 있어 파랑아!’ / 하지만 파랑이는 노랑이랑 놀려고 밖으로 나갔어 / 저런, 노랑이네 집이 텅 비었네 / 파랑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 /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 그때 갑자기 길모퉁이에서 / 노랑이가 나타났어 / 너무 기뻐서 둘을 꼭꼭 껴안았지 / 그렇게 꼭꼭 껴안고 있다 보니 어느새 둘은 초록이 되어 버렸어 / 초록이는 공원에도 놀러 가고 / 굴속을 달려가기도 했어 ~
그러다 지쳐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어 / 그런데 파랑이 엄마 아빠가 이러는 거야 ‘넌 우리 파랑이가 아냐, 넌 초록이잖아!’ / 노랑이 엄마 아빠도 그러는 거야 ‘넌 우리 노랑이가 아냐, 넌 초록이잖아!’ / 파랑이와 노랑이는 너무너무 슬퍼서 파란 눈물, 노란 눈물을 뚝뚝 흘렸지 / 울로 울고 또 울자 둘은 몽땅 눈물이 되고 말았어 / 겨우 울음을 그치자 둘은 다시 파랑이와 노랑이가 됐어
‘이젠 우릴 알아보겠지?’/ 파랑이 엄마 아빠는 파랑이를 찾아서 너무너무 기뻐했어 / 파랑이를 꼭꼭 껴안고, 뽀뽀도 쪽쪽 / 노랑이도 꼭꼭 껴안고 …
어, 그런데 엄마 아빠가 초록색이 됐어 / 이제야 엄마 아빠도 모든 걸 알게 됐지 ~“
네덜란드의 동화 작가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파랑이와 노랑이』의 부분이다. 기차 안에서 손주들을 달래기 위해 잡지를 찢어 놀아주다가 탄생한 책으로, 당시 뉴욕 타임스 ‘최고 그림책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의 힘은 무엇보다 은유(metaphor)에 있다. ‘파랑’과 ‘노랑’이 지니는 이미지 융합 과정을 재미있는 동화 놀이로 그려 놓았다. 파랑과 노랑으로부터 초록의 이미지 합성이 어린이들에게 무한한 환희와 감동의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다.
시(시조)에서도 마찬가지다. 파랑이와 노랑이라는 관념이 서로 꼭꼭 껴안아 초록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탄생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시의 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에 해당할 것이다. 시인이 표현하려는 사물의 객관적인 현상과 심상의 움직임 등을 기존의 현상과는 다른 사물에 빗대어, 보다 구체적이고 새로운 연상을 가능하게 하는지의 여부에서 시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다.
시에서의 표현 방법을 ‘비유’와 ‘상징’, ‘반어(irony)’ 그리고 ‘역설(paradox)’이라 한다면, 무엇보다 비유에 의한 비중이 전부라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어떤 시작詩作 지도 과정에서 “시와 비시非詩는 ON 아니면 OFF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였다. 어떤 작품이 ‘시에 가깝다’라는 말은 이미 시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시는 생각이나 느낌을 보편적인 언어 질서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언어 질서로 새로운 이미지를 탐색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원되는 다양한 비유의 기법이 작품성을 판가름할 것이다. 특히 다른 대상을 끌어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치환을 시도한다. 이 때 유추나 공통성이 지닌 암시에 따라 새로운 관념으로 병치하여 표현할 때 사용되는, 원관념(A)과 보조관념(B)에서 시의 품격이 보인다. A와 B는 상관관계가 멀수록 심상의 충돌 효과는 더욱 크게 전달된다. ‘세월=화살’이거나 ‘세월=유수’ 등의 ‘흐름’을 연상하는 사은유(dead metaphor)의 관계가 아니라, 이와 무관한 ‘세월=깡통’, ‘세월=장미꽃’이라는 참신한 비유에 염두에 두면서 지난 가을호를 조심스럽게 읽어 보았다.
공교롭게도 지난 호 “시조에서의 그리움 모으기”에서 이미 ‘그리움’의 제재를 추출한 바 있지만, 이번에도 ‘그리움’을 일별하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그리움이야말로 시인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지고至高한 심상의 창작 동기가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눈이 먼 사랑 한 줌 연꽃으로 피워놓고
머잖아 올 것처럼 돌아보며 멀어져 간
긴 장마 하늘보다 더
눈물 많던 그 사람
종일토록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리다가
마음에 날개 돋은 난 어느덧 개개비새
연꽃 밭 들락거리며
울음 쏟아 놓고 있다
내 슬픔 빠겨나가 노을로 번질 무렵
연잎에 고인 울음 엎지르고 가는 바람
온몸이 녹아내릴 듯
그리움은 아프다
- 김강호 「주남저수지에서」 전문
주남저수지는 부들이며 창포와 갈대 그리고 연꽃 등 온갖 수생식물과 쇠기러기 등 다양한 생물의 보금자리이다.
김강호의 「주남저수지에서」는 그 현장을 시의 언어로 그린 한 폭의 풍경화이다. 저수지의 아름다움이 포착된 살롱 사진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눈물과 울음 그리고 그리움의 사연을 담아내고 있다. “눈이 먼 사랑”이라는 원관념을 위하여 “한 줌 연꽃”이라는 보조관념을 등치시켰고, “긴 장마 하늘보다 더 눈물 많던 그 사람”이라는 강조에서, 연꽃을 통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둘째 수에서 화자는 어느덧 개개비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리움이라는 생각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가 되어 “종일토록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리다가” 어느덧 “연꽃 밭 들락거리며 울음 쏟아 놓고 있다”고 한다. 이는 새의 한 특징을 빌려 화자의 심상을 대신하게 시도이다.
셋째 수는, 그리움의 추상(첫째 수)이거나 자신의 변신(둘째 수)을 넘어 이제 모든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되돌리려 한다. “슬픔이 빠져나간 노을”이었고, 물방울은 “연잎에 고인 울음”이었으며, 무심한 듯 바람은 이를 엎지르고 가는 것인가? 저수지가 온갖 생물이 살다간 흔적을 정화하여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듯, 그의 그리움 또한 온몸에서 녹아내려 아픔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남저수지에서」는 사랑=연꽃, 장마=눈물, 나=개개비, 슬픔=노을, 물방울=울음 등의 참신한 비유와 강조를 통하여 심상의 세계를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개개비가 주남저수지의 연밭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듯, 읽는 이 역시 마음속 주남저수지 어디쯤에서 오래 머물게 하고 있다.
포말로 구슬 꿰어 발을 짜는 폭포 소리
그 발을 치고 앉아 구운몽 읽는 소리
어머니 더우실 거야
녹음하여 보내자
- 김창완 「매미 소리」 전문
매미는 특수한 발음기를 가지고 있는 수컷이 운다. 서울 도심 목동 주변에서도 매미 소리를 듣는다. 감나무 집 시골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매미 소리가 새벽이면 하나둘로부터 시작하여 아파트가 떠나갈 듯 요란하다.
김창완은 매미가 사는 현장에서 “포말로 구슬 꿰어 발을 짜는 폭포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그 발을 치고 앉아 구운몽 읽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폭포의 포말이 구슬이 되고, 그 구슬을 꿰어 발이 되는 점층의 관계가 시적 이미지 구성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매미 소리의 음절은 포말이었고, 음절이라는 포말을 꿰어서 완성한 문장이라는 형태가 발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발을 짜는 주체가 바로 매미 아닌가? 초장부터 비롯된 매미 소리와 포말의 직접 비유, 발이 완성되기까지의 점층 관계, 다시 폭포 소리로 확대되는 구성이 예사이지 않게 다가온다.
‘발’은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추억의 소품이다. 단칸방에서 마주 보며 애환을 나누는 시절의 그 이웃끼리, 방안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하여 문 앞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 하였듯, 왕의 뒷자리인 신비의 영역을 발 하나로 나누기도 했다.
「매미 소리」 초장에서 상을 일으킨 매미 소리와 중장의 매미 소리로 짠 “그 발을 치고 앉아 구운몽 읽는 소리”로 상을 펼지는 가운데, 초장과 중장을 대구(couplet)로 설정하고 있다.
종장은 이를 반전시킨다. 앞의 대구를 이어받아 다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반전된다. 누구든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리움과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김창완은 존재의 외피를 탈피하기 위한 비유로 결말을 맺는다.
초장과 중장에서의 시각적 이미지(전구)가 청각적 이미지(후구)로 전환되는 인과 관계, 이것이 반전되어 어머니를 향한 진한 그리움과 걱정이 단수 시조의 미학의 텍스트로 보여주고 있다.
이승이 아닌 먼 곳의 어머니에게 매미 소리와 구운몽 읽는 소리를 녹음하여 보내려는, 신안 섬 착한 아들의 어머니를 향한 모정慕情이 이렇듯 뜨거울 수 있을까? 원로 시인의 빛나는 작품에서 시조의 감칠맛과 찐득이는 서정을 한 수 배울 수 있다.
허공에도 길을 내어 달리고 싶은 걸까
보름달 이마 위에 지문 몰래 찍어 두고
아버지
바퀴를 굴린다
세상이 다 둥글도록
태풍이 길 막아도 멈춘 적 없었다는
사십 년 연애 같은 우체부 가방 놓자
어깨가
가벼워진다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 박화남 「지붕 위의 자전거」 전문
박화남의 「지붕 위의 자전거」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참신한 시선이 돋보인다. 배경은 보름달이 있는 지붕 위이다. 요즈음은 대부분 아파트 생활로 지붕이 없이 살아간다. 보름달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거나, 시골의 부모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한 달과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의 가방 등은, 모두 다 느림의 미학이 남긴 추억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빨간색 우편 자전거를 타고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소식을 전하였다. 이 직업을 천직으로 여겼기에 가지 못할 곳이 없었나 보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는 ‘다녀갔노라’는 증표로 눈에 잘 띄는 곳에 우편물을 놓아두고 돌아 나온다.
자전거 바퀴의 속성인 ‘둥글다’는 외형의 이미지에는,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는 내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허공을 비롯하여 보름달도, 아버지의 마음씨도, 자전거 바퀴도 그리고 세상도 모두 ‘둥글다’는 복합적인 이미지와 관계망 형성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태풍이 길 막아도 멈춘 적 없었다”는 아버지의 자전거와 “사십 년 연애 같은 우체부 가방”의 애환은 얼마나 절절하였을까? 그동안 충직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훌륭한 모습이었을까? 이런 아버지 세대의 희비를 다 내려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보름달이 된 「지붕 위의 자전거」는 이미지 연상의 유기적인 관계로 설정되었다. 적절한 비유와 명징한 이미지는 독자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으로 남을 것이다.
도련님! 달이 차올라 만삭이 되었네요
진통이 느껴져요, 꽃나무 아래로 갈까요
쿵더쿵 요동치는 가슴 안고 냇가로 갈까요
쏟아내는 빛들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오실 날만 기다려요
한바탕, 꽃이 지기 전에 당도 하셔야 해요.
- 김현주 「없는, 연애에 대한 것 – 봄밤」
보름달이 깊어가는 봄밤에 어느 이와 손잡고 걸을 수 있다는 것, 한때의 첫사랑 추억이 가슴속에 있다는 건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닐까?
김현주의 「없는, 연애에 대한 것」은 가상의 연인을 설정하여 그를 기다리며 그리움에 몸부림친다. 어쩌면 존재의 실상보다는 부재의 허상을 꿈꾸며 행복을 누리려는 이 시대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작품에서 ‘도련님’은 가상의 정인情人이다. 달이 차올라 만삭이 되었다는 현상학적 특징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지금의 자신이 처한 상태를 암시적으로 전하고자 시도한다. 새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진통으로 “꽃나무 아래로”, “냇가로” 가고 싶다는 고혹蠱惑은 신이 내린 젊음의 향기이다.
축복과 환희의 그 별빛을 “품에 안고”,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오실 날만 기다린다”라는 그리움의 끝은 어디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한바탕 꽃이 지기 전”이라고 제한하고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파토스’와 ‘에로스’ 중 어느 쪽의 사랑이든 꽃과 같은 시절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인은 온갖 상상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허상까지도 실상의 거울에 옮겨와 바라보며 심상心狀을 위무慰撫한다. 김현주의 작품이 ‘없는 연애’에 대한 안타까움이라 한다면, 달 아래에서 거문고 소리 듣는 이매창李梅窓의 연정戀情이 가슴을 적시게 한다.
“봄은 와도 그대는 아직 멀기만 한데 / 바라보아도 자꾸만 덧없는 이 마음/ 거울엔 먼지 쌓이고 달빛 아래 거문고 소리(春來人在遠 對景意難平 鸞鏡朝粧歇 瑤琴月下鳴)”
내 일찍이 설악雪嶽에 등 기대고
무산霧山 가까이서
한 오십년
가난한 시 쓰면서 살았거니
그 떠난 적막강산寂寞江山에 이제
시詩마저 놓고 싶다
- 박시교 「그 떠난 뒤에」 전문
원로 시인 박시교의 소회가 허무하게 다가온다. 설악산 백담사의 회주였던 조오현 스님과는 반백년을 글벗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초장으로 열었다. 시조를 사랑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무산이 홀연 입적하신 그 적막강산은, 시조단 모두의 적막강산이라 하여도 될까?
무산 스님이 남긴 한 줌 재가 시조단에 부는 큰 회오리가 되어, 이제 시마저 놓고 싶다는 작품이 마음 착잡하게 하고 있다.
무산 스님은 불교라는 고색창연한 종교의 세계를 떠나 문학이라고 하는 영역, 그중에서도 시조 문단의 상좌上佐에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설악에 등 기대고”를 비롯하여 “무산 가까이서”와 “한 오십 년 가난한 시 쓰면서“라는 내포內包는, 표면적인 어의語義보다는 포함된 외연外延의 관계로 읽혀야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그 떠난 적막강산에 이제 시마저 놓고 싶다“는 허무한 생각 또한, 넘치는 문인 홍수와 문학지 쓰나미 시대에서 예사이지 않을 화두의 도화선으로 남겨 두고 있다.
이제 큰 시인이 떠난 적막강산, 한때 ‘잡초론’ 하였던 시조 문단의 과거사가 무색할 정도의 소위 자칭 문인들 속에서 “시마저 놓고 싶다”는 소회가 따가운 채찍소리로 들린다.
갖가지 아쉬움의 목록을 들고
내 마음의 나침반이 아직도 가리키는 곳
언제는 지천이던 날 그 여백을 걸어간다
숫기 없는 바람이 푸른 아침 데려오고
커다란 백지 한 장 채색하던 날들이
좋은 것, 좋지 않은 것 만다라를 그린다
직유의 햇살세례 직립의 길은 곧다
목마른 낙타는 제 혀를 씹어 해갈한다는데
갈증은 채 식지 못한 어제를 소환한다
가 보자, 갈 데까지 미증유의 길을 가자
멍울진 일흔, 발자국도 늙어 가고
통증은 함께 갈 시간 소박한 동행이다.
- 이말라 「순례」 전문
인생을 순례길이라 한다면 이말라의 「순례」를 두고 말함인가? 누구든 살아가면서 쌓이는 아쉬움이 목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소망이지만, 젊은 시절에 언제나 “지천이던 날”의 우상을 되돌아보며 미소 짓게 하나 보다.
“숫기 없는 바람이” 어김없이 “푸른 아침 데려오는” 무상한 섭리 앞에서 인생이라는 백지 한 장을 채색하였고, 그것은 애증으로 채워진 한 폭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라 하였다. ‘만다라曼陀羅’는 둥글게 두루 갖춘 원을 의미한다. 어떤 것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상태이다.
직유直喩는 시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원관념을 나타내기 위해 보조관념의 비슷한 성질을 직접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세상은 실은 ‘만다라’를 위한 보조관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시의 결結에 해당하는 넷째 수는 비장한 각오이다. 삶의 과정에서 자신은 언제나 미완의 갈증으로 끝난 지난날을 반추하고 있다. 그래서 “멍울진 일흔”이며 늙어가는 발자국까지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필연이 된 마지막 통증까지도 벗하며 살아가려는 “소박한 동행”에 함께 발 올리며 우수에 젖게 한다.
한 편의 시조만치 완결의 미학을 갖춘 시의 갈래가 있을까? 운韻과 율律을 필요조건으로 하는 논리적인 상의 펼침이 다른 갈래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부질없는 흐느적거림(?)이 음수율에 갇혀 현대시에 현저히 이르지 못하거나, 단순한 음풍농월로 과도한 정감을 통제하지 못하는 작품 앞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는 어찌 시조뿐이랴!
시조의 본질은 시적인 완성도이다. 비유를 통한 시적 표현의 참신성에 있다. 동원되는 관념의 관계 맺음으로 하여 이미지의 명징성과 온전한 시의 가부가 가늠될 것이다. 좋은 시조는 사물의 특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완결된다는 것이 지난 『한국동서문학』 가을호에 보인다.
원나라 허유임의 적항조행荻港早行에서 “맑은 서리에 단풍잎 취하고(淸霜醉楓葉), 어슴푸레한 달빛은 억새꽃에 숨는다(淡月隱蘆花)”라 하였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우리의 가슴속 어디쯤에도 산머루가 익어갈 만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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