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모화리(毛火里)
회원님들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합니다. 외동읍내의 각급 학교와 각 마을의 출신, 출향인사를 소개하면서 빠뜨린 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재경 외동향우회 회원명단을 보고 직장과 직책이 제대로 기재된 향우님 위주로 소개드리고 있는데, 명단에 없거나 주요인사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분, 재경 외동향우님이 아니신 분은 거의 누락되고 있습니다.
이 점 해량하시고 누락된 주요인사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회원님들께서는 해당 초등학교나, 해당 마을의 기사 후미에 ‘답글’로 보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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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蔚山)과 경주시(慶州市)의 경계점에 위치한 모화리(毛火里)는 비록 마을규모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지만 이곳은 울산(蔚山)과 경주시의 시내버스가 교차하고,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과 7번국도가 동시에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다.
모화(毛火)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이 지역을 신라도성(新羅都城)의 외성(外城)으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모화(毛火)라는 지명이 부여되었다.
당시는 불교의 최성기(最盛期)로 불가(佛家)에 귀의하는 사람이 이 곳 모벌군성문(毛伐郡城門)에 이르러 삭발(毛伐)하여 머리털을 태우고, 불국사 경내에 들어갔다 하여 ‘모벌(毛伐)’ 또는 ‘모화(毛火)’로 불리기 시작했다.
1940년대의 모화리
모화리(毛火里)는 또 김동리(金東里)의 소설 ‘무녀도(巫女圖)’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을 탄생시킨 고장이기도 하다.
김동리(金東里)는 ‘무녀도’를 쓰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녀(巫女)의 이름을 짓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그의 고향인 당시의 경주읍 성건리 부근 동해남부선 모화역(毛火驛)의 이름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딸 수 있었고, 그 주인공의 이름이 지어지자마자 그 소설은 쉽게 써졌다고 한다.
본디 김동리(金東里)는 우리나라 토속신앙(土俗信仰)과 기독교(基督敎)의 대립관계를 주제로 ‘무녀도’를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 무녀(巫女)의 성격에 걸 맞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주인공 이름이 바로 우리 토속신앙(土俗信仰)과 상징적으로 어울릴 수 있으면 그녀의 캐릭터를 강하게 묘사(描寫)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글의 주제(主題)를 압축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날 며칠을 주인공 이름 때문에 고민하던 김동리(金東里)는 문득, 그가 어렸을 적 고향에서 들었던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용인 즉, “옛날엔 불국사(佛國寺) 산문(山門 ; 절 또는 절의 바깥문)에 아무나 들어설 수 없었다. 승려(僧侶)로 출가하기 위해서는 모화(毛火)라는 곳에서 머리를 먼저 깎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을인 ‘입실(入室)’에서 불국사(佛國寺)로 들기 위해 오랫동안 마음을 닦으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아직도 모화(毛火)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작가 김동리(金東里)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했다. 모화(毛火), 즉 ‘털 毛字’에 ‘불 火字’는 머리를 불사르고 속세를 떠나 피안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꽃 피는 내고향 모화리
그리고 이는 불교(佛敎)에서의 표현이지만, 무속(巫俗)의 세계에서도 현실의 세계와 영혼(靈魂)의 세계를 잇는 교차점(交叉點)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필칭,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靈魂)과 산 자의 마음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 또 그들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무녀(巫女)의 이름으로서는 이보다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무녀도(巫女圖)’의 주인공 무녀의 이름은 ‘모화(毛火)’로 결정되어졌다.
모화리(毛火里)의 주요기관과 시설, 중요 문화재, 자연부락, 중요 지형지물, 특산물(特産物), 현대사의 순국영령(殉國英靈), 그리고 그동안 거쳐 온 애환(哀歡)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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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리(毛火里)에는 1953년 4월 1일, 입실국민학교 모화분교(毛火分校)로 인가를 받고, 1963년 6월 15일, 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은 모화초등학교(毛火初等學校)가 소재하고 있다.
모화초등학교는 1953년 4월 1일 입실국민학교 모화분교장(毛火分敎場)으로 인가를 받아 그해 6월 27일, 지금의 학교부지에 2개의 가교사를 준공해 당시의 입실국민학교(入室國民學校)로 통학하는 모화 1리에서 5리까지의 1, 2학년생을 모아 수업함으로써 학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입실국민학교와의 통학거리가 4km로 거리가 멀었고, 2km 내로 인접한 석계국민학교(石溪國民學校)는 마을과 학교 사이에 시내가 있어 소량(小量)의 강우(降雨)에도 물이 넘쳐나 통학이 불가한 지역적 특성이 감안되어 분교장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3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여전히 입실국민학교로 통학을 해야 했다.
모화분교(毛火分校)에서 2학년까지 재학하다가 3학년이 되면, 본교인 입실국민학교 같은 학년에 편입되어 입실국민학교까지의 먼 거리를 통학(通學)했던 것이다.
재경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2008년도 회장을 역임한 우희곤 전 회장님과 외동향우회 최고의 알피니스트(alpinist) 서무수 향우께서도 이 분교에 재학했었다.
옛적 입실국민학교 모화분교
(교사 앞 운동장이 뿌연 것은 모화에만 있는 연갈색 모래색깔 때문이다)
이후 점차적으로 지역 내 교육인구(敎育人口)가 증가하고 10리길을 통학하는 어려운 실정을 개선코자 지역주민들이 학교설립(學校設立)을 위한 기성회(期成會)를 조직, 적극 협조함으로써 1963년 5월 16일 3개 교실의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한 후 같은 해 6월 15일 완전한 개교를 맞게 되었다.
1953년 모화분교장(毛火分敎場)으로 인가 받은 뒤 10년의 세월이 지나 모화국민학교(毛火國民學校)로 개교를 하게 된 것이다. 2014학년도 현재 모화초등학교의 학생현황과 교직원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학급․학생 현황
학 년 |
1 |
2 |
3 |
4 |
5 |
6 |
계 |
학급수 |
2 |
2 |
2 |
2 |
2 |
2 |
12 |
학생수 |
남 |
17 |
20 |
18 |
17 |
19 |
21 |
112 |
여 |
16 |
22 |
13 |
17 |
14 |
24 |
106 |
계 |
33 |
42 |
31 |
34 |
33 |
45 |
218 |
교직원현황
구
분 |
교
장 |
교
감 |
보직
교사 |
교
사 |
보
건 |
영
양 |
유치
원 |
강
사 |
일반
직 |
기능
직 |
일용
직 |
계 |
남 |
1 |
1 |
1 |
3 |
- |
- |
- |
- |
2 |
- |
8 |
16 |
여 |
- |
- |
1 |
8 |
1 |
1 |
1 |
3 |
- |
14 |
29 |
58 |
계 |
1 |
1 |
2 |
11 |
1 |
1 |
1 |
3 |
2 |
14 |
37 |
74 |
지금의 모화초등학교
모화초등학교(毛火初等學校)는 개교 첫해 368명의 학생 수로 출발한 이후 농촌학교(農村學校)로서 학생 수가 감소했던 1970~80년대에도 500여명 내외를 유지했었고, 1990년대를 지나서도 당시의 학생 수를 꾸준히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그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고 있다.
2014학년도 현재는 12학급 218명의 재학생(在學生)을 두고 있으며, 1965년 제1회 졸업생 41명을 비롯해 총 50회의 졸업식(卒業式)을 가지는 동안 지난 2011년 현재 3,158명의 동문(同門)을 배출해 냈다.
모화초등학교에는 현재 경상북도에서 가장 훌륭한 교내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2006년 7월 19일 개관식(開館式)을 가진 ‘꿈빛도서관’은 학교의 자랑거리이다.
학생 수의 감소로 공실(空室)이 된 2개 교실을 개조하여 50여평 규모로 개관한 도서관(圖書館)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최신시설을 갖추고 있다.
기존 도서에 총동창회(總同窓會)의 기증으로 4천 여권이 넘는 풍부한 교재와 양면서가, 하이펙 의자, 입식 검색대, 북트럭 등 비품의 교체와 도색, 바닥 및 출입문의 구조변경 등으로 학생들에게 최적의 독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모화초등학교의 교가를 소개한다.
모화초등학교 교가
1. 치술령 동대봉산 우람한 가슴에
우리의 보금자리 모화 초등학교
진실하라 부지런하라 교훈 새기면서
꿈과 진리 탐구하는 빛나는 슬기
[후렴]
복되도다 우리는 모화의 건아
이 나라를 떠받치는 새 기둥이다.
2. 만리성 굽이굽이 정기 어리어
일천년 신라의 얼 담긴 이 터전
높고도 높은 꿈을 가슴에 안고서
꿈과 마음 닦고 가는 빛나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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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과 당시의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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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모화리 162번지(경주시 외동읍 모화남1길 26-32)에는 지난 1978년 11월 8일 외동읍(外東邑)에서 유일한 고등학교로서의 사립고등학교로 출범한 태화고등학교(太和高等學校)가 위치하고 있다.
1978년 11월 8일 설립된 태화종합고등학교(泰華綜合高等學校)는 2004년 3월 2일 태화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4년 현재 태화고등학교의 교직원과 학생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교직원 현황(2014년 현재)
구분 |
교원 |
일반직 |
계 |
교장 |
교감 |
교사 |
소계 |
6급 |
7급 |
8급 |
기능직 |
소계 |
남 |
1 |
1 |
12 |
14 |
1 |
· |
· |
1 |
2 |
16 |
여 |
· |
· |
12 |
12 |
· |
1 |
1 |
· |
2 |
14 |
계 |
1 |
1 |
24 |
26 |
1 |
1 |
1 |
1 |
4 |
30 |
학년 및 학과별 학생현황(2014년 현재)
구 분 |
1학년 |
2학년 |
3학년 |
계 |
학급
수 |
학생
수 |
학급
수 |
학생
수 |
학급
수 |
학생
수 |
학급
수 |
학생수 |
남 |
여 |
계 |
보건
간호과 |
2 |
56 |
· |
· |
· |
· |
2 |
16 |
40 |
56 |
기업경영
관리과 |
1 |
28 |
· |
· |
· |
· |
1 |
21 |
7 |
28 |
금융
정보과 |
1 |
28 |
· |
· |
· |
· |
1 |
18 |
10 |
28 |
보통과 |
· |
· |
2 |
40 |
2 |
51 |
4 |
58 |
33 |
91 |
정보
처리과 |
· |
· |
2 |
51 |
2 |
47 |
4 |
54 |
44 |
98 |
계 |
4 |
112 |
4 |
91 |
4 |
98 |
12 |
167 |
134 |
301 |
개교 당시의 태화고등학교
외동읍 모화리(毛火里)에 위치한 태화고등학교는 35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로 ‘기본이 바로 선 창의적인 인재 육성’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 다양한 직업 수용과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사회에서 요구하는 특정 직업 분야의 전문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종합고(綜合高)에서 특성화고(特性化高)로 체제 개편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13년 7월, 경북 교육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지금은 경북 교육청이 지원하는 특성화고등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특성화고로 개편된 태화고(泰華高)는 2014학년도 신입생부터는 개편된 학과로 신입생을 모집했다.
태화고(泰華高)는 이번 특성화고 체제 개편을 통해 직업 교육에 대한 인식 전환의 기회를 제공하고, 고용 창출 및 지역 산업 활성화와 이로 인한 지역 균형 발전에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국을 대상으로 보건간호과 2학급(56명), 기업경영관리과 1학급(28명), 금융정보과 1학급(28명) 총 4학급 112명의 모집 정원에 125명이 지원해 13명이 탈락하는 등 우수 학생 모집에 성공하고 있다.
태화고등학교 교문
또 원거리 학생을 위한 80명 수용의 기숙사 신축을 2014년 7월에 완공할 예정에 있다. 기숙사가 완공되면 원거리 통학 불편 해소는 물론 자격증 취득반, 공무원 준비반 등을 운영해 졸업 후 취업 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한 태화고(泰華高)는 다변화되고 있는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수 인재를 육성을 위해 한국생산성 본부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재학생들을 위해 경쟁력 있는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국가 공인 ERP정보관리사, 정보기술가격(ITQ), 그래픽기술자격(GTQ) 및 국제 IT자격 ICDL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컴퓨터 활용 능력 배양을 도모하는데 적극적인 협력을 받고 있다.
또 신지식 기반 사회에 부응하는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해 야간에 기능 지도반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는 인구유입이 활발했던 1980년대에는 학생 수가 27개 학급에 1,300여 명에 이르다가 그 이후 인구가 급감(急減)하자 12개 학과로 감소될 정도로 쇠퇴기에 이르고 있다. 모두들 모화리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적이 끊긴 모화리 기존 주택가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는 외동읍(外東邑)에 소재하고 있으나, 학생은 거의가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학생들이라는 것이다.
2014학년도의 경우 아래 표에서와 같이 전교생 301명 가운데, 외동읍 학생은 44명뿐이고, 울산광역시 거주 학생이 228명이나 된다.
거주지별 학생현황(2014년 현재)
경주 |
외동 |
울산
(북구) |
울산
(남·중·동구·울주) |
기타 |
계 |
29 |
44 |
201 |
27 |
· |
301 |
지난 1979년 개교한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는 학교 동쪽 담장을 기준으로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개교 당시의 학생 대부분은 주로 태화방직(泰華紡織)에 근무하던 여자 종업원들이거나, 울산시에 거주하는 학생들이었다.
개교 당시부터 학교는 외동읍(外東邑)에 소재했는데, 울산(蔚山) 지역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태화방직(泰華紡織)에 근무하던 여종업원들이 주로 바로 옆 울산시에서 출퇴근하는 울산시의 청소년들이었다는 얘기다.
지금의 태화고등학교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의 창립배경과 울산지역 학생위주의 취학내력을 잠시 알아보기로 한다. 태화고등학교는 학교가 설립인가를 받기 전인 1977년, 태화방직(泰華紡織)의 창업주 고(故) 송암(松岩) 김학명 회장이 현 학교부지에 3층 교사를 준공하여 당시 이 회사에 근무하던 종업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코자 태화방직(泰華紡織) 부설 산업체학교를 설립한 것이 시초였다.
섬유산업이 전성기 시절인 당시의 모화리(毛火里)에는 수많은 태화방직(泰華紡織) 여공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1980년대 중반 태화방직회사(泰華紡織會社)가 문을 닫기 전까지 회사에서는 이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제공했었다.
태화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
(이때는 태화종합고등학교 당시였다)
처음 개교 당시에는 회사에서의 필요성도 있었지만, 지역 내에 고등학교가 없어 불편을 겪던 외동읍과 울산지역 주민들이 회사 측에 학교설립을 간곡하게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태화방직(泰華紡織)에서는 이러한 회사의 필요성과 주민들의 뜻에 부응하여 취학대상 종업원과 외부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교사를 신축하고, 보통과(普通科)와 상업과(商業科) 15개 학급으로 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학년 학생 394명(남 217, 여177)을 모집, 1979년 3월 5일 수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 이사장으로는 태화방직(泰華紡織)의 김학명 창업주가, 초대교장으로는 고(故) 강임술 교장이 각각 취임했었다.
이어서 1979년 11월에는 4층으로 교사를 증축하고, 1981학년도에는 전교생이 1천300여명을 넘어섰다. 1982년과 1987년에는 실업계고교 운영심사에서 교육감상을 수상하며, 내실 있는 학교로 인정받기도 했다.
1988학년도부터는 여고(女高)로 전환하기 시작해, 1992학년도에는 완전한 여자고등학교로 탈바꿈한 바도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학생 수는 꾸준히 1천200여 명대를 유지하며, 경상북도 도내 읍(邑)단위로는 최대의 고등학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후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태화방직(泰華紡織)의 부도로 인한 폐업, 1997년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의 승격과 함께 타 시․도 진학금지 조치 등으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태화방직(泰華紡織)의 폐업으로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寄宿舍) 거주 자격이 상실되었고, 생계영위를 위해 울산시 지역의 서비스업종으로 대거 이직한 탓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모화리 전역에서 북새통을 이루던 갈래머리 여공들도 학교를 그만 두고 썰물같이 빠져나가 버렸다.
그 시절 태화여고 학생들(제2회)
사정이 이렇게 되자 경상북도교육청과 울산광역시교육청은 울산시 북구 소재 3개 중학교에 대해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 지원이 가능하도록 합의했으며, 이러한 합의에 따라 태화고등학교는 1998년 정보처리과(情報處理科)를 신설하고 급식소, 도서실을 준공하고, 2003년에는 남·녀 공학으로 다시 전환하는 등 학교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어 2004년에는 시대에 부응하고 획기적인 내실을 기한다는 취지 아래 교명을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로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학생 수가 계속 감소하여 2007학년도에는 총 12학급에 310(남 177, 여 133)명으로 울산지역 학생들이 76여%나 편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전교생 301명에 울산시 거주 학생이 228명이나 된다.
2014년부터는 특성화고등학교로 지정되어 전국을 대상으로 학생을 모집하고 있기 때문에 외동읍 출신 학생들의 비중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태화고등학교 제3회 졸업생
그러나 폐업된 태화방직의 예 부지에 2014년부터 4,500세대의 아파트단지를 건설하게 되면,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의 학생 증원은 물론,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증설도 가능할 것이다.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는 지난 2014년 2월 현재 제33회 졸업식을 통해 총 5,99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태화고등학교의 교가를 소개한다.
태화고등학교 교가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는 울산시(蔚山市)에 소재하는 태화강(太和江)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문자(漢文字)인 글자도 다르지만, 태화고등학교의 ‘태화(泰華)’는 태화방직의 사명에서 따온 이름이고, 태화강(太和江)은 울산광역시의 동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으로 울산(蔚山) 서부지역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태화강(太和江)의 이름은 신라의 승려인 자장율사가 선덕왕 12년에 세운 태화사(太和寺)라는 사찰의 이름에서부터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태화사(太和寺)는 자장율사가 산둥 반도의 태화지(太和池)에서 지룡(池龍)을 만나 국난을 피하기 위하여 경주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계시 받았는데, 태화사는 지룡에게 이를 보답하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태화고등학교 제10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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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關門城)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사적(史蹟) 제48호로 경주 지역의 다른 성과는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뻗은 유일한 산성(山城)이다.
이 산성은 신라(新羅) 성덕왕 2년(772)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으며, 주위가 6,792보, 5척의 석성으로 지금의 경주시(慶州市)와 울산시(蔚山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돌과 자연석(自然石)을 이용하여 축성(築城)되어 있다.
우박천(禹泊川 ; 동천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동해(東海)를 향해 쌓았으며, 이러한 모양으로 축성한 것은 울산만(蔚山灣)에 상륙한 왜구(倭寇)가 서라벌(경주)까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전초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모벌군성(毛伐群城)이라 불렀던 이 성은 현재 성문지(城門址)로 보이는 석축이나 창지(倉址), 병사지(兵舍址) 석벽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성은 경주(慶州)의 남산성(南山城)보다 발달한 축성술(築城術)을 보여주며, 반월성(半月城)의 둘레보다 길어 보통 신라(新羅)의 만리성(萬里城)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관문성
보통 관문성(關門城)의 길이를 약 12㎞라 하는데, 경주 양남면 신대리 정상에 있는 ‘기박산성’까지 포함할 경우의 길이에 해당한다.
지금의 관문성(關門城)은 옛적의 산성과는 달리 지금은 몇 동강으로 갈라져 있다. 서쪽은 동해남부선과 동천강(東川江)이 잘라놓았고, 동쪽은 새로이 건설하는 포항 - 울산 간의 복선전철(複線電鐵)이 다시 한 번 동강을 내어버렸다.
울산(蔚山)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연결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단선철도의 복선전철화 사업 때문이다.
이 복선전철화(複線電鐵化)사업은 지난 2010년 4월말께 포항(浦項)에서 기공식을 가진데 이어 경주시 외동읍 모화역(毛火驛) 일원에서 안전기원제를 열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시행하는 동해남부선 단선철도(單線鐵道)를 복선전철화하는 사업인데, 사업비 2조5천656억 원을 투입해 총 76.5㎞를 8개 구간(區間)으로 나눠서 단계별로 시행하고 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도
그러나 그동안 문화재(文化財)가 많은 경주지역의 특성(特性)으로 인해 문화재 조사와 설계변경(設計變更) 등이 잦은데다 부지보상(敷地報償)도 늦어져 공사가 상당히 지연되고 있다.
특히 사업초기인 2009년과 2010년 등에는 사업비(事業費)가 거의 배정되지 않아 공사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울산 쪽인 1~4공구는 2018년까지로 연장(延長) 변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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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역(毛火驛)의 역사를 먼저 알아본다. 모화역은 1937년 5월 1일 배치간이역(配置簡易驛 ; 역무원을 배치한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1951년 4월 12일 보통역(普通驛)으로 승격하였고, 1972년 7월 20일 무배치간이역(無配置簡易驛 ; 역무원을 배치하지 않은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외지(外地)로 떠나버려 주민과 승객이 적어 역무원(驛務員)이 배치되지 않는 무인 간이역(簡易驛)으로 전락한 것이다.
1966년의 모화역(毛火驛)
(오른쪽에서 두 번째 가죽잠바 청년이 외동향우회 전임 회장인
우희곤 카페지기다. 뒤에 있는 건물이 모화역사(毛火驛舍)이다)
이 후 1970년대 말부터는 울산공단(蔚山工團)의 팽창에 따른 인구증가와 태화방직의 창설에 따른 모화리의 상주인구의 급증으로 새로이 역사(驛舍)를 준공하였고, 1979년 2월 1일, 다시 보통역(普通驛)으로 승격(昇格)되었다.
그러나 태화방직의 부도로 수많은 여공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다시 주민 수가 줄어들자 1994년 1월 20일, 배치간이역(配置簡易驛)으로 격하되어 울산시(蔚山市)에 있는 호계역에서 관리하다가 2004년 12월 10일부터는 여기에서 다시 무배치간이역(無配置簡易驛)으로 격하되었다가 포항-울산 간의 복선 전철공사 착수와 함께 폐역되었다.
건물은 크지만 결국 무인역(無人驛)으로 주저앉았다가 이제는 폐역이 되어 복덕방이 되고 말았다.
폐역 직전의 모화역사(毛火驛舍)
동해남부선이 폐선되고, 모화역이 폐역된 원인(遠因)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과 나란히 달리는 7번국도가 비포장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포장됨으로써, 도로교통(道路交通)이 그만큼 편리해졌고, 가정마다 승용차(乘用車)를 갖고 있어 열차를 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선과 모화역이 폐선․폐역되는 실체적 원인(原因)은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와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이 지난 2009년부터 총 2조 500여억원을 투입하여 동해남부선 울산-포항간 단선 73.2㎞를 이설하는 복선전철화(複線電鐵化)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포항간의 동해남부선 전철화 사업은 유네스코가 경주시 일원에 산재한 세계문화재로서의 문화재를 안정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일제가 도심지에 건설한 동해남부선을 외곽으로 이설하라는 권권에 따라 시행하는 사업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기존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모화(毛火), 죽동(竹洞), 불국사 등 10개 역은 폐지되고, 입실(入室)과 부조, 나원, 안강역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모화역은 서둘러 폐역(廢驛)하고 말았다.
1937년 개설된 이래 지난 70여 년 동안 모화리(毛火里) 주민들의 애환을 새기고, 관문성과 원원사지, 치술령을 찾는 관광객(觀光客)들의 설레는 마음들을 실어 나르던 모화역(毛火驛)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폐역 후 철거직전의 모화역 플랫폼
('철까치'는 녹이 쓸고, 플랫폼은 잡초가 우거졌다)
모화역이 폐역된 원인이 입실역(入室驛)의 경우와 같이 철도공사의 복선전철사업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인 경주 역사지구(歷史地區)를 효과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현재의 선로를 이설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역사지구(歷史地區)의 영구적인 보존을 위해 현재의 선로이설(線路移設)이 불가피하다 해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 온 모화역(毛火驛)의 역사(驛舍)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반드시 강구(講究)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실역(入室驛)의 경우와 같이 사업주체인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문화재(文化財)로서의 가치를 꼼꼼히 조사하도록 요청하고, 그 보존(保存)을 강력하게 요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질 동해남부선의 마지막 모습
(전철용 고압전주의 전선이 걷히고, 선로는 빨갛게 녹이 쓸었다)
다른 파일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문화재청(文化財廳)은 이미 경남의 진해역 등과 다수의 증기기관차 급수탑(給水塔)을 철도사적(鐵道史的), 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를 인정하여 근대문화유산(近代文化遺産)으로 등록한바 있다.
유서 깊은 역사(驛舍)의 연혁과 신라조(新羅朝)의 정기가 겹겹이 쌓인 모화역(毛火驛)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평가에 따라 철도사적(鐵道史的) 가치와 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가 미흡할 수 있으나, 불국사(佛國寺)로의 입산을 위한 출발점이었다는 종교사적(宗敎史的) 의의와 소설 ‘무녀도’의 주인공 ‘모화(毛火)’의 탄생지라는 문학사적(文學史的) 의의는 그 미흡성(未洽性)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고 본다.
한 가지 더 제안을 한다면 경주시(慶州市) 당국이 철도공사(鐵道公社)와 협상하여 경주시 도심구간(都心區間)이 아닌 교외구간으로서의 불국사-죽동-입실-모화(毛火) 구간만이라도 철도공사로부터 기증(寄贈) 받거나, 장기 분할상환방식으로 매입하여 요즘 성행하는 ‘레일바이크’노선으로 활용함으로써 연도의 기존 역사(驛舍)들을 보존하였으면 한다.
폐역 후 복덕방이 되어버린 모화역사
시민(市民)들의 가족나들이와 건강생활은 물론, 연도(沿道)에 늘어선 영지, 영지석불, 마석산, 괘릉, 감산사지, 숭복사지, 아기봉, 원원사지, 관문성, 치술령 등 관광지(觀光地)에 대한 관광객의 견학과 위락을 위한 수송(輸送)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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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도심에서 약 50리, 외동읍 모화리에서 동북쪽 봉서산 골짜기로 약 30분 가량 거슬러 오르면, 부석사 석축(石築)과도 비견할 만한 훌륭한 석축이 꽤 길게 나타나고, 여기에 한 폐사지(廢寺址)를 볼 수가 있다. 이곳이 바로 『삼국유사』에 자주 언급되는 원원사지(遠願寺址)이다.
원원사는 신라(新羅)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세운 금광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 되었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원원사지(遠願寺址) 3층 석탑
여기에서 말하는 ‘신인종(神印宗)’이란 선덕여왕 4년(635년) 명랑 법사가 당(唐)나라에서 귀국할 때 처음으로 신라(新羅)에 전한 신인비법을 사용함으로써 보급된 밀교(密敎)의 일파로서 삼국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종파였다.
원원사(遠願寺)는 신라(新羅) 선덕여왕 당시 밀교(密敎)의 후계자들인 안혜, 낭융 등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 김술종(金述宗 ; 신라 중고기의 귀족)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원원사(遠願寺)의 원래 사찰명은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원래 ‘遠源寺’였는데 조선조 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 ‘遠願寺’로 기록된 이 후부터는 모두 후자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창건 동기가 통일된 신라(新羅)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여 울산만을 이용해 침입해 오는 왜병을 막고자 불력(佛力)을 기울인 것으로 미루어 ‘遠願寺’라는 명칭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동경잡기에는 또 이 원원사를 숭정(崇貞) 경오년(庚午年 ; 조선 16대 인조 8년, 1630)에 중수(重修)하였으나, 26년 뒤인 병신년(조선 17대 효종 7년, 1656)에 원원사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다시 중건(重建)되었다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조선 후기까지 소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원사지(遠願寺址) 3층 석탑
그리고 이 절은 신라(新羅)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金庾信) 등이 창건(創建)할 당시 그 창건 목적이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徐羅伐)을 지키는 숨겨진 병영(兵營)으로 기지화 했다는데 의의를 두기도 한다.
계곡(溪谷)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라벌(徐羅伐)의 관문이었던 관문성(關門城 ; 일명 만리성)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반대로 관문성에서는 이 절이 보이지 않으니 천혜(天惠)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신라(新羅)의 병사들이 일부러 머리를 깎고 승려(僧侶)로 변장해 이 절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신라(新羅)의 영원한 번영을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경주 일대의 의병장(義兵長)과 승병장(僧兵長)들이 이 절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고, 동래(東萊)를 거쳐 경주(慶州)로 진격하던 왜군(倭軍)과의 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다.
이때의 전투를 ‘모화전투(毛火戰鬪)’라고 한다. 얘기가 나왔으니 ‘모화전투(毛火戰鬪)’의 대강을 잠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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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예나 지금이나 침략자인 왜군(倭軍)은 울산만에 상륙하여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를 침공하기 위하여 영남좌로(嶺南左路)를 점령하려했다.
이에 조선군(朝鮮軍)과 경주지방 의병(義兵)은 수차에 걸쳐 울산지역이나 동해안에 전진 배치되어 왜군을 격퇴하였으나, 몇 번은 왜군이 관문성(關門城)을 돌파하여 영남좌로의 연변인 모화리(毛火里)와 방어리(防禦里) 등지까지 진출하였고, 불국사(佛國寺)와 경주읍성을 점령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문화재(文化財)를 불태웠다.
불국사에 불을 지른 왜놈들의 만행
그 중 관문성(關門城)을 돌파한 왜군(倭軍)을 모화리(毛火里)에서 격퇴시킨 전투를 ‘모화전투(毛火戰鬪)’라고 하는데, 선조(宣祖) 26년부터 29년까지 세 번에 걸쳐 전개되었다.
첫 번째 전투(戰鬪)는 선조(宣祖) 26년 2월 17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다. 모화(毛火)의 관문성을 수비하고 있던 의병장(義兵長) 황의안이 왜군이 관문성으로 대거 침입하자 서장(書狀)을 꾸며 파발로 다른 의병장 이의장, 김춘룡(金春龍), 최봉천(崔奉天) 등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연락이 닿은 의병장(義兵長)들은 각자 정병(精兵)을 이끌고 모화(毛火)에 도착하였다. 날이 저물자 왜군(倭軍)은 관문성 밖에 진을 치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화(毛火)에 도착한 의병군들은 진용(陣容)을 정리하여 3대로 나누어 관문성 남북에 매복하고, 화공작전(火攻作戰)을 전개하였다. 이때 피해는 양측이 반반이었다고 ‘화암실기(花岩實記)’에서 기록하고 있다.
전투는 다음날 다시 시작되었다. 이날은 울산지역 의병장 김흡(金洽), 김범(金範), 고처겸(高處謙), 김순경(金順卿) 등이 합세하였다. 간간히 전투가 이어지다가 저녁때는 서인충, 윤홍명, 박언복(朴彦福) 등이 군사를 끌고 왔다.
이로서 의병군(義兵軍)은 수천 기(騎)에 육박하여 의병군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나, 워낙 많은 수의 왜군(倭軍)도 만만치 않아 수차례의 공방전(攻防戰)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무장한 의병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사상자(死傷者)가 늘어나자 왜군(倭軍)들은 지리멸렬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밤새 격전(激戰)이 벌어졌고,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의병군에 승리가 돌아간 대첩(大捷)으로 기록되고 있다.
모화전투의 격전장 관문성
두 번째 ‘모화전투(毛火戰鬪)’는 선조(宣祖) 27년 정월 17일, 왜군의 일군(一軍)이 모화리(毛火里) 소재 원원사(지금의 민간사찰인 ‘원원사’가 아닌 본래의 ‘원원사’)에 침입한 것을 의병장 박춘무(朴春茂) 부대가 모화리 마을 안에까지 추격하여 격퇴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의병군의 좌부장 이몽서(李夢瑞)가 전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선조(宣祖) 29년 정월 3일, 의병장 이계수(李繼秀)가 왜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입실리에서 모화리(毛火里)를 향해 행군하던 중 왜군(倭軍) 수 십 명에게 공격을 당해 중상(重傷)을 입고 사경(死境)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관문성(關門城)에 주둔하고 있던 은진현감 ‘이곡’이 이 소식을 듣고, 급습하여 이계수(李繼秀)를 구출하고 왜군(倭軍)을 격파함으로써 침공한 왜군은 울산 쪽으로 패주(敗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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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현재의 원원사(遠願寺) 뒤 언덕은 옛 금당(金堂)터로 그 앞에 3층석탑이 동서 쌍탑 형태로 버티고 서 있다.
보물 제1429호인 원원사지(遠願寺址) 3층석탑은 기단부에 12지신을 양각(陽刻)하고, 그 위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는데, 그 기법과 솜씨가 빼어나기로 명성이 높다.
이 절터는 1927년 당시 불국사(佛國寺)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던 일본인 ‘스기야마(杉山)’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 절은 극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지금의 원원사지
특히 금당지(金堂地) 전방에 묘(墓)를 쓴 자가 미신(迷信) 때문에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을 무너뜨려 부근 골짜기로 굴려 내려 버려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현재의 탑은 1933년, 일본인(日本人)이 복원하여 세워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금당지(金堂地)’는 절에서 본존(本尊), 즉 석가모니불을 모셔 두는 건물 터를 말한다.
자난 2010년에는 모화리 원원사(遠源寺) 터에 나란히 서 있는 신라시대 쌍탑인 3층석탑(보물 1429호)이 1930년대에 어떻게 발굴․조사되고 복원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희귀 사진과 도면(圖面)이 공개되기도 했었다.
재일 한국인 연구자인 가종수(賈鍾壽) 일본 슈지쓰(就實)대학 대학원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 ‘한국의 고고학’ 여름호를 통해 1930년대에 일본인 건축학도 ‘노세우시조(能勢丑三)’가 당시에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로 있던 이 쌍탑을 직접 발굴조사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탑을 복원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과 도면 10여 장을 발굴하여 소개한 바 있다.
원원사 동탑 조사 중인 일본인 노세우시조(能勢丑三)
(1930년대 일본 건축학자 '노세우시조(能勢丑三)'에 의한 원원사지
발굴조사. 쌍탑인 이곳 삼층석탑 중 동탑을 조사하는 장면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노세', 그는 이곳 쌍탑인 3층석탑을 발굴하고 복원했다.
빈 절터에 '묘'를 쓴 사람이 자신의 가문에 해를 끼칠것이라며, '탑'을
허물어 개곡에 굴려버린 것을 발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었다)
현재는 부도(浮屠 ;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 4기와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신라(新羅)의 탑들에 비하여 탑신(塔身)이 가늘어 가냘픈 느낌이 들지만, 이러한 약점을 탑에 조각된 사천왕상(四天王像)과 12지 신상이 보강해주고 있다.
비교적 크고 안정된 이중기단은 상층기단의 12지 신상 조각을 위한 것이다. 또한 석탑의 동북쪽 500m 거리에 부도(浮屠) 3기가 있고, 서북쪽 300m 지점에 최근 발견된 1기의 부도(浮屠)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高麗)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서북쪽의 부도는 원좌(圓座)내에 범자삼자(梵字三字)를 새겨놓았고, 연화문 등의 조각이 다른 부도(浮屠)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조형미가 있다. 절터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 사적지(史蹟地) 바로 앞에 새로 들어선 원원사(遠願寺)라는 사찰은 1980년대 초에 세워진 개인 사찰이다. 사찰의 한문자(漢文字)도 신라시대에 세웠던 사찰 이름과 똑 같이 작명되어 있다.
지금의 개인 사찰 원원사(遠願寺)
이에 대해 주민들은 “마을의 자랑거리인 ‘원원사(遠願寺)’란 이름을 개인 사찰이 사용하는 것은 문제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고, 경상북도(慶尙北道)와 경주시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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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와 울산의 경계선 가운데 동해안에 치우친 부분에는 삼태봉~동대산~무룡산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산줄기가 있다.
태화강역(太和江驛 : 울산역)에서 울산시 북구 호계(虎溪)를 거쳐 국도 7호선을 타고, 불국사(佛國寺) 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다란 산줄기를 말한다.
가장 남쪽의 무룡산(452m)은 울산의 진산으로 일컬어지는 산이고,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동대산(東大山)과 ‘삼태봉’을 거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이르는 약 30㎞의 산줄기를 일명 ‘동대산맥(東大山脈)’ 또는 ‘삼태지맥’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도상의 봉서산
동해의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내륙(內陸)으로는 멀리 영남알프스 줄기까지 바라보이는 산줄기로 해발고도(海拔高度)가 높지는 않지만, 바다에 인접해 있어 상대적으로 고도감(高度感)은 꽤 있는 편이다.
‘삼태봉’은 흔히 독립된 봉우리로 대접받기도 하지만, 외동읍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은 ‘동대산’의 최고봉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봉서산(鳳棲山)’의 최고봉으로 보기도 한다.
‘봉서산(鳳棲山)’은 원원사(遠願寺)의 서쪽과 북쪽에 걸쳐 있는 아담한 산줄기의 최고봉을 가리키는 것이고, ‘삼태봉’은 동대산 자락의 최고봉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원원사(遠願寺) 입구에 설치한 표지석(標識石)에도 원원사가 소재하고 있는 산이 봉서산(鳳棲山)이라고 표지하고 있다.
원원사 표지석
어쨌든 봉서산(鳳捿山)은 해발 532.8m의 산정으로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모화리 원원사(遠願寺) 뒤쪽부터 ‘삼태봉’까지의 능선을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봉서산’이라 칭하고 있다.
이 ‘봉서산(鳳捿山)’을 ‘동대산(東大山)’의 별칭으로 보기도 하는데, 외동중학교 교정에 조성한 ‘청운정(靑雲庭)’의 비문(碑文)에 적힌 ‘봉서산’은 입실리 기사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모화리 원원사 뒤쪽의 봉서산(鳳捿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동중학교 동쪽 ‘동대산’을 말한다.
청운정의 비문을 지은 사람이 일부 산악인(山嶽人)들이 만든 등산용 지형도를 근거로 오판(誤判)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화리의 봉서산은 ‘봉황(鳳凰)이 깃든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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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하천 변에 거주하는 성씨(姓氏)의 이름을 차용하여 그 하천의 이름을 작명한 경우는 외동읍 모화리에 소재하는 우박천(禹朴川)이 유일하다.
외동읍의 ‘우박천(禹朴川)’은 울산만(蔚山灣)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 상류지역의 하천으로 옛 이름은 ‘어이내’라고 칭했다. ‘어이내’라는 옛 뜻은 하늘(天)이라는 뜻으로 신령스러움과 광명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고을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뜻하기도 한다.
‘우박천(禹朴川)’이라는 뜻은 1539년 경 지금의 외동읍 문산리의 ‘우박(禹朴)’마을에 단양우씨(丹陽禹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 살면서부터 동네 이름을 ‘우박’이라 하였고,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마을 이름을 따서 ‘우박천(禹朴川)’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여기에서 우박천(禹朴川)의 하류인 동천강(東川江)을 잠시 살펴본다. 조선시대 제작된 울산지역의 고지도(古地圖)에는 대부분 동천강이 태화강(太和江)과 함께 그려져 있어 예부터 동천강이 울산(蔚山) 지역의 주요하천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천강
동천강(東川江)은 예부터 울산시의 ‘농동(農東)’과 ‘농서(農西)’ 사이를 흐르는 강물을 동천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한자조어(漢字造語)일 뿐이고 그 이전에 불렀던 순수 우리말 이름은 ‘어름거랑’이었다.
한자로 표기해서 어련천(語連川)이란 말로 글자의 뜻대로라면 “말이 이어진다”라는 뜻의 ‘文式造語’라는 의미의 단어같이 보인다. 그러나 본뜻은 ‘얼음’이란 뜻을 음만 빌려온 이두식(吏讀)式) 조어(助語)였다.
그런데 동천강(東川江)과 우박천(禹朴川)을 ‘얼음거랑’이라고 부른 때도 오래된 옛적이고, 그 이후에는 ‘냉(冷)거랑’이란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 ‘냉거랑’은 실재로 얼음 같은 찬물이 흘러나와 ‘거랑’(개울)의 물이 하루종일 한랭(寒冷)한데서 온 이름이다.
동천강의 상류인 우박천(禹朴川)의 발원지(發源地)로서의 괘릉리의 ‘하이골’물이 그만큼 차고 맑았다는 얘기다. 중간에서 냉천리의 냉천(冷川)까지 합류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강의 발원지(發源地)란 하구(河口)에서부터 거리가 가장 먼 물줄기를 말하는데,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흐르는 물줄기를 본류(本流), 본류로 직접 흘러드는 물줄기를 제1지류(支流), 제1지류에 흘러드는 물줄기를 제2지류라고 한다.
동천강(東川江)과 우박천(禹朴川)의 발원지는 예로부터 울산(蔚山)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경주방향으로 가다 불국사역 전방 약 2km 지점의 좌측에 위치한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괘릉리(掛陵里) 일대라고 알려져 있다.
우박천과 동천강의 발원지 요도
정확한 발원지점(發源地點)은 괘릉리 위쪽 ‘하이골’에 최근 농업기반공사가 조성한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 안쪽의 ‘활성재’ 정상 바로 밑에 있는 괘릉리 지역 막바지 골짜기로 본다.
오래되어 세분화된 골짜기 이름은 기억에 없으나, 필자는 1960년대 초까지 나무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해다 나르거나, 여름마다 ‘소맥이러’ 다니기 위해 날마다 드나든 골짜기라 정확하게 알고 있다.
토함산록의 한 자락인 괘릉리의 ‘하이골’은 외동읍 괘릉리의 ‘괘릉재’, 즉 동산령(東山嶺)을 중심으로 왼쪽인 신계리(薪溪里)의 ‘상섶재’와 오른쪽인 활성리(活城里)의 ‘활성재’사이에 있는 아흔 아홉 개의 작고 큰 골짜기를 통틀어 이르는 이름이다.
이들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에 모여들고 있다. ‘아흔아홉 골짜기’란 실제로 골짜기가 아흔 아홉 개가 아니라 그만큼 골짜기 수가 많다는 뜻이다.
50년여 전 '하이골'의 아흔 아홉 번째 골짜기('활성재' 바로 밑 마지막 골짜기)에 땔나무를 하러 갔을 때 골짜기 입구에 한 두평 정도의 습지가 있었고, 그 습지에서 미세한 물방울들이 삐어져 나와 자그마한 물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이골' 중 가장 높은 골짜기로 바로 위 '활성재' 잿길로 활성리의 초동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오르내리는 모습이 쳐다보이는 골짜기였다. 이곳이 괘릉저수지의 수원지이자 우박천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물론 형산강의 또 다른 발원지도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이골’은 한자로 ‘大利谷’이라고도 하는데, 한문자대로라면, ‘한이골’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 말 ‘한’은 ‘크다(大)’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박천의 발원지 괘릉리 '하이골'의 괘릉저수지
전체 명칭은 ‘큰 이로움을 주는 골짜기’라는 뜻인데, 괘릉리 주민들에게 땔나무와 약간의 농업용수(農業用水)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거의가 만석꾼의 소작농으로 보릿고개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당하며 살던 그 시절의 괘릉리 서민들에게는 땔나무 채취도 천수답(天水畓)을 면하지 못한 ‘하이골’의 개울물도 모두 이로움은커녕 가난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에서 흘러내리는 또 다른 물줄기는 곧바로 외동읍 신계리 앞 개울과 시래동(時來洞)을 거쳐 남천(南川)과 합류하여 형산강으로 흐르는데, 괘릉리 감산사(甘山寺) 위쪽 도수로(導水路)를 통해 유입되는 물은 감산사 앞을 지나 ‘싸리밭등’ 위쪽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리고 마을 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괘릉리 ‘뺏골’(볕골)과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하천, 그리고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로 밑과 우박천(禹朴川)을 이루다가 동천강(東川江)으로 흐른다.
위에서 말한 ‘사리밭등’은 현지에서는 ‘사리밭디’라고 하며, ‘사리’는 ‘싸리’를 말하는데 경상도(慶尙道) 사람들이 ‘싸’자 발음을 못하는데서 생긴 말이다. ‘디’는 ‘등’, 즉 ‘등성이’의 경주지방 방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작되는 우박천(禹朴川)의 물은 괘릉리에서 활성리, 죽동리, 연안리, 구어리, 입실리, 모화리 등지를 흐르면서 비옥한 외동평야(外東平野)를 조성하고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박천(禹朴川)과 동천강(東川江)엔 물이 많았고,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산전샘’의 원천(源泉)이 되기도 했었다.
모래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맑은 물이 고요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물이 모래와 뒤엉켜 구르기도 했다. 수원지(水源池)인 괘릉리(掛陵里) ‘하이골’의 물이 그만큼 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맑고 아름다웠던 우박천(禹朴川)도 이제는 물이 없는 건천(乾川)이 다 되어 가고 있어 현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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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조(新羅朝) 당시에는 지금의 외동읍 지역을 모화군(毛火郡) 또는 모벌군(毛伐郡)이라고 통칭했고, 문벌군(蚊伐郡)이라고도 칭했다.
신라 6부촌인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관할에서 본피부 관할로 변경되었다가 그 일부인 지금의 외동읍 지역을 모화군(毛火郡)으로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처소(處所 ; 지금의 군청소재지)는 모벌(毛伐) 또는 모화(毛火)로 표기했는데, ‘伐’이든 ‘火’든 둘 다 고대(古代)에 ‘들’이나 ‘벌판’을 뜻하는 ‘ㅂ.ㄹ(블)’로 읽혔는데, 지금의 모화리(毛火里)를 말한다.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毛火里)의 지명유래에 “신라시대 때 불가(佛家)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毛伐郡城) 성문에 이르러 삭발을(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조 모화군(毛火郡)의 군청소재지 모화리
(태화방직을 철거하기 전이다)
모화리(毛火里) 일대가 동대산과 치술령의 사이에 위치한 협곡지형이어서 산 사이의 벌판이라는 뜻으로 ‘묏벌’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 ‘모벌(毛伐)’이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의 모벌군(毛伐郡)은 서라벌과 신라의 중요 항구였던 울산을 사이에 두고 서라벌의 현관(玄關)역할을 하다가 서기 757년 신라 제35대 경덕왕 17년에 임관군(臨關郡)으로 군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모화군(毛火郡)이 임관군(臨關郡)으로 명칭이 변경된 사유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당시 신라의 조정에서 전국의 지명들을 모두 이두(吏讀) 문자에서 한자명(漢字名)으로 고치면서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말한 ‘이두’란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신라 때부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말한다. 그리고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이란 한글 이외의 문자를 빌려서 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의 총칭이다.
넓은 의미로는 현대국어(現代國語)의 로마자 표기도 포함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자(漢字)를 빌려 국어를 기록하는 문자(文字)의 운용을 일컫는다.
경주 지역의 여러 군현들 역시 이때 한자음이나 뜻을 빌려 표기했던 우리말 지명들이 모두 한자명으로 고쳐졌다.
모화군(毛火郡)이 임관군(臨關郡)으로(現 외동읍), 비화현이 안강현으로(現 안강읍), 구도성은 대성군으로(現 보문동) 각각 바뀌었다.
모화리
모화군(毛火郡) 즉, 임관군(臨關郡)의 위치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가 중심지인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범위는 불분명하다. 지금의 외동읍과 울산시 북구 지역으로 추측된다.
서라벌(徐羅伐)의 남쪽 관문이자 국방상의 요지이며, 울산지방의 현(縣)들을 관할한 무척 큰 고을이었음에도 상세한 역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모화군(毛火郡)은 역사초기부터 서라벌의 외곽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물왕때에 가야군(伽倻軍)과 왜군(倭軍)이 울산에서 합류한 후 ‘모벌’을 돌파해 신라를 침공한 후부터 ‘모화(毛火)’는 국방상의 중요성이 부각된 듯하다.
모화군(毛火郡)은 지금의 외동읍과 신라의 중요한 외항이었던 울산의 두 현, 굴아화현(屈阿火縣 ; 지금의 울주군 범서면)과 율포현(栗浦縣 ;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까지 관할로 했었다.
그리고 모화군(毛火郡)의 관할 하에서 두 현이 있던 울산지방은 사라센 제국과 당나라, 일본, 탐라국(耽羅國 ; 제주도)의 상인과 사신이 드나드는 무역항으로 번창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라센제국(Saracens)은 이슬람교의 신봉자들이 이룩한 대제국(大帝國)의 총칭이다. 사라센 또는 사라센족(인)은 대체로 이슬람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로 원래 로마제국 말기에 시나이반도(Sinai-peninsula)에 사는 유목민(遊牧民)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관문성
서기 613년까지 예언자 ‘마호메트’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북방의 ‘메디나’로 옮겨갔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 교단(敎團)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센 제국은 ‘메디나’의 이 자그마한 이슬람교단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국가였다. 632년 예언자(豫言者) ‘마호메트’가 죽은 뒤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들은 ‘아부바크르’를 새 지도자인 ‘칼리프’로 추대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세력을 넓혀 7세기에는 동쪽으로 이란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갓이다.
사라센 제국은 잠깐 사이에 아라비아로부터 북 아프리카와 유럽에까지 이르는 큰 영토(領土)를 갖게 되었다. 사만 왕조, 사파리 왕조, 살라리 왕조, 비잔틴 왕조, 함단 왕조, 부와이 왕조, 파티마 왕조들이 모두 사라센 제국이었다.
서양에서는 중세 1000년의 시기 중 아라비아 민족이 지배하는 새로운 노예국가(奴隸國家)였던 사라센 제국이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대륙 일부의 패권을 장악했던 전반기를 ‘암흑시대(暗黑時代)’ 또는 ‘야만시대’로 불린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모화군(毛火郡)의 처소(군청소재지)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모화리에 두었으며, 앞에서 소개한 대로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인 굴아화현과 율포현을 영현으로 두었다.
또한 모화군(毛火郡)의 명칭은 앞서 소개한 대로 모벌군 또는 문벌군(성덕왕 때의 지명)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지금의 외동읍 지역인 모화군(毛火郡)은 신라의 수도로 이르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어 왜군의 침로를 막기 위해 성덕왕 때 관문성을 쌓았으며, 경덕왕 17년(757)에 임관군(臨關郡)으로 개칭했었다.
관문성
그런데 틈만 나면 서라벌(徐羅伐)을 침공하던 왜구를 물리쳐 명성을 떨치던 당시의 모화군(毛火郡)의 영현이었던 굴아화현과 율포현에서 신라조(新羅朝)의 패망을 촉진하는 모반이 있었다는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조 말엽에 모화군(毛火郡)의 영현이었던 굴아화현 출신의 박윤웅(朴允雄)이 당시 그 일대의 강력한 호족으로 활약했는데, 930년 이들 세력이 고려에 귀부(龜趺 ;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신라지역이 고려에 통합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박윤웅은 그 공적으로 고려조의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고, 그의 영역인 모화군(毛火郡)과 산하의 굴아화현 등 두 개의 현을 비롯하여 동안군(東安郡)의 영현인 우풍현까지 통합하여 흥례부(興禮府)라는 거대한 고을을 탄생시켜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모화리
나중에 모화군(毛火郡)은 울주(鬱州)로 개명한 흥례부에서 제외되었고,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동경(東京 ;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추후 병합되었다. 이상의 내용이 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 모화군(毛火郡)의 명칭이 전래된 유래에 속한다.
그러나 경주시 외동읍 사무소 홈페이지에 나오는 연혁에는 모화군(毛火郡)이나 임관군(臨關郡)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홈페이지 상의 연혁에 의하면 외동읍은 고대의 사로국(斯盧國 ; 신라) 6부족 중에 본피부(本皮部), 즉 취산진지촌에 속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모화군(毛火郡)의 군청소재지였던 모화리에는 신라가 당(唐)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한 후에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지금 모화리(毛火里)의 자연부락인 ‘땅지’ 또는 ‘땅진’이라는 마을이 그곳이다.
신라(新羅) 삼국통일기(三國統一期)에 원군(援軍)으로 왔던 당(唐)나라 군사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당진(唐陣)’이라 하던 것이 경상도사투리식의 경음(硬音)으로 발음이 변하여 ‘땅진’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땅지’라고 불리고 있다.
모화리 풍경
당시의 모화군(毛火郡) 역사를 조금 더 알아본다. 신라의 3국통일 이후인 722년(신라 성덕왕 21년)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이 축조되어 ‘노당(弩幢)’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731년에는 신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등 대일관계가 험악해지자 ‘노당’이 증원되는 등 모화군(毛火郡)은 남해안 국방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당(弩幢)’은 신라 때 병부(兵部)에 속한 관직으로 ‘노사지(弩舍知)’의 바로 아래 벼슬로서, 위계(位階)는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 있었다.
여기에서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신라 관등 중 ‘선저지(先沮知)’와 ‘대사(大舍)’가 어떤 등급인지 당시의 신라의 관등과 임용대상 신분을 도표로 소개한다.
신라의 관등과 임용대상 신분
등
급 |
관 직
명 |
진
골 |
6
두품 |
5
두품 |
4
두품 |
중
시령 |
시랑
·
경 |
도
독 |
사
신 |
군
태수 |
현
령 |
1 |
이벌찬
이벌간
우벌찬
각 간
각 찬
서발한
서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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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척찬
이 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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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잡 찬
잡 판
소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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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파진찬
해 간
파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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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대아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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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아 찬
아척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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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일길찬
을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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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사 찬
살 찬
사돌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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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급벌찬
급 찬
급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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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대나마
대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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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나 마
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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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대 사
한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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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사 지
소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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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길 사
계 지
길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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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대 오
대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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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소 오
소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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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조 위
선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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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모벌군성(毛伐郡城)
당시의 ‘노당(弩幢)’은 671년(문무왕 11)에 설치하여 1명을 병부(兵部)에 두었고, 경덕왕 때 ‘소사병(小司兵)’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노당(弩幢)’이라는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원래는 ‘사설당(四設幢:弩幢 ·雲梯幢 ·衝幢 ·雲幢)’의 하나로 ‘노당’의 한 사람이 병부에 있었으나, 뒤에 화살을 한 번에 여러 개 나가게 하는 ‘쇠뇌(弩)’를 사용하는 ‘당(幢)’이 생겨, 그 으뜸자리에 ‘노당주(弩幢主)’를 두고 다른 ‘노당’을 각 감(監)에 수십 명씩 배치하였다.
모화군에 성을 쌓은 신라조의 관리는 원진(元眞)이라는 사림인데, 원진은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의 관인(官人)이다. 722년 각간의 관등으로 왕명을 받고 모화군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이 성을 관문성이라고 한다.
원진은 축성 당시 3만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둘레 6,792보, 높이 5척165cm)이 되는 성을 완공하였다. 이 성은 울산 방면으로부터 침략하는 왜구를 막아주는, 신라 왕경(王京) 부근의 가장 웅장한 석성이 되었다.
《당서》 ‘신라조(新羅條)’에 “산을 이어 수십 리에 걸쳐 좁은 골짜기를 쇠문으로 잠갔으니, 이를 관문(關門)이라 하며, 항상 ‘노(弩)’를 지닌 군사 수천 명이 지킨다.”고 쓰여 있을 정도이다.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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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리에는 4개의 개신교회가 있다. 모화3리 482에는 ‘통합’ 소속의 모화교회가 있고, 모화2리 236-2에는 ‘고신(高神)’ 소속의 모화제일교회, 그리고 모화3리 294-3에는 ‘통합(統合)’ 소속의 모화중앙교회, 1984년에 개척한 동서남북교회 등이 소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통합(統合)’과 ‘고신(高神)’이라는 말은 기독교 개신교(改新敎) 교단의 교파(敎派)를 말하는데, ‘고신(高神)’은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 출신 목회자들의 교파이고, ‘통합’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교단으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면서 연합을 추구하는 신학적(神學的)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모화교회 전경
‘모화교회(毛火敎會)’는 1902년 4월 7일 ‘안씨’부인이 기독교 선교사(宣敎師)로부터 전도를 받아 5명의 교인으로 모화1리 382번지 사랑방에서 기도회로 시작한 교회로 1931년 10월에는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입실교회(현 외동제일교회)’에 합병되기도 했었다.
이후 1945년, 일제(日帝)가 패망하여 저들 나라로 들어가고, 6.25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12월 29일에는 ‘외동제일교회(입실교회)’에서 분립(分立)했고, 1951년 1월, 교회당(敎會堂)을 신축한 이후 지금까지 120년의 전통을 자랑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모화교회(毛火敎會)’는 필자의 할머니의 어머님(필자의 陳外曾祖母)과 할머니께서 처녀시절에 출석하시던 교회였다. 그 당시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계동(溪洞)에 살고 계셨다.
모화리 동서남북교회
지금의 모화교회(毛火敎會)는 지역사회의 주민통합과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13년 7월 5일, 모화3리에 위치한 모화교회 교육관(敎育館)에 ‘경주외동외국인상담센터’의 개소식을 가지고, 관련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외국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모화리(毛火里)의 대외적 민간외교 활동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
모화교회(毛火敎會)에 부설된 ‘경주외동외국인상담센터’는 경주YMCA와 모화교회가 함께 만든 센터로 외동읍(外東邑)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내국인과 함께 살기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경주외동외국인상담센터’는 외동읍(外東邑) 지역에서 경주외국인센터(외동읍 입실1리)에 이어 두 번째로 개소(開所)된 센터로 외국인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개소되었다.
모화교회 경주외동외국인상담센터 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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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모화리(毛火里) 479에는 천주교 모화성당(毛火聖堂)이 소재하고 있다. 지금의 성당은 옛적 모화성당이 낙후되자 2013년 4월 7일, 봉헌(奉獻)한 성당으로 대지면적 3540㎡, 연면적 1864㎡에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신축한 모화 성당
370명을 수용하는 성전(聖殿)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는 빛이 시간대별로 다른 느낌과 색깔을 연출하고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十字架), 십자가의 길, 감실 등은 서양화가 김도율(대구대교구) 신부(神父)의 작품이다.
모화성당(毛火聖堂) 신자들은 본당이 설립된 2002년부터 가건물 형태의 임시 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2011년부터 새 성전 건립을 추진하면서 본당(本堂) 신자들이 타 본당 모금활동과 물품 판매를 통해 성전건립 기금을 마련했었다.
모화성당의 임시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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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에 걸쳐 모화리(毛火里)의 영욕(榮辱)을 상징하는 시설이나 그에 부속된 군상(群像)이 있었다면, 단연코 모화리 1410번지에 소재하던 태화방직(泰華紡織)과 그 시절 여공(女工)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절 태화방직(泰華紡織)의 영욕(榮辱)의 세월이 모화리(毛火里)의 영욕을 가름해 왔기 때문이다.
태화방직(泰華紡織)이 지난 1996년 2월, 부도로 공장문을 닫기 전까지는 1970년대 중반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던 모화리(毛火里)를 웬만한 중소도시(中小都市)에 버금가는 인구 밀집지역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당시에는 자동차 시트 봉제업(縫製業) 등 연관 산업시설인 소규모 공장까지 성업을 이루고 있어서 온 동네가 생산시설이고 공장이었다.
태화방직(泰華紡織)의 미싱사들을 스카우트하여 현대자동차(現代自動車)에 납품하는 자동차 시트 봉제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모화리의 태화방직
그러나 태화방직(泰華紡織)이 부도로 폐업된 뒤에는 이들 미싱사들의 거의가 다른 방직공장으로 옮겨 가거나, 서비스 업종으로 이직(移職)하여 더 이상 기술인력(技術人力)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은 울산시(蔚山市) 북구청이 직접 나서서 자동차 시트 봉제 전문인력 양성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자동차 시트 생산과 품질관리(品質管理)를 하기 위한 봉제인력(縫製人力)의 전문화(專門化)와 우수인력 확보를 위한 자치단체 차원의 지원활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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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그 시절 모화리의 영욕(榮辱)을 가름해 온 태화방직(泰華紡織)의 부침(浮沈)의 세월과 그에 따른 사연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모화리(毛火里)와 울산시 북구지역이 온통 단발머리 여공(女工)들로 북적대게 하던 태화방직(泰華紡織)이 회사 측의 무리한 투자확대로 부도(不渡) 처리되어 문을 닫은 뒤에는 거대한 방직공장과 사택(社宅)이 무려 20여 년간 폐허가 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그 시절 태화방직 여공들
태화방직(泰華紡織)은 원래 부산(釜山)에 있던 신발 종합메이커 (주)태화(泰華)의 자회사였다.
당시의 태화그룹은 주력기업인 (주)태화(泰華)의 1만 2천명직원 외에 태화방직(泰華紡織), 태화건설, 태화섬유, 태화칼슘, 동아증권 등 10여개 관계회사에 총 1만 6천여 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수출 1억불 달성을 목표로 하는 부산지방의 대표적 신발 수출업체 중의 하나였다.
1970년대 중반, 태화(泰華)그룹은 탈고무 업종 다각화에 따라 건설, 증권업체(證券業體) 등에 진출하면서 본사를 서울 광화문(光化門)으로 옮겼는데, 당시 태화그룹은 수출이 전국 15위 정도에 매출액(賣出額)은 30위 이내였다.
그러나 태화(泰華)그룹은 주력(主力)인 신발산업의 사양화(斜陽化)와 산업다각화에 따른 태화기계(泰華機械)와 태화종합건설(泰華綜合建設) 투자의 실패 등으로 부산지방의 신발업체인 국제화학, 진양화학, 삼화고무 등과 함께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 시절 태화방직 여공들
태화기계(泰華機械)와 태화종합건설 투자의 실패로 1981년, 회사가 은행(銀行) 관리 하에 들어갔고, 1996년 2월에는 우려하던 태화방직(泰華機械)도 부도(不渡)로 공장문을 닫게 되었으며, 이로써 모화리의 수많은 태화방직 여공들도 울음바다를 이루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태화방직(泰華紡織)의 연관 산업으로 생계를 영위하던 수많은 모화리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뒤에는 그토록 넘쳐나던 모화리(毛火里)의 활기도 급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택가(住宅街)에는 인적(人跡)이 끊기기 시작했고, 밤늦게까지 흥청대던 이런저런 서비스업소도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어터지던 교회(敎會)들마저 한산해지기 시작했고, 모화초등학교(毛火初等學校)와 태화고등학교(泰華高等學校)는 학생 수가 급감(急減)하여 무더기 공실(空室)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그 시절 태화방직 여공들의 숙소(사택)
(20여 년간 방치되어 흉가가 되어버렸다)
특히 폐허(廢墟)가 된 태화방직(泰華紡織) 창고마다에는 방직공장에서 쓰여야하는 원료나 제품대신 특정 오염물질인 폐(廢) 주물사(鑄物砂)가 9만 여 톤이나 쌓여 있었고, 각종 화학물질이 방치되어 있어 모화리(毛火里)와 울산지역의 환경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폐(廢) 주물사(鑄物砂)는 유독성 ‘페놀(특유한 냄새와 독성이 있는 무색 또는 흰색의 결정성 덩어리)’이 함유된 ‘주물사’를 말하며, ‘주물사’는 거푸집을 만드는 데 쓰는 모래로 통기성(通氣性)과 내화성(耐火性)이 좋아야 하며 주로 점토분(粘土分)을 함유하는 천연 모래를 쓴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여기에다 태화방직(泰華紡織)은 지난 1996년 2월, 부도(不渡) 처리된 후 20년여 간 방치(放置)되어 있다가 지난 2002년 10월 경매를 통해 한국자산관리공사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철거 전의 태화방직
그리고 지난 2003년 2월, 안성주택산업㈜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과정에서는 4년여 간의 법정다툼이 발생하는 등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공방(法廷攻防)이 벌어져 인근 외동공단(外東工團)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근로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주거난(住居難)을 가중시켜 왔다.
외동공단(外東工團) 등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태화방직(泰華紡織) 부지가 소송에 말려 주거용지로서의 기능을 전혀 작동하지 못함으로써 공장은 외동읍(外東邑)에 소재하는데, 종업원들은 거의가 울산(蔚山) 시민들로 울산에서 출퇴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울산공업지역에 인접한 문산리(汶山里)의 외동공단(外東工團) 등 외동읍(外東邑) 지역은 편리한 교통에다 울산(蔚山)에 소재한 현대자동차 부품단지로 급부상하면서 등록된 공장이 2013년 현재 700여 개에 달하고 1만3천여 명의 근로자(勤勞者)가 일하고 있었다.
특히 외동읍(外東邑)지역 공장들은 울산(蔚山)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부품업체(部品業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상당수 근로자들이 외동읍 지역에서 생활을 희망하고 있지만, 교육시설이 미비한데다 주택난으로 대부분 울산(蔚山)에서 출퇴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8년 2월께 대법원(大法院)의 최종 판결에서 태화방직(泰華紡織) 부지에 대한 안성주택의 소유권이 인정됨으로써 안성주택이 이를 2010년 3월께 다시 ㈜부영주택에 매매하여 이제는 9만여 평의 태화방직 부지에 주택건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주시(慶州市)에서는 이를 기초로 2014년도 업무계획(業務計劃)으로 태화방직(泰華紡織) 부지에 4,500세대의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는 지원계획을 수립하여 확정했다.
지난 1992년도에 태화방직(泰華紡織)이 폐업한 후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어오던 이 부지는 총 9만여 평으로 공원과 도로를 포함한 공동주택지가 5만여 평에 달해 약 4천여 세대의 대단위 아파트 건립이 가능한 곳이다.
섬유산업의 전성기 시절인 당시의 모화리(毛火里)에는 수많은 태화방직(泰華紡織) 여공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1980년대 중반 태화방직회사(泰華紡織會社)가 문을 닫은 후 이제는 화사 측에서 여공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제공한 태화고등학교만 남기고,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철거 전의 태화방직
(잿빛 하늘이 태화방직의 마지막을 임종이라도 하듯 낮게 내려와 있다)
그러나 이 학교에는 그 시절 여공(女工)들이나 근로여성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고, 울산시(蔚山市) 지역의 중학교 졸업생들이 진을 치다가 이제는 특성화고등학교(特性化高等學校)로 변신이 되어 전국을 대상으로 학생모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태화방직(泰華紡織)의 전성기에는 모화리(毛火里)의 지역경제도 그만큼 활성화 되어 돈과 활기(活氣)가 차고 넘쳤지만, 회사가 문을 닫고 모두가 떠나 버린 뒤에는 사람도 돈도 함께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다보니 남아 있던 공장과 기숙사(寄宿舍)도, 교회와 이발소도, 소란한 생활인들의 발걸음으로 밤늦게까지 소란하던 주택가도 모두 녹이 쓸고 퇴색이 되어 흉물(凶物)이 되는가 하면, 인적이 끊기다 못해 버려진 빈집에는 노숙인(老宿人)들이 몸을 녹이는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다.
폐허가 된 그 시절 모화리 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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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옛 태화방직(泰華紡織) 부지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 초등학교(初等學校)는 당연히 하나 더 설립될 것이고, 잘하면 중학교(中學校) 설립도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중학교(中學校)가 없으면, 울산시(蔚山市)에 거주하는 근로자(勤勞者)들이 외동읍 지역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동공단에 종사하는 울산시 거주 근로자들이 모두 외동읍 주민으로 옮겨오면, 옛 태화방직(泰華紡織) 시대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고향 모화리(毛火里)의 새로운 도약과 비상(飛上)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그리고 꽃피는 그 고향을 등진 우리들이 언젠가 되돌아가서 인적(人跡) 끊긴 마을길을 다시 채웠으면 한다.
모두들 떠나버리고, 인적이 끊긴 모화리 원주민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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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리(毛火里)에는 ‘외동 기능성 가바(GABA)라는 청정미나리’라는 그 미나리 길이만큼이나 기다란 이름의 청정 미나리가 재배되어 출하되고 있다. 이 미나리는 모화리 672-1에 소재하는 경주농업기술센터가 우수한 종근(種根)만 골라 개량한 품종이다.
‘기능성 가바 청정미나리’는 두뇌활동(頭腦活動)에 좋은 ‘GABA (Gamma Amino Butyric Acid)’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학생들의 학습능력(學習能力)을 키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능(效能)을 갖추고 있다.
‘외동 기능성 가바(GABA)’라는 청정미나리’
또한 속이 차고 연해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진한 향(香)과 어우러져 겨울철에는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는데 좋다고 한다.
비타민과 무기질(無機質), 섬유질이 풍부한 알카리성 식품으로 이뇨(利尿), 이담, 해독작용(解毒作用)과 혈액 정화, 간 보호, 숙취제거(宿醉除去) 등의 효능도 있다고 한다.
외동읍 모화리(毛火里)와 녹동리 5ha에서 청정암반수(淸淨巖盤水)를 이용해 무농약 친환경 농산물 인증(認證)을 받아 재배되는 ‘외동 기능성 미나리’는 올해 70여 톤을 생산하여 5억 원의 고소득(高所得)을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경주농업기술센터는 “청정미나리의 품질고급화와 차별화(差別化)를 위해 친환경 농법과 재배기술(栽培技術)을 더욱 체계화하고, 청정미나리 재배단지를 지속적(持續的)으로 늘려 농가 고소득 품목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도록 적극 육성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모화리(毛火里)와 녹동리의 ‘가바(GABA)’ 청정미나리는 무논이나, 땅이 걸고 물이 괴거나 흐르는 미나리꽝(미나리를 심은 논)에 재배(栽培)하는 것이 아니고, 비닐 온상(溫床)의 밭에서 재배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온상밭에서 재배하는 모화리 ‘가바(GABA)’ 청정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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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리(毛火里)는 건너말, 계동(溪東), 땅지, 모화(毛火), 밭가운데, 상모(上毛), 새각단, 역전(驛前), 웃말(上村), 원띠, 큰말, 하모(下毛) 등 무려 1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비교적 많은 유적(遺蹟)과 전설을 간직한 마을이다.
동해남부선의 모화역(毛火驛)이 소재하고 있고, 외동읍에서는 유일한 사립 태화고등학교(太和高等學校)가 소재한다. 모화리의 자연부락을 소개한다.
○ 역전(驛前)
경주(慶州)와 부산(釜山)을 잇는 철도 동해남부선의 모화역(毛火驛)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역전(驛前)’이라 부르고 있으며, 울산(蔚山) 시내버스의 종점이어서 경주시내 버스와의 교차점(交叉點)을 이루어 경주와 울산방면의 주민 왕래가 빈번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역전
○ 건너말
‘하모(下毛)’에 속해 있는 소단위 마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데, 옛날에 명절(名節)을 맞아 친목대상이 되는 편을 나누기 위해 ‘건너말’을 경기단위(競技單位)로 택한 것이 유래되어 지금도 좁은 계곡 반대편 소집단(小集團) 인가마을을 상호 ‘건너말’이라 부르고 있다.
○ 계동(溪東)
조선(朝鮮) 시대까지는 ‘문산리(汶山里)’와 한 마을이었는데 우박천(禹朴川)을 경계(境界)로 하여 분할되는 바람에 개울의 동쪽 편에 위치한다 하여 계동(溪東)이라 불렀다 한다.
우박천 계동교
계동(溪東)에는 필자의 ‘진외가(陳外家 ; 아버지의 외가)가 있었으나, 필자의 경우는 청소년기에 상경(上京)하여 왕래가 없었고, 선친께서도 30여 년 전에 타계(他界)하신 터라 진외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마을에 거주하고 계시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해방 전에 작고(作故)하신 진외할아버지의 존함은 최(崔)자 정(廷)자 수(守)자이시고, 그 분의 따님으로 지난 1959년, 필자의 향리(괘릉리)에서 작고하신 할머니의 존함은 최(崔)자 우(于)자 개(介)자를 쓰셨다.
혹시 이분들의 거처나, 이분들의 후손들이 살아오신 그동안의 사연(事緣)을 알고 계시는 계동(溪東) 출신 향우님이 계시면, ‘답글’로 전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는다.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전임 회장이자 우리 향우회 ‘카페지기’이신 우희곤(禹熙坤) 박사님이 이 마을 출신인데, 청소년기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그런지 필자의 진외가(陳外家)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땅지, 땅진, 당진(唐陣)
신라(新羅) 통일기(統一期)에 원군(援軍)으로 왔던 당(唐)나라 군사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당진(唐陣)’이라 하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땅진’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땅지’라고 불리고 있다.
○ 모벌(毛伐), 모화(毛火)
이 마을에는 관문성(關門城)이 있다. 관문성(關門城)은 삼국유사 및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이 지역을 신라도성(新羅都城)의 외성(外城)으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모화(毛火)라는 지명은 그 당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 불교의 최성기(最盛期)에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이 곳 모화군(毛火郡) 성문(城門)에 이르러 삭발(毛伐)하여 머리털을 태우고, 불국사 경내에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또는 ‘모화(毛火)’로 불리었다는 전설이 있다.
○ 밭가운데
신라(新羅) 시대에는 모화리(毛火里)에서 가장 큰 자연촌락(自然村落)을 이루고 있었는데 사방에는 밭으로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밭가운데’ 라고 불리어졌다.
○ 상모(上毛)
모화리(毛火里) 전역으로 볼 때 경주(慶州)와 부산(釜山)을 잇는 동해남부선을 경계로 북동쪽 상부에 위치 하였다하여 ‘상모(上毛)’라 부르고 있으며, 자연촌락(自然村落) 중에서도 가장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마을이다.
○ 새각단, 새뜸
‘하모(下毛)’에 속해 있는 새로 생긴 작은 마을을 일컬어 ‘새각단’ 또는 뜸뜸이 인가가 산재(散在)하여 형성되었다 하여 ‘새뜸’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들 촌락명이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각단’이란 용어는 입실리 기사에서 소개한바와 같다.
○ 웃말, 상촌(上村)
‘상모(上毛)’ 가운데서도 북동쪽 상부(上部)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웃말’ 또는 ‘상촌(上村)’이라 불리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규모가 작은 기와집들이 많다.
○ 원띠, 원지(院趾)
조선(朝鮮) 시대에 원님이 살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지’라고 불려오다가 그 후 ‘원띠’라고도 불러왔다고 한다.
○ 큰말
‘상모(上毛)’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라 ‘큰말’이라 불리고 있으며, 약 30여년 전에 태화방직주식회사(太和紡織株式會社) 사택인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립되어 주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원주민(原住民)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
○ 하모(下毛)
모화리(毛火里) 전역으로 볼 때 ‘상모(上毛)’와 반대 방향인 하부(下部)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하모(下毛)’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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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리(毛火里)는 6.25동란 때 전사한 공군조종사(空軍操縱士) 박두원(朴斗元)의 향리이기도 하다. 박두원은 1926년 7월 5일 당시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 모화리(毛火里) 12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박두원(朴斗元)은 7세 때 동생과 단 둘이 도일(渡日)하여, 1943년 3월 사가(佐賀)현에 위치한 사가(佐賀)중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9월에는 일본 다찌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陸軍飛行學校) 조종과정을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비록 일제(日帝)의 육군항공대 조종사(操縱士)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한 전력(前歷)을 가지기는 했으나, 1950년 6월 25일 조국의 전쟁발발 소식을 접하자 그해 10월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 구주(九州) 제2진으로 자원입대하였다.
부산(釜山)에 있는 육군헌병대(陸軍憲兵隊)에서 근무하던 중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대구(大邱)와 영천(永川)전투에 참전 중에 상관(上官)의 추천으로 1952년 2월 1일 공군 간부후보생(幹部候補生) 16기로 입대하여 동년 3월 1일, 군번 50945로 공군소위(空軍少尉)에 임관되었다.
박두원(朴斗元)은 6.25전쟁 중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으로 고국전선에 참전한 641명의 참전인원 중 유일하게 공군(空軍)에 지원하였다.
전쟁기념관에 게시한 박두원 대위 영정
(얼굴과 복식은 전쟁 당시 사진과 복장을 기준으로 유화로 제작되었다)
어쨌든 일제(日帝)의 패망으로 실전경험은 없었으나, 일본 육군항공대(陸軍航空隊)의 조종사 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에 불과 1개월의 훈련으로 공군장교(空軍將校)로 임관되어 전투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관(任官)과 동시에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무스탕 전폭기(戰爆機)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여기에다 부대배속 이틀 후부터 출격(出擊)을 개시한 그는 적진지 폭격, 보급로 차단작전, 지상군(地上軍) 근접지원작전 등 총 90회의 출격기록을 수립하였다.
1개월에 평균 18회씩의 출격을 한 셈이다. 퇴각하는 북한군(北韓軍)과 중공군(中共軍)의 퇴로를 차단하여 괴멸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종사의 숙련도(熟練度)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박두원은 이때부터 원산(元山), 고성(固城), 간성(干城), 신안주(新安州)등지에서 적진지, 보급품(補給品) 집적소 등에 대한 공격으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공군에서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치하하여 5개월 만에 중위(中尉)로 진급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나 1952년 8월 2일 89회째 출격하던 날, 적진지를 공격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對空砲火)를 맞아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박두원이 전투조종사(戰鬪操縱士)가 되면서 평소에 최소한 100회의 출격(出擊)을 희망했던 그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89회를 마지막으로 산화(散華)하자, 동료 조종사들은 다음날부터 그의 영정(影幀)을 들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의 출격기록을 채워주는 눈물겨운 전우애(戰友愛)를 발휘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부(政府)는 박두원을 중위에서 대위(大尉)로 특진(特進)시키고, 1952년 10월 15일,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을 비롯해 비행훈장, 6·25종군기장, 대통령표창 등을 추서(追敍)하였다.
국립묘지(현충원)의 고 박두원 대위의 묘
모화리(毛火里) 출신 회원님들을 위해 박두원(朴斗元) 대위의 사연을 조금 더 알아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共産軍)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박두원(朴斗元)은 그해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지원 입대하여 대구(大邱)와 영천(永川)전투에 투입되었다.
학도병(學徒兵)으로 지상전투에 참전한 그는 아군(我軍)에 전투비행대가 있다는 사실과 전투조종사(戰鬪操縱士)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공군본부를 찾아가 당시 작전국장(作戰局長)인 한해남 중령을 만남으로써 1951년 7월 모국의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새로운 사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공군에 편입된 그는 간단한 비행훈련과정을 거쳐 1952년 3월 1일 공군소위(空軍少尉)로 임관하여, 공군 최초의 비행단(飛行團)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던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무스탕 전폭기(戰爆機)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처음 조종사(操縱士)생활에서 그는 우리말이 서투르고 일본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동료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입대(入隊) 경위가 알려지고 전투출격이 거듭되면서 숭고한 조국애(祖國愛)와 투철한 사명감이 발휘되면서부터는 오히려 그의 서툰 우리말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조종사(戰鬪操縱士)들의 황폐한 마음을 씻어주는 청량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는 5개월간의 짧은 기간에 89회라는 경이적(驚異的)인 출격을 감행하였으며, 적 탱크진지 공격과 보급로(補給路) 차단작전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52년 6월 28일에는 LT 6604, 6407 목표공격에서 명중탄을 퍼부어 그 일대를 불바다로 만듦으로써 6·25전쟁에서 보기 드문 미국 국방성(國防省) 특별수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박두원(朴斗元) 대위는 임관하여 매일같이 출격을 감행하면서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후배 조종사 이희근 중위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의 사후(死後) 30년 만에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그 내용을 여기에 다시 한 번 소개하면서 모화리(毛火里) 향우님들과 함께 박두원(朴斗元) 대위의 분골쇄신했던 호국단심과 전투조종사(戰鬪操縱士)로서의 용맹성을 느껴보기로 한다.
“친애하는 나의 희근 군! 군이 보내준 글월은 나에게 끝없는 기쁨과 반가움을 가져다주었네. 너무나도 그리우면서도 편지 한 장 쓰지 못한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게.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의연분투하고 있다니 무엇보다 다행일세.
나도 원기 왕성하게 적 공산군 격멸에 매진하고 있으니 안심하게. 다년간의 숙망이, 아니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밟아야 할 길을 걷게 된 자신을 돌아볼 때 이 감격을 누구에게 터놓고 나누어야 할지 모르겠네.
한번 출격하면 두 번하고 싶고, 세 번 출격하면 네 번째의 출격이 안타깝도록 기다려지네. 폭탄이 없고 로켓이 떨어지면 눈 아래 보이는 적 고사포를 발길로라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마음 어찌할 수 없네.
곧 출격하게 되네. 희근이 날 믿어주게. 굳은 결의로 조국을 지키세. 이것은 조국이 우리 젊은이들에게만 맡겨준 위대한 사명이며 영광이 아니겠는가. 전쟁을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네.
침략자 공산무리를 격멸하고 내 조국 아니 자유민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한국청년의 긍지를 다하세. 그럼 다음을 약속하면서 건투를 비네.
1952년 4월 1일 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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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우리는 구구절절이 배어있는 조종사(操縱士)로서의 투철한 사명감과 그의 나라 사랑하는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푸른 제복의 조종사(操縱士)로서의 긍지와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필승의 신념, 그리고 조국과 자유민의 평화를 지키려는 그의 높고 순결한 사명감(使命感)은 우리나라 국군의 진정한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52년 8월 2일, 연일 계속된 출격(出擊)에도 지칠 줄 모르고 박 중위는 동료 조종사(操縱士)들과 함께 또 다시 89회째 출격에 나섰다.
목표는 내금강에 위치한 장안사였다. 그 일대는 무수한 적의 자동화기(自動火器) 진지가 있었고, 동부전선(東部戰線)의 보급집결지로서 중요한 요새지였다.
편대장(編隊長) 전봉희 소령이 이끄는 무스탕기 편대에 박 중위가 3번기로 강릉기지(江陵基地)를 이륙하여 북으로 기수(機首)를 향했다.
이날따라 기상(氣象)이 나빠서 5,000피트에 구름이 깔려있고 가랑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계획된 고도(高度)를 취하지 못하고 4,500피트로 구름 밑을 스치면서 경포대, 주문진을 지나 금강산 내금강에 위치한 장안사 부근의 적 보급품(補給品) 집결지를 공격하다가 적 지상포화에 피탄(被彈)되었다.
그러나 기체(機體)를 살리기 위해 비상탈출을 하지 않고, 기지로 귀환하던 중 강원도 간성(干城) 상공에서 항공기의 공중폭발로 산화(散華)하고 말았다.
이날은 출격편대(出擊編隊)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료(同僚) 조종사 대신에 출격하여 산화(散華)한 것이다.
오직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멀리 현해탄을 건너와 멸공전선(滅共戰線)에 앞장섰던 박두원 중위는 이렇게 꽃다운 젊음을 아낌없이 조국의 하늘에 바치고 간 것이다.
그리고 아깝게도 그는 생전에 소원했던 100회 출격(出擊)을 못다 채우고 조국의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散華)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군 전투기조종사(戰鬪機操縱士)가 되면서부터 평소에 최소한 100회의 출격을 희망하였으나, 목표달성을 눈앞에 두고 89회를 마지막 출격(出擊)으로 산화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동료 조종사들은 그의 영정(影幀)을 들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 출격기록을 채우게 됨으로써 그는 그의 소원대로 죽어서도 조국 하늘을 지킨 불사조(不死鳥)가 되었다.
박두원(朴斗元) 중위는 전사 후 곧 대위(大尉)로 추서됨과 동시에 군인으로서 최대의 영예인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이 추서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박두원(朴斗元) 대위가 조종하여 적진을 괴멸시키던 전투기 F-51 무스탕(머스탱 ; MUSTANG)의 개요와 제원(諸元)을 알아보기로 한다. F-51 무스탕은 미국(美國) North American 항공사가 개발한 전투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연합군(聯合軍)측의 가장 우수한 전투기로서 미국(美國)의 발전된 항공산업과 영국(英國)의 유명한 Rolls-Royce Merlin엔진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1941년 5월에 처음 생산되었으며, 어떠한 다른 미국 전투기들보다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1942년부터 작전에 투입되었다.
6.25 당시의 F-51 무스탕(머스탱 ; MUSTANG) 편대
(꼬리의 K는 우리 공군의 표식이고, 기체마다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F-51 전투기는 2차 세계대전(世界大戰) 동안 아시아와 유럽 등 모든 전선에서 활약하여 그 성능(性能)이 입증되었으며 6.25전쟁에서도 운용되었다.
우리나라 공군은 6.25전쟁 발발 당시 한 대의 전투기(戰鬪機)도 없는 상황이었으나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2일 미국(美國)으로부터 인수하여 전쟁 기간 중 전 전선에 걸쳐 작전을 수행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공군의 전투조종사들은 동체(胴體)에 “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라는 문구(文句)를 써 붙이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공군은 휴전(休戰)시까지 F-51 전투기 133대를 보유하였으며, 총 8,495회를 출격(出擊)하여 UN공군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출격 기록을 수립하였다. 6.25전쟁 후 제트 전투기 F-86F가 도입될 때까지 운용되다가 1957년 6월에 퇴역(退役)하였다.
제원(諸元)은 중량 3.2톤, 최대속도 770km/h, 항속거리 1,530km이며, 승무원 1명에 날개에 12.7mm 기총(機銃) 6문이 탑재되어 있었고, 5인치 로켓과 폭탄 등을 무장했었다. 실물크기는 기장(機長) 9.8m에 기폭(機幅) 11.3m, 기고(機高) 4.2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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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모화리(毛火里) 출신 인사로는 위에서 소개한 6.25의 영웅(英雄), 공군조종사 고(故) 박두원(朴斗元) 대위 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전국에 산재하여 활약하고 있다.
우선 모화리 계동(溪洞) 출신으로 한국전력 연수원 부교수와 동(同) 정보통신연구부장 등을 거쳐 재경 외동향우회장을 역임하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인 우희곤(禹熙坤) 박사를 들 수 있다. 우박사는 이 카페의 '카페지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경(在京)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동창회장으로 모화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인 천만호 예비역 육군대령(육사31기)은 외동중학교와 경주고, 육사를 거쳐 군사문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을 역임한 후 국방SW산학연협회 책임연구원을 역임하고 있다.
또한 옛적 입실초등학교 모화분교(毛火分校)를 거쳐 입실초등학교 제35회 출신인 알피니스트로 우리 카페에 전국의 ‘마루금’을 소개하고 있는 서무수 향우, 그동안 재경(在京) 외동중학교 동창회(同窓會) 업무에 열성적인 활동을 해온 최근환 향우와 이충원 향우(은행지점장)도 모화리 출신이다.
언젠가 돌아갈 내고향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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