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요, 나좀 내보내줘요!!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어요. 와서 봐주세요!! 병원부터 가야 한다구욧!”
철창에 매달린 솔희는 블라우스 단추를 따서 벌리며 지나가는 경찰서 직원들에게 웃가슴에 생긴 여러개의 손톱자국과 부풀어오른 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솔희의 그 아름다운 입술은 양 옆으로 터져 피가 난 흔적이 있었고 한쪽 눈은 파랗게 멍이 든 상태였다.
“셧업!!”
무표정한 얼굴로 유치장에 앉아 있던 험상궂고 키가 큰 흑인여성이 솔희를 향해 텃세를 부리듯 소리쳤다.
순간 움츠러든 솔희는 철창에 두 손을 끼고 가슴을 밀착시켜 그 흑인여성과 한발짝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다.
그때 듣다 못한 경관이 철창 앞으로 다가와 무심한 듯이, 이런 민원 한두번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꺼내 주시는거죠? 전 억울하게 여기 혼자 잡혀온거에요, 저를 먼저 친 그녀는 여기 아직 안온건가요? 그녀가 여길 들어와야 해요, 플리이즈~~!”
“이봐!! 더 이상 시끄럽게 굴면 다시 수갑을 채울줄 알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여기 들어온 순서대로 호출되서 조사가 시작되니깐 얌전히 기다려”
그 무뚝뚝한 경관은 솔희의 편이 아니었다.
실망한 솔희가 뒤를 돌아다 보는 순간 멍한 표정의 초점 없는 눈빛을 가진 백인 여자 한명, 험상궂고 덩치큰 흑인여자 두명, 신경질적이고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늙은 백인 노파 한명이 땅바닥에 앉아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구석의 양변기의 칸막이였다.
거기에 볼일보기 위해 앉으면 아래는 종아리와 발목이, 위로는 가슴, 얼굴이 모두 노출되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엉덩이만 간신히 가리는 칸막이가 쳐진 돌출된 화장실은 지나다니는 남녀들이 모두 볼수가 있었다.
그 엉터리같은 변소를 보는 순간 솔희는 더더욱 패닉에 빠졌다.
“헤이, 이봐. 꼬락서니보니깐 백인녀한테 두들겨 맞고 잡혀온 것 같은데 억울하면 백인 부모한테서 태어나던가 말이지. 여기서 억울하다고 해봐야 니 사정 들어줄 사람 있을거 같아? 나는 여기만 네 번째야”
아까 솔희더러 일갈했던 험상궂게 생긴 흑인 여동료(?)는 무심한 말투로 씹어뱉는 충고를 했다.
그녀의 두터운 음성과 흑인 특유의 슬랭 악센트에 기가 죽은 솔희는 한 구석에 가서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파묻고 흐느꼈다.
온 몸 구석구석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흉터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이제야 온 몸의 근육과 살갗의 통증이 몰려오고 있어서 억울하다고 깽판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제이가 에벌린과 결혼한지 일년 가까이 되는 동안 솔희는 제이와 공적인 만남 외에 사적 만남을 자주 가질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솔희는 최소한의 자존심 때문에 사적 만남을 제이에게 먼저 요구하는 일은 없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거기에 그녀의 실력의 답보는 더 그녀를 미치게 하는 것 같았다.
큰 꿈을 안고 정이 들었다면 정이 들었을 따뜻한 엘에이를 박차고 진출한 이곳, 처음에는 모든게 신기했다.
그 다음에는 이 거대한 도시가 그녀를 두팔벌려 안아주고 축복해 주는 것 같았고 그녀를 어깨 위에 타올려 새로운 세계로 밀어 올릴 것 같았다.
거기서 가능성과 희망을 본 그녀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던지고 걸었다.
오롯이 그녀만을 바라보아 주고 그녀에게 헌신해주던 남편 정균을 큰 미련없이 버렸고, 절대 그녀의 실력으로는 딸수 없었을 행사를 따기 위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갖은 수치와 수모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을 뿐 아니라 돌아갈 다리조차 불질러 버린 상태였다.
드문드문 제이와 밀회를 나눌 때 솔희는 그에게서 웬지 식어버린 열정을 발견할수 있었다.
어쩌면 솔희가 이혼후에 제이와 정사를 할때부터 느낀 설레임과 긴장이 사라진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객관적으로도 제이는 성의도 예전같지 않았고 특히 오늘은 파워가 거의 없었다.
제이가 솔희의 아파트에 와서 몰래 사랑을 나누었을 때, 돌아 누운 제이를 바라보며 솔희는 마음 속에 일어나는 풍랑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나 제이에게 쏘아 붙였다.
“자기, 변한거 알어?”
“변하다니?”
“마치 나랑하는게 의무방어전 뛰는 분위기야. 네 원시적이고 에너지틱한 기운이 사라져버렸어.”
“휴우.......솔직히 말하자면 나 그그저께부터 어젯밤까지 3일 연속으로 에벌린이 기절할 때까지 천당 구경시켜줬어. 그렇게 해야 의심을 받지 않아. 너와의 관계를 자유롭게 지속하기 위한 내 고육책이야.”
"뭐얏!, 그딴게 자랑이라고 내 앞에서!? 에잇~!"
철썩!!
차라리 안 하느니만도 못한 말을 한 제이에게 솔희는 더 분노가 증폭되어 제이의 조각같은 뺨을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놀란 토끼눈을 뜨고 있던 제이에게 솔희는 아픈 손바닥을 수습할 생각도 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너! 정력 자랑하는거랑 어젯밤 일 자랑하는게 젤 못난 숫컷들 짓거리라더라, 그녀한테 힘 다 빼버리고 나한테 온걸 자랑이라고 하는거 맞니? 나는 네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결혼생활 중에서도 남편보다 네가 우선이었어! 남편한테 단 한번도 안하던거 네겐 다 해줬고. 아무리 자유로운 관계라도 우리가 서로 얼굴 보는 동안은 이 세상이 다 우리거야 해! 그건 네가 한 말이야,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이라니 너도 똑같애!”
철썩!!
순간 솔희의 눈앞이 번쩍이며 호흡의 정지와 더불어 어지러움을 느끼며 솔희는 침대 위로 다시 쓰러졌다.
‘주르르’하고 눈물이 안약처럼 흘러나온 솔희는 그녀가 맞은 뺨에 두손을 갖다대니 이제야 퉁퉁 부운 것 같았고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이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댄다는건 꿈도 꿔보지 못한 일이었다.
“제, 제이! 어쩜 이럴수 있어? 지금 나한테 뭐한거니? 어떻게 약한 여자의 얼굴에 손을 대애, 흐윽!”
“손찌검은 네가 먼저 했어. 말은 바로 하자, 그리고 모든건 너의 개인적 선택이야. 그때 너가 가정을 버릴 생각이 없었듯이 나도 가정에 충실해야할 의무가 있어. 그리고 넌 남편과 멀리 떨어져 있었쟎아. 나는 퇴근하면 바로 얼굴 마주하는게 에벌린이야. 에벌린은 본능적인 의심을 너와 내게 갖고 있어.”
"아, 아니.........어떻게 그리 한 마디도 안 져줄수가 있니?"
제이는 솔희에게 핑계를 대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단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유들유들하게 느껴져 솔희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까지 그 자리에서 쏟아져 버렸다.
그의 표정에서 솔희에 대한 부담과 짜증이 읽혀졌고, 제이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찾기 시작하는데 솔희는 바보같이 제이를 붙잡는다.
“왜 그래, 어딜가? 제이?”
“피트니스에 가서 운동좀 하고 샤워도 하고 집에 들어가봐야 해”
“혹시 내 향수 냄새 지우려는거 아니니?”
“.............솔희야, 우리 서로 가정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사랑하자고 했쟎아? 내가 보기엔 솔희, 너 빨리 재혼하는게 나을 것 같다. 그때쯤이면 너도 날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바보 자식! 결혼하고 나니깐 그깐 배우자가 뭐라고, 그 잘난 제이 맞니?”
제이는 솔희의 외침에 답변을 더 이상 거부한채 어느덧 옷을 다 찾아 입고 난뒤에 넓고 긴 등을 보이며 솔희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벼게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달빛 아스라이 비치던 창가에서 사랑의 연가를 불러 바치던 제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자발적으로 사랑의 피아노곡 연주로 화답하던 솔희의 그때 그 모습이 떠 올랐다.
샌디에고 바닷가에서의 낭만적인 만남과 하룻밤, 쇼핑몰에서 홀로 박수를 치던 제이의 모습, 함께 걷던 오솔길, 다 쓰러져가던 시골의 모텔에서 정열을 불태우던 두 사람의 모습이 솔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XX끼! 너를 위해 연주도 해주었고, 시까지 지어다 바쳤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솔희는 제이가 결혼한후 제이에게 더 집착하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자기가 아닌 것 같았고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느덧 솔희가 보스톤에 온지 2년이 넘었고, 연인이자 동료인 제이가 에벌린이라는 후배와 결혼한지는 1년이 조금 지났다.
솔희에게는 2년 조금 더 지나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Mr. Hansen씨, 저의 실력이 귀사가 보기에 모자란다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저의 뒷소문 때문에 계약 연장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근거가 없는 뜬소문들이며 저를 모략하고자 하는 일부 몰지각한 음악인들의 뒷담화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바닥이 무슨 성인군자나 뽑는 곳입니까?!”
“Mrs. Solhee Chae씨, 이미지를 먹고 사는 직업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본인께서 본인관리를 하셨어야 하는 것이죠, 소문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저희는 그 진실에 관심도 없습니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귀하나 저희 회사나 좋을게 없어요. 뜬소문에 영향받지 않으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실력만큼이나 이미지도 중요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쏘리씨는 둘다 대중들의 needs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공연기획사에서는 노골적으로 솔희의 실력 답보를 문제삼았으며, 에드먼드에 대한 성상납 의혹, 그녀의 결혼생활 시절부터 있었던 제이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인해 솔희에게 유리한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있었다.
기가 막혀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솔희가 CEO와 면담을 요청했다가 결국 부사장인 핸슨과 미팅을 겨우겨우 진행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결백함과 억울함을 따졌지만 미국인 부사장 핸슨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면서도 결국 솔희와 오랫동안 함께 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솔희는 원래대로 2년 계약연장을 요구했지만 공연기획사에서는 2년 연장시에는 연봉과 개런티를 동결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기에 연봉과 개런티 인상이 보장되는 1년 연장에 만족해야 했다.
솔희는 그쯤에서 1년간 인상된 돈을 받고 그 후엔 떠나는 것으로 계약 협상을 마무리짓고 물러섰다.
그 이유는 그전부터 제이가 설립한 회사로부터 더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제이의 회사로 들어가면 소문이나 더 안좋게 날 우려가 있겠지만 일정 시간을 번 뒤에, 여기저기 에이젼씨사를 찾다가 안되면 그때가서 문을 두들길 보험으로 남겨 놓기로 했다.
어느날 시내 외곽의 banquet hall(사설 렌트용 파티장)에서 음악인들의 파티가 열렸다.
솔희는 에드먼드와의 성상납 사건 이후에 생겨난 약간의 공황장애 증세와 대인기피증이 서서히 옅어져 감에 따라 전과 다름없이 파티에 참여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익히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 나가기로 했다.
거기서도 음악인 사교계의 화제는 단연 제이와 에벌린 부부였다.
이상하게 느낀 것이 굵직굵직한 음악인들이 에벌린에게 가서 먼저 밝게 인사를 하고 대화를 오래 나누는 광경이 자주 목격된 것이다.
에벌린은 보스톤 외곽 지역의 120년이 넘은 명문 사립중고등학교인 브론슨 중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음악을 가르치지 않지만 사립에는 음악교과가 존속했고 교권도 엄격히 보장되었다.
에벌린이 결혼 이전부터 인근 음악대학으로 편입하여 교사가 되기 위해 성악, 합창지휘와 작곡이론같은 잡스러운 음악 전공기초과목들과 교직과목을 배우고 있다했었다.
솔희는 그러한 에벌린의 행보에 대해 명문 컨서바토리 출신 피아노 전문석사의 망신이라며 피식거리고 비웃었던 기억이 있었다.
파티장에서 에벌린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대화소리를 훔쳐들으니, 끔찍하게도 에벌린이 그들의 자녀들의 교사였던 것이다.
에벌린은 학급담임과 일반음악수업을 맡았고 특활반인 학교 합창단의 지휘를 직접 맡고 있다.
그 명문 사립학교에는 부호의 자녀들, 그리고 보스톤에서 활동하는 중견 음악인들의 자녀들이 대거 재학중이었던 것이다.
아닌말로 보스톤의 중요한 음악인들의 자녀들을 제이의 아내 에벌린이 모조리 제자로 삼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음악 특활을 신청하게 되면 그들이 선택한 악기의 강사들을 섭외하는 것도 음악교사인 에벌린이 해야하는 일이었기에 소일자리를 원하는 초보 악사들이 에벌린에게 눈도장을 찍기를 원하고 있는 것도 이 파티의 분위기였다.
“미세스 에벌린 네빌! 그렇다고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요. 잘좀 생각만 해주세요. 전 이 흥겨운 파티장이 학부모회의장이 되길 원친 않으니깐요”
“아, 지난번 학부모 회의때 밀러씨 부부가 함께 오셔서 참 보기 좋으셨어요. 지미 학생도 좋아할거에요. 아무래도 내 남편 제이와 친분있는 음악인들의 자제들을 볼때마다 눈이 한번씩 더가는건 어쩔수 없더라고요, 호호호”
에벌린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는 음악가들과 에벌린이 대화를 나누는데 제이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자 에벌린은 활짝 웃으며 제이의 팔짱을 낀다.
제이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이들의 대화 분위기를 살피는 척하자 다른 누가 제이에게 농을 건냈다.
“아이고, 누구시더라! 혹시 브론슨 하이스쿨 에벌린 선생님의 부군되시는 분인가요?”
“아, 저 말입니까? 제가 에벌린 선생 남편 제이 맞습니다. 으흐흐흐”
“우하하하하!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잡아야돼요. 보스톤 음악계의 마당발이자 샛별이신 제이씨보다 새신부 에벌린이 더 주목을 받으니 말이죠. 역시 명문 사립학교 선생님이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우하하하핫!", "오호호호호!"
학생들 교육문제까지 파티장으로 끌고 들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래도 고의성(!)이 짙어 보였다.
에벌린과 제이는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솔희의 뒷통수를 때린 것은 어리숙하게만 느껴졌던 에벌린의 행보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반학교 교사직을 택한 에벌린이 외적으로는 음악계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학교에 대거 재학중인 음악인들의 자녀들을 맡음으로 인해서 다시 그들의 부모와 자연스레 연결되고, 이런 사교장에서 다시 제이를 끌어들임으로써 남편 제이의 음악활동과 음악비지니스를 내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벌린, 그 어수룩한 애송이가 제법 하네?......근데 이런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건가? 그들만의 리그?)
솔희와 제이의 음악적 협업은 계속되고 있기는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한 벽에 가로 막혀 있어서 괴롭다는 고통을 제이에게 호소했지만 제이는 무기력하고 슬픈 표정을 내보이며 자신도 최선을 다해주었고 누구나 이런 슬럼프나 회의감에 빠질때가 있다고 솔희를 위로해 주었다.
그전같으면 불같이 폭발하던 제이는 결혼하고 불과 1년 사이에 그 예민한 성질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제이가 솔희더러 제발 의존심좀 버리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라고 충고를 한건 뼈아픈 말이었다.
솔희는 그녀가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적인 음악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도대체 제이가 자기를 뭘로 보고 의존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을까?
이제는 제이가 솔희를 노골적으로 귀챦아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까?
얼굴이나 몸매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녀에게도 제이는 슬슬 권태를 느끼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제이에 대한 의혹도 며칠전의 제이 사무실 3층의 연습실에서의 환상적인 사랑으로 무마되어 버렸다.
모텔도, 호텔도, 아파트도 아닌 연습실에서의 예기치 않았던 사랑.
당시 일시적으로나마 그녀가 제이의 손길을 뿌리쳤던 이유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들이닥칠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따라가고 절정을 향해 달려갈때 그 불안감은 몇배의 쾌감으로 바뀌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할수 없었던 사랑....! 역시 제이는 날 실망시키지 않아)
솔희는 아무도 없는 좁은 개인연습실에서 연습을 잠시 쉬며 며칠 전의 제이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그때 모르는 아이디의 전화번호가 그녀의 아이폰에 뜬다.
모르는 전화번호는 웬만하면 받지 않는 그녀였지만 웬지 받아야할 생각이 들어 아이폰을 들어 수신표시를 눌렀다.
전화기에서는 알 듯 모를듯한 백인여성 특유의 액센트가 들린다.
“쏘리씨? 저 에벌린 네빌이에요”
“아, 에벌린?! 어쩐 일이세요? 학교에 계시나요?”
“아뇨, 요즘 종일 집에만 있어요. 방학이라서요. 그나저나 한번 만나고 싶네요. 가능하면 지금이라도”
전화기너머 들리는 에벌린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솔희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솔희는 에벌린을 그리 보고 싶진 않았지만 애써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는지 에벌린의 만남을 선선이 응락했다.
로드샵에 나 있는 카페에 먼저 들어앉은 솔희가 바깥을 내다보니 에벌린은 금색머리를 휘날리며 검은색 벤츠 G-바겐이라는 위협적이고 각진 SUV를 길가녁에 주차하고 있다.
자리에 앉은 에벌린은 다짜고짜 솔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여러말 안할께요. 쏘리씨와 내 남편 제이와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랑 제이가 결혼하기 전에 뭘 했던지는 묻지 않고 따지지 않을께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사적 연락을 끊어주길 바래요.”
솔희는 도도할 정도로 구는 에벌린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2년전 앳된 표정으로 제이에게 야단맞고 눈물을 찔끔거리던 그 에벌린, 그 앞에서 첫 대면 인사를 하는데 자기의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 하며 살짝 외면하던 그 신출내기 학교 후배 에벌린이 지금 솔희 앞에서 고개를 치켜 세우고 아래로 깔아 보는 눈초리를 쏘고 있었다.
에벌린의 표정과 몸동작에 화가 난 솔희는 처음부터 그녀와 맞설 의사는 없었지만 역시 예민한 솔희는 그 도발에 넘어가 버렸다.
“왜 그게 문제가 되나요? 나와 제이가 사적 연락을 하는게 거슬린다면 제이를 단속할 일이죠. 바쁜 나를 불러내서 강요하지 마세욧!”
“쏘리! 네가 한 짓이 뭔지나 알어? 제이가 나랑 결혼한 뒤에도 제이 유혹해서 몇 번 같이 잔것도 알고 있어. 원래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무조건 넘어가게 되 있어. 그러니깐 너한테 조심하라고 하는거 아냐?!”
“휴우........증거있어? 네 남편이랑 나랑 잤다는? 그러니깐 제발 니 신랑이나 잡으라고, 그거 못 잡는건 네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던지 부인으로서 정치력이 없던지 둘중 하나야.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지 말고!”
끄르르륵......! 콰당!
의자가 끌리고 테이블이 옆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에벌린은 솔희를 덮쳐버렸다.
짝!! 짝!!
아아악!!~
솔희의 눈 앞에 별빛이 번쩍 번쩍 번들거리다 사라졌다.
이 상황은 벌써 솔희가 두 대나 뺨을 맞은 이후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아픔을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야아아악!”
솔희는 두 눈을 꽉 감은채 괴성을 질러대며 두 팔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렸지만 단 한 번도 에벌린의 몸에 유효타를 주지 못했다.
솔희와 에벌린은 체구와 신장이 비슷했지만 에벌린은 서양여성의 특성상 팔과 다리가 길고 유연했고 뼈가 두꺼워 싸움에 유리했다.
놀라움과 공포에 눈을 꼭 감고 마구 이리저리 휘저어지는 솔희의 손은 아예 에벌린의 몸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게다가 솔희는 청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운동화차림이었고, 에벌린은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샌들을 신었기에 에벌린이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였다.
솔희의 성정은 신경이 매사에 예민하여 삵을 연상케할 정도로 무척 사나왔지만 실제 싸움실력이 형편없었고 몸의 전투력은 초등학교 여학생 수준 밖에 안되었다.
이제야 솔희의 얼굴에 아픔과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고 에벌린의 손과 발은 솔희의 몸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아랫배에 에버린의 손날이 와 박히는 순간에는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숨이 막혔다.
결국 솔희는 카페 땅바닥에 쓰러졌고 온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에벌린의 독무대가 되었다.
에벌린은 솔희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카페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머리를 잡힌 솔희는 엉금엉금 기어가며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 아픔이 이어지며 그녀의 아름다운 볼에 사정없이 떨어지는 에벌린의 손매....
에벌린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가 휙 밀어재꼈고 솔희는 힘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의 카페 건물 외벽에 등이 충돌하자 헉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또 다시 무너졌다.
카페 외벽에 등지고 쪼그려 앉도록 던져진 솔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마귀할멈과 같은 표정으로 에벌린은 솔희에게 다시 다가와 그녀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역시 쪼그려 앉았다.
(매로 아픈것만큼 고통스러운게 있을까?)
순간적으로 독백이 지나가던 솔희는 이미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에벌린은 솔희의 부상 따위엔 관심이 없었고 분노에 가득찬 표정과 비열한 웃음을 솔희에게 보여준다.
“이봐, 쏘리, 남의 남편 stealing하면 어떻게 되는지 지금 알았지? 진작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안 그래? 니 이름(sorry) 그대로 열 번만 부르면 용서해줄까?”
미국인들은 Solhee를 sorry라고 불렀으니깐 미안하다는 말 열 번을 하라는 말이다.
솔희의 호흡이 이제 진정되어 가고 있는 순간에 에벌린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다른 방식으로 솔희를 욕보이기 위해 작전을 변경하고 있는 듯 했다.
에벌린은 쪼그려 앉은 자세, 흡사 볼일을 보는 자세로 앉아 솔희를 등지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자기의 엉덩이를 살짝 들고 ‘탁’ 하고 쳤다.
에벌린의 이 모양은 무척 우스꽝스럽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이런 동작을 만드는 이들보다 이런 동작을 강제로 보게 되는 이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이 동작은 “내 xxx에 키스해봐”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우, 천박한 뇬! 저딴게 제이의 아내고 고등학교 선생이라니........)
“아, 알았어, 니가 원하는대로 해줄께, 해주면 더 안 때릴거지? 나 맞기 싫어서 그래......”
솔희는 몸을 앞으로 숙여 엉금엉금 기어 에벌린에게 다가갔다.
“OMG! 어, 너 정말 하려고? 그래?! 할수 있음 해봐! 못하기만 해봐라. 푸우우하하하핫!”
이성을 잃어버린 에벌린은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에서 완전히 미친 여자가 되어 있어, 자기 치마를 걷어 올려 보이며 계속 솔희를 비웃고 도발했다.
한발짝도 안남길 정도로 간격이 줄어들자 솔희는 에벌린의 어깨쭉지까지 내려온 금발머리를 난데없이 휘어잡아 낚아채 버렸다.
“아아아악!”
머리를 잡힌 에벌린은 이리저리 솔희의 손길을 빼려고 머리를 휘둘렀고 두 팔을 뒤로 보내 솔희를 제압하려 했지만 그 긴 팔이 이럴 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솔희는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두 팔이 부르르 떨려도 개의치 않고 에벌린의 머리카락을 놓치 않았고 오히려 이리저리 휘둘렀다.
방금전까지만도 솔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수치스러운 망신까지 주던 에벌린은 땅바닥에 쓰러졌고 드레스 자락이 뒤집어 까져 팬티가 보일 지경이 되었다.
솔희는 여기서 놓치면 방금처럼 지옥구경을 온 것 같은 폭행을 또 당할것이기에 끝까지 가보기로 하고 절대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치 않았다.
에벌린은 괴성을 지르며 연신 help, help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워커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누군가 차갑고 낮은 소리로 솔희에게 외쳤다.
“Stop!! Get on the ground now!!"
극도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상태인 솔희에게 그말이 들릴 리가 없었고 결국 제복입은 남자의 근육질 팔이 솔희의 팔을 낚아챘고 솔희는 힘없이 팔을 뺏겼다.
아직껏 솔희의 두 손아귀에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한 무더기가 뽑혀 있었다.
그 제복입은 남자는 솔희를 거칠게 땅바닥에 눕혀 두손을 허리뒤로 끌어 모아 철커덕하고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그때서야 솔희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길가녁에 경찰차 두 대가 경광등을 울리며 서있었고 제복입은 남자들은 경찰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명의 여경은 피해자(?)인 에벌린을 수습했다.
솔희는 경찰관에 의하여 뒷 손목 수갑이 채워진채 강제로 경찰차 뒷칸에 던져졌다.
앞칸과는 칸막이로 막혀 있었고 뒷좌석은 쇼파가 아니라 딱딱한 불연성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자였다.
그리고 경찰차 백미러에 비친 모습은 더욱 경악스러웠다.
에벌린은 덩치 큰 여경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고, 그 여경은 에벌린의 등을 계속 쓸어주며 괜챦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경찰차 백미러에 비치는 여경과 에벌린의 얼싸안은 모습은 그 상태로 고정되어 점점 멀어져만 갔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