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KTX산천호로 상경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서는 서울 나들이라 약간은 설레입니다.
몇 일전 장엽 연구관과 25년만에 통화가 이루어졌다.
백남준 다다익선을 처음 부터 시작하여 완성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학술행사에 참석해 주실수 있나요?
생소한 전화였지만
지금부터 25년전 내가 30세에 되던해
도대체 무슨일을 했었던가?
오래만에 들어 보는 백남준, 다다익선...
우.생.순이 아니라 참으로 내.생.순의 기억들이 찬연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오늘 서울 갑니다. 25년 전 아스라한 설레임과 오래된 지인과
이쯤에서 한번이라도 더 만나고 되돌아 보고싶어서...
다다익선(多多益善)...
(* 이 글은 2006년 백남준선생님 별세를 계기로 쓰게된 다큐입니다)
1988년 88올림픽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을 무렵 문화체육부 주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경성관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과천 청계산 자락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정이 고즈넉이 내려다 보이는 관장실에 들어가니 유준상 학예연구실장도 이미 배석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88올림픽 준비가 막바지였던 터라 아마 올림픽 행사와 관련된 임무를 줄 것 같아 긴장이 되었다. 사람을 불러 놓고도 두 분의 밀담이 미쳐 끝나지 않은 듯 여담을 계속하고 있어 창문 밖으로 잠시 청계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리가 불편한 이경성 관장께서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면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경성관장>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그간 고생이 많았지” 반사적으로 “아닙니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뭘 두고 고생이 많았다는건지 잘 몰랐다.
1987년 3월에 방한한 벨기에 출신 세계적인 모자이크 작가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 동시에 시인인 끌로드 라이어씨가 “별들의 미립자” 대형 모자이크(현대미술관 입구) 작품 활동을하는 동안 1개월간 맡아서 작품 시작에서 부터 끝까지 지원하여 매듭을 짓게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리라 짐작이 가면서도 아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직접 부르시지는 않았을 거야, 사실 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들은 쉬우면서도 생색이 나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예산확보, 감사원감사 등 애로사항이 얼마나 많은지는 관료출신이 아니면 알수가 없지, 하긴 저 어른께서야 오로지 예술(Art)만을 일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자조하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이번엔 더 큰 건이야” 백발의 노신사께서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919년생으로 우리 아버지하고 동갑이신데 저렇게 곱게 늙으실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짐짓 어아해하는 표정을 짓고있는데 옆에 있던 유준상 실장이 웃으면서 “아! 그 왜 백남준씨 알지”? “아! 예 그분..” “그분 작품을 남선생한데 맡길 테니까 한번 해봐요” “나도 도와 줄테니” 대화가 이렇게 흘렀다
<백남준의 가족들>
옆에서 지긋이 지켜보시던 이경성 관장께서 야윈 손을 내밀면서 특유의 약간 어눌하면서 더듬는 목소리로 “한번 해봐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좋은 기회야” 아무 생각도없이 “예 잘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1919년생 구황실 주치의 손자로 일본 와세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무슨 뜻을 가지셨는지 미술계평론가로 태두에 자리에 계시는 큰 어른이시다. 한마디로 장관들도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지
그 길로 관장실을 나와서 야외조각장의 곽덕준씨 작품의 돌탑(곽덕준 작품: 앤드레스) 아래로 걸어가면서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이 좋은 기회란 말인가? 그리고 백남준씨라면 이미 잘 알려진대로 반체제 운동하던 예술가라고 이미 소문이 나있는터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인지 초여름 열기가 얼굴을 스치면서 짜증이 났다.
몇 일후 유준상 학예연구실장장이 자기 방에서 잠깐 보자고 하였다. 책상위에는 조잡한 옛날 글씨로 갈겨쓴 편지 한통을 내밀었다. 영어, 한문, 일어가 중간 중간에 들어간 어눌한 어법의 내용이었지만 A4용지에 3장을 빽빽하게 써내려간 절절한 장문의 편지였다. 봉투에는 철자법도 맞지 않는 옛 글씨체로 백남쥰으로 쓰여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중앙(중정) 램프코아에 비디오아트의 기념비적인 탑(예컨데 석가탑같은) 을 세우겠다고 하였는데 설계는 광장의 건축가 김원씨가 도와주기로 했고, 삼성 리움 관장인 홍ㅇ희 여사한테 가면 필요한 모니터(TV)주기로 했고, 몇 일뒤에 내(백남준)가 미국에서 구입한 이스라엘제 D.A(분배기)를 보낼 것이다.
이러한 분배기를 한국에서 만들수 있다면 좋은데 한국에는 기술에 없어 만들수 없고 3-WAY 레이져 디스크도 ..마찬가지고 등등.. 하여튼 내용을 보면 올림픽개막이전에 대형 비디오작품을 1개 만들어보자는 내용이었다.
편지 내용으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형태 조차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유준상 실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연상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동안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남선생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답답함이 느껴졌다.
<TV에 자석을 붙여 최초로 왜곡된 영상 출현>
그 순간 “실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러한 일에는 많은 정부 예산이 들어가야 할터인데 첫 순서는 무조건 예산 확보가 관건인데...잘 아시다시피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이미 신규사업은 작년에 심의가 끝났고 지금은 추경이나 예비비에 반영해야 되는데..갑자기 지금에 와서 예산을 요구한다? 무슨 명목? 무슨 힘으로.. ” 문화공보부에서 9년차 잔뼈가 굵은 필자의 관료적인 생각으로 뻔한 예산타령만 늘어 놓았다. 유교수님이 머리를 짚으면서 “아 그렇지요 이 일을 어쩐담”하는 못습을 보면서 참 여유로운 교수님다운 말씀이시다.
“ 올해 꼭해야 되는 일 인가요” 필자의 뜬금없는 반응에 대해 유실장은 이내 정색하면서 “흠 이것을 이번에 끝내지 않으면 남선생이나 나나 큰일 나는거요”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심각하게 되받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 해졌다. 이일을 어찌해야하나?
직원들은 이미 퇴근을 하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다. 나름대로 논리적 사고를 위해 6하 원칙에 적용해 보았지만 각 요소 간 아귀가 들어맞질 않았다.
그렇다. 예산확보 어디 한번 해보자 아무리 강조한들 예산이 먼저다. 불과 올림픽을 3개월 남짓한 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을 예산을 어찌 조달할 것이며 설사 예산을 투입한다 해도 때를 맞춘다는 보장은 있는가? 만약 일을 벌려놓고 정작 필요한 시기에 오픈 못한다면 그땐..내 인생에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과거 선배들 무용담을 들으보면 박통시절에는 특명 사업 같은 것이 있어 하명하는 즉시 예산을 주면서 이일을 어제까지 완료하라. 성공하면 특진이고 실패하면 사표를 쓰야 했던 일화도 있었다는데..지금의 시절이야 그런 일도 있을수 없고 지금은 국가적인 대사 올림픽에만 관심이 있지 이런 일에 관심조차 가질런지..
<개선문: 풍피두미술관>
하지만 이대로 가만 앉아 있다가 당할 수 만은 없지 우선 소요예산이라도 한번 편성 해보자? 나름대로 주먹 구구방식이지만 탑을 쌓기 위한 골조비, 각종 물품구매비, 비디오설치비, 부대경비는? 개막식은? 설치할 장소인 램프코아의 건축물 안전도는? 이렇게 따지고 있자니 그냥 가슴이 콱메어 온다. 서류 파일을 밀쳐두고 담배 한 개피를 피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백남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경제기획원 예산실 직원들도 모르기는 매 한가지다.
그렇다면 다소 부풀려져도 ..지들도 알 수가 없지 그렇다면 모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하려면 그냥 크게 한번 해보는 거다. 막말로 나중에 노력은 했으나 예산 확보가 되지않아서 못했다고 하면 역량이 없다는 소리는 듣겠지만...복지부동이라던가 이런 소리는 안듣겠지... 이쯤 생각하고 나니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왕 내친 김에 작품 골조비 19억8천만원, D.A구입비 3억8천만원, 전기공급장치 5억 5천만원.. 감이 잡히는 대로 막 써내려 갔다. 얼렁 뚱당하여 소요예산을 약 30억원이라고 내 나름대로 편성해버렸다. 아마 두번을 산출해보라면 나 자신부터도 헷갈렸을 것이다. 이제 배짱으로 확 밀고 나가는 거지 나중에 우사를 당할때 우사를 당하더라도...(갱상도 사투리)
그리고 몇일뒤 이경성 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잘 진행되고 있겠지” “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큰소리로 낭낭하게 대답했다 “남 선생이 승진할 때가 됐다지?” 아마 공무원이라면 가슴 철렁하면서 가장 매력적인 소리겠지만 이내 냉정을 찾아 생각해 주시는 것은 좋은데 마음속으로 “관장님께선 잘 모르실 겁니다. 사무관 승진은 윗사람이 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승진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거라구요.” 내심 그렇게 하지 않으시더라도 이미 이 일은 제가 한번 맡은 이상 잘해 볼께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몇 일뒤 뉴욕 맨하턴에 있는 백남준씨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다. 부드럽지만 어눌한 말투로 “남선생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에요. 디에이는 무슨 부품을 가지고 맹글어야 하고요. 한국산을 화질이 좋지 않은데 청계천에 가면 오사장을 만나서 그것을 맹글어야 한다”는 이야기 만을 반복하는데 필자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중간에 말을 자르면서 “백선생님께서 꼭 한국에 와주셔야만 되겠습니다” “빠른 시일내 꼭 오십시요” 꼭오시라고 이야기로 국제 전화의 내용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유준상 실장이 백남준씨 자료라고 하면서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의 작품 콜렉션들을 보여주었다. 맥주 한 잔 나누면서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요셉보이스가 어쩌구 어려운 설명을 하였으나 무엇이 유명한지 백남준씨가 세계적인 아티스트이고 무슨 문화의 테러리스트다. 뭐다 해도 실감이 나질 않았고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는 유준상교수가 81년쯤에 일본에 우연히 들렀는데 동경 한복판 더운 날씨 속에서 많 사람들이 유명백화점 앞에 없이 줄이 이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요셉보이스: 지금부터 혁명이다>
그래서 무슨 세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남준파이크(백남준의 영어식 이름)를 보기 위해 서있다는 말에 반가워 안에 들어가 보니 도쿄 백화점 대형 홀에 백남준이 소개되자 수많은 관중이 기립하였는데...놀랍게도 인류 최초의 TV는 달이다. 라는 주제로 미국 시카고에 이어 두 번째 퍼포먼스를 하는데.. 도중에 감정 전달이 잘 안되자 백남준씨는 이내 큰소리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귀에 익은 한국식 음률로 부르는데 많은 일본의 관중들이 무슨노래인지도 모르면서 따라 부르는 기이한퍼포먼스연출이 되고 있었다.
순간 유실장은 눈물이 쏟구치더라는 것이다. 저렇게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도 국내에서는는 이름 석자 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다니...이어 벡남준씨를 만나 통성명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동갑나기고 당시에 애국유치원을 같이 다닌 추억이 있다는 등 그날의 감동이 생생하다고 했다.
1988년 6월 초순에 마침내 백남준씨가 입국하였다. 공항에 내린 그는 기자들에게 휩싸였다. 한국에 두 번째 입국이라 국 내외 문화부기자들은 다 모인듯 했다. 공항입국장에서는 가까스로 이들을 따돌리고 기자회견장이 있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스스로 문화전도사라고 자칭하는 조선일보 정ㅇㅇ기자, 날 서기로 소문난 동아일보 김ㅇㅇ부장, 등등 당대 날리던 기자들이 모여서 백남준 실체를 밝히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88년6월 김포공항:옆 필자>
사실 국내에서도 다소 입심 좋다고하는 작가들도 주요일간지 문화부 기자들에게 걸리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백남준씨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필자는 백남준씨 옆에 앉아 귀를 쫑끗 세우고 있는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막 도착한 백남준씨는 갈증이라도 나는듯 생수로 목을 축이더니만 기자들이 미처 질문도하기 전에 먼저 운을 뗐다.
"태고적에 동북아시아에는 낮에도 해가 뜨지 않고 연속적으로 약 3개월쯤 밤으로만 된 적이 있었다고해” “그래서 중국, 한국, 일본은 음력을 쓰잖아 여자들 달거리를 월경이라고도 하고” 이게 무슨 말이야? 웅성거리던 기자들이 갑자기 물을 끼엊은 듯 조용해져 버렸다.
이어 백남준씨의 특유한 낭낭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그땐 말야 죄다 달만 쳐다보고 살았겠지” 왜 저러시지 좌중의 기자들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과연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하는 이야기일까? 의아해 하면서도 세계적인 작가의 말이라 반문은 커녕 열심이 받아적기에 여념에 없었다.
“그때는 우리인류는 모두 달을 보고 정보를 얻었지 가령 달무리가 서기라도 하면 내일은 비가 오겠구나. 달이 뜨오르면 이제 저녁시간이 되어가나 보다. 왜나 해가 없으니까 그러니 인류최초로 눈으로 볼수 있는 텔레비젼은, 즉 정보 전달의 매체는 바로 달인 게지” 아하! 명쾌한 답이이었다. 그때서야 가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마 일본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달아달아」에 해설이었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편에 말야” 시공을 뛰어넘는 강의가 시작되었다.
<다다익선:1988년>
순간 필자는 백남준씨의 거침없는 지식에 심오함에 섬뜩함을 느꼈다. “한국에는 비빔밥이 있는데 말야 나물과 고추장이가 각각 다른 맛내는데도 그것을 함께 비벼서 먹어보면 각각의 맛이 아닌 또 다른 오묘한 맛을 낸다 말야” 이것이 바로 멀티미디어(종합정보)라는 거야” “이제 종이는 죽었어. 단 화장실 종이는 빼고”ㅎㅎ 좌중을 웃음 도가니로 만드는가 하면 양(量)적인 미학(美學)은 단지 발신(電波 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수신(TV수상기를 통해서 보는 것)에 있다. 이어서 연어알論에 이르기 까지 거침없는 강의로 한국 기자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청담동 (백남준 누님 백영득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설례였다. 바로 그것이다. 거침없는 저 예술거장을 누가 막으랴. 이제 저분을 앞세우고 경제기획원이던 청와대이던 돌파하는 거다. 당시 경제기획원 박ㅇ부 예산실장은 관료라서 만나 설명해도 감각조차 없을 거고.. 이시대의 넘버2맨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만나 행사와 연계하여
<좌로부터 필자, 백남준, 진규원과장>
올림픽조직위가 예산실을 눌러서 강제로 라도 예산 배정이라도 해준다면..흐흐
오래된 건물인 한강빌딩에 위치한 올림픽 조직위원회 내부는 매우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막강한 파워맨 올림픽 조직위원장 방은 양탄자가 푹신하여 신발이 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핸섬하고 매너좋은 박위원장은 매끄러운 느낌이다. 두 분은 처음 만나는 사이다. 수더분하게 멜빵 끈바지를 느슨하게 입고 목에는 더운 여름인데도 니트 스웨터를 두른 기괴한 모습의 백남준씨를 박위원장은 깍듯이 예우했다.
그런데 말투가 영 시원챦게 오고간다. “박세직씨야? 나 백남준이요? 한국에 와서 비디오작품 맹걸라고 하는데 지원 좀 해주시지요” 순간 앗찔했다. 여기서 예산을 지원하는것이 아니고 그냥 조직위원장의 후광만 받을려고 하는데 왜이러시나 박세직씨의 미간에 약간 흐릿함이 스쳐갔지만 반듯하고 예의가 바른 분이라 “아 예 백선생님 도와드려야 하구 말구요” 박세직씨가 겸손하게 동조했다. 가슴 조렸던 긴장이 풀어졌다.
담소가 끝나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났다. 정확일 3일뒤 문화공보부 기획예산담당이 전화로 경제기획원에서 수시배정 예산 신청하라는데 어떻게 되는지 물어왔다. 그간 사정을 얘기했다. 이서애 기획예산과장이 웃으면서 “남중희 대단해”하고 반쯤 칭찬을 해주었다.
경제기획원 문화예산실은 보기보다 한적했다. 하긴 예산 철이 지났기 때문이겠지 하면서도 당시 우리나라의 100조가 넘는 예산을 주물럭거리는 소위 실세부서에 왔다는 실감은 느끼지 못했다. 곧 밀고 당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김모 사무관과의 지리한 줄다리기 끝에 최종 23억원으로 낙착을 보았다.
자 이제 부터는 속도전이다. 우선 건물안전 진단을 광장건축에 의뢰하였더니 현장 실측 후에 보강의 필요성이 있다라고 진단이 나와 즉시 렘프코아 중앙광장을 약 30톤이상 하중에 견딜수 있도록 긴급공사 발주를 하는 한편 건축가 김원씨와 만나 편지를 보여주면서 작품골조설계를 의뢰하였다. 골조설계를 배당받은 광장의 최욱진 실장이 기겁을 하면서 전화를 하면서 정보제공 요청을 해왔다. 사실 나도 아는것이 없다.
어쨌든 최단시간에 개념설계 부터하되 세부도면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만일 설계가 늦어지면 골조가 늦어지고 비디오아트완성이 늦어진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역설하였다. 전기공사 발주도 서둘렀다. 기존의 전력으로서 1003대 TV 전력량을 감당할수 없으므로 증설요청을 하는 한편, 청계천 멀티비젼 제작자인 오세헌씨를 만나 물어보니 의외로 쉽게 접근할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삼성전자를 방문하여 TV제공을 요청하였다. 몇 대가 필요한지 물었다. 실제 작품에 필요한 TV는 1003대였지만 부잣집 곡간에서 인심 난다고 1300대가 필요하다고 우겼다.
김진국TV부장은 자기들은 25인치보터 소형 5인치까지 총 1000대라고 통보받았다고 했다. “무슨 소리냐 작품에 필요한 TV를 제공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1300대 정도가 안 되면 할 수가 없다. 홍라희 여사님께 다시 한번 물어보라” 순간 김부장의 표정이 흔들렸다.
“시간을 달라 이번 주중으로 여부를 알려주겠다.” 일단 승기는 잡은 것 같았다. 삼성전자로부터 순순히 무상 1300대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후훗 이거 쉽네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튿날문제가 발생하였다.
< 작품 깔대기: 백남준>
백남준씨로부터 TV는 내부 전파를 수신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수신장치를 제거한 브라운관만 가져오라는 것이였다. 바로 사실은 김진국부장에게 통보했다.
순간 김부장은 “옛! 그건 안됩니다. 잘아시는 바와같이 우리공장은 자동화공장인데1000대의 수신장치를 제거하려면 엔지니어 수명이 달라붙어 생산 후 1달 이상 작업이 필요합니다. TV를 더 드릴 수는 있어도 제발 그것만은 안됩니다.” 통사정하였다. 인간적으로 참 난감하였다.
오세헌씨를 불러 “TV 수신장치를 우리가 제거하면 어떨까요” 오씨는 펄쩍 뛰면서 “1인이 하루에 2~3대 작업하는데 1300대를 하려면 올림픽이 지나갑니다” 즉각 핫라인을 가동하였다.
유준상 실장을 통해 S그룹 안주인 홍ㅇ희 여사에게 부탁하는 한편 나도 안면 바꾸고 “안되면 안하겠다. 그 대신 같이 깨지자” 이렇게 나오니 김부장도 하는 수없이 “좋습니다. 우리라인 을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15일내 공급할께요 됐습니까?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감정스린 목소리가들렸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무엇인지 해냈다는 것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유준상 실장과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반포자택으로 가서 2차로 또마셨다. 뭔가 되고 있구나 이양반은 술 취하면 상대방과 박치기하는것이 취미인데 이미 택시에서 박치기 두 번 당하고 나니 골이 얼얼하다. 참고로 같이 타고 있던 제일기획에 김은영이도 박치기를 당했는데..기분이 상했는지 아니면 술이 너무 많이 취했는지 나한데 주사늘어 놓다가 그냥 내빼버렸다. 아마 유실장님의 계속되는 주량에 놀랐는가 보다
골조설계가 나왔다. 조광건설의 김광석 사장이 직접 진두지휘 하겠다고 했다. 야간 작업지시를 내렸다. 골조제작 핵심인력은 지하주차장에 대형 숙소를 마련하고 출퇴근을 금지시켰다. 나도 7시에 출근하여 새벽 1시까지 버티었다.
공사에는 늘상 같이 하는 안전사고와 화재예방을 외치며 돌아다녔다. 만약 화재가 나면 2000억원이 넘는예술품이 잿더미가 된다. 특히 용접 불똥을 조심하라. 현장 내에서 금연하라. 안전용구를 착용하지 않는 자는 출입을 금한다. 몇일 못가서 목이 쉬고 몸살기운이 돌았다. 악착같이 참고 견디었다. 8월초 다른 직원들은 휴가를 간다고 하였다. 난 아예 현장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8월15일이 휴일인지도 모르고 작업을 독려하고 있는데 아내가 어린 아들 두 녀석 데리고 서울대공원 놀러왔다. 들렸다. 영문도 모르는 작은 녀석이 안전모를 쓰고 있던 나를 보고 “우와 우리아빠 야구선수 같다”라고 하였다.
공사가 거듭되면서 자연 나 자신도 말이 없어졌다. 달력에 하루하루를 X표를 해가면서 담담함을 느꼈다. 최선을 다한다. 뭐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데 전기회로를 담당하던 오세헌씨가 이스라엘제 DA가 화질이 떨어지고 분배수가 적어 문제라고 하였다.
“3개회로의 영상을 1003대에 연결하려면 수백개의 DA가 필요한데 분배 차수를 높이면 화질이 나빠진다.” “그러면 어쩌면 좋겠냐” 방법은 있다. 삼성전자에 새로 개발된 IC칩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줄지 모르겠다. 즉시 핫라인을 가동하였다. 한번 하기가 어렵지 이젠 무 대포로 가는 거다.
이번에서 RTV연구소 K부장이 만나자고 했다. 갔더니만 놀랍게도 호박씨만 한것을 담배갑 반쯤되는 통에 30개 정도 주면서 유출 안 되도록 신신당부하고 반드시 작품용으로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결국은 DA도 국산화한 셈이다.
기자들의 출입이 잦았다. 인터뷰 요청도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깨가 으쓱하였다. 높이 18미터의 다보탑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에 현장소장을 불러
“탑의 맨 꼭대기는 내가 마무리 하겠다.” 즉 상량은 내가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제구조물이라서 “혹시 용접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보시요 내가 이래뵈도 공고, 공대 기계과출신이요” 18.9m .탑끝에 매다려 상량을 하면서 제발 무탈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다.
드디어 9월 초순에 접어들면서 국내 상황은 올림픽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백남준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9월13일 위성방송을 통해 프랑스 미국 뉴욕-프랑스 파리-소련 모스크바-브라질 상파울로-서울을 있는 위성방송을 할 예정인데 그때까지 작품이 마무리되면 마무리 되는대로 안되면 시공 중인 상태라도 좋으니 생방송을 하자는 제의를 했다.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제의를 하였다.
부랴 전기배선 공사를 독려하고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나니 KBS 방송국, 신문기자, 김중자 무용단 등이 몰려왔다. 현재 공사 중이며 작품설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누누히 공사가 진행 중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위성방송 시간은 한국시간 저녁8시 김중자 무용단의 연습하는 북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7시 30분에 마침내 마지막 전원연결이 끝났다. 전기담당이 다가와서 “메인스위치를 올려야되겠는데 만에 하나 안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차단기가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스위치를 올릴면 어떨까요. 어차피 문제되면 책임은 내가 져야 하잖아요” 필자는 스윗치에 손을 대자마자 순간의 망설임 없이 바로 스윗치를 틀어 올렸다.
<1003대TV가 동시 점등>
전기보안 담당자도 흠칫 놀랐다. 나도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에 거대한 탑에 마치 수천개의 등을 동시 켠 것처럼 하늘을 오르는 찬란한 빛의 기둥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감격하여 탄성을 올렸다. 옆에 있는 기자들도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생방송을 준비하던 방송국 관계자들도 기적같다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해 것이다.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일까? 아니면 나.생.순 축제 후에 오는 우울함이 내자신을 변화시킨건지는 몰라도...필자는 2년후 산업자원부로 부처를 이동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서기관으로 승진한후 명예퇴직 한후 2002 부터 대창정밀주식회사를 설립, 자동차부품을 수출하며 현재 마산대학교에서 신재생에너지관련 강의 하는 등 조선메카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가운 일가가 큰일을 하고 있다니 자랑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