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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은양(13)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할머니가 준 산호, 소품샵에서 예뻐서 산 진주알, 생일 선물로 받은 형석까지. 지난 4일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광물·암석’ 코너에서 유양은 집에서 챙겨 온 자신의 보물들을 관람객들에게 내밀었다.
“진주는 광물일까요? 산호는 왜 광물이 아닐까요? 형석은 보석일까요?”
유양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막힘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광물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진주는 조개가 만든 것이라 광물이 아닙니다. 산호는 그 자체로 동물이고요. 형석은 광물이지만 물렁물렁한 편이라 학자들은 완전한 ‘보석’으로 보지 않기도 합니다.”
5분 남짓한 설명 끝에 그는 “지금까지 14기 어린이 도슨트 유세은이었습니다”라고 끝인사를 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는 유양처럼 공룡·우주·광물·동물·뼈 등 전시물을 설명해주는 ‘어린이 도슨트(안내인)’가 있다.
노란 옷을 입고 “설명해드릴까요?” 묻는 어린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2008년부터 운영돼 온 제도이지만 코로나19 탓에 3년간 중단됐다가 올해 재개됐다. 올해는 초등학교 고학년(4~6학년)과 중학생 도슨트 23명이 주말, 공휴일 및 방학기간 ‘본인이 가능한 시간’에 비정기적으로 활동한다.
도슨트들은 자신이 맡은 전시 분야에 애착도, 전문성도 깊다. 고래, 물범, 물개 등 해양포유류 분야 설명을 맡은 이소정양(13)은 “어떤 동물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암불로케투스 나탄스’라고 했다. 5000만년여 전 살았던 현생 고래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이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인도랑 파키스탄 국경 근처에서 발견됐는데, ‘걷고 헤엄치는 고래’라는 뜻이에요.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3살 때 곤충 피규어를 선물받고 ‘곤충의 역사’에 빠지게 됐다는 김남우군(12)은 관람객들에게 궁금한 게 있는지 물었다. 9살 아들 태경군과 함께 온 박선하씨(38)가 “나방과 나비의 차이”를 묻자 김군은 구분이 쉽지 않다면서도 앉을 때 나비는 주로 날개를 접고 앉고, 나방은 날개를 펴고 앉는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도슨트 친구가 질문에 너무 쉽게 재미있게 설명해주더라. 즐거웠다”고 했다. 묵묵히 옆에서 듣던 태경군은 조용히 “재미있었어요”라고 했다.
아이들의 전문성을 존중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어린이 도슨트 제도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달 21일 트위터 이용자 ‘풀쥐(@puljigumong)’가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어린이가 ‘설명해드려도 될까요?’라며 유창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어린이들도 직업 만족도가 높아보이고 저도 유익해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일화를 소개한 것이 주목을 받았다.
이 글이 6일 기준 373만 뷰, 1만7000 리트윗을 기록할 만큼 호응을 얻자 풀쥐는 “노파심에 덧붙여본다”며 도슨트를 즐길 수 있는 행동지침을 올리기도 했다. ‘어린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언행(반말 등) 은 지양해주세요. 귀여워하기·기특해하기는 눈으로만, 웃음을 가득 담아주세요’ 등 ‘도슨트로서의 어린이’를 존중해달라는 당부였다.
네티즌들은 “어린이를 단순 ‘애’가 아닌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린이만한 공룡, 곤충 전문가가 또 어디에 있겠나”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어린이들, 귀엽고 프로페셔널하다”며 호응했다.
현장의 관람객들은 어린이 도슨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또래인 어린이들의 집중도도 높았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김진옥 학예사는 “자연사박물관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나 다름없다”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마음껏 설명하고 설명 들으며 꿈을 펼치게 하는 게 취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