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회의 돈 이야기
2020,03 김길식(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돈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돈은 원시사회에서부터 선진국의 최첨단 도시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곳에서 쓰인다. 돈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환영받는 존재이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활력소이다. 또한 상업과 무역을 촉진하고 가치를 축적하는 수단이며 상대적 가치를 나타내는 본질적인 척도다. 이와 같이 돈은 계산의 기본 단위, 지급수단, 교환과 재화 축적의 매개물이라는 역할을 감안할 때 어떤 것이 돈이 되려면 무게와 모양이 통일되어야 하고, 무게와 가치가 정확히 비례해야 했다. 따라서 돈은 이런 방향으로 변화·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의하면 돈은 경제행위 시에 발생하는 분업에 대한 교환 수단으로 발생한 것으로 설명한다. 즉 ‘분업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교환 본능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면서 그 교환 수단으로서 돈이 생겨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후 백 년 뒤 애담 스미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 School)의 경제학자들은 인간 행위의 밑바탕을 이루는 본능적 욕망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본능적 욕망의 정도 차이를 나타내는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을 지불하기 위한 수단의 필요성에서 돈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 활동에 기여하는 자본의 역할을 체계화 시켰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대표학자 : 멩거(Carl Menger)에 의하면 ‘화폐는 거래 편의를 위하여 개인들이 고안해낸 것’ 즉 화폐는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돈은 탁월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돈은 힘과 탐욕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풍족하든 결핍하든 간에 끔찍한 고통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돈 때문에 지금까지 부자와 빈자가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빈자는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돈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들 머릿속 한켠에는 은연 중에 늘 돈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돈! 돈! 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돈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와 우리나라 고대 돈의 궤적에 대하여 알아보자.
2. 돈의 기원과 발전
인류가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교환형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물물교환의 형태로 상호교환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교환형태는 물물교환에서 특정 실용물을 매개로 하는 물품화폐로 점차 변화되었으며, 다시 간편하면서 고가치의 교환 매개물인 전용화폐로 발전하게 된다. 물품화폐는 가축, 조개, 곡물, 소금, 가죽, 무기, 장신구 등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면서 화폐 기능을 함께 갖게 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이 탄생한 정확한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확실히 돈이 문자보다 먼저 등장했을 것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돈은 적어도 약 5천 년 전부터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여러 고대 문명권에서 상호 교환 또는 매매하는 농업생산물의 가치를 평가할 척도가 필요성 때문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농업에 의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사적 소유가 늘어남에 따라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매매하거나 필요한 물품과 교환함으로써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매매와 교환의 신뢰를 담보할 매개체가 필요했고, 효율적인 매매와 교환의 수단이 필요했다. 마침내 돈이 나타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돈은 기원전 32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최초로 돈의 개념이 탄생했다. 이때 나타난 은화인 세켈(shekel)이라는 돈은 보리의 양(量)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통화단위 뿐만 아니라 생산한 곡물의 무게단위로도 사용되어 교역의 발생을 촉진했다. 셰켈은 구약성서에도 나온다. 즉 요셉이 메디아 사람들에게 은 20세켈에 팔려간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통해 세켈은 당시에 실제로 만들어 유통한 은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돈은 인류 최초의 성문 법전인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에 처음 명문화되어 나타난다. 바빌로니아의 6대왕 함무라비 왕은 기원전 1750년경에 만든 이 법전에 최초로 금융규제 조항을 공포했다. 여기에 부채의 이자와 벌금의 납부를 규정되었으니 그 수단이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돈은 점차 상업적 계약을 이행하고 재산의 매각과 구입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가치척도의 역할을 갖게 된 돈이 상업적으로 널리 유통되면서 자연스럽게 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돈이 돈다운 모습으로 제작되어 실제 유통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오늘날 터키 서쪽에 있던 소아시아 지방에서 금과 은을 섞어 만든 일렉트럼(electrum)을 그 출발이라고 본다. 청동기시대가 끝나갈 당시 초보적인 금은 세공 기술을 가지고도 무게를 표준화하고, 무게에 따라 가치가 정확히 비례하도록 하려는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중해 동쪽에서 고고학 조사를 통해 발견되는 수많은 일렉트럼은 디자인이 다양한 것에 비해 무게는 놀랍도록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렉트럼이 만들어질 무렵, 아시리아제국 서쪽의 에게해 지역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동쪽의 내륙에는 히타이트어나 리디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일렉트럼은 좁은 지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물건을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무게와 가치를 정확히 비례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렉트럼의 가치는 무게나 크기를 직접 재서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뒷면에 찍힌 네모꼴의 갯수을 통해 확실히 구분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000년대에 중국의 한자로 작성된 장부에 개오지 조가비가 나온다. 실제 중국 신석기시대 앙소문화기와 용산문화기의 유적에서는 많은 개오지 조가비가 발견되어 당시 화폐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재화를 나타내는 한자 화(貨)자는 변화한다는 의미를 가진 화(化)와 옛날부터 돈으로 사용했다(古以貝爲貨)고 하는 조개(貝)로 구성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개오지 조가비를 돈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가비 화폐는 세계 거의 모든 대륙에서 장신구와 통화 수단인 돈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아프리카 원주민 사회에서는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어떤 개오지 조가비는 점차 교환가치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돈 개오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함무라비 법전 이후, 성문화된 법적 효력을 갖게 된 돈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서기 1세기 중엽까지 이어진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기원전 600년경, 리디아왕국(현재 터키의 서부)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알리아테스 왕이 울퉁불퉁한 금은 합금덩어리를 주조하여 만든 동전(동전은 구리로 만든 금속화폐지만 인반적으로 금속으로 만든 화폐를 범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이 등장했다. 오늘날 '리디아의 사자'로 알려진 이 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화폐로 보고 있다. 당시 알리아테스 왕이 동전을 만든 이유는 정복전쟁에 동원된 그리스 출신의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기 위해서였다. 리디아의 동전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주로 라루리온의 광산에서 채굴한 은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동전의 생산기술이 발전하고 화폐 주조소 또한 점차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춤에 따라 단일 통화를 사용했다. 제국의 경영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은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조달했다. 이 때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군대가 안전하게 교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야만 했다. 로마는 옥수수, 쇠고기, 올리브유, 목재, 금속, 파피루스, 도자기, 유리, 은, 향수 등 스페인, 프랑스, 중동, 북아프리카 등지로 대규모로 수출하여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여 돈으로 축적하여 제국 경영에 충당하였다. 이로써 막대한 재원을 보관하면서 운용할 은행과 같은 기구가 필요하였다. 로마시대에 은행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은행의 맹아가 이 때 생겨났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은행 제도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불붙은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의 거대한 문예부흥 과정에서 탄생했다. 르네상스는 주로 예술, 과학, 문학,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는데, 이 때 돈은 르네상스의 중요한 자극제였다. 즉 메디치가와 같은 막대한 부를 가진 부자들의 후원이 예술과 건축의 융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돈은 예금과 대출을 관리하는 은행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은행이란 말도 당시 이탈리아 금융업자들이 예금과 대출 사무엥 사용하던 나무 책상이나 탁자인 '반카banca'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메디치가에 의해 설립되었던 메디치은행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신뢰받는 곳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메디치은행이 독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피오리노 도로'라고 하는 금화만을 거래했기 때문이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150달러에 해당하는 이 금화는 크기와 무게가 일정하여 유럽 전역에서 그때까지 통화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은화를 제치고 상거래용 기축통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은 1472년에 설립된 몬테 데이 파스키 디 시에나 은행이다. 이 은행은 빈곤층에게 7.5% 금리로 돈을 빌려주었다. 설립 후 400여 년 동안 시에나와 그로세코 지역에서 착실하게 성장하였다. 현재 이탈리아 전역에 3천여 개의 지점을 거느린 이탈리아 3위 은행의 전신이다.
3. 돈과 권력
돈과 국가 또는 군주와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국가 또는 군주의 권력이 강고할 때는 돈이 그 영향과 지배를 받았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시장이나 백성들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통일한 도량형 가운데 “1관(貫)=10냥(兩)=100전(錢)=1,000문(文)”이라는 무게 단위는 화폐 단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돈의 가치가 무게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영국의 파운드, 프랑스의 리브르, 이탈리아의 리라와 똑같았던 것이다. 천하의 진시황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돈의 가치는 통일된 무게 단위에 의해 평가되었을 뿐, 화폐가치를 죄지우지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서양 군주들이 시도한 디베이스먼트(화폐 가치 절하)가 중국이나 조선에서 시도되었을 때 그 백성들은 서양의 경우와 똑같이 분노했다.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졌을 때 화폐를 발행했을 때와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개축하면서 당백전(當百錢)이라는 돈을 발행했을 때 중국과 조선의 백성들은 즉각 반발했다. 나라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민심을 잠재울 수 없었다. 명목가치와 실제 무게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나 군주의 힘이 충분히 강했을 때에는 감히 이런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중국 한 대의 풍물을 기록한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화폐는 처음부터 국가가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시대에 초야에 묻혀 지내던 강태공이 무왕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울 때 아홉 개의 정부기관(九府)을 세우면서 이 기관들이 각자 독자적으로 돈을 찍어 세금을 걷어 재정을 충당하도록 하는 율법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른바 구부환법(九府圜法)이라는 법률이었다. 이 법은 돈이 국가나 군주에 의해 제작되어 운영된다는 화폐국정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래서 가끔 디베이스먼트를 할 때도 중국이나 조선의 군주들은 아주 당당하게 법을 고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우주관이 사회를 지배했다. ‘우주는 둥글고 인간 세상은 네모나다’라는 관념이다.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고대 중국 화폐는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서양의 주화와 달리 바깥이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리도록 만들었는데, 그 후 중국을 비롯한 중화문화권 화폐의 기본형이 되었다. 이 경우 하늘과 땅을 잇는 중간 매개자인 왕은, 화폐를 지배하는 존재다. 따라서 왕이 거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어떤 모양으로 바꾸더라도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왕명이 되며, 그 가치를 의심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수(五銖)라는 무게가 적힌 오수전(五銖錢)은 중국 한대(漢代) 이후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에서 만들어져 사용된 돈을 총칭한다. 그러나 고대 중국인들은 그 돈의 재질이나 형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재질과 디자인이 제각각이었다. 그 이유는 오수전의 힘이 품질과 무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왕의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고학 유적 발굴을 통해서 출토되고 있는 오수전이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도 해당 군주가 형태와 무게를 자의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과 관념은 우리나라에도 이어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뒤에 권력을 잡은 뒤 ‘화권재상(貨權在上)’이라고 하면서 종이돈인 저화(楮貨)를 발행하고자 했다. 돈을 만드는 권한은 오직 저 높은 곳의 한 사람, 즉 왕이 가진 것이니, 그가 돈을 무슨 재료로 정하든 한번 정하면 백성들은 군말 없이 사용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이 있던 중국도 조금씩 서구에서의 화폐 관념을 따르게 되었다. 유럽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귀금속을 재료로 하는 유럽의 상품화폐가 무역상 사이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유럽과 교류한 것은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중국은 그들의 대표 특산물인 비단을 팔고 당시 상품화폐였던 은을 받았다. 중국 사람들이 특산품 판매의 대가로 금이 아닌 은을 받은 것은 당시에 유럽보다 중국에서 은의 상대가치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즉, 유럽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보통 1대 12~15 정도였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대 10 정도였기 때문이다. 유럽이 중국보다 금이 은보다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 상인들은 중국 특산품들을 수입하면서 금 대신 은을 지급하고, 유럽 안에서는 중국 수입품을 팔면서 금화를 받았다. 무역 이외에 환차익을 통해 이중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무역에서 원-달러 가치의 변동에 따라 환차익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무역을 통해 유럽에 비단을 팔아 받은 은을 고운 비단이라는 의미인 사이시(細絲)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국의 비단 장사들은 사이시의 무게를 잴 때 원(元)이라는 단위를 썼다. 사이시는 말발굽(또는 배) 모양이었으며 둥근 동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과 중국의 접촉 기회는 점점 확대되었다. 육상의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해상무역로가 트이면서 중국인이 파는 물건도 비단 뿐만 아니라 도자기, 차 등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유럽에서 특산물을 팔고 그 댓가로 받는 것도 사이시가 아닌 스페인 은화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에서 특정의 형태와 용량을 가진 돈이 교환가치의 척도로 사용되었다.
국가나 군주의 권력 약했을 때 국가나 군주의 권력이 화폐에 작동하지 못한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확인된다.
1529년 합스부르크 동맹과 프랑스 동맹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패권을 다툴 때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합스부르크 동맹)가 프랑스의 두 왕자를 생포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아들을 뺏긴 프랑스 동맹의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가 요구한 1,200만 에스쿠도(escudos : 스페인의 화폐 단위) 상당의 보석금을 어렵사리 마련했지만, 병사들이 금화를 하나하나 세는 데에만 넉 달이 걸려 보석금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보석금을 받고 검수를 마친 신성로마제국 측은 4만 개의 주화가 함량 미달이라고 퇴짜를 놓았고 그 바람에 포로 석방은 더 늦어졌다. 이를 통해 국가나 군주 권력이 미약할 때에는 화폐국정론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화폐에 국가나 군주의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돈에 국가나 군주 권력을 강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가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시설이나 군주의 얼굴을 표현하였다. 주화의 앞면을 ‘헤드’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앞면에 보통 군주의 얼굴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또 화폐의 단위 역시 국가 권력이나 군주를 상징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과거 영국의 ‘크라운’, 스웨덴과 덴마크의 ‘크로나’, 노르웨이의 ‘크로네’ 등의 화폐 단위에 군주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면 화폐가 국가 또는 군주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문화권 국가에서는 돈에 대한 군주의 권력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돈을 발행해서 얻는 이익을 시뇨리지(seigniorage)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군주의 권한(droit de seigneur)’이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왔다. 과거 프랑스 화폐 단위였던 ‘프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백년전쟁 초기에 치러진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프랑스의 군주 장 2세(Jean le Bon) 부자가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에게 생포되어 영국이 보석금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300만 크라운에 해당하는 보석금을 주기 위해 프랑스가 새로 찍은 돈에는 ‘말을 탄 늠름한 왕(Francorum Rex)’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망신스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도안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때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 화폐, 프랑(Franc)이다.
이런 점들로 볼 때 화폐는 국가나 군주의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이 확실하고, 적어도 군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집권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군주의 권력이 화폐에 작동하는 화폐국정론이 기능하였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4. 세계의 돈 이름(화폐 단위) 이야기
무릇 돈의 이름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1545년 스페인은 오늘날 볼리비아의 포토시라는 고산지대에서 어마어마한 은광을 발견했다. 그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적함대를 조직함으로써 군사 강국으로도 도약했다. 유럽 최강국 스페인은 중국에서 이것저것 좋은 물건을 죄다 사들이면서 그들의 페소화를 지불했다. 이 때 중국에게 지불된 페소화는 가운데가 뚫리지 않은 쟁반 모양의 은화였다. 중국은 그 돈을 보고 은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돈이라 하여 ‘은원(銀圓)’으로 불렀다. 이리하여 마침내 ‘둥글다’는 뜻의 원(圓)을 화폐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청나라 후기에 이르러 국력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자 청나라 백성들은 자기 나라 돈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자국 통화가 약세로 밀려난 것이다. 그 결과 스페인 화폐인 페소와 러시아 화폐인 루블 등 은화로 만들어진 외국의 주화가 중국의 전통 화폐인 엽전을 밀어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자 1889년부터 일부 지방에서는 관리들이 서양의 은화를 흉내 내어 은화를 직접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에는 ‘위안(元)’이라는 단위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위안’이라는 말이 중국의 화폐 단위로 굳어졌다. 국가나 군주가 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고안한 화폐 단위가 아니라 그냥 엉겁결에 시작된 해프닝이었다.
중국의 ‘위안’과 같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체코 동남부의 보헤미아 지방의 요아힘(Joachim)은 옛날부터 은광으로 유명하였다. 스페인이 신대륙으로 진출하여 남미에서 대규모 은광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캐낸 은이 유럽의 화폐 주조에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요아힘 계곡에서 만든 돈’이라는 의미로 요아힘스 탈러(Joachim’s Thaler)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이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에서 ‘탈러’로 축약하여 사용하였고, 다시 스페인으로 들어와 달러라고 변형되었다. 달러가 은화의 대명사가 되자, 이번에는 스페인령의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도 자기들이 만든 은화도 달러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달러’는 주인이 없는 화폐 단위가 되어 버렸다. 프랑(Franc), 마르크(Mark) 등과 달리 달러(dollar)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지 않고 유독 소문자로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 없는 화폐 단위였던 dollar가 오늘날 세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사뭇 아이러니하다. 그 후 이를 국가 공식 화폐로 사용한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장악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확실히 돈의 운명은 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위안이나 달러는 우연찮게 그것을 쓰던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국가나 군주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이 ‘화폐법(Currency Act, 1764)’을 만들어 그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도 영국 돈만 쓰도록 했을 때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은 분노했다.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룬 다음, 그들은 자기들의 은화에 달러라는 글자를 새기고 화폐 독립을 확인했다. 그 후 1792년,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이런 내용의 ‘주화법(鑄貨法)’을 제정함으로써 미국의 공식적인 국가 통화로 공인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18세기까지도 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는데, 상상 속의 화폐 단위 ‘리라(lira)’가 여러 도시국가로 분립되어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을 이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했다. 즉, 각 도시국가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수십 가지 주화들이 주인 없는 화폐 단위인 리라와 일정 비율로 서로 교환되었다. 이때 리라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모든 화폐의 가치척도가 되어 오늘날 이탈리아의 화폐 단위가 되었다. 프랑스어권에서도 14세기 후반까지 저울을 뜻하는 ‘리브르(livre)’를 화폐 단위로 썼다. 영국의 화폐 단위인 ‘파운드’ 역시 무게의 단위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은 화폐 단위의 명칭들을 통하여 돈의 가치는 물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고, 균평한 저울을 통해 측정될 수 있다는 관념이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통화 ‘원’은 비극적이고 굴욕적으로 탄생했다. 조선 말 고종은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를 초청해 현대식 주화를 만들었는데, 이 때 ‘환(圜, WARN)’이라는 화폐 단위를 사용하였다. 이후 대한제국기인 1900년 범람하는 일본 돈의 유통을 막고자 제정된 화폐조례에서도 우리나라의 공식 화폐 단위는 ‘환(圜)’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장차 자신들이 달성할 목표인 한일병합조약(1905년 을사늑약)을 염두에 두고 한자 ‘圓(원)’과 영어 ‘Yen’이 함께 기재된, 국적 불명의 불법 화폐를 고의로 유통시켰다. 우리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일본 제일은행이 만들어 뿌린 이 돈 때문에 “Yen=圓=우리 돈”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렸다. 그 후 1918년, 다이쇼 일황이 조선에도 일본의 화폐법을 적용한다는 칙령을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일본의 법을 통해 “Yen=圓=우리 돈”이 된 것이다. 광복된 뒤 남조선에 주둔한 미군은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을 통해 이러한 일본 법률의 효력을 당분간 그대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 바람에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된 이후에도 한국은행이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하는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조선은행권 발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짐을 꾸려 피난 가기 바쁘던 당시 한국은행 직원들이 지하 금고에 있던 조선은행권 40억원을 미처 수송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자 북한이 이를 접수하여 전투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대거 살포하자 남한의 화폐 질서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조선은행권을 급거 회수하고 한국은행권을 발행토록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긴급명령에는 화폐 단위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은행 직원들은 일본에 인쇄를 주문할 때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과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만들었던 조선은행권과 똑같은 圓(원)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처럼 국가 당국이나 국민적 합의가 전혀 없었던 그 해프닝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화폐 단위는 원(圓)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6. 25 전쟁 중에 인플레이션이 하도 심각해서 다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여 100대 1의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 대통령은 환(圜)이라는 화폐 단위를 도입했다. 과거 대한제국이 시도했다가 실현하지 못한 화폐 단위였다. 하지만 이 화폐 단위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62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권력을 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긴급통화조치법을 발동하여 10대 1의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때 한글 ‘원’이라는 화폐 단위를 다시 도입했다. 헌정질서가 정지한 가운데 몇몇 현역 군인들이 밀실에서 만든 이 법의 적법성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 50년 동안 방치되던 끝에 2012년 3월 개정된 한국은행법에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는 원으로 한다”는 법조항이 명문화됨으로써 화폐 단위에 관한 공식적인 법률 근거가 마련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6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원’아라는 화폐단위가 법률에 의해 공식화되었지만,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웠던 “Yen=圓=우리 돈”이라는 내선일체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묵인하면서 ‘원(圓)’의 한글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화폐단위가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에는 ‘원’이라는 화폐 단위가 너무 익숙하게 뿌리내려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5. 고대 한국의 돈
1) 한반도 최초의 돈
우리나라는 기원전 4세기경에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문화가 요동을 거쳐 한반도 서북부 지방으로 유입되면서 초기철기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전국시대 7웅(雄) 중의 하나였던 연(燕)나라의 주조 쇠도끼와 쇠끌과 함께 청동으로 만든 명도전이라는 돈이 들어와 철을 매개로 한 물품화폐와 중국 전용화폐의 사용이 개시되었다.
한반도에서 처음 나타나는 명도전은 춘추전국시대에 주로 황하 하류지역에서 주조되어 유통된 손칼 모양의 청동화폐로서 도화(刀貨) 또는 도전(刀錢)이라고도 한다. 보통 형태에 따라 침수도(針首刀), 첨수도(尖首刀) 원수도(圓首刀), 방수도(方首刀), 반수도(反首刀) 등 여러 형태가 있으며 몸통에 주출된 글자나 유통지역에 따라 명도(明刀)와 제도(齊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명도는 날의 앞쪽 끝이 뾰족한 첨수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연나라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날의 중앙부에 ‘명(明)’자를 주출한 데서 명자도(明字刀), 명도(明刀)라고 불렸다. 제도(齊刀) 가는 몸체를 가진 명도에 비하여 날 부분이 넓고 중량감이 있다. 몸통에는 제작지와 유통지인 제(齊)의 지명이 주출되어 있어 제도(齊刀)라고 하는데, 제나라의 법정통화라는 뜻의 ‘제법화(齊法貨)’라는 문자가 주출된 것도 있다.
첨수도는 춘추시대 만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연(燕)나라의 일부 소수민족의 활동지역에서 주조된 도전(刀錢) 일종이다. 조기의 것은 도수부의 첨단이 예리하고 길며 칼날부분의 만곡도 심하다. 표면에 숫자, 간지, 길상구, 지명 등이 주출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명도전과 유사한 면이 많아 첨수도를 명도전의 고식으로 보기도 한다.
명도전은 추추 말기에 출현하여 전국시대 연나라 각지에서 제작되어 유통되었는데, 표면에 ‘명(明)’자가, 배면에는 숫자·간지(干支)·좌우(左右) 등의 문자와 지역명 등이 주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명도전을 주조했던 지역 혹은 단위를 나타낸다. 즉 간지는 주조연대, 지명은 주조지역, 숫자는 화폐의 중량단위를 나타낸다.
명도전은 12.5~13.5cm 크기이며, 손잡이에 3줄의 직선문양이 길이로 나 있으며 끝부분에는 여러 매를 꿰어 묶을 수 있는 원형의 고리가 있다. 재료는 모두 청동이며 용범에 의해 주조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도전(刀錢)은 명도전이 대부분이며 수백~수천 매의 묶음으로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 출토지역은 주로 중국 동북지방의 요하 서쪽지역을 비롯하여 요동, 길림성 서남부 일대 및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서북한 지역이다. 한반도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유적으로는 자강도 위원군 용연동유적,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집자리유적 등이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명도전을 가득 담은 토기 항아리를 땅을 판 구덩이에 묻어둔, 퇴장유적(退藏遺蹟)에서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명도전은 전국시대 말기 중국 연나라와 위만조선 사이에 밀접한 교류와 교역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명도전이 실제 위만조선 사회에 유통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위만조선과 연나라와의 교역 시에 위만조선 사람들이 중국 내에 들어가 교역하거나 연나라 사람들이 위만조선으로 들어와 교역을 할 때 교환수단으로서의 역할은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위만조선 사회 내에서 공식적인 화폐로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문헌에 기원전 957년 기자조선 시대에 자모전(子母錢)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 다만 『한서』 지리지에 고조선에 8조법금이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 3개 항목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고조선에도 돈이 제작되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 전(錢)을 내야 한다’ 등의 기록으로 보아 현물인 곡물과 금속으로 만든 돈이 화폐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잇다. 그러나 50만 전(錢)의 돈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다음의 삼한사회에서 통용된 것과 같은 청동 또는 쇠로 만든 물품화폐였을 것이다.
2) 물품화폐의 제작과 유통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돈을 제작하여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철기문화가 본격화되는 원삼국 시대, 즉 삼한시대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弁辰)조에는 “나라에서 철(鐵)이 나는데, 이를 한(韓), 예(濊), 왜(倭)에서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모두 철을 가지고 해서,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쓰듯이 한다. 또 2군(낙랑군과 대방군)에도 공급해 준다.”는 기록과 『후한서』 동이전 한(韓)조에도 “나라에서 철이 나는데 이를 예, 왜, 마한(馬韓)과 거래한다. 모든 것을 사고파는데 철을 재화(財貨 : 돈)로 삼는다.”는 기록 등을 통하여 삼한시대는 철이 돈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쇠로 물품화폐를 만들어 유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물품화폐의 용도로 제작되어 사용된 철은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쇠도끼(鐵斧)나 판장쇠인 철정(鐵鋌) 형태를 갖춘 것으로 확인되었다. 초기철기시대에 중국 연나라에서 수입되어 이를 모방하여 만든 실용형태의 주조 도끼와 주조 쇠끌이 원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두들겨서 단조한 판상(板狀)철부와 봉상(棒狀)철부와 변화되고 삼국시대에 이르면 신라와 가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판상(板狀)의 철정(鐵鋌)으로 변화하여 다른 철제 도구나 농기구를 만드는 철소재이자 돈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화폐 기능을 한 철기들은 삼한시대의 진·변한지역(영남지역의 낙동강 동쪽과 서쪽)과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지역의 많은 무덤에서 출토되어 삼한시대~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물품화폐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품화폐이자 철소재가 도끼나 끌 모양에서 철정으로 변모한 것은 여러 철제품의 소재로 활용될 뿐 아니라 물품화폐의 용도가 크기 때문에 운반하기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물품화폐는 그 자체가 철소재로도 활용되면서 창원 다호리 1호묘나 경주 사라리 130호묘, 김해 양동리 160호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와 같이 중국에서 들어온 청동거울, 허리띠고리, 장식도검, 금은세공품, 각국의 특산물 등이 물품화폐로서 원거리 교역의 매개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끼 형태의 물품화폐는 2세기 중엽 이전의 삼한시대 전기에는 판상철부 형태가 사용되다가 그 이후의 원삼국시대 이후에는 봉상철부 형태로 변화하였다. 삼한시대의 판상철부와 봉상철부는 길이 20~30cm 크기의 것 한 종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물품화폐가 아직 분화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잇다. 그러나 3세기 후반~4세기초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물품화폐의 형태가 상·하 대칭의 철정(鐵鋌) 형태로 정형화(定型化)되고 크기도 길이 25~27cm 정도의 대형, 20~23cm 전후의 중형, 15~18cm 전후의 소형 등 3가지로 분화된다. 따라서 삼한시대에 비해 물품화폐로서의 기능이 훨씬 증대되고, 크기와 중량에 따라 화폐로서의 가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삼한시대건 삼국시대건 철정은 경주 사라리 130호묘, 김해 양동리 162호묘, 경주 황남대총 남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0매 단위의 묶음으로 70점, 100점, 수백점씩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당시 철정에 대한 화폐단위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물품화폐인 철정의 집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함과 동시에 권력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3) 왜 물품화폐를 도끼를 모방하여 만들었나?
그런데 삼한시대 당시와 그 이전의 중국에서는 농기구나 공구를 모방한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 반량전, 오수전, 각종 왕망전 등이 제작되어 유통되었고, 한반도에도 다량 유입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한사회에서는 이 화폐와는 전혀 다른 철로 만든 도끼 모양 물품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에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화폐를 제작하여 유통하였다. 또 이때까지 중국 화폐는 모두 동전(銅錢)인데 비해 삼한시대의 물품화폐는 실제 다른 도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철소재 그 자체를 물품화폐로 만들어 사용한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어쨌든 삼한사회의 화폐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삼한시대 진변한에서 중국 화폐를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끼를 본떠 만든 물품화폐를 만들어 사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부터 당시에 가장 중요한 농기구의 하나인 산(鏟)이라는 농기구를 모방한 포전(布錢)을 주조하여 유통하였고, 또 전국시대에는 제나라와 연나라에서 도전(刀錢)이 제작되어 유통되었다. 즉 당시에 가장 중요시되던 농기구나 공구를 본떠서 화폐로 사용함으로써 각기 화폐의 정체성을 찿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삼한의 진변한 역시 그들의 특산물인 철을 재료로 하여 오래 전부터 가장 중요한 수렵도구이자, 농기구, 공구 등 만능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도끼를 모델화하여 물품화폐를 만들어 유통함으로써 스스로의 화폐 정체성을 찾고자 한 결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하면서 주먹도끼를 대표로 하는 여러 가지 도끼가 사냥이나 생활에 사용되었고, 신석기시대에는 농사가 시작되면서 직접적인 농기구 이외에 목제 농기구를 제작하는 공구로서 사용되었다. 이 때부터 도끼는 단순한 농공구로서의 의미 이외에 그 자체에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춘천 교동 동굴무덤이나 울진 후포리 집단 매장유적에서 다량(153점)으로 출토된 거대한 돌도끼(길이 30~60cm)를 통해 이때부터 도끼에 무언가의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도끼가 특별한 의식용 도끼로 기능하였음이 분명하다. 그 후 청동기시대에 들어 와서는 대형의 도끼머리에 구멍을 뚫어 장식을 매달거나 권위 상징물로서 허리에 매달거나 했던 흔적들이 확인되고, 아름다운 돌결 무늬가 도끼 표면에 표출되도록 제작하여 장식성을 가미한 것과 함께 원형도기, 별모양 도끼 등 권위상징적인 도끼들도 나타난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도끼가 가장 먼저 유입되는 것도 한반도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도끼에 대한 관념이 특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후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도끼가 직접 농경의례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만큼 의례적·상징적 기능을 하게 된다.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에는 농경의례 장면으로서 따비로 밭을 가는 장면과 함께 청동도끼로 땅을 일구거나 개간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그 후 초기철기시대에 들어 중국 전국계 철기가 유입되는데, 그 중에 주조철부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유입된다. 이로 보아 쇠도끼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농공구이자 의식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면면히 계승되어온 실용 농공구로서의 도끼의 중요성과 의례적 관념이 응축된 결과 삼한시대에 들어 진변한에서 그들의 특산물은 철을 재료로 하여 도끼 형태를 모방한 물품화폐를 제작하여 유통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화폐와 다른 형태의 물품화폐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자를 사용하여 중국과 교류·교역을 하면서 한자 지식을 화폐에도 투영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형문자 중 도끼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지아비)를 나타내는 부(父)나 고결한 선비를 나타내는 사(士), 최고 권위를 가진 임금을 나타내는 왕(王)자는 모두 도끼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따라서 도끼에는 남자, 최고의 권위 등의 의미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신석기·죠몽시대 이래 도끼가 출토되는 무덤은 남성 무덤인 것도 이러한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권위가 있는 남성 무덤에서는 크고 화려하며, 특별한 고급 재료로 만든 도끼가 출토된다. 원삼국시대 이후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서 부월(斧銊)을 왕권을 승계하거나 군사권을 위임하는 상징물로 사용된 것 역시 특별히 부여된 도끼의 위엄과 상징성을 말해준다.
4) 중국 화폐의 대량 유입과 유통
그런데 당시 한반도에는 중국의 전용화폐도 대거 유입되었음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의 연안과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중국 화폐들이 출토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화폐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창원 다호리유적과 경산 임당·신대동유적, 인천 운서동유적 등에서 출토된 오수전, 사천 늑도 패총에서 출토된 반량전, 해남 군곡리 패총·김해 회현리 패총 등에서 출토된 화천, 제주 건입동 산지항 유적에서 출토된 오수전·화천·화포·대천오십 등이 있다.
반량전(半兩錢)은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함과 동시에 전국시대에 지방마다 달라 혼란스러웠던 화폐제도를 통일하면서 만든 화폐이다. 즉 가운데 사각구멍이 있는 원형의 반량전을 유일한 공식 화폐로 정하고 중국 전역에 강제로 통용케 하였다.
‘반량(半兩)’이라는 것은 12수(銖), 즉 1량(兩)=24수(銖)의 절반이라는 의미로 ‘량, 수’는 그때까지 진(秦)의 영토 내에서 사용되었던 중량 단위였다. 진의 반량전은 직경 3~3.5cm 정도의 크기로 제작되어 유통되었지만 크기나 중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주조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방형의 구멍과 원형의 가장자리에 돌출 윤곽이 없고 앞면은 사각구멍을 사이에 두고 전서체로 각각 ‘반량(半兩)’을 주출하였으며 뒷면은 문양이나 글자가 없이 편평하다.
진의 반량전은 그 후 2100여년에 걸쳐 중국 전(錢)의 표준이 되고 그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 화폐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단명으로 끝나고 곧이어 한(漢) 왕조가 성립한 후에도 화폐제도는 진의 것을 그대로 이어 받아 반량전을 유통시켰다. 그러나 초기에는 민간에게도 반량전 주조를 허락하는 등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 무게를 단위로 하는 칭량화폐(稱量貨幣)인 반량전은 실제 중량이 반량(12수)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무게는 점점 줄어 팔수(八銖), 사수(四銖)밖에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한 무제 때에 이르러 민간의 화폐주조를 금지하고 원수(元狩) 3년(기원전 120년)에는 반량전을 폐지시켜 삼수전(三銖錢 : ‘三銖’라는 두 글자를 주출)을 주조하였다. 삼수전에는 앞면만 윤곽을 둘렀으나 그 다음 해에 새롭게 만든 오수전(五銖錢 : 앞면에 ‘五銖’라는 두 글자를 주출)에는 앞·뒤면에 모두 윤곽을 둘렀다. 이러한 조치는 종래의 전(錢)에 윤곽이 없어 동전을 만들기 위한 동(銅) 재료를 얻기 위해 전의 테두리를 깎아 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상남도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반량전은 중국 전한대(前漢代)에 제작되어 유통된 것으로서 서북한 지역의 낙랑과의 교류·교역을 통해 많은 한대 물품들과 함께 당시 남해안 최대의 국제무역항이었던 늑도유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수전(五銖錢)은 삼한시대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중국 한 대 화페이다. 오수전은 전한 무제(원수 4년, 기원전 119년) 때부터 주조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여 약 700여 년 동안 왕조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주조되어 당(唐)나라 초기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서기 621년)될 때까지 중국의 표준화폐로서 장기간 통용되었다.
오수전은 무게가 5수(1수=.659g)이고 앞면에 ‘五銖’라는 글자가 면문(面文)으로 주출되어 있다. 모양은 원형의 동전 면의 중앙에 사각구멍이 뚫고 주위에 윤곽선을 두른 것인데, 오수전의 이러한 형태는 이후 중국 전(錢)의 기본형이 되었다.
오수전의 주조는 처음에는 각 군국(郡國)에서 이루어졌으나, 한 무제 원정(元禎) 4년(기원전 113) 이후에 한의 중앙정부가 독점적으로 주조하면서 오수전 이외의 화폐는 전면 유통을 금지시켰다. 그 이후로 한나라 초기 이래 혼란했던 화폐제도는 안정되었으며 엄청남 양의 오수전이 주조되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왕망전(王莽錢)은 전한(前漢) 말 원제(元帝) 황후의 일족인 왕망이 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기 8년부터 23년에 걸쳐 신(新)왕조를 세웠다. 왕망(王莽)의 중국지배는 불과 15년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화폐 개혁은 4회나 있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전설에 근거하여 기묘한 화폐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내용은 복고적으로 그 규정은 대단히 번잡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든 화폐는 돈의 원료인 동의 제련, 전(錢)의 제조 방법, 전에 들어가는 글씨의 서법(書法), 전체적인 제작 기술 등 여러 면에서 세련된 것으로 중국 고대 화폐 가운데에서도 가장 잘 만들어진 것에 속한다.
왕망은 신나라를 세우기 전년(서기 7년)부터 이미 대천(大泉), 계도(契刀), 착도(錯刀)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었는데(왕망의 제 1차 화폐개혁) 계도와 착도는 사각구멍이 있는 원형전 아래에 소도(小刀)의 형태를 더한 것이다. 그러나 서기 9년에는 계도·착도·오수전을 폐지하고 무게 1수의 소천(小泉)을 새로 주조하여 대천과 함께 사용하였다(왕망의 2차 화폐개혁). 그 후 서기 10년에는 또 금·은·구리·귀갑(龜甲)·조개(貝)를 재료로 하는 6형식 28종의 화폐를 제정하였다(왕망의 제 3차 화폐개혁). 그러나 서기 14년에는 대천과 소천을 폐지하고 무게 5수의 화천(貨泉), 25수의 화포(貨布)와 포전(布錢)을 만들었다(왕망의 제4차 화폐개혁). 이러한 대천, 계도, 착도, 소천, 화천, 화포 등 왕망이 만든 화폐 모두를 총칭하여 왕망전이라 한다.
화천(貨泉)은 왕망이 만든 화폐 중 가장 많이 주조되었던 것은 화천으로 서기 14년 왕망의 제4차 화폐개혁 때 주조되었다. 모양은 둥근 모체 중앙에 사각구멍을 뚫고,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자를 주출하였다. 왕망은 제3차 화폐개혁으로 발행된 여러 종류의 화폐가 지나치게 번거롭고 복잡하여 화폐경제가 혼란해지자 화포, 화천 등 새로운 종류의 화폐를 발행하였다.
화포(貨布)는 춘추전국시대 이래의 포전(布錢)을 다시 모방하여 제작한 것으로 원봉원년(元鳳元年 : 기원 14년)에 화천과 함께 주조되어 동시에 사용되었다. 몸통과 다리에 걸쳐 오른 쪽에 화(貨)자를, 왼쪽에 천(泉)자를 주출시켰다. 크기가 화천보다 크고 형태도 달라서 화천 25매가 화포 1매에 상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에 제주 산지항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화천은 왕망 정권이 멸망한 뒤에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오수전을 부활시킬 때까지 계속 주조되었으며, 주조 량이 많아 우리나라와 일본의 많은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왕망대 이후 중국과의 교류·교역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마한(馬韓)에서 기원전 169년에 동전이 주조하였으며, 진·변한에서는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진·변한의 쇠로 만든 물품화폐 이외에는 비정될 수 있는 당시의 동전이나 화폐 거푸집 등의 유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최근의 마한권역의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마한권역에서도 진변한과 같은 형태의 철정(鐵鋌)과 이와는 다른 사각막대 모양의 철정(鐵鋌)이 출토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독자적인 물품화폐를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5) 삼국·통일신라의 화폐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4세기 이후 신라와 가야의 대형 고분을 중심으로 하여 다량의 철정(鐵鋌)들이 출토된다. 철정의 크기도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대·중·소형으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이 철정들은 대개 일정 계층 이상의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철정이라고 하는 물품화폐가 상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독점적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경주 황남대총과 같은 왕의 무덤에서는 수백점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철정을 권위와 부의 수단으로 집적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이를 다른 지배계층이나 피지배층에게도 분배하여 유통시키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무덤 바닥에 10점, 20점 등으로 철정을 가지런히 깔고 주검을 관이나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물품화폐에 대한 관념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의 철정은 양쪽 끝 부분이 도끼날 모양으로 벌어진 형태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기본 형태지만, 백제의 경우 이러한 형태도 있는 반면, 직사각형 막대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 점이 차이점이다. 직사각형 막대 모양 철정이 백제의 전형적인 물품화폐라고 한다면 도끼 날 모양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철정은 신라·가야, 특히 가야와의 교류와 교역 과정에서 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에서 이 형태의 철정은 가야토기 등 가야계 유물들과 출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외 고구려에는 어떤 물품화폐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동옥저와 신라에서 금은무문전(金銀無文錢)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철정이라는 물품화폐 이외에는 비정될 수 있는 당시의 화폐나 화폐 거푸집 등의 유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석탑 사리장엄구에 신라 철정(鐵鋌) 형태로 만든 소형 금정(金鋌)이 가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에서 왕실이나 상류 지배층을 중심으로 금·은전(金·銀錢)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식적인 화폐로는 유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소지왕 12년(490) 경주에 상설시장인 경시(京市)를, 지방에는 향시(鄕市)를 설치하고, 각기 관리기관을 두어 시장의 관리와 세금징수를 하였고, 백제에서는 세금을 베(布)·비단(絹)·실(絲)·삼베(麻)·쌀(米)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물품납세 방식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물품화폐가 교환과 상거래, 납세 및 지출의 보편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철정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